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소환단.
당연우는 마치 뱀이 땅을 기듯 산적들 사이를 지나갔다.
그럴 때마다 대호채 산적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끄악!”
“독이다!”
당연우가 품에서 우모침을 꺼내 뿌렸다. 검게 빛나는 우모침에는 독이 발라져 있었다.
내공이 부족한 산적들은 그 한 수에 절명했다. 그나마 조장급의 산적들은 내기를 끌어올려 독을 억제했지만, 뒤따른 항룡표국의 표사들의 검을 막지 못했다.
“물러서! 내가 나선다.”
결국 만거득이 커다란 도를 꺼냈다. 그가 부하들 사이를 헤집는 당연우를 쫓았다.
그러나 당연우의 움직임은 너무도 현란하면서도 빠르기 그지없어 절정 고수인 그조차도 쉽사리 쫓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길을 막은 것이 자기 부하들이라 베어내고 당연우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무슨 저런 개 같은 신법이 다 있어?!”
만거득이 이를 빠득 갈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당연우가 보이는 신위는 강호 짬밥을 먹을 대로 먹은 만거득도 난생처음 보는 신법이었다.
무림 강호에 땅바닥을 기는 신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당연우의 신법은 땅바닥을 뒹구는 건 나려타곤과 비슷했지만, 보다 공격적이면서도 어지간한 고수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빨랐다.
“어이! 만거득이! 자네는 나와 놀아야지?”
그 사이 안두휘가 만거득 앞을 가로막았다.
항룡표국의 표두인 안두휘는 만거득과 큰 차이가 없는 고수였다.
평소에 마주해도 부담스러운 상대인데 당연우가 부하들 사이에서 날뛰고 있었다.
게다가 철익의 명에 반드시 당연우를 잡아야 했다. 아니, 당문의 후한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을 모두 죽여야만 했다.
“씨발······ 그래, 내가 네놈 팔이라도 잘라 속을 풀어야겠다.”
안두휘가 죽으면 상황이 바뀔 것이다.
만거득은 안두휘를 향해 거칠게 칼을 휘둘렀다.
***
‘얼굴이 예쁘장한 게 인형 같은데, 눈에 살기가 가득해.‘
남사성은 당연우의 이름을 팔아 남궁린과 직접 대면했다.
당연우의 뒤를 쫓던 남궁린이 남사성을 내칠 리 없었다.
하지만 남사성이 당연우와 함께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때문인지 남궁린의 시선이 곱지 못했다.
‘이년도 가가를 노리는 건 아니겠지?’
그녀는 갑자기 늘어난 신부 후보들에 당연우마저 도망치자 심기가 불편했다.
그런 남궁린의 기분을 아는지 남사성이 여전히 남장을 한 채 납작 엎드렸다.
“저는 당 공자님의 부탁을 받아 남궁 여협을 찾아왔습니다.”
“가가께서 네게 부탁을? 흥! 뭔데?”
심기가 불편하니 말 또한 곱지 않았다.
뒤에서 지켜보는 단장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남궁 여협께서도 당 공자님께서 이번 약혼을 썩 내켜 하시지 않는 것은 아시죠?”
갑자기 혼약자라며 그 후보들이 몰아닥치니 좋을 리 없었다.
특히 오랫동안 밑 작업을 해온 남궁린은 탐탁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들끓는 살의는 인근 중소 사파로 향했고, 덕분에 사천 사파는 불벼락을 맞았다.
“용건만 간단히. 다 아는 사정에 시간 들일 생각 없거든?”
“이번 약혼은 당문의 가주님께서 결정한 것, 당 공자께 마음에 안 든다고 무위로 돌릴 수는 없겠지요.”
남궁린이 탁자를 탁 때렸다. 탁자가 두부처럼 뭉개졌다.
남사성은 물론 단장수의 눈도 동그래졌다.
남궁린의 성취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던 탓이다.
그녀는 당연우의 뒤를 쫓는 방편, 뒤늦게 수련에 열을 올렸다. 그동안 구음절맥으로 제대로 배우지 못한 무공이었다.
그러나 절맥으로 앓기 전에도 그녀는 남궁세가에서도 손꼽히는 무재였고, 절맥증을 고치면서 몸에 남은 음기가 단전에 축적되면서 상당량이 내공이 됐다.
“내가 용건만 하랬지?”
그런 그녀의 목소리에는 살기마저 담겨 있었다.
무공이라고는 조금도 모르는 남사성이 태연자약하게 그녀의 살기를 받으며 입을 열었다.
“당 가주님께서는 여럿, 세력과 인연을 맺고 싶어 후보들을 불렀고, 여러분께서는 당 공자 또는 가문의 인연을 위해 이번 당 공자 쟁탈전에 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남사성의 말이 길어지자 남궁린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녀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굳이 당 공자가 한 명과 혼인을 할 필요가 있나요?”
“그걸 몰라서 우리가 이 난리를 피우는 줄 알아?”
