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신임 련주.
번데기가 허물을 벗듯 당연우의 몸에서 검게 탄 껍질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갈라진 틈으로 우윳빛의 부드러운 속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무장 가운데 퍼진 머리카락이 그의 움직임따라 출렁였다.
그가 눈을 뜨자 섬뜩한 마기가 번쩍였다가 차츰 잦아들었다.
“환골탈태를 하긴 했는데······ 이래서야 더는 마인이 아니라고 부인할 수 없겠네.”
당연우가 긴 한숨을 털어내며 달라붙은 껍질을 벗겨냈다.
당연우가 신마의 깨달음을 체득하면서 몸은 신마의 무공에 어울리게 바뀌었다.
키는 한뼘 더 자랐고, 팔 다리도 길어졌다. 윤기나는 피부나 길어진 머린 부차적인 것이었다.
“머리는 쓸데 없이 길어졌네. 탈모인들을 생각하면······ 아니, 누가 머리카락 때문에 무공을 배우겠어?”
당연우는 자문자답을 하며 신마의 연구실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식물인간이 된 신마 주기성이 담긴 항아리가 있었다.
몸이나 내공은 여전히 절대고수의 것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 속은 텅 빈, 껍데기만 남아있었다.
“이걸 연합 장로들에게 어떻게 보여줘야 하나?”
당연우가 한숨을 푹쉬며 치렁치렁한 머리를 대충 묶었다.
당연우가 신마의 깨달음을 체득하는 동안, 연합 내부는 무림맹의 선전포고를 받고 뒤집어졌다.
“무림맹, 이 개 씨발 것들이!”
백절인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쳤고.
“설마설마했는데 그들이 결국 나설 줄이야.”
하설기는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장로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체념하거나 분통을 터트리거나, 또 살의를 보이거나.
당연우가 그런 회의장 안에 뒤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시녀를 통해 머리와 옷을 가다듬은 그는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키가 부쩍 커졌으나 눈썰미 좋은 이들만이 조금 의구심을 보였을 뿐, 당연우의 외양에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당 공자가 왔군. 모두 진정하게.”
하설기가 내공을 담아 난리법석을 피는 장로들을 진정시켰다.
당연우가 신마의 후계자라 하지만 당문 사람인만큼, 그 앞에서 연합의 간부로서 체통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하설기가 당연우를 빤히 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키가 조금 컸나?’
마주 서서 키를 재본 적은 없었지만 당연우의 신장이 조금 커진 것처럼 느껴졌던 탓이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 역시 당연우의 변화를 크게 감지하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당 공자, 결국 무림맹이 선전포고를 했다네. 본부를 향해 이만에 달하는 맹의 병력이 쳐들어온다더군.”
“목적이 무어랍니까?”
“목적? 무력에는 무력으로. 연합에서 자네를 협박해 끌고 온 것에 대해 따지러 온다는 내용이었지.”
하설기가 포고문을 다시 훑어보고는 말했다.
당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제가 돌아가기만 하면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자네가 돌아간다고?”
하설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가능하겠나?”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하설기는 이 사단을 일으킨 신마를 암시했다.
당연우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신마, 련주님께서는 저 먼 곳으로 가셨기에 여러분들께서 허락한다면 저는 집으로 가겠습니다.”
“아니, 그렇더라도 사람을 이렇게 모았는데 무림맹이 그냥 돌아갈 리는······ 뭐라고?!”
하설기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련주님께서는 저 먼 곳으로,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셨습니다. 그러니 장로님들의 반대가 없다면 저는 집으로······.”
“련주님이, 신마께서, 서거하셨단 말이냐?!”
“서거는 아니고요. 비슷한 거긴 하죠.”
당연우의 시선이 하설기에서 천장으로 향했다.
하설기의 외침에 다른 장로들도 침을 꿀꺽 삼켰다.
무림맹과 한바탕 해보겠다는 이들도 연합 위에는 신마가 자리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권성의 무위가 아무리 뛰어난들 신마에게는 닿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자신들을 박살내고 핍박했지만 신마는 연합을 만든, 그리고 무림을 양분한 전설이었다.
당연우가 입맛을 다시며 입을 열었다.
“뭐, 죽은 거나 다름없죠. 제게 모든 걸 물려주시고 떠났으니까.”
당연우가 설명하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하설기가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렸다.
“최근 십수 년은 자신만의 연공실에 틀어박혀 나서지 않던 련주님께서 갑자기, 그것도 급하게 후계자를 찾는 모습이 이상하다 여겼지.”
“그래, 심지어 후계자에 위협이 될 철익까지 제거하시지 않았나.”
하설기의 의문에 백절인이 맞장구쳤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특히 차기 련주를 노렸던 하설기와 백절인의 심리 변화가 극적이었다.
‘지금 내가 련주가 되면 그 권성을 상대해야겠지?’
하설기가 침을 꿀꺽삼켰다.
‘그 련주님과 견주던 권성이란 말이야······.’
그건 백절인도 마찬가지였다.
눈치빠른 하설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림맹이 쳐들오는 가운데 우리도 설전만을 벌일 수 없소. 현재 련주님도 부재하는 상황에서 나는!”
그가 시선을 백절인에게 돌렸다.
