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조서당.
‘나명한으로 수라마교를 휘젓고 염라상회와 청정경 서당을 싸움에 끌어들인다라······.’
중원전서협회 등을 통해 파악한 바로는 염라상회는 강호경제인연합 소속 상인들이 모여 만든 암중 세력이었다.
정의회로 흔들고 조사해 본 바 거대 상회의 무능한 2세 또는 3세 출신으로 이뤄진 조직은 부족한 능력으로 돈을 벌고자 인륜을 과감히 버린 이들이었다.
‘다소 무능하더라도 돈과 인맥이 받쳐준다면 강호에 위협이 될 수도 있구나.’
역으로 청정경 서당은 관의 부패한 관리들이 사익을 위해 손을 잡은 집단이었다.
비슷한 성격의 운길서당이 사천 안에서 활동했다면 청정경 서당은 중원 전체를 아우르는 세력이었다.
‘결국에는 사욕에 권력을 휘두르는 파렴치한 놈들이란 거겠지.’
이들의 공통점은 사리사욕을 위해 약자를 핍박하는 이들이라는 것과 공개적으로 나설 수 있을 만큼의 힘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긴 정의회라고 다르진 않지.”
마공을 익힌 그들은 정의를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집단이 됐다.
오로지 악을 처단하기 위해 거리낌 없이 살인을 일삼는 이들이었다.
그것이 마공의 문제인지 아니면 오랫동안 이어진 거친 낭인생활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들이 하나의 세력이었더라면 상당히 골치 아팠을 텐데······.”
염라상회의 자금과 청정경 서당의 권력, 수라마교의 기술과 정의회의 무력까지.
그들이 협력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했더라면 무림맹이나 사파연합 못지않은 세력으로 성장했을 것으로 보였다.
나는 뒤통수를 긁적이면서 성의문을 떠나는 나명한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아니, 자기밖에 모르는 이들이기에 오랫동안 하나가 될 수 없었던 거려나?”
그때 삐걱거리며 문주 집무실이 열렸다.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가 방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수라마교의 꼬리를 잡았다고 들었다.”
주상열이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처음에 정의를 위해 수라마교와 대적하던 그들은 싸우면서 가족을, 그리고 동료를 잃으면서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사이가 됐다.
특히 자신을 따르는 수하들을 가족처럼 아꼈던 주상열이 수라마교에게 가진 원한은 이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수라마교의 삼장로 나명한이에요.”
나는 성의문 바깥으로 나가는 나명한을 가리키며 말했다.
성의문을 잃은 그가 갈 곳은 너무나도 뻔했다.
“이곳을 떠난 그의 발걸음이 멈추는 곳이 수라마교의 본거지겠죠.”
“아니, 마인이 도달할 곳은 지옥뿐이다.”
주상열이 살기를 드러내며 말했다.
***
“내가 수라신교의 주인이 된다고?”
나명한은 당연우의 제의에 귀가 솔깃했다.
성의문을 잃은 수라마교는 현재 반쯤 와해한 상태나 다름없었다.
정의회라는 대적자가 등장한 이상 살아남는 일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당문의 지원이라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도리어 중소문파인 성의문보다 더 세력을 커질 수 있었다.
적어도 나명한은 그럴 자신이 있었다.
‘허나 그들이 마교를 지원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군.’
당문과 같은 명문 정파가 무슨 생각으로 마교를 지원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눈앞의 구명줄을 뿌리칠 여유 따윈 없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당장은 당문의 개가 돼서라도 신교를 살려야 한다.”
그리고 이 밀약은 당문에도 목줄이 채우는 일이었다.
마교를 지원했다는 것은 당문의 힘으로도 무마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문득 나명한의 머릿속에 섬뜩한 가능성이 떠올랐다.
“······아무리 독왕이라도 자식을 버림패로 쓰지 않겠지.”
지금까지의 모든 거래가 당연우를 통했다.
다른 당문 사람을 보지 못했으니 당문이 당연우를 내칠 생각이라면 얼마든지 꼬리를 자를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혈육이거늘.”
나명한은 당연우가 독왕의 무관심 속에 죽을 뻔했다는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다.
“······고생했네.”
일장로는 나명한의 귀환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문에게 성의문을 홀라당 빼앗긴 것에 대한 욕이라도 쏟아내고 싶었지만, 꾹 삼켰다.
‘화나긴 나보다 삼장로가 더 했을 것이야.’
