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귀왕십삼수.
“오대세가는 완전히 실패했군. 다시 세력을 구축하는데 몇 년, 몇십 년이 걸릴까?”
청도사가 제갈천을 보며 물었다. 그의 곁에는 오대세가 출신 객주들이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본래부터 아홉 명과 다섯. 조직 내 세력 차이가 있었다. 이 가운데 남궁 출신 객주가 작전 중 사망하고, 당중일이 사로잡혔다.
차기 가주를 밀어줘 세가를 통째로 삼키겠다는 그들의 계획은 연거푸 실패했고, 결국 첩자들마저 모두 잃었다.
“그래, 이 일의 책임은 어떻게 질 건가?”
그 때문인지 제갈천을 향한 청도사의 말투조차 달라져 있었다.
제갈천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일을 실패한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다음 일에 전면적으로 따르겠소.”
청도사가 조금 놀란 듯한 눈으로 제갈천을 봤다.
의사 포기 선언이었다.
그를 찬찬히 제갈천과 다른 오대세가 출신 객주를 훑어보곤 미소를 지었다.
“흠흠! 우리 구파는 변수를 없애고자 하오.”
그가 객주들에게 내민 건 문파를 떠나고 은거에 들어간 고수들의 이름이었다.
이른바 살생부였다.
이들 중에는 금분세수를 한 이도 있고, 조용히 산속에 파고든 이들도 있었다.
“정파 무림의 진정한 힘은 바로 이들이지.”
강호에 피바람이 불 때면 어디선가 고수가 나타나 전황을 뒤집었다.
그리고 그들은 무엇보다 하늘과 땅을 뒤집을 14인객을 방해되는 존재였다.
“그들을 일망타진할 기회입니다.”
오대세가는 회합에서 14인객을 이루는 객주 중 한 명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그동안 그들을 잡을 수 없었던 건 세가 내부의 첩자와 그들의 꼬리 자르기 때문이었다.
중독 미수 사건으로 회유된 첩자들은 솎아냈고 당중일을 잡았다.
‘이번 회합의 주제는 14인객인가?’
남궁적이 각 세가의 대표자들이 침을 튀기며 이야기하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남궁세가와 당문은 이번 일로 앓던 이를 뽑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건 구파라고 다르지 않았다.
“구파와 협력해 완전히 뿌리를 뽑는 것이 어떻습니까?”
한 배분 위 대표자들의 눈치를 보던 당연강이 입을 열었다.
“음! 그건······.”
누군가 신음을 흘렸다.
섣불리 말하진 못하지만 다른 이들도 뜻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대세가가 앞설 기회가 생겼는데 구파의 손을 빌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구파에 빚을 지우고 싶었고, 강호의 평화를 위협하는 비밀결사를 오대세가만의 힘으로 처리하고 싶다는 공명심도 있었다.
‘구파가 끼어들면 희석되기 마련이지.’
당연우를 생각해 당연강의 말에 힘을 실어주고 싶었지만, 남궁적 역시 같은 심정이었다.
같은 정파라고는 하지만 종교에 기반을 둔 구파와 혈족 위주로 성장한 오대세가는 성격이 달랐다.
그 차이로 늘 음이야 양이야 알력 다툼이 이어졌다.
“당 소협의 이야기도 타당성이 있다만, 굳이 그들의 힘이 필요한 상황은 아니지 않은가?”
제갈인이 다른 이들을 대표해 이야기했다.
“14인객은 거슬리는 놈들이지 위협이 되는 놈들은 아니야. 그것도 그들이 철저하게 자신들을 숨겨왔기 때문에 그런 거지. 꼬리를 잡은 이상 어려운 상대는 아니네.”
제갈인의 말처럼 점조직으로 이뤄진 14인객의 보안은 철저했다.
그리고 그러한 점조직의 단점은 세력을 키우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그들의 세력 구조가 어떻게 되는지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오랫동안 그들이 힘을 키워온 걸 생각하면,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구파와 협력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당연강은 공명심보다 사람이 더 우선이 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올곧은 생각인가.
그러나 젊은 무인의 협의에 감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피가 두려워서야 무림인이라 할 수 있는가.”
모용가에서 온 대표자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숨보다 명예가, 그리고 가문의 위세가 더 중요했다.
애초에 오대세가 회합은 그런 자리였다.
어디까지나 오대세가가 협심해 구파를 견제하고 힘을 키우자는.
‘전도유망한 청년이다만······ 아직 멀었군.’
