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흔들리지 않는 푸근함.
소림 출신 객주 홍진은 침을 꿀떡 삼켰다.
먼저 비동에서 준비하겠다던 청명해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를 맞이한 건 아미·청성·당문, 그리고 무림맹 사천지부의 고수들이었다.
‘이건 함정이다!’
청명해가 배신한 걸까?
본래 이번 계획의 목적은 결사의 최대 적인 당가의 막내 공자, 당연우를 포획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의 준비단계에서 감당할 수 없는 고수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청명해!”
홍진이 청명해를 찾았지만, 그는 이미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의 눈앞에 중년의 아미파 고수가 다가왔다.
“홍진, 오랜만이구려.”
“오랜만이오. 현진 사태.”
홍진이 손을 털고 주먹을 쥐었다.
아미파의 장문인이 직접 이끄는 타격대가 나온 이상 도망치는 것은 무리였다.
“끄아악!”
한쪽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홍진이 시선을 돌리니 당중수가 당문의 무사들과 함께 악귀처럼 암기를 던지고 있었다.
“저긴 이미 시작했구려. 우리도 합을 나눠봐야 하지 않겠소?”
현진의 양손이 파랗게 빛을 뿜어내며 말했다.
“후, 그렇군. 내 그대에게 무슨 말을 하겠소.”
홍진이 주먹을 쥐며 말했다. 그가 오른 주먹을 허리춤에 올리고 왼손바닥으로 그녀를 향해 내밀었다.
소림이 자랑하는 백보신권의 기수식이었다.
“흥! 참회는 지옥에서 하시오.”
현진이 싸늘하게 일갈하며 땅을 박찼다.
홍성진을 마주한 객주는 종남파 출신의 구학제였다.
“인원은 그쪽이 많다만······ 고수의 수는 우리 쪽이 많다는 걸 알 까나?”
구학제가 이죽거리며 검을 뽑았다.
마주한 홍성진도 검을 들었다.
“그럴지 모르지. 그러나 자네들에겐 정의가 없다네.”
“뭣?”
“14인객······ 왜 15인객이 아닌가? 면면을 돌아보니 거지는 없군. 왜일까? 개방 출신이 있었다면 지금처럼 정보통제에 문제가 생기지도 않았을 텐데.”
그 말에 구학제가 얼굴을 붉혔다.
“그, 그건!”
“됐네. 자네들은 어찌 됐든 거지와 함께하기 싫다는 거 아닌가?”
홍성진이 정곡을 찌르자 구학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가 검을 흔들며 청운적하검을 준비했다.
“결국 자네들은 처음부터 잘못된 거야.”
“웃기지 마!”
구학제가 흥분해 홍성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 미친 당가 놈이!”
제갈천을 마주한 건 당중수였다.
당중수가 그를 발견하자마자 암기를 뿌려댄 탓에 그는 잘난 혓바닥을 놀릴 틈조차 없었다.
“끄아악!”
제갈천이 데려온 14인객의 고수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당중수가 이끄는 암룡대는 오랜만에 찾아온 철암당주와 함께 아낌없이 개발한 암기를 실험했다.
그가 고개를 돌려보니 모용창도, 팽순기도 암룡대와 마주하면서 자신을 도와줄 처지가 아니었다.
그들이 아무리 뛰어난 고수라 하더라도 물량 공세에는 답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객주라고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아미, 청성, 당문, 무림맹 사천지부 연합은 독기를 머금고 14인객을 공략했다.
그리고 14인객이 믿었던 청명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
“이제야 집에 돌아왔군.”
당연해가 초췌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봤다.
당연강과 가주 자리를 다퉜던 것이 수십 년은 지난 기분이었다.
‘내가 잘못된 판단을 했던 거였어.’
당연해는 당연강은 무너져가는 당문을 다시 일으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가 본 당연강은 아둔했고 나약했다.
‘나약하진 않았지.’
당연강은 그 독왕을 상대로 이를 악물며 성장해나갔다.
막내는 그런 당연강을 믿고 부족한 부분을 지원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세가 밖에서 마음껏 선보였다.
“오히려 내가 가문에 누를 끼쳤을 줄이야······.”
입 안이 썼다.
