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백리안(百里眼).
암질객잔은 두천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고급 객잔이었다.
정문에 들어서면 돌길을 따라 나무와 돌, 작은 연못으로 꾸며진 정원이 시선을 끌었고, 이어 7층 구조의 객잔을 마주했다.
객잔은 1층 전체가 식당으로 이뤄져 개방감과 함께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저희가 매번 최고급 객잔만 찾는다는 걸 놈들도 잘 아나 봐요.”
나는 7층까지 뻥 뚫린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살수들이 어디에 박혀 있는지 보이기에 잔뜩 긴장한 팽기웅과 남궁호와 다르게 나는 여유작작이었다.
“그야 뭐, 우리가 어설픈 숙박시설을 방문할 이유는 없으니까.”
먹는 거 좋아하는 팽기웅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주위를 경계했다.
나는 조용히 술잔을 들었다. 과일 향이 감도는 술 안에도 달짝지근한 산공독이 담겨 있었다.
“당문 사람에게 독을 쓰다니······.”
“사천당문 출신이라고 해서 다 독이 전공인 건 아니니까요.”
내가 지금까지 선보인 무공은 추혼비접, 절정의 암기술이었다.
의술에서도 두각을 내고 있다고는 하지만 독에 면역이 있을 정도로 독공을 익혔다고 보기에는 추혼비접의 존재감이 컸다.
‘큰형처럼 두드러질 정도도 아니고.’
당연강은 녹안공자라 불릴 정도로 얼굴이 시퍼렇게 독이 올라 있었다.
“가벼운 선제공격 같은 거죠. 걸리면 좋고, 아니어도 독에 제가 어떻게 반응하나 볼 수 있고.”
나는 술잔에 담긴 독을 보다가 단숨에 들이켰다.
이를 지켜보던 남궁호와 팽기웅이 깜짝 놀랐다.
“다, 당 공자!”
취화독공, 오행독공에 이어 태극분열심법까지 독을 분해할 심법은 차고 넘쳤다.
‘꽤 고급 산공독이네. 이거 출처가 어디지?’
싸구려 산공독은 먹는 즉시 역한 기운이 목구멍에서 코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그들이 쓴 독은 거부감이 없는 단맛이 혀끝에서 느껴졌다. 산공독을 만들 때 질 좋은 감초를 넣은 모양이었다.
“작업하는데 돈을 좀 많이 쓰는 놈들인가 봐요. 이름값 좀 하겠는데요?”
나는 씩 웃으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때마침 위층에서 폭음이 터져 나왔다. 4층 객실에서 사람 하나가 뚝 떨어졌다.
“모용 형도 시작한 모양인데요?”
남궁호가 한숨을 내쉬며 검을 뽑았다.
“이번 여행은 정말 하루도 편할 날이 없군.”
“난 간만에 솜씨 발휘해서 좋은데?”
팽기웅이 크게 웃으며 도를 휘둘렀다. 그의 뒤를 노리던 살수가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죄 없는 손님도 있는 마당에 암기나 벽력탄을 던질 수 없는 노릇이라 나도 검을 뽑았다.
“일단 탐명무형검이나 시험해 봐야겠다.”
가까이 다가오는 점소이의 가슴을 칼로 후벼파며 중얼거렸다.
동시에 살수문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했다.
***
두천과 반나절 거리 떨어진 곳에 설치된 임시 막사 안에서 살수문주는 당연우를 잡기 위해 고심했다.
안에는 문주 직속 정보원들이 자리해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측간에서는 실패했습니다.”
처음 입을 연 사내는 깨끗하게 씻었음에도 구릿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살수문의 특급살수는 반나절부터 똥통에 들어가 당연우를 노렸다.
교과서적이지만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더불어 침실을 살피던 정보원도 암살 실패를 보고했다.
식당에서 독을 넣은 살수도, 점소이로 위장한 살수도 하나 같이 돌아오지 못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 가능한 사람이 있나?”
살수문주는 하루 만에 십 년은 늙은 기분이었다.
살수문은 당연우를 잡기 위해 정예 살수들이 투입됐지만 단 하나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시간이 없는 만큼 최정예만을 엄선해 보냈거늘!’
그 수만 열이 넘었다.
살수문주는 이 정도 수라면 절정고수도 죽일 수 있다고 자부했다.
그리고 그 자부심이 당문의 어린 공자에 의해 무너졌다.
“문주님, 시간이 촉박해서 그런 거라 봅니다.”
암살하기 위해서는 현장 조사와 대상에 대한 충분한 조사가 필요했다.
거기에 더해 계획을 수립하고 또 모의 암살 실험을 거쳐야만 살행에 나설 수 있었다.
이번에는 현장 조사야 이전과 다름없이 했다고는 하지만 대상인 당연우에 대한 조사가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암살 계획 역시 전보다 부실했다.