남궁적은 아쉬운 마음으로 당연강을 바라봤다.
그런 협의는 정파 무인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했으나 세가를 이끌 가주가 가질 마음이 아니었다.
‘뭐 그도 이렇게 현실을 마주하고 성장하는 거겠지.’
남궁적은 당연히 이 젊은 소협의 의견이 무시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노회한 정치인인 제갈세가의 가주가 당연강을 거들고 나섰다.
“당 소협의 말에도 일리가 있네. 굳이 우리가 피를 볼 필요는 없지. 그러니 무림맹에 협력을 요청하는 것이 어떻겠나?”
“음?”
“제갈 가주!”
모용세가나 팽가의 대표가 목소리를 높였다.
구파든 무림맹이든 그들이 끼어든다면 오대세가가 온전히 해결했다는 의미가 희석되긴 마찬가지였다.
“여러분이 무슨 마음인지는 알고 있습니다만······.”
제갈인이 남궁적을 슬쩍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이어 다른 대표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당문도, 남궁세가도, 그리고 저희의 피해가 만만치 않았지.”
첩자든 뭐든 결국 14인객의 일로 세가의 무인들이 희생됐다.
아직 사건이 없던 모용세가와 팽가와 다르게 세 가문은 피해가 적지 않았다.
“무림맹과 조율해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한의 이득을 봐야 할 때라 생각됩니다.”
제갈인이 그렇게 말하자 모용가나 팽가도 할 말이 없었다.
‘당 소협을 거든 이유가 뭘까?’
남궁적이 그렇게 생각하며 그 역시 당연강의 편을 들었다.
“남궁세가 또한 그리 생각합니다.”
***
“고수들의 깨달음을 훔친 건 좋아. 하지만 하나가 되지 않는 건 또 문제네.”
제갈휘와 제갈민을 상대하면서 문제점을 확인했다.
남궁적의 깨달음을 머금은 성왕십삼수는 내공이 뒷받침하더라도 그 위력이나 묘리가 살아나지 않았다.
이는 심법의 기반이 달랐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성왕십삼수는 창궁무애심법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권법이었다.
그렇기에 도반삼양귀원공도 뛰어난 내공심법이지만, 창궁무애심법을 익히지 않으면 제 위력이 나질 않았다.
이는 제갈가의 칠현무형검이나 탐명마검 역시 마찬가지였다.
“타문파의 무공은 잘해야 구할, 못하면 그 위력의 절반조차 발휘할 수 없다는 건가?”
나는 입맛을 다셨다.
알고는 있었다. 다른 무공들도 그렇지만 특히 남궁세가의 색채가 강한 성왕십삼수가 그러했다.
자칫 무리하게 운용했다간 주화입마에 이를 수 있었다.
그나마 주화입마의 걱정 없이 다른 문파의 무공을 써온 건 축기보다는 자유로운 운기에 초점을 맞춘 오독행공 덕분이었다.
‘방법이 없을까?’
그렇게 생각을 하며 연무장으로 나왔다.
제갈인에게 대여를 신청했던 터라 연무장에는 약속했던 남궁적이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르신.”
나는 포권을 취해 예를 보였다.
남궁적이 희게 웃으며 반겼다.
“이거 당 공자 아니신가? 신수가 훤해졌어! 허허!”
나는 그를 활용해 당면한 문제를 풀어볼 생각이었다.
“어르신, 제가 무공을 익히면서 든 생각이 있는데······.”
“심법과 외공이 따로 노는 거 말인가?”
남궁적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내 무공 실력이 부쩍 늘었다는 사살이 제갈민과의 비무를 통해 공개됐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보인 무공이 자신이 전한 성왕십삼수가 아니란 걸 알고 남궁적은 성왕십삼수에 문제가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예상하신 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문의 무공과 남궁세가의 무공은 궁합이 잘 안 맞나 봐요.”
“흠······ 그것보다는 성왕십삼수의 문제라고 봐야겠지. 실제로 세가 안에서 권법을 익히는 이는 있어도 성왕십삼수를 배우는 이가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남궁적의 얼굴에 쓰디쓴 미소가 담겼다.
세가 안에서 전인을 구할 수 없으니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당문 사람인 내게 무공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성왕십삼수는 창궁무애심법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권법이 아닌가요?”
“맞지만 틀리단다.”
남궁적이 같은 심법이라도 어떻게 무공이 갈라지는지 상세하게 설명했다.
