84화. 철익의 유산.
‘이 녀석이 백리안이란 말이지.’
엽맹문의 간부 하설기는 지전섭의 안내를 받고 온 당연우를 멀뚱히 바라봤다.
신마에 안내하기 전 그를 직접 만난 이유는 전 총관인 철익 구운재를 물 먹이고 신마의 후계자로 지목된 인재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혼인식에서는 제대로 보지 못한 바 이번 기회에 당연우가 어떤 자인지 이야기를 나눠볼 심산이었다.
“공자? 소협? 아니면 소련주? 뭐라 부르는 것이 좋겠나?”
하설기가 대뜸 하대를 했다.
하설기는 연합의 간부였고, 당연우는 신마의 후계자였다. 그의 연륜이나, 실적, 직위 모두 당연우에 비해 부족하지 않았다.
당연우도 이를 신경쓰는 것 같진 않았다.
“호칭이야 편하실 대로 불러주세요. 어찌됐든 조만간 바뀔 테니까요.”
신마가 직접 당연우를 지목한 만큼 오래지 않아 마땅한 자리가 주어질 것이고, 그러면 그 자리에 맞게 호칭도 변할 것이다.
하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면 당 공자로.”
“예, 하 장로님.”
당연우가 포권을 취하며 응대했다.
역시 명문가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아서인지 적이라 볼 수 있는 하설기에게도 예를 보였다.
다만 그의 모습에 지전섭이 못볼 것 봤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녀석은 눈치없게 왜 저래?’
지전섭이 다 들리게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까지 저었다.
그가 손을 휘저어 지전섭을 밖으로 내보내고 자신의 집무실 안에 당연우와 둘만이 남았다.
천천히 뜯어보니 당연우는 호리호리한 체구에 얼굴에는 잡티 하나 없을 정도로 피부가 좋았다. 외모만 보면 허안공자라 불림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미모가 빼어났다.
‘혼인식의 신부만 다섯이랬지······.’
외모도 준수하고 실적도 있다. 무공도 후기지수들 중 손에 꼽히는 고수이며, 가문도 명문세가 출신이었다.
인기가 없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련주님께서는 바쁘셔서 바로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네.”
물론 거짓말이었다.
신마가 바쁜 적은 연합 결성 초기 때를 제외하면 거의 없었다.
구운재가 총관에 취임한 이후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무공 연구 등에 빠져 본부에는 두문불출했다.
그래서 철익의 권력은 막강했고 많은 연합원이 그를 차기 련주로 생각하고 있었다.
“덕분에 이렇게 자네와 이야기를 할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지. 엽맹문에서 온 하설기네.”
“반갑습니다. 하 장로님. 저는 당문의 당연우라고 합니다.”
당연우도 다시 인사했다.
사파연합과 무림맹이 적이라고는 하지만 절강성에 자리한 엽맹문과 사천당문이 직접적으로 부딪힌 적이 없었다.
사련과 당연우가 직접 대적한 보고 또한 받은 적이 없으니 사적인 원한은 없었다.
게다가 연합의 간부인 그가 후기지수를 상대로 적의를 보이는 것도 우수운 일이었다.
“이렇게 연합에 불려오게 돼 혼란스러울 것이네. 하지만 우리 연합에서 련주님의 명은 하늘과도 같은 것. 다소의 불편함에 대해서는 내 이렇게 고개 숙여 양해를 부탁하지.”
그가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자,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가지. 자네는 이곳에서 무슨 일을 하고 싶은가?”
“정보를 모아 당문과 무림평화에 도움이 되게끔 할 생각입니다.”
“허, 첩자질을 하겠단 말인가? 그것도 내 앞에서?”
당찬 당연우의 말에 하설기의 몸에서 살기가 피어 올랐다.
당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야만 제가 허울뿐인 신마의 후계자가 될 수 있겠지요. 그것이 장로님들께서도 바라는 일이 아닙니까?”
“련주님의 지지가 있다면 연합의 주인이 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야.”
“그래봐야 몇 년 정도 할 수 있을까요?”
일흔이 넘은 신마가 살 날이 얼마나 많을까?
무공이 고강한 만큼 장수할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가 불로장생의 괴물도 아니고, 영원히 살 리는 없었다. 그렇기에 후계자를 오대세가에서 데려올 정도로 다음 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연합에서는 길어봐야 일이 십년으로 보고 있었다.
“먹을 거만 먹고 도망치겠다는 말인가?”
“서로를 위해 말이죠.”
하설기가 당연우의 눈치를 봤다.
벌써부터 중원 무림에서는 당연우에게는 힘에 굴복한 비겁자라는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그 비난의 화살이 당문에까지 닿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도 정파측 무인들의 목소리였고, 사파에서는 그 누구도 비난하지 않았다.
그들은 신마의 변덕에 직접 피를 흘렸던 경험이 있었기에 그의 무서움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영리하달까? 손익계산에 빠르달까······ 허례허식보다 실리를 추구하는 건 그쪽보다 우리 쪽에 어울리지. 그런 걸 보면 련주님의 눈은 틀리지 않은 것 같군.”
