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금자탑 투자법.
“가주님, 저 연강입니다.”
당연강이 집무실 문 앞에서 쭈뼛쭈뼛 눈치를 봤다.
그는 늘 아버지를 마주할 때면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들어와라.”
당중월의 목소리가 들리자, 당연강이 작게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가주 집무실은 여전했다.
책상 위에는 결재 서류가 탑처럼 쌓여 있었고, 당중월은 그 앞에 앉아 검토 및 재가를 반복했다.
“앉아라.”
당연강이 맞은 편에 놓인 의자를 끌어 앉았다.
당중월이 보던 서류에 도장을 찍고 서류를 치웠다.
그의 회백색 눈이 당연강을 비췄다.
“결국 네가 소가주 자리를 지켰구나.”
당연강이 부푼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말이 나오기도 전에 당중월의 냉혹한 평가가 뒤를 이었다.
“하는 것도 없이.”
“······.”
당연강이 입을 다물었다.
당중월이 마땅찮은 표정으로 당연강을 노려봤다.
“연해가 막내를 음독한 건 알고 있더냐?”
“의심은 했습니다. 막내가 중독된 독은 쉽게 구할 수 있는 독이 아니었으니까요.”
“의심만? 답답한 놈······.”
당연강이 입을 달싹였다. ‘그런 하찮은 수에 넘어갈 제가 아닙니다!’라거나 ‘정파의 무인으로 어떻게 형제에게 독수를 쓸 수 있습니까?’와 같은 변명이 입 안에서 흩어졌다.
당중월이 혀를 찼다.
“쯧! 넌 내가 왜 장자 승계를 포기했다고 선언했는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네?”
“연해는 독심이 있지. 목적을 위해 친동생에게 가차 없이 독을 쓴다는 걸 내게 보여 줬다. 그리고 막내는 연해에게 그에 대한 대가를 줬더구나. 아주 철저하게!”
당연해는 현재 당연우와의 싸움으로 입은 주화입마로 무공을 잃었다. 게다가 외부의 도움을 받아 문주가 되려고 했던 사실이 발각돼 투옥됐다.
당연우는 음독에 대한 복수를 톡톡히 한 것이다.
“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무장을 나서지 않았더구나······.”
“그런 암계 따위 힘 앞에서는 무력합니다! 그리고 명문 세가의 대표로 더러운 짓을 할 순 없습니다.”
그건 당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불가했다.
당연강의 외침에 당중월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연해의 방식은 사파 놈들이나 할 짓이지. 한데 연우는 어떻더냐? 스스로 몸을 치료하고, 사람을 끌어모아 연해의 심계를 모조리 분쇄했다. 아주 당문답게 말이지.”
당연강은 열 살 터울 막냇동생과 비교되는 것 자체가 자존심 상할 일이었다.
또 그런 당연강의 심정을 아는지 당중월이 눈살을 찌푸렸다.
“너는 그야말로 명문 세가의 도련님다운 처사를 하는구나. 착각하지 마라. 너는 당문을 이끌어야 할 사람이다. 그렇게 어수룩해서는 나는 네게 이 자리를 물려줄 수가 없다.”
“아버지!”
당연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연해가 투옥되고, 당연우가 과거시험을 핑계로 당문을 나갔다. 당연강에게 경쟁자가 없거늘, 당중월은 매정한 소리를 이어갔다.
“무공이 중요는 하지. 하지만 가주에게 필요한 건 힘만이 아니다.”
당연강의 무공은 또래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출중했다.
그러나 가주에게 필요한 능력은 무공이 아니라 지도력이었다.
“네 인생의 목표는 가주더냐? 그렇다면 차라리 나는 막내를 억지로 데려와서라도 후계자 수업을 시작하겠다.”
‘그래도 연우는 하지 않을 겁니다.’
당연강은 막냇동생과 한 약속을 떠올렸다.
그도 막내의 말을 전부 믿지 않았다.
그렇기에 당연우의 과거 준비에 아낌없이 투자했고, 사람을 풀어 소문을 냈다.
‘만약 연우가 다시 돌아온다면······ 그건 시체가 되어서일 겁니다. 아버지.’
당연강은 독한 마음을 먹었으나 굳이 이를 드러내지 않았다.
어찌 아비 앞에서 형제간 골육상쟁을 이야기하겠는가.
적어도 당연강은 그런 파렴치한 짓은 할 수 없다 생각했다.
“아버지, 저는 당문을 이끌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강해져야 합니다.”