나명한이 성의문에 과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건 장로들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는 그런 애정으로 지금의 성의문을 키운 인물 중 하나였다.
“아닙니다.”
나명한이 힘없이 웃으며 대꾸했다.
일장로가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고는 장로회를 이었다.
임시 거처에는 수라마교의 팔장로 중 사망한 사장로와 칠장로를 제외한 여섯 장로가 모두 모였다.
“힘든 건 알겠다만 상황을 이야기해주게.”
일장로의 간곡한 부탁에 나명한이 입을 열었다.
그는 마교가 당문의 감사로 자리를 비운 뒤 성의문을 지킨 사람이었다.
중원 곳곳에 방이 붙어 감사 결과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자세한 내막까지는 몰랐다.
“당문에서는 과연 명문세가라 부르기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감사대의 신뢰를 높이기 위해 외부 인원, 그러니까 사룡삼봉과 오기린을 초청했으며, 일부 무림맹에서도 지원이 왔습니다.”
“음······ 그것이 무림맹의 간계일 가능성은?”
일장로가 무림맹의 지원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명한이 고개를 저었다.
“무림맹이 주도적이었다면 모르겠으나 감사의 지휘는 조명식 의원이었습니다.”
“흠······ 조 의원이라면 당문 사람이었지?”
“당문에서 전문 의원을 하는 사람입니다.”
조명식 의원은 당문에서 일하기 전부터 사천제일의였다.
그가 당문에 고용됐다고는 하지만 당문의 하수인 노릇을 할 정도로 명성이 작지 않았다.
“그것보다 그들이 감사하는 과정에서 이번 일에 염라상회와 청정경 서당이 연루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염라와 청정경이!”
다른 장로가 목소리를 높였다.
두 세력은 수라마교에서도 예의 주시하던 존재였다.
일장로가 그에게 눈치를 주고 나명한을 돌아봤다.
“삼장로, 그 이야기 자세히 말해보게.”
그가 노골적으로 불편한 시선을 보였다.
애써 살기를 꾹 누르며 나명한의 뒷말을 기다렸다.
“이번 성의문과 관련된 소문이 유난히 빨리 퍼진 배경에는 강호경제인연합과 관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나명한은 당연우가 알려준 정보를 빠짐없이 장로회에 풀어놓았다.
일부는 일장로처럼 불쾌해했고, 또 살의를 내비쳤다.
“그리고 감사에 손을 댈 수 없었지만, 그들을 통해 염라상회와 청정경 서당의 지부를 일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나명한이 당연우에게 받은 자료를 내밀었다.
당연우는 염라상회와 청정경 서당을 끌어들여 성의문과 관련된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렸다.
동시에 당연우는 그들이 관여한 부분을 문서로 만들었다.
“본교와 정의회와의 전쟁에서 그들이 어부지리를 노리는 것으로 보이는군요.”
이를 살펴본 수라마교의 장로들이 신음을 흘렸다.
나명한이 장로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들을 어떻게 할까요?”
일장로는 얼굴까지 붉히며 탁자를 때렸다.
“그곳에 철강시를 보내지.”
그는 수라마교가 성의문을 잃었을 때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나명한은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철강시는 일장로를 위시한 본교 출신의 최강의 검이었다.
그것이 존재하는 한 나명한을 비롯한 외부 출신 장로들은 수라마교를 장악하기란 요원했다.
“습격입니다!”
그때 외부에서 소란이 일었다.
장로들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인가?!”
회의실을 나선 장로들이 심각한 얼굴로 장원에 쳐들어온 무인들을 노려봤다.
그 가운데 낯익은 얼굴의 사내가 무섭게 도를 휘두르며 앞으로 나섰다.
“주상열!”
그의 도에 마교의 마인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그 모습에 나명한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장로들도 식은땀을 흘렸다.
***
“정의회가 수라마교의 수뇌부를 치고, 수라마교는 염라상회와 청정경 서당을 전쟁에 끌어들이는 거죠.”
나는 검은돌을 바둑판 위에 올려놓았다.
당문의 정자에는 당가 사람들이 오갔지만 우리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게 쉽게 되겠습니까?”
눈앞의 사내가 웃는 얼굴로 물었다.
머리에 계인이 박힌 그는 당연강이 바둑 선생으로 부른 인물이었다.
‘너도 명문 세가의 자식이니 교양이란 걸 배워야지 않겠냐?’