당연해가 울적한 표정으로 당문을 지켜보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시선을 돌렸다.
당연우가 탕약을 들고 들어왔다.
“형님, 일어나셨나요?”
그가 발로 대충 문을 닫고 탁자 위에 약을 내려놓았다.
몸에 남은 마비독을 해독하고 망가진 몸을 보하고자 만든 약이었다.
덕분에 당연해는 점차 몸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막내야, 네가 나 때문에······ 네가 고생이 많았구나.”
당연해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몇 번이나 죽이려 시도를 했던 터라 막내에게는 면목이 없었다.
“아, 진짜 고생 많았죠. 죽을 뻔한 것도 있었지만 어린 나이에 철암당을 이끌거나 귀찮은 일에 끌려다니거나······.”
그렇게 투덜거리는 것치고는 당연우의 목소리가 너무 밝았다.
그를 묵묵히 바라보던 당연해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연우야, 내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단다.”
그가 당연우를 똑바로 보며 입을 열었다.
“대충 알 것 같지만, 뭔데요?”
당연우가 탁자 앞에 편히 앉으며 되물었다.
“나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평생 당문의 뇌옥에 갇혀도 불만이 없지. 하지만······.”
그가 핏발이 선 눈으로 말을 이었다.
“내 나름대로 죄를 갚을 생각이다.”
“뭐, 14인객 같은 비밀결사라도 세우게요?”
“······그래. 당문에도 그림자가 있지. 나는 평생 빛에 들지 않는 곳에서 살겠다. 너와 당문을 위해서.”
당연우가 귀를 후비적거렸다.
“저도 작은형이 뇌옥에 처박히는 걸 원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아버지나 중수 삼촌이 허락할 거 같아요?”
“내 아버지께 말씀드려 음양고를 먹을 거다. 그분들도 내가 뇌옥에서 그냥 썩는 것보다 도움이 되는 걸 바랄 거다.”
음양고는 음고와 양고로 연결된 독충으로 한쪽이 죽으면 다른 한쪽도 지독한 독을 뿜어내며 죽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보통은 신뢰할 수 없는 첩자나 죄인을 다룰 때 쓰는 독충이다.
“그리고 연화도 책임을 져야겠지.”
“중수 삼촌이 또 울겠네요.”
당연우가 또 철암당주가 뛰쳐나가는 거 아니겠냐며 투덜댔다.
당연해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내 스승님께 잘 말씀드려보겠다. 원하신다면······ 팔이라도 잘라 뜻을 보여야겠지.”
그와 당중수는 숙질 관계기도 했지만 동시에 사제관계기도 했다.
당연우가 머쓱하니 뒤통수를 긁적였다.
“뭐, 작은형이 그리 결심했다면 저도 말릴 수는 없겠죠.”
“그리고 네게 큰 빚을 졌다. 이 빚은 후일 목숨으로 갚겠다.”
“목숨으로요? 형제간 너무 거창한 거 아니에요? 됐어요. 두 번 다시 헛짓이나 하지 마시라고요.”
당연우가 부담스럽다는 듯 손사래 쳤다.
그런 막내를 보며 당연해가 미소를 머금었다.
동생에게나 가문에게나 큰 죄를 지었다. 당연해는 이 빚을 스스로 지옥 구덩이에 떨어져 갚을 생각이었다.
***
“으아! 힘들었다. 한동안 집에서 나가지 말아야지.”
나는 오랜만에 방에 돌아와 침상에 몸을 뉘었다.
부드러운 이불에 파고들며 뒹굴뒹굴했다.
14인객의 일이 마무리되고 당중수가 당문에 돌아오면서 임시 철암당주라는 자리도 다시 반납했다.
14인객 등 뒤처리는 어르신들이 할 일이었고, 내가 나설 일은 따로 없었다.
덕분에 할 일이라고는 오랜만에 조명식 의원과 함께 의술 관련해 토론하거나 가끔 만화루 상태나 살피면 될 일이었다.
“1년 만에 돌아온 집······이 맞나?”
딱딱한 나무 베개를 톡톡 두드리며 셈을 해봤다.
제갈세가에서 있던 회합을 시작으로 섬서의 전형문에 찾아가서 수사하고 하남 무림맹, 다시 사천으로 가 호정문과 아미파, 청성파 등을 전전했다.