나는 그의 가르침과 머릿속의 깨달음을 한꺼번에 맛보면서 이해했다.
‘뿌리는 같지만 뻗어 나간 가지가 다르다는 거구나.’
그런데 성왕십삼수와 도반삼양귀원공은 뿌리조차 다른 무공이었다.
그것에 대한 문제도 남궁적은 쉽게 답을 내놓았다.
“무공의 원류까지 올라가면 결국 하나지.”
“천하공부출소림.”
모든 무공은 결국 소림에서 나왔다는 이야기였다.
“그래, 그렇다네. 그러니 조금쯤 수정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무공을 창안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남궁적의 머릿속에 남궁세가의 다른 심법, 혹은 삼재공 등으로 개편된 성왕십삼수가 떠올랐다.
「본디 당 공자를 가르칠 때도 육합권에 맞게 개량해 가르쳤었지.」
그의 생각을 읽고 나는 뒤늦게 성왕십삼수의 무리가 담긴 육합권법을 배웠다는 걸 떠올렸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나는 작은 깨달음을 얻곤 남궁적에게 감사를 표했다.
남궁적도, 남궁린도 떠난 연무장.
홀로 남아 도반삼양귀원공을 바탕으로 성왕십삼수를 재구성했다.
단초는 제갈휘와의 비무에서 시도했던 탐명검법과 칠현무형검의 융합이었다.
거기에 남궁적의 깨달음이 더해졌다.
마음이 일기 전 몸이 먼저 움직였다.
“스으—읍! 후우우―”
낮고 깊은 호흡으로 움직였다.
성왕십삼수의 패도적인 기세는 사라지고 귀원공의 음습하고 묵직한 기운이 대신 주먹에 담겼다.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형의 의미를 추론해 보아라.’
남궁적의 깨달음이 속삭이듯 말을 걸었다.
눈앞에서 당중화가 성왕삽삼수를 펼쳤고, 남궁적이 도반삼양귀원공의 흐름을 만들었다.
“······그리고 틀을 깨버려라.”
머릿속에서 남궁적의 깨달음이 성왕십삼수를 산산이 분해했고, 당중화가 새로이 조립했다.
그것이 귀왕십삼수의 완성이었다.
***
“약속은 약속이지······.”
제갈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14인객 처리와 관련해 대표자들과 오랜 회의를 진행했다.
결국 당연강의 의견을 존중해 무림맹에 도움을 요청해 피해를 최소화하자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당연우와의 거래로 당연강을 지지했다. 제갈민과의 비무도 끝났으니 남은 약속은 하나뿐이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집무실 밖 인기척이 느껴졌다.
“가주님, 모셔왔습니다.”
“들어······ 들어오시라 해라.”
말끔한 외모의 노학사가 안으로 들었다.
눈은 날카롭기 짝이 없었고, 허리도 꼿꼿한 것이 학사의 본보기라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적어도 하의 간수를 제대로 했다면 말이다.
문에 들어선 그의 바지가 훅 떨어져 내렸다.
함께 들어온 제갈가의 아이가 급히 그의 바지를 치켜올려 고정했다.
“하아······.”
제갈인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세가 유일의 기문둔갑 연구자.
한때는 황실 학사와 토론을 할 정도로 깊은 학식의 소유자였던 제갈균이었다.
‘노사께 글을 배웠던 게 엊그제 같거늘······.’
엄격한 스승이었던 제갈균에 머리에 마가 찾아들었다.
기문둔갑 탓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세월의 흐름이랄 지 제갈균은 혼탁한 눈으로 매일 같이 세가 안을 헤매고 다녔다.
“노사, 당문의 공자에게 기문둔갑을······ 후, 다른 방법이 없으려나?”
제갈인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제갈세가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당연우와의 약속을 무르고 싶었다.
집무실을 나선 제갈균이 흘러내린 하의를 주섬주섬 끌어 올렸다.
비척거리던 발걸음이 천천히 자세를 잡더니 자로 잰 듯이 힘차게 걸어 나갔다.
혼탁했던 눈에는 총기가 떠올랐다.
‘당문의 아해가 기문둔갑을 배우고 싶다라······.’
그가 품에서 노란 부적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의 손길에 빈 부적 위로 핏물이 스쳐 지나갔다.
“홀홀, 그 녀석이 과연 내 가르침을 따라올 수 있을까?”
화륵―!
부적이 땅에 떨어지자마자 푸른 불길이 제갈균을 단숨에 삼켰다.
제갈균의 신형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홀연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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