‘저는 아버지보다 더······ 독왕 따위가 아닌 독의 제왕이 될 생각입니다.’
당연강이 늘 그렇듯 조용히, 그리고 맹렬하게 화를 불태울 뿐이었다.
***
“금민재? 최근 만화루를 먹었다는 그놈이군.”
곰방대를 문 노파의 입에서 잿빛 연기가 피어올랐다.
달콤하면서도 어질한 향에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좁은 지하굴 안에서 연기를 피할 방도가 없었다.
“음, 투자자를 모으고 싶은데?”
나는 대뜸 용건부터 이야기했다.
노파가 끌끌 거리며 누런 이를 드러냈다.
“흘흘, 들었다. 만화루에서 재밌는 사업을 한다지?”
그녀는 처음부터 나를 알고 있다는 듯 답했다.
「만화루가 요즘 회원제 운영으로 바꿔 고급화를 노린다지?」
만화루가 당가타 홍등가 제일 기루였던 만큼 굴러가는 돈의 액수가 적지 않았다.
노파는 전 루주가 소리 없이 사라진 이후 만화루의 거취에 귀를 기울였다.
“지하전장이 당가 눈치 때문에 세탁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노파, 지하전장 당가타 분타주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소위 지하전장은 범죄자나 사업을 양지화할 수 없는 소규모 사파가 이용하는 전장이었다.
“그래서 개인 세탁소를 공용 세탁소로 쓰겠다고?”
“어. 그래서 사업 개편을 위한 작업을 진행 중이야. 알다시피.”
분타주가 백태가 가득한 혀를 날름거리며 곰방대를 핥았다.
“우리가 널 어떻게 믿고?”
“굳이 믿을 필요 있나? 만화루란 담보가 있는데?”
분타주가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뒷배를 잃고 조금 흔들린다고는 하지만 만화루면 당가타 제일의 기루지. 이 녀석이 말한 사업대로라면······.」
지하 전장의 인맥이라면 회원을 늘리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홍등가는 사업 특성상 당문이나 관이나 크게 관여하지 않다 보니 돈을 운용하기에도 좋았다.
무엇보다 중앙전장 사천지부장이 만든 세탁 시설이라는 것이 분타주의 구미를 당기게 했다.
「아니, 당중 이놈을 처리하고 우리가 먹는 건 어떨까?」
욕심 가득한 분타주의 시선이 나를 훑었다.
“흠, 넷이나 있으니 절반 정도 줄이면 실력 입증이 될까?”
나는 등에 멘 검을 툭 치며 말했다.
분타주는 내가 숨은 호위의 수를 맞히자 침을 꿀떡 삼켰다.
「으음, 이 자가 만화루에 고용된 고수를 제압했다는 소문이 있었지······.」
“아니,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좋아, 투자자를 모아 보지. 전 지부장이 고용한 세탁 실력을 믿어 보겠어.”
그녀는 이미 금민재가 사천지부장 밑에서 일을 한 사실을 파악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그럼 부탁하지. 어차피 다 같이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네놈들 돈 아주 달게 먹어 주마.’
사파 놈들 주머니 터는 거엔 거리낌이 없었다.
***
석관웅 운길서당 훈장은 지하로 가는 일이 그 어떤 학생을 가르치는 것보다, 급제자를 내는 것보다 설렜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든든함.
무림에서도 이름난 고수가 석상처럼 호위를 서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맛에 사파와 거래하는 거지.’
석관웅 자신은 무공은커녕 주먹질조차 제대로 해본 적 없었다.
그러나 그는 세치 혀만으로 자신보다 월등히 강한 이들을 짓밟을 수 있었다.
권력과 폭력, 그리고 재력까지 모두 겸비한 것이다.
“그래, 오늘은 어떤 투자설명회가 열리는 거지?”
“지하전장 당가타 분타주의 추천을 받은 신진입니다.”
등 뒤의 고수는 백룡회에서 보낸 일급 살수였다.
“당가타? 거기에도 분타가 있었나? 당문이 있는데?”
백룡회 출신 호위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세상 어디에나 그늘은 존재합니다. 훈장님.”
“음, 그거야 그렇지.”
사실 잘 모르면서 석광웅은 아는 체했다.
지식과 지혜는 석관웅이 무림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뽐낼 수 있는 무기이며 자존심이었다.
지하 통로를 지나자 큰 공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조가 땅굴을 얼마나 판 걸까?’
석관웅은 가끔씩 이 드넓은 동공을 마주하면 일개 학사 출신이었던 선조가 무슨 생각을 가졌는지 의문이 들었다.