이 성 저 성을 넘나들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계절감을 느낄 새도 없이 순식간에 시간이 흐른 기분이었다.
“곧 있으면 열여덟······ 아니 또 세가 회합이 다가오는 건가?”
뭔가 회합을 열릴 때마다 사고가 일어나는 것 같아 마음이 울적했다.
처음 참가한 당문의 회합은 제갈민과 한바탕 살풀이했고, 두 번째 제갈세가의 회합에서는 14인객의 사건을 마주했다.
‘어라? 다 제갈 놈들이네.’
원흉이라고 보기는 그랬지만 모두 제갈세가와 얽혀있었다.
“에이 씨, 내 다시는 제갈 놈이랑 엮이나 봐라.”
나는 투덜거리며 이불 속에 더욱 몸을 파고들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포근했어야 할 이불이 까끌까끌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최고급 객잔의 비단을 섞은 이불에만 몸을 감싸다가 내 방의 싸구려 이불에 몸을 맡기면서 생긴 부작용이었다.
“아니, 이 이불도 저렴한 게 아닐 텐데?”
최고급 객잔의 것과 비교할 순 없지만, 그래도 당문 가주 직계의 방인만큼 질 좋은 침구였다.
나는 딱딱한 침상을 꾹꾹 누르며 입맛을 다셨다.
“용수철도 있겠다, 할 일도 없겠다······ 매트리스나 만들어 볼까?”
딱딱한 목침도 익숙하니 나쁘진 않았지만 푸근한 솜 베개가 그리웠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기억을 되새김질했다.
‘예전에 매트리스 공장을 취재한 적이 있었지. 뭐 때문이었더라······.’
기억을 더듬어 보니 중소기업 일자리 관련 취재로 기억했다.
당시 업체는 사람 구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전하고자 몇 곳에서 연락 온 곳 중 하나였다.
“기계로 찍어내는 것보다는 어렵겠지만, 철암당 장인들이라면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자리를 박차고 철암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한명구 장인은 오랜만에 당주가 제자리를 찾으면서 안정된 철암당을 지켜봤다.
임시로 온 당연우도 새로운 발명품을 만든다는 점에서는 좋은 당주기도 했지만, 그 역시도 요 몇 개월간 외부 일로 자리를 비웠다.
덕분에 철암당은 한명구가 임시의 대리로 운영하다시피 했다.
‘임시의 대리라니······ 허허!’
일개 장인인 한명구로는 철암당을 이끈다는 것이 부담도 컸고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그래도 당중수가 다시 자리를 되찾고 평소와 같은 철암당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노사,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렇게 느긋하게 차라도 마실까 싶을 때 문이 벌컥 열리면서 당연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서류 더미를 들고 온 것을 보아하니 또 기묘한 발상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허허, 이거 막내 도련님이 여긴 어쩐 일로?”
귀찮을 법도 하지만 당연우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것들은 철암당 장인들에게도 자극이 됐다.
그가 여느 때처럼 한명구의 책상 위에 설계도를 척하니 펼쳐놓았다.
“요즘 잠이 잘 오지 않는 거 같아서 만들어 보려는 게 있어요.”
“이건······.”
한명구가 설계도를 쭉 훑어보더니 난색을 보였다.
그가 침대 위에 올리는 상점(床垫)은 일단 용수철을 균일한 길이와 굵기로 만들어야 했다.
발상은 뒤로 하고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다.
“아래에는 나무 합판을 깔고 그 위에 다시 솜이불을 몇 장 올리는 거예요. 그리고 용수철을 천으로 감아서······.”
당연우가 침상 위에 올릴 상점에 관해 설명을 이어나갔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당연우가 만드는 설계도는 다른 이들이 그려낸 것보다 훨씬 더 이해하기 쉬웠다.
길이나 설명이 워낙 세세하게 적어놓았기 때문에 손재주가 있는 장인이라면 설계도만 봐도 만들 수 있는 물건들이었다.
“이건······ 신입 놈들 기술 시험으로 써볼 만하겠군요.”
한명구는 내용을 살피고 답을 찾아냈다.
그는 귀찮다고는 해도 이 귀여운 막내 공자의 요청을 내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원로급 장인인 한명구가 직접 뭘 만드는 일은 없었다.