“결과론이다. 우리가 늘 완벽한 상태에서 살행에 나섰더냐?”
문주의 말에 정보원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언제 어떤 상황이라도 반드시 죽인다. 그것이 우리 문파가 명성을 날릴 수 있었던 이유다.”
내심 살수문주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본래 그들의 문파에는 이름이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의 뛰어난 실력에 살수문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살수문주는 그것이 마치 살수를 대표하는 것 같아 내심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실패한 이상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 뭐가 문제였는지는 파악했나?”
그것이 정보원들이 파견되는 이유였고 동시에 살수문이 명성을 날릴 수 있는 이유였다.
실패 원인을 분석하고 다음 살행에서는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그것이······.”
정보원들이 서로 시선을 마주했다.
실패 원인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섣불리 입 밖으로 낼 내용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준비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정보 유출, 살수문에 배신자가 있었다.
그리고 모든 작전을 알고 있는 이는 눈앞의 문주뿐이었다.
‘문주가 미치지 않고서야 우리를 팔 리가 없잖아?’
살수문은 강호에서 지탄받는 범죄조직이다.
워낙 많은 이들을 암살했기에 이를 이끈 문주는 사법 거래를 하든 뭐든 사형이 거의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정보가 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보원 중 조심스레 한 명이 손을 들고 고백했다.
문주가 눈을 부라렸지만, 그는 기죽지 않고 입을 열었다.
“작전이 새지 않고서야 그들이 그렇게 영민하게 반응했을 리 없습니다.”
그의 말에 다른 정보원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정보 통제가 미흡했다는 건가······.”
문주가 문제점을 생각할 때 막사 안으로 쇠 구슬 하나가 데구루루 굴러왔다.
그걸 발견한 살수문의 문도들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정보원들은 정예 살수의 뒤를 쫓을 정도로 숙련돼 있었고, 살수문주는 말할 것이 살수문 최고의 살수였다.
살수문주는 탁자를 뛰어넘으며 뒤집어 대비했다.
“······.”
“······.”
그러나 그들의 요란한 대처에도 쇠 구슬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당 공자, 아무런 소리도, 빛도 안 나오는데?”
‘당 공자? 목표다!’
살수문주는 막사 밖 팽기웅의 목소리를 단번에 알아들었다.
그는 이미 유명인사였고 목소리나 인상착의 등의 정보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와 함께 다니는 당씨 성이라면 목표인 당연우였다.
“아! 그냥 쇠 구슬이에요. 이들도 독의 내성을 올리는 수련을 했을 텐데 아깝게 비싼 독을 쓸 수는 없잖아요. 같은 의미로 암기도 마찬가지고요.”
막사 안으로 오기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살수문주는 정보원들에게 전음으로 명령을 내렸다.
‘죽여라!’
동시에 살수문주는 조용히 퇴로를 향해 몸을 뺐다.
“여기로 나오는 놈이 문주랬지?”
남궁호의 검이 살수문주의 퇴로를 막았다.
기겁한 살수문주가 비도를 던졌지만 남궁호는 가볍게 검을 휘둘러 떨어트렸다.
‘정보가 어디까지 샌 거지?’
14인객이 살수문을 제거하기 위해 역으로 의뢰를 한 걸까? 아니면 무림맹에서 14인객으로 위장해 의뢰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살수문주가 혼란스러운 가운데 정신을 다잡고 상황을 빠르게 살폈다.
오기린은 일류에서 고수를 오가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후기지수 중에서는 단연 돋보이는 실력자들이었다.
‘남궁호, 모용경준, 팽기웅······ 그리고 당연우 순인가?’
살수문이 파악한 무공실력은 남궁호가 가장 뛰어났고 당연우가 조금 쳐졌다.
지략은 차치하고 나이와 지금까지 드러난 무공실력을 고려한 판단이었다.
그리고 일행의 중요도를 따지면 당연우가 사건 해결을 맡은 만큼 가장 높았다.
‘당연우를 공격해 틈을 만든다!’
그가 정보원들에게 다시 한번 전음을 날리고 단도를 꺼냈다. 어설픈 암기술로 당가 사람과 싸우는 것보다 제대로 단도술로 공격하는 것이 위력적이었다.
살수문주가 땅바닥에 찰싹 엎드려 물 흐르듯 막사 안을 누볐다.
“큭?”
그가 당연우를 향해 다가갈 때 가슴팍이 따끔거리는 고통이 느껴졌다.
바닥을 보아하니 삼각으로 뾰족하게 날이 선 마름쇠였다.
‘이걸 언제?’
그가 들어왔을 안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이미 주시하고 있었는데도 당연우가 무언가를 뿌리거나 던지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살수문주가 놀란 눈으로 처음 막사 안으로 들어온 불발탄을 돌아봤다.