정적을 피하기 위함이었는지, 아니면 황실의 노여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인지 지금에 와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대신 석관웅은 이를 잘 활용해 범죄자들의 모임 장소를 만들었다.
원형 공동은 때론 투기장으로, 때론 거래 장소로도 이용됐다.
이날은 자신의 범죄 계획을 일부 공개해 각 조직의 투자를 받는 투자설명회가 진행됐다.
석관웅이 준비가 끝난 상석에 자리를 잡았다.
마침 왜소한 체구의 사내가 공동 가운데에 섰다.
“흐음, 무림인이군요. 어디를 털 생각일까요?”
무력이 필요한 경우는 대개 사기보다는 강도살인 범죄일 가능성이 높았다.
석관웅은 다소 흥미가 식은 표정으로 사내를 지켜봤다.
“글쎄 그런 시시한 일이라면 그다지 투자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걸?”
이런 투자설명회로 석관웅은 사천에서 일어나는 대규모 범죄 사건을 미리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건을 개요를 먼저 아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짜릿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당가타에서 온 금민재라고 합니다.”
목소리에 내공이 담겼는지 그의 목소리는 넓은 동공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가 포권을 취하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석관웅과 시선을 마주쳤다.
‘재밌는 놈이네?’
석관웅이 자기도 모르게 손을 흔들었다.
작은 체구와 다르게 당당한 그의 모습에 다시금 흥미가 돋았다.
***
‘아······ 저게 훈장이야? 운길서당도 제정신이 아니네.’
나는 석관웅을 발견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자기 서당 밑에 이런 게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그 밖에도 백룡회나 창소파, 야수문 등 중견 사파에서 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당문이나 아미파, 청성파 같은 쟁쟁한 명문정파가 가득한 사천에서도 터를 잡을 정도로 힘을 가진 문파였다.
‘좋아 시작해 볼까?’
나는 당가타에 자리한 만화루에 대한 설명을 짧게 한 뒤 본격적으로 사업에 대해 입을 열었다.
“만화루에서 하는 사업은 기본적으로 돈세탁입니다. 중앙전장 사천지부장이 마련해둔 경로를 통해 누구보다 안전하게 세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나는 사천지부장이 만든 세탁 경로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비록 지점장은 몰락했으나 아직 창구는 살아 있습니다. 중앙전장이라는 전국구 전장을 통해 돈을 깨끗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저희 만화루에서 제공할 수 있는 가장 큰 혜택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어 설명한 건 회원권과 이용권에 대해서였다.
“그리고 투자 유치를 해주신 고객분께는 만화루를 이용할 수 있는 이용권을 받을 수 있는 회원권을 제공할 생각입니다.”
회원권을 가진 자가 만화루를 이용할 수 있는 이용권을 받을 수 있었다.
굳이 회원권과 이용권을 나눈 이유는 둘 다 판매가 가능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중앙전장을 이용한 돈세탁이란 말이지.”
“당가타는 당문이 있는 곳이야 오히려 관의 눈 밖에 있는 곳이지.”
“만화루에 토실토실한 년들이 많다더군. 그게 공짜라고?”
이처럼 눈을 빛내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음, 저자를 어떻게 믿고 내 돈을 맡기지.”
“당가타면 당문 손아귀에 있는 건데······.”
반대로 걱정을 보이는 이들이 있었다.
나는 말을 덧붙여 쐐기를 박았다.
“게다가 먼저 가입해 회원이 되시는 분들에게는 세탁 자금 1할 이하의 손실금으로 모시지요.”
그 말은 세탁 도중 자금이 1할 이상이 넘기면 내가 부담하겠다는 소리였다.
대부분의 돈세탁 중 3할 이상이 날아가는 경우가 허다해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해서 수익이 나겠소? 그래서야 자선 사업일 텐데?”
좌석에 앉은 노인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확실하게 투자, 세탁한 자금을 회수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불안과 욕망이 손에 잡힐 듯 보였다.
투자자들의 마음을 읽는데 그들을 홀릴 그럴듯한 이야기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만화루라는 현실 담보가 있었고, 전 중앙전장 사천지부장이라는 이름값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리고 어차피 당신들 투자금에서 돌려 막는 거니까.’
당장 눈에 띄는 손해를 볼 건 없었다.
금민재야 위장 신분이었고, 혹여 들킨다하더라도 내 뒤에는 당문이 있었다.
‘네놈들 돈, 맛있게 먹어 주지.’
그리고 만화루는 그들을 낚는 훌륭한 미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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