시서예화를 이야기할 줄 알았으나 그가 권한 건 바둑이었다.
크게 강요하는 것은 아니라서 나는 중원전서협회의 연락책을 바둑 선생으로 꽂아 넣었다.
어차피 바둑을 따로 배울 필요는 없었다.
‘AI 취재하면서 바둑계도 취재한 적이 있었지.’
현대 바둑과 강호의 바둑이 규칙 등이 다르긴 했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어차피 바둑을 업으로 살 생각은 없었다.
“수라마교가 분란을 일으킨 덕분에 염라와 청정경의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금진위가 백돌을 바둑판 위에 올리며 말했다.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던 이들이 수라마교를 반격하면서 힘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정의회에 염라상회, 청정경 서당까지······ 수라마교가 힘들겠군요.”
“철강시가 강하다고는 하지만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금진위는 중원전서협회에서 파견 나온 연락책이었지만 본래 한명식과 함께 14인객에 소속된 인물이었다.
한명식의 기억을 통해 그가 쓸만한 인재라는 걸 알게 된 이후 직접 연락책으로 데려왔다.
“싸움이 오래 이어지려면 균형이 맞아야겠죠?”
내가 흑돌을 금진위의 집을 허물며 이야기했다.
금진위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잘그락거리며 백돌을 들었다 놓았다.
“졌습니다. 제법 공부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도련님을 따라잡기에는 아직 먼 것 같습니다.”
금진위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빠르게 집을 정리했다.
그는 바둑 선생으로 위장하고자 단기간에 실력을 연마했다.
머리가 비상한지라 짧은 시간에 당연강쯤은 가볍게 짓밟을 정도로 바둑 실력을 갈고닦았다.
‘그야 평생 바둑돌만 쥔 사람의 깨달음이 있으니······.’
취재 당사자는 나이가 들어 순위에서는 밀렸지만 시간제한이 없다면 여전히 적수가 없던 프로였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계가를 도우며 입을 열었다.
“수라마교에 직접적인 지원은 필요 없어요. 단지 그들의 칼날이 서로를 찌르도록 하게만 하면 충분하죠.”
첫 삽은 수라마교의 강시였지만 염라상회의 검이 청정경을 찌를 수도, 정의회를 향할 수도 있었다.
금진위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강경련이나 관의 정보력을 상대로 말입니까?”
“그들이 강경련이나 관을 대표한다고 생각하나요?”
내가 되묻자 금진위가 우물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염라상회는 강경련 간부 출신이 만든 세력이지 강경련이 만든 세력이 아니었다.
이는 청정경 서당 역시 마찬가지.
염라상회와 청정경 서당이 온전히 강경련과 관의 힘을 휘두를 수 있을 거라고 보지 않았다.
“······아니면 정의회의 칼날이 염라나 청정경을 찌르게 해도 되고요.”
정의회의 정보 출처는 전서협회다.
염라나 청정경을 수라마교로 위장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염라상회나 청정경 서당의 존재가 세간에 드러나게 되면 무림맹과 사파연합이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겁니다. 굳이 싸움을 붙일 이유가 있습니까?”
조용히 내 말을 듣던 금진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14인객의 수뇌부는 둘째치고 소속원들은 강호의 평화를 위해 행동하던 인물이었다.
한명식이나 눈앞의 금진위 역시 가슴에 협의를 품고 있었다.
그의 불안한 마음이 훤히 보였기에 나는 순순히 의도를 밝혔다.
“그들이 사라진다고 해결될 일일까요? 또 다른 세력이 빈자리를 채우겠죠. 그럴 바에야 그들이 끊임없이 서로를 물어뜯고, 또 새로운 세력이 싹을 틔우기 전에 짓밟게 해야죠.”
나는 14인객을 상대하면서 상당히 고단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기 위해 까는 판입니다.”
금진위가 큰 충격을 받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의 앞에 기획서를 내밀었다.
“조직 개편안이에요.”
서류의 맨 위에는 ‘조서당(鳥鼠堂)’이란 글자가 적혀 있었다.
금진위가 서류를 들어 내용을 살피고는 크게 놀랐다.
“도련님, 이건······.”
“수라마교가 흔들린 틈에 사람을 집어넣었죠? 제대로 분탕질하면 염라와 청정경도 흔들릴 거예요.”
나는 씩 웃으며 기획서의 제목, ‘조서당’을 가리켰다.
“염라와 청정경에도 사람을 넣죠. 잔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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