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고양이 전쟁.
“그것이······.”
독왕 당중월이 냉철하고 당당했던 평소와 다르게 식은땀을 흘리며 말끝을 흐렸다.
그의 눈앞에는 신부 후보들이 각 세력을 이끌고 당문을 찾았다.
이 사단의 시발점은 팽가였다.
팽자연의 혼인에 사활을 건 팽가에서는 가문에서 손꼽히는 고수인 유엽비도 팽상수가 직접 오십여 명의 팽가 무사와 하인을 끌고 당문을 찾았다.
팽상수는 팽가 혈족치고는 체구는 작으나 실력만큼은 당문에서도 한 수 접어줄 정도로 비도술의 고수였다.
“막내, 연우는······.”
시선을 돌리니 단장수 남궁적이 보였다. 단장수도 팽상수 못지않은 고수였다.
한때 남궁린을 보필하느라 잠잠했으나 최근 몇 년 동안 다시금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현재 집 안에 없다네.”
모용세가에도 이에 못지않은 인원을 대동하고 찾아왔다.
거기에 상계의 거물이라 불리는 소호상회에서는 식사 자리를 갖는 것조차 천금을 들여야 한다는 부상회주가 함께였고, 사천윤가에서는 전 무관 출신 고수가 따라왔다.
‘이놈이 가출을 해!’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온 이들이지만 정작 주인공인 당연우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덕분에 이들을 맞이해야 하는 건 당중월과 당연강의 몫이었다.
“가문의 힘을 총동원해서 녀석의 흔적을 쫓고 있으니 잡아 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터.”
당중월이 모인 이들 앞에서 엄중히 이야기했다.
“가문의 힘을 총동원해서 반드시 연우를 찾아 데려오겠소.”
그러나 남궁린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마냥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저는 가가를 찾겠어요.”
“리, 린아.”
남궁린이 당중월 앞에서 큰소리를 내자 남궁호가 크게 당황했다.
당중월도 당돌한 남궁린의 모습에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
한편으로 무림인의 아내라면 그 정도 기개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여기에 저만큼 가가를 사랑하는 사람도 없으니까요.”
그녀가 섬뜩할 정도로 광기를 보이며 말했다.
***
“음, 남쪽으로 빠져나왔으니 귀주성을 거쳐 가는 걸로 할까?”
북이나 동쪽으로 방향을 잡을 경우 화산파가 있는 섬서성이나 무당, 제갈세가가 있는 호북성을 경유해야 했다.
물론 그들이 섬서성이나 호북성 전체를 감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며 가며 출신 무사들의 눈에 띌 위험이 있었다.
“무사님께서는 귀주성으로 가시나 봅니다.”
초로의 상인이 물었다.
나는 성도를 나오는 상인 일행에 합류했다.
소규모 상인들인 그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낭인 무사들을 고용했다.
그들을 믿어선지 귀주성까지 가는 길에 위험이 되는 녹림 산채가 따로 없어선지 낯선 이방인인 나를 일행으로 흔쾌히 받아들였다.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세상을 돌아보려고요. 방향이 남쪽으로 향하니 귀주성은 어떨까 싶어서요.”
당중월이 졸지에 불귀의 객이 됐다.
상인은 남색 두건을 고쳐 매며 답했다.
“아버지의 유언이라······ 젊은 나이에 대단하구려. 정든 고향을 떠나기가 쉽지 않은 일이거늘.”
「이 젊은 청년의 강호행이 무탈해야 할 텐데······.」
노상인의 마음이 느껴지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퍽퍽한 무림 생활에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최근 정의회와 수라마교 등을 상대한답시고 신경을 썼더니 정신적으로 상당히 지쳤다.
‘미리 경고도 했고 인지도 했을 텐데도 원한을 샀고 말이야.’
가족 같은 동료를 잃어 눈이 돌아갔다는 건 알고 있지만, 조금쯤 억울한 감도 있었다.
아무리 사람들 마음을 읽고 그들을 조종하는 일이 특기라지만,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니 마음이 마냥 편하진 않았다.
‘몸이 편해지자고 했더니 머리털 빠질 정도로 머리를 굴렸어야 했지. 여러모로 피곤했어.’
“그래서 발 닿는 대로 여행을 떠나는 건가? 흠, 내 귀주에 아는 사람이 있긴 한데······.”