하설기가 당연우의 말에 기분 좋게 웃었다.
“허울뿐인 명성보다 조금이라도 피가 덜 흐르는 것이 더 좋은 방안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연합의 주인이 돼 우리를 억제할 생각은 해 본 적은 없는가?”
“할 수 있을까요? 제가?”
당연우의 물음에 하설기가 고개를 저었다.
“힘들겠지. 당장이야 우리가 련주님의 말에 따라 자네를 지지한다고 해도 자네는 련주님이 아니지 않은가.”
신마와 같은 힘이 있다면 가능하다는 이야기였지만, 반대로 절대고수가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당연우가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신마의 지도가 우수하더라도 일이십 년에 이룰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연합과 무림맹의 힘은 백중지세. 덕분에 무림은 더없는 평화를 이룩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힘의 추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순간 전쟁이 벌어질 것이 뻔했다.
그것은 연합의 기득권인 하설기도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총관에 이어 다음 련주를 노리는 하설기는 전쟁으로 찢겨나간 연합을 이어받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머리가 좋다고 하더니 세상을 아주 냉정하게 볼 줄 아는군.’
하설기가 마주한 당연우는 어설피 정의를 외치는 여타 후기지수들과 달랐다.
그는 오히려 노회한 정치인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다만 이 문제는 하 장로님뿐 아니라 수신회의 백 장로님과도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지만요.”
당연우가 수신회 출신 간부인 백절인을 언급했다.
현재 연합 안에서 하설기와 대립하고 있는 파벌의 주인이었다.
“절인, 그 놈과 따로 약속을 잡았는가?”
하설기는 당연우와 따로 약속을 잡은 게 아니었다. 자신의 사람인 지전섭를 통해 잠시 시간을 만든 것이었다.
당연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하지만 하 장로님께서 저를 만난 이상 수신회 측에서 연락이 오겠죠.”
그의 말처럼 정적인 백절인이 당연우를 가만 둘 리 없었다.
기분파인 신마의 총애를 받는 당연우의 입김이 이번 총관 임관에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나와 절인을 한 저울에 올리겠다? 내 앞에서 그 말을 할 배짱은 가상하군.”
“어차피 만나게 될 것을 굳이 아닌 척 입을 다무는 것보다야 하 장로님 마음에 드실 것 같아 솔직히 말한 것뿐입니다.”
불쾌할 법도 했으나 하설기는 호탕하게 웃었다.
당연우는 자신의 마음에 쏙 드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그의 말처럼 아무런 말 없이 문을 나서 백절인을 만났다면 오히려 더 불쾌했을 것이다.
현재 사련의 시선은 온통 당연우에게 집중돼 있었다. 그런 그가 백절인과의 만남을 자신에게 숨길 수 있을 리 없었다.
“맞네. 앞과 뒤가 다른 놈은 내 좋아하지 않거든. 정말이지. 정파의 위선자 놈들 같지 않아. 그래서 말인데······.”
하설기가 눈을 빛냈다.
“내 밑으로 오면 연합의 주인이 되게 해주지. 뒤끝도 없이, 반발도 없이 온전히 말이야.”
“집이 좋습니다. 집에서 당과나 먹으면서 평화롭고 행복하게 사는 게 제 꿈입니다.”
“허어! 그래, 본래 기둥서방질을 하려고 했다지? 자네 같은 사람이.”
하설기는 당연우가 혼인식 때 어처구니 없는 발언을 했던 것을 기억을 떠올렸다.
“련주님 덕분에 신혼도 즐기지 못하고 쫓기듯 나왔지만요.”
당연우가 그제야 제 나이 대에 맞는 표정으로 볼멘 소리를 냈다.
‘이 자는 능력은 뛰어나나 야망이 없구나. 괜히 적으로 만들어서 피곤해질 필요가 없겠어.’
하설기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며 당연우를 파악했다.
인재는 인재이나 자신에게 위협이 될 인재는 아니었다.
“그 마음이 바뀌지 않아야 할 텐데.”
하지만 철익이 이렇게 의욕 없는 당연우를 죽이려 했던 이유가 의문이 남았다.
하설기에 이어 백절인과도 무난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두 사람은 사파연합이 자리를 잡은 뒤 간부가 된 이들이라 그런지 말 그대로 정치꾼이었다.
산적이나 살인자, 사기꾼 출신의 기존 사마외도와는 달랐다.
‘따지자면 부패 정치인이겠지만.’
연합 안에서 세력을 만들고 연합 전체의 이익보다는 개인과 자기 세력의 이익을 꿈꾸는, 그런 자들이었다.
두 사람 모두 절정고수였기에 마음은 좀처럼 읽기 어려웠으나,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의 의도를 끄집어낼 수 있었다.
“저기, 당 공자님?”
하설기와 백절인을 만나고 돌아가던 중 잡는 사람이 있었다.
정보각의 대맹부장이었다.
나는 그를 슬쩍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나를 부른 이유를 읽었기 때문이었다.
“자리를 옮길까요?”
“제가 누군지······ 아니, 말씀대로 잠시 저를 따라와주시지요.”