당연우가 이성에 심드렁한 건 오랫동안 지켜 본 남궁린이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첩을 들이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나마 당 가주의 압박이 없었다면 혼인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당연우가 이번 일로 도망을 칠 정도로 질색을 보였으니, 다음에는 기회가 없을 수도 있었다.
“당 공자는 어딘가에 얽매이고 귀찮은 일을 싫어하죠. 그래서 굳이 자신이 아니어도 되는 일은 남에게 맡기곤 해요.”
“그래······ 잘 알지.”
당연우의 이야기가 이어지자 남궁린이 살의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렇다는 건 귀찮은 일을 저희가 없애주면 당 공자도 좋아하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다른 년들을 쫓아내는 건 쉽지 않아.”
무공만이라면 몰라도 관, 상계는 남궁세가의 입김이나 물리적인 힘으로 무리였다.
무력도 마찬가지인 것이 팽가는 남궁세가 못지않았다.
“다행이라면 이번 후보들은 각기 원하는 게 달라요. 당문과의 연을 위한 것도 있었고, 명성 때문인 경우도 있고요.”
남사성이 남궁린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순수하게 당 공자를 원하는 사람은 남궁 여협뿐입니다. 그래서 제가 가장 먼저 남궁 여협을 찾은 것이고요.”
“광적이라면 몰라도 순수하다고 말하긴 어렵지.”
“숙부!”
옆에서 단장수가 끌끌하며 말을 덧붙이자 남궁린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됐다.
남사성이 잽싸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정실이 누군지는 현 단계에서 정하긴 뭐하고. 일단은 다들 약혼으로 당 공자를 묶어두는 거예요.”
“가가를 딴 년과 나눠 먹자고?”
남궁린이 다시 한번 탁자를 때리자 나무 탁자가 단숨에 가루가 돼 사라졌다.
숨이 턱 막히는 살기가 남궁세가 임시 천막 안을 가득 채웠다.
“네, 못 먹을 바엔 나눠라도 먹어야죠. 당장 도망치는 당 공자를 잡는 게 우선이니까요.”
“그래, 그건 그렇지.”
수긍하는 남궁린의 살기는 여전히 살벌했다.
“그러니까 일단 당 공자를 잡고 어떻게 나눌지 후보자들과 상의하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네 말이 맞아. 하지만 모두가 좋은 일을 하자고? 네년의 꿍꿍이를 듣기 전에 수락하기 어려운걸? 이번 일로 네가 얻는 이익은 뭐지?”
남궁린이 남사성을 노려보며 물었다.
남사성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입을 열었다.
“당 공자의 힘이죠. 그런데 여러분이 함께하신다면 더 큰 힘이 되겠죠?”
***
“당 소협의 공이 컸소.”
대호채와의 싸움이 끝나자 안두휘 표두가 직접 다가와 인사했다.
말처럼 항룡표국과 대호채와의 전력 차는 두 배가 훌쩍 넘었다. 그 수를 메꾼 것이 당문의 독과 암기였다.
만거득과 대호채의 조장들은 부하 산적들이 독공에 삽시간에 무너지자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
“덕분에 표물은 물론이거니와 인명 피해도 크지 않을 수 있었소. 표국을 대표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오.”
그렇게 말하면서 안두휘가 포권을 쥐었다. 더불어 그의 마음속에서도 감사의 뜻이 느껴졌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뒤로 물러섰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예를 거둬 주세요. 안 대협.”
배분으로 따지면 안두휘는 당중월과 같았다.
아버지뻘 사람이 고개까지 숙이며 감사를 표하자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안두휘가 껄껄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허허, 내 마음 편하고자 당 소협을 불편케 했구려.”
“아닙니다. 오히려 무림 말학도 존중해주시는 안 대협의 인품에 감동했습니다.”
내 말에 안두휘 표두도 기쁜 듯 크게 웃었다.
이어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당문의 소협께서는 어떤 일로 우리 표행에 잠입한 건가?”
그가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안두휘는 대호채의 목표가 표물이 아닌 나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대호채와의 싸움에서 보인 공은 공이고, 원인을 제공한 과 역시 있었다.
숨길 게 없었던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집에서 혼인을 강요하니, 잠시 집을 나와 바람을 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제 뒤를 쫓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그래서 잠시 몸을 숨기고 의탁하려 했습니다.”
사파연합까지 쫓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안두휘가 수상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당문이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항룡표국을 노릴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이 자가 당문의 사람이 아니라고 보기에는 훌륭한 추혼비접을 보였어.」
대호채와의 싸움에서 당문의 절기를 보였던 덕에 그가 나에 대한 의심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편함을 감추지도 않았다.
“그럼 일단 일정대로 하남성으로 함께 갈 건가?”
대호채의 목표가 표물이 아닌 나라는 걸 알았기에 안두휘는 나와 동행하는 걸 부담스러워했다.
그 마음을 읽은 나는 쓰게 웃었다.