노상인이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당장의 상행이야 고용한 낭인들도 있고, 함께 가는 상인들도 있어서 나 하나 따라붙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생판 모르는 남에게 지인을 소개해주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젊은 청년이 고생하는 게 안 되긴 했는데 말이지.」
나를 향한 그의 고민이 짙게 묻어 나왔다.
“신경 써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의 마음을 알았기에 나는 선뜻 웃으며 예를 표했다.
노상인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니 결국 마음을 굳혔다.
“자네가 여유가 있다면 정안시의 함가상회를 찾아보게나.”
“어르신······.”
여러 상회와 상인들이 모인 상단에는 나 말고도 젊은 상인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노상인은 나에게 살갑게 굴었다.
‘마음을 읽지 못했다면 이 호의를 의심했겠지.’
노상인은 혼자 여행을 떠나는 나를 보고 먼저 간 아들이 떠올렸다.
‘여행 경로를 세밀하게 잡은 건 아니니까.’
이름난 명소의 풍광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여행길에 만난 사람들과 연을 맺는 것도 여행의 묘미였다.
“그래, 가기 전에 내 전서구라도 보내려 하는데······ 이름이 뭐랬더라? 허허, 이거 듣긴 했는데 말이지.”
노상인이 무안한 듯 말끝을 흐렸다.
가명이랄지 늘 쓰는 이름이 있었다.
“정가의 민재입니다.”
***
“가가라면 평소 안 가던 곳으로 갈 거예요.”
당연우의 흔적이 성도에서 사라졌다는 걸 안 남궁린이 지도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그녀가 코가 닿을 듯 지도에 얼굴을 붙였다.
“서쪽에는 청성파가, 서남쪽에는 아미파가 있어. 북서쪽에는 화산파가 있고 감숙에는 공동파. 그러면 어딜 가든 귀주 방면으로 빠졌겠네?”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남궁호를 바라봤다.
“가가가 성도에 온 건 사람 속에 숨기 위함일 거예요. 그러면 성도를 나갈 때도 혼자 가시진 않았겠죠.”
“그, 그건 그렇겠지?”
남궁호가 남궁린의 험악한 기세에 더듬으며 대꾸했다.
“오라버닌 귀주 방향으로 빠진 무리를 조사해주세요.”
이어 남궁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숙부께선 이전에 만들었던 인피면구의 용모파기를 만들어 조사해주시고요.”
“음? 당 공자가 성도에 남았을 거란 이야기냐?”
남궁적의 물음에 남궁린이 고개를 저었다.
“가가는 당문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걸 알고 있어요. 아무리 등잔 밑에 어둡다지만, 당문의 눈을 피하긴 어렵겠죠.”
그러나 성도를 나갈 때 인피면구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당연우는 허안공자라 불릴 정도로 눈에 띄는 외모의 소유주였다. 그가 사람들의 시선에서 한순간에 사라졌을 정도라면 인피면구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가가, 기다려주세요. 제가 가가를 만나러 갈게요. 반드시.”
남궁린이 당연우에 대한 광기 어린 집착을 보이자, 남궁적이 남궁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나는 우리 막내 조카의 정신상태가 이제 슬슬 걱정된다.”
남궁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걱정을 이제야 하시는 겁니까? 저는 벌써 포기했습니다.”
남궁린이 놀라울 정도의 추론으로 당연우의 행적을 추적할 때 팽가는 당문과 손을 잡았다.
다만 팽자연은 조부의 말에 따라 말을 아꼈고, 대신 팽상수가 전면으로 나섰다.
“당 공자가 가출······ 크흠! 무슨 일로 이리 가녀······ 크흠! 신부 후를 두고 문을 나섰을까?”
팽상수가 말을 하다가 연달아 헛기침했다.
숙부인 자신이 봐도 팽자연은 가녀리단 말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팽가 사람들은 한창 도를 들고 수련하던 팽자연의 저돌적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곰이나, 호랑이 같은 맹수과였다.
‘얼굴은 형수님을 닮아 옥을 깎은 것처럼 예쁜데······ 몸뚱이는 완전 큰형님이야.’
“면목이 없습니다.”
당연강이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 당연우는 자랑스러운 동생이지만 가끔 이해 못 할 기행을 벌이곤 했다.
이번 일도 어떤 사연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되나 이유까진 알 수 없겠다.