쇠 구슬은 터진 홍시처럼 찢어진 껍질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안에는 얇은 용수철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마름쇠가 깔려 있었다.
자신의 신법을 파악하지 않은 이상 쓸 수 없는 암기였다.
‘소리도 없었고 게다가 이 독은······ 극독이다.’
살수문주의 얼굴이 꺼멓게 죽어갔다.
고개를 들어 당연우를 봤다. 십 대 소년이라고 볼 수 없는 냉담한 시선이 그를 향했다.
“네, 네놈은······ 미래라도 보는 거냐!”
그 말을 끝으로 살수문주는 절명했다.
막사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아! 팽 형, 그 마름쇠에 조금 위험한 독이 발라져 있으니 조심하세요.”
뒤늦게 당연우의 목소리가 막사 안에 울려 퍼졌다.
팽기웅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당 공자! 암기도, 독도 안 썼다면서?”
“그 말을 믿으셨어요?”
당연우가 한심하다는 듯 팽기웅을 바라봤다.
팽기웅이 어리둥절하자 당연우가 친절히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도망치려는 정보원의 등에 비수를 던졌다.
“이놈들이 얼마나 영악한데 독이니 암기니 다 말하면서 쓸 수 없잖아요. 그래서 일부러 소리도 나지 않는 암기를 썼는데.”
당연우가 당연하다는 듯 이야기하며 남은 정보원들을 가리켰다.
“자세한 건 나중에 기회가 되면 설명해 드릴게요. 일단 저 녀석들이나 도망치기 전에 잡죠?”
얼빠진 표정을 짓던 팽기웅이 이내 표정을 굳히고 도를 들었다.
***
당문의 홍보부는 최근 들어 몰아치는 업무에 정신이 없었다.
“막내 공자님께서 또 일을 치르셨다면서?”
홍보부 직원이 퀭한 눈으로 차를 홀짝였다. 그의 책상 위에는 폐기된 원고가 가득했다.
당중월의 명령에 수없이 고쳐 쓴 원고들이었다.
“천라지망으로 이제야 겨우 좋은 문구 하나 뽑았는데······.”
세가 밖에서 활약하는 건 당문의 일원으로 축하할 일이었다.
그러나 깐깐한 당중월의 눈에 만족할만한 이야기를 뽑아내는 건 쉽지 않았다.
“그야 첫째 공자님 때는 신경 쓰지 않았다가 녹안공자라는 이상한 별호가 붙었으니까요.”
“빌어먹을 개방 놈들!”
당연강은 또래 중에서도 탁월한 실력을 보이며 후기지수들 사이에서도 이목을 끌었다.
자연히 그에 대한 소문도 퍼져나갔는데, 그 과정에서 개방이 수작질했다.
‘무공도 뛰어난데 얼굴이 퍼렇더라.’
‘독공은 당가 역사상 제일이 될지도 모르는데 얼굴이 파랗더라.’
‘얼굴이 푸르딩딩하대.’
당연우도 세가에서 신경 쓰지 않았더라면 허안공자와 크게 다르지 않은 별호가 붙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홍보부에서 당연우의 새로 별호를 만들어서 소문을 퍼트리는 것은 아니었다.
가장 그럴싸한 별호에 살을 붙을만한 정보를 풀고 힘을 실어주는 정도였다.
“그래서 우리 막내 공자님의 별호는 뭐가 좋은 것 같아.”
“백리안.”
누군가의 질문에 홍보부 직원이 짧게 답했다.
“미래를 예지할 정도로 뛰어난 식견을 가졌으나 아직 천리안이라 불리기엔 부족하여 백리안이라 부른다더군.”
설명하는 직원의 얼굴이 조금 상기돼 있었다.
***
인적드문 암굴 속, 당연화가 검은 액체가 가득 담긴 사발을 들고 종종 발걸음을 옮겼다.
조심스럽게 들고 찾은 곳은 돌로 만든 관 앞이었다.
회백색 관 안에는 검푸른 액체가 가득 차 있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사발에 담긴 독액을 채워 넣었다.
“가가, 어서 일어나셔야지요.”
무공을 잃은 당연해가 다시금 힘을 되찾기 위해 당중일의 힘을 빌렸다.
그러나 그 당중일도 제갈세가에서 잡히는 바람에 당연해의 위치가 애매해졌다. 그저 당연화만이 그를 바라보고 치료를 도울 뿐이었다.
이 가운데 청명해가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 소저, 잠시 자리를 비켜줄 수 있겠습니까?”
이에 당연화가 피하지도 지키지도 못한 가운데 석관이 출렁이며 반라의 당연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청명해를 향했다.
“무슨 일이지?”
“당중일이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났으니, 이젠 당 소협께서 그 자리를 이으셔야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청명해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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