대맹부장이 연합의 정보각으로 안내했다.
이미 소식을 들은 정보각의 부장들이 회의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철익을 잃은 뒤 그들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비호해줄 사람이 없으면 언제라도 목이 달아날 사람들.’
대맹부장을 통해 이미 그들의 생각을 읽었다.
신마에 의해 차기 련주인 나에게 의지할 생각이었다.
‘정보에 대한 가치는 다른 간부들도 알고 있을텐데······ 아, 모조리 죽이고 자기 사람으로 갈아 치울 사람들이지.’
그들의 목숨은 차기 총관이 정해지기 전까지였다.
능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하설기나 백절인 모두 이들을 그대로 두고 쓸 생각은 없었다. 자기 사람으로 채우는 것이 다루기도 편했고 후일을 도모하기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하 장로, 백 장로와는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저는 차기 련주가 될 생각이 없습니다.”
앞과 뒤가 말이 다르면 두 장로를 적으로 만들 가능성이 있었다.
이는 적당히 신마를 상대하고 집으로 돌아갈 내 예정과는 크게 어긋나는 일이었다.
“아니, 그런······.”
본론을 꺼내기도 전에 내가 단언하자 정보각의 부장들은 크게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나는 웃으며 그들이 마련한 상석, 이전 철익이 앉았을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이렇게 달콤한 자리를 그냥 버리는 것도 아깝지요. 안 그래요?”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대맹부장님도 자리에 앉으시지요. 우리는 조금 이야기할 시간이 필요해요.”
나는 이미 정보각주라도 되는 것처럼 대맹부장에게 자리를 권했다.
대맹부장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내 왼쪽에 앉았다.
나는 빠르게 그들의 머릿속을 읽었다.
정보각을 담당하는 그들은 사파연합 정보의 보고였다.
이것만으로 연합을 찾은 목적 하나는 이뤘다고 볼 수 있었다.
‘제갈 군사에게 보내주면 좋아할 정보가 아죽 그득해.’
나는 정보각의 각주들을 쭉 둘러보고 입을 열었다.
“저 역시 련주님에 의해 잡혀온 몸, 기댈 곳이 없으니 부장님들의 지원이 있으면 한결 여유가 생기겠죠. 그런 의미에서 공생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어떤가 싶습니다.”
그들이 무림맹 출신인 나를 믿을 리 없었다.
기회가 된다면 언제라도 내 등 뒤에 칼을 꽂고 하설기나 백절인 밑에 들어갈 인간들이었다.
‘뭐, 언제 배신하든 내 앞에서 숨길 수는 없을 테니까.’
하설기나 백절인과 같은 절정고수의 답답한 마음을 마주했을 때와 다르게, 그들의 머릿속은 안개가 걷힌 것처럼 훤히 보였다.
정보각 부장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나를 제물로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생각까지 쉽게 읽어낼 수 있었다.
“공생이라, 좋은 말입니다. 공생, 임시 동맹으로 저희가 최대한 당 공자를 지원할 테니······.”
“제가 련주님을 통해 부장님들의 자리를 지켜드리죠.”
나는 씩 웃으며 정보각 부장들과 손을 잡았다.
하설기, 백종인에 이어 정보각 부장들과의 만남이 있고 난 뒤 숙소로 안내됐다.
신마의 후계자라는 이름 덕분에 연합 안에서는 가장 좋은 방이 배정됐다.
바로 철익의 방이었다.
‘정리가 된 건가? 아니면 도적놈들이 다녀간 건가?’
전 사파연합 이인자의 방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휑했다.
족자가 걸렸을 벽에는 얼룩만이 남아 있었고, 가구는 고급이었지만 탁자 위나 장식장은 텅 비어 있었다.
본래 자리에 놓여 있을 물건들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꽤나 값이 나갈 물건들이라 생각됐다.
그런 방에서 사흘 정도는 부족함 없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연합을 찾았던 당일 외에 따로 나를 찾는 사람은 없었다.
사흘 정도 지나서야 지전섭이 방문을 두드렸다.
“공자님, 련주님께서 찾으십니다.”
“드디어? 나가지.”
나는 지전섭의 안내를 따라 신마가 기대리고 있는 지하 연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굽이진 돌 계단은 대리석을 깎아 만든 모양이다. 어떻게 관리했는지 발자국이나 먼지 하나 보이지 않고 하얗게 윤이 나고 있었다.
한참을 계단을 내려가고서야 거대한 연무장의 문을 마주할 수 있었다.
“여기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안내를 마친 지전섭이 도망치듯 다시 계단을 올랐다.
눈앞에 놓인 문은 악마라도 봉인이라도 하려는 듯 통으로 짜낸 철제 문이었다.
나는 노크라도 할 생각으로 문을 만졌다.
문은 묵직한 무게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게 열렸다.
안에서 신마가 직접 문을 열어 준 것이다.
“연합의, 내 연구실에 온 것을 환영하지. 당가의 아이. 아니······.”
신마가 전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강호 유일의 독심술사여.”
그 한 마디에 여유작작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어라? 이거 망한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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