‘괜히 말려들게 할 수는 없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더는 폐를 끼쳐드릴 수는 없지요. 이 자리에서 저는 다른 길로 갈까 합니다.”
“하남성에 있이 있는 것은 아니고?”
“기왕 호북성에 왔으니 조금 멀더라도 무당파의 해검지라도 구경해 볼까 싶습니다. 목적지를 정한 게 아니라서요.”
해검지는 무당파를 찾는 이들이 괜한 분란을 만들지 않기 위해 병장기를 놓아두는 곳이었다.
무당파가 소림사와 함께 구파일방 중 일이 위를 다투는 명문정파다 보니, 깨달음이라도 주워갈 생각이었다.
‘그래, 땀내 나는 절간보다야 낫지 않겠어?’
소림 속가제자 출신인 안두휘가 알았다면 크게 노할 생각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스스로 위로했다.
어차피 안두휘 곁에서 그의 일보신권과 소림사의 권법에 대한 깨달음을 어느 정도 훔쳤다.
“그럼 잠시만 기다리게. 그냥 보내는 건 강호 후배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게다가 가는 동안 대호채나 사파연합의 추격이 있을 수 있었다.
안두휘는 미안한 마음에 평소 목숨처럼 지니던 소환단을 꺼냈다.
소환단은 대환단만큼은 아니다만, 역시 소림사에서 제조한 영약이었다. 돈만으로 구할 수 없는 명약이었다.
선뜻 귀한 물건을 내미는 안두휘의 인정에 나는 난색을 드러냈다.
“대협, 저는 이걸 받을 수 없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어찌 됐든 내가 표행에 참여해 손해를 끼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안두휘는 억지로라도 내 손에 소환단을 쥐여주려 했다. 절정 고수의 금나수였다.
그러나 그의 생각을 통해 수를 읽은 내가 한 걸음 물러서며 그의 손을 피했다.
“허?”
안두휘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피하는 게 아니었는데.’
덕분에 안두휘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예상대로 그는 본격적으로 금나수를 펼쳤다. 권법의 고수답게 현란한 손놀림에 나는 내 손을 내놓고 말았다.
‘단장수 어르신보다 반수 정도 위인 거 같은데? 나중에 안두휘의 심득을 분석해 체득해 봐야겠어.’
안두휘의 무공도 무공이었지만, 한사코 주려는 마음도 거절하기 어려웠다.
나는 체념하고 소환단을 품에 넣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하하! 아니네. 은혜는 내가 아니라 자네가 대성했을 때 후배에게 이에게 갚아주게.”
그가 호탕하게 웃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다시 한번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는 무당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대호채가 깨졌다라······ 그러면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 되겠군.”
사련의 총관, 철익 구운재가 뒤늦게 대호채를 찾아 상황을 파악했다.
그는 당연우를 잡지 못해 아쉬움이 짙게 남았지만, 과거의 실패보다는 앞으로의 일에 더 신경을 썼다.
그동안 당연우가 모습을 숨겼으나 항룡표국이 습격 사건을 알리는 순간 당문과 추격자들이나 그를 쫓을 것이다.
구운재나 사련 입장으로는 당연우 추살 작전이 세간에 알려져 봐야 좋을 게 없었다.
밖으로는 당연우를 잡기가 어려워지고, 안으로는 련주의 분노를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다.
“총관님, 그럼 저희는 어찌하는 게 좋겠습니까?”
대호채주 만거득이 눈치를 보며 물었다.
구운재와 만거득은 같은 절정 고수였지만, 연합 내 지위는 물론이거니와 개인의 실력 차도 컸다.
만거득은 녹림채에서도 손꼽히는 고수긴 하지만, 구운재는 차기 련주로 인정받는 고수였다.
강호 전체를 보아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괴물이었다.
이렇다 보니 만거득도 구운재 앞에서는 기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그가 내린 명을 실패하고 부하도 잔뜩 잃었다.
“만 채주가 나 때문에 욕을 많이 봤어.”
하지만 구운재는 만거득을 나무랄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어르고 달래 당연우 추살에 힘을 싣게 할 생각이었다.
만거득이 안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총관님의 기대에 부응치 못해 죄송합니다.”
“그러지 말게. 내 자네를 미래의 녹림채의 주인으로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이 지금 자네 모습을 보면 뭐라 하겠나.”
“총표파자······.”
만거득의 눈에 희망이 감돌았다.
녹림채의 주인은 총표파자라고들 불렀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무공만 강해서는 오를 수 없는 자리였다.
다른 후보자를 물리치고 자리에 오르려면 그만한 뇌물과 인맥, 정치력은 필수였다.
그러나 사파연합 총관의 지원이 있다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조금 더 힘을 내주게. 먼저 녹림의 다른 채주들에게도 채근도 해주고······.”
구운재가 정보각 부장들에게 채찍질하는 것과 다르게 조용히 대호채주를 구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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