“이게 가능하면 나중에 마차에도 달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연우가 다른 설계도를 꺼내며 말했다. 보아하니 마차 바퀴 사이에 용수철을 설치해 충격을 흡수하는 장치였다.
이건 장거리 운행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애들을 시켜서 만들어 보죠.”
한명구가 너털웃음을 흘리며 손이 남는 장인들을 모았다.
철암당의 장인들은 암룡대가 외유를 나서며 암기를 제법 사용했기 때문에 이를 보수하고 새로 만드느라 다들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당연우가 새로운 발명품을 제시하자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려들었다.
“침대 위에 올려놓는 건······ 뾰족한 부분이 등을 찌르진 않을까요?”
“그건 합판과 솜을 넣어서 막으면 되고, 오히려 마차에 설치하는 충격 흡수 장치가 어떤 효과를 낼지 궁금한데? 나무 바퀴로도 괜찮을까?”
설계도 앞에 모인 장인들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고, 한명구는 그들의 의견 중 개선안을 설계도 한쪽에 적어넣기 시작했다.
당연우가 새로운 설계도를 만들어낼 때 늘 보이던 모습이었다.
***
먼저 완성된 시험용 매트리스에 몸을 눕혔다.
과연 철암당 장인들의 솜씨는 일품이었다. 기계로 찍어낸 것 못지않게 매트리스의 완성도는 높았다.
‘정말이지. 당문에서 태어나길 다행이지.’
아니었더라면 이런 물건 하나 만드는 일에도 장인을 수소문하고 설득하는데 고생했을 게 뻔했다.
나는 시종을 시켜 준비한 솜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몸이 편해지자 마음도 편해졌다.
“뒹굴뒹굴하면서 혈마비록이나 봐야겠다.”
나는 청명해가 남긴 혈마비록을 꺼내 봤다. 혈마의 품성을 나타내듯 거친 글귀가 책 안에 가득 담겨 있었다.
고문을 읽고 해독하는 건 제갈균이나 전여문의 깨달음이 있어 어려울 게 없었다.
“그러니까······.”
글의 의미를 제갈균과 전여문이 끄집어냈다면, 그간 훔쳐 왔던 깨달음들이 하나씩 달라붙어 혈마의 본의를 완성해나갔다.
그리고 청명해의 얕은 깨달음이 깨알같이 첨부됐다.
[본좌는 검 한 자루로 세상을 좌시하였으니, 이를 시기한 위선자들의 질투에······.]
“하 씨, 누가 사파 잡놈 아니랄까 봐 서두부터 허풍은······.”
나는 백 년 전 마인을 한껏 비웃으며 책을 덮었다.
혈마고 자시고 둘째치고 새로 만든 침대가 너무도 기분 좋았다.
***
“아버지, 막내가 만든 침구를 사용해 보셨습니까?”
평소 일에 치여 퀭한 얼굴로 나타나던 당연강이 오늘은 웬일인지 말끔한 얼굴로 가주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중월은 그게 무슨 말인가 싶어 물었다.
“막내가 뭘 만들었다고?”
“상점이라고······ 침상 위에 올리는 물건입니다. 포근하니 뒤척임 없이 잠이 잘 오더라고요.”
“흐음? 그래?”
당연강의 얼굴이 탱글탱글한 것이 확실히 효과가 있어 보였다.
당중월 역시 과중한 업무로 수면의 질이 좋다고 볼 수 없었다.
“만드는 것이 쉽지는 않은데, 저희 객당이나 귀빈에게 줄 선물로 양산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당연강도 오랫동안 당중월 밑에서 가주 보좌를 하다 보니 시야가 넓어졌다.
처음에는 단순 업무만 처리했는데 이제는 스스로 의견을 내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는 단계까지 온 것이다.
“귀한 물건을 세가에 온 손님께 경험케 하고 이용자를 늘리겠다는 방법이구나. 좋다. 한 번 해보아라. 내 중수에게도 말해두지.”
당중월이 당연강의 의도를 파악하고 사업을 허락했다.
“하하! 사람들이 편안한 잠자리에 많이 놀랄 겁니다.”
당연강이 자신감을 보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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