“아니요. 이번 기회에 팽가의 힘을 보여줄 수 있어서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도 있소.”
본래 정략혼이란 집안 어른 간의 이야기가 충분히 된 뒤에야 진행된다.
그런데 이제 막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 남궁세가에서 대뜸 사절단을 꾸려 당문으로 출발했다.
소가주인 남궁호와 세가의 고수인 단장수까지 함께였다.
덕분에 팽가도 부랴부랴 뛰쳐나오듯 당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차라리 잘된 일이지.’
팽가는 남궁세가에 비하면 후발주자였고, 신붓감 후보인 팽자연은 당연우와 크게 인연도 없었다.
어차피 혼인이란 가문과 가문의 연합이니, 이번 기회에 팽가의 힘을 보여줘 당문의 호감을 사는 것이 좋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런 면에서 당문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 좋지.’
마음이 조급한 남궁세가는 독자적으로 당연우 수색에 나섰고, 모용세가 측은 남궁세가의 뒤를 쫓는 모양새였다.
마땅한 무력이 없는 소호상회와 사천윤가는 오히려 당문에 남아 신부 후보가 얼마만큼 내조를 잘하는지 실력을 보일 생각이었다.
팽가는 그런 부분은 포기했다.
팽자연은 도는 놀랄 만큼 잘 다뤘다. 도만큼은.
“아무리 백 리 밖까지 본다는 당 공자라 하더라도 며칠 사이에 천 리를 가진 못했을 터. 당가와 팽가의 연대를 보여주는 것이 어떻겠소?”
이유야 어찌 됐든 공동 작업을 하다 보면 유대를 만들기 마련이다.
***
십여 명의 행상인과 넉 대의 짐마차가 행렬을 만들었다.
나는 행렬 끝에 노상인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발걸음을 옮겼다.
“무공을 배웠다고? 이전에 글공부를 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호신용으로 가전 무술을 조금 배운 정도입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당연우의 몸을 다시 태어나 죽지 않으려면 일단 내 몸 하나 건사할 실력이 필요했다.
“과거 시험까지 봤고 그쪽으로 실적을 냈으니 그쪽이 더 전공이죠.”
“허허, 문무를 동시에 갖추다니 대단한 인재였구먼.”
노상인이 진심으로 칭찬했다.
나는 머쓱하니 뒤통수를 긁었다.
“반대로 어느 하나 두각을 내지 못한다고 봐야겠죠.”
“허! 그래도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이것저것 할 줄 아는 쪽이 더 유용하지.”
하나만 할 줄 아는 사람은 그 하나가 실패했을 경우 답이 없었다.
노상인도 배운 게 돈 놀음이라 환갑이 넘어서도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고된 상행에 나섰다.
“그래, 장사를 배워 보는 건 어떤가?”
“관심은 있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배워 본 적이 없어 선뜻 시작하기 어렵더군요.”
지금까지 한 돈벌이나 사업은 제대로 된 수단은 아니었다.
그동안 해온 수법은 다단계나 폰지를 기반한 사기가 대부분이다.
「며칠 대화를 해보니 학식도 나쁘지 않고 수에도 밝아. 게다가 무공을 배웠다니 체력도 좋겠지?」
노상인의 생각이 훤히 드러났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노상인은 나에 대해 어느 정도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였다.
“따로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함가에서 일해보는 것이 어떤가?”
“어르신,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나는 그의 권유를 사양했다.
무림에서 사업을 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돈에 욕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만화루만으로도 혼자 놀고먹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정의회를 운영자금을 빼더라도 끼니 걱정은 하지 않을 정도였다.
“아니야. 내 너무 내 생각만 했군.”
노상인이 멋쩍게 웃었다.
이어 무안한 듯 화제를 돌렸다.
“내 먼저 간 아들놈 보는 것 같아 자꾸 참견하게 되는군. 이거 늙어서 주책이야.”
‘손주가 없었던 걸까?’
노상인과 나의 나이 차를 고려하면 아들이 아니라 손주가 떠올렸을 게 맞았다.
내가 그의 기억을 읽으려는 찰나 노상인이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
“귀곡서생이라고 아는가?”
뜬금없는 이야기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상인이 슬며시 주위를 살피더니 말문을 열었다.
“내 장인은 나완 다르게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네.”
‘아니,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지?’
등골이 싸했다.
똥 밟는 걸 피하려다 재난을 만난 기분이었다.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