“백 장로가 초대 련주님의 뒤를 이어 우리 연합을 잘 이끌어갈 것이라 생각되오.”
하설기계 파벌에게는 천청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그동안 하설기를 지원했던 그들은 이후 하설기가 련주가 된 이후 얻을 이득이 한순간에 날아갈 것이 보였다.
그러나 이어진 하설기의 말에 그들도 항변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특히 백 장로는 정파와의 싸움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바, 오늘 무림맹과의 전쟁에서 좋은 영단을 보일 것이라 판단되오.”
백절인이 앗 뜨거 하는 표정으로 하설기를 노려봤다.
지금 련주가 됐다간 권성의 주먹에 골로 가기 십상이었다.
“허허, 하 장로와 같이 생각이 깊은 사람이 이번 전쟁에서 더 좋은 방향으로 연합을 이끌거라 생각되오만? 나 같이 무공밖에 모르는 무지렁이는 하지 못할 묘책을 끄집어낼 수 있을 것이오.”
백절인이 질세라 하설기에게 미뤘다.
현재 연합의 양대 파벌은 하설기와 백절인이었다.
평소 련주가 되기 위해 열을 올렸던 두 사람이 권성이 직접 전쟁에 나온다는 이야기에 서로가 련주 자리를 미뤘다.
당연히 두 사람의 파벌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두 사람의 말에 맞춰 목소리를 높였다.
평소 서로를 헐뜯기 바쁘던 이들이 이번엔 반대로 서로를 칭찬하기 바빴다.
그때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제가 할까요? 련주?”
하설기와 백절인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옮겨졌다.
준수한 외모의 청년.
당연우였다.
‘아니, 아무리 사태가 급박하더라도 반의 반도 살지 않은 녀석을 내 머리 위로 올릴 수야.’
‘게다가 그는 무림맹의, 사천당문 출신의 아이지 않은가.’
장로들의 머릿속이 복잡해진 가운데 당장 권성의 주먹을 앞둔 하설기와 백절인은 다른 생각을 했다.
‘아니, 본래 당가 놈은 련주님의 후계자였지. 명분은 있어.’
‘권성이 아끼던 놈이었으니 그 주먹도 피할 방도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더라도 마땅한 세력이 없는 놈이니 실권은 나와 하가 놈이 잡을 수 있을 것이야.’
당연우의 뒤를 봐주던 사람이 없으니 연합 안에서 그를 지원할 사람은 없었다.
또래에 비해 당연우의 무공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연합의 간부들과 비교하면 한참이나 부족했다.
그렇기에 그가 련주가 된다고 해서 하설기나 백절인의 권력구도에 문제가 생길 일은 없었다.
하설기와 백절인,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일단 저놈을 전시 련주로 올려두고.’
‘전후에 처리한다.’
당연우는 이미 신마라는 든든한 뒷배를 잃었다. 무공이 뛰어난들 하설기와 백절인에 비할 수는 없을 것.
두 사람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뜻을 나누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지. 당 공자는 련주님께서 직접 초청한 후계자였지.”
하설기가 먼저 입을 열었고.
“그야말로 신마님께서 인정한 정통한 후계자다!”
백절인이 다른 장로들이 반박하지 못하도록 소리쳤다.
연합의 양대파벌의 주인이 그리 말하자, 다른 장로들도 반대 의견을 낼 리 없었다.
“그러면 신임련주님을 모셔볼까?”
하설기가 씩 웃으며 말했다.
“련주님, 상석에 오르시지요.”
백절인이 맞장구를 치며 당연우를 안내했다.
그가 안내한 곳은 평소 신마가 앉았던 자리였다.
당연우가 상석에 놓인 붉은 의자에 앉아 장로들을 내려봤다.
백수십 명의 장로들의 시선이 나이 어린 신임련주로 향했다.
‘같잖긴.’
당연우가 실소했다.
굳이 마음을 읽지 않아도 그들의 속내가 훤히 보였다.
***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취임행사들은 모두 생략토록 하죠.”
나는 가타부타한 일들을 뒤로 미루고 곧바로 전시 체제를 선포했다.
“련주님의 말씀이 맞소. 허례허식은 우리에게 어울리는 일이 아니지.”
“먼저 무림맹의 전력과 이에 맞설 준비가 우선이야.”
내가 말하기 무섭게 하설기와 백절인이 덧붙였다.
내 말에는 꿈쩍도 하지 않던 장로들이 두 장로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각기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완전히 바지 사장이군.’
하설기가 앞으로 나서 입을 열었다.
“무림맹과 우리 연합의 세력은 백중지세. 문제는 현 무림맹주인 권성. 그 자가 아닐까 싶소.”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쳐들어오는 무림맹과 제대로 방비조차 하지 못한 사련의 전력이 같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피해를 감수하면 무림맹의 전력을 받아칠 정도의 여력은 본부에도 있었다.
자리한 간부들의 무위는 현재 쳐들어오는 무림맹의 고수들과 비교해서 부족하지 않았고, 본부에 남은 무인들의 수도 오천이 넘었다.
네 배 가량 차이가 났지만, 지리적인 이점이나 수성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무림맹을 막는 것이 무리가 아니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절대고수 권성.
그의 신위 앞에서는 숫자가 의미가 없었다.
“그것은 우리 련주님께서 직접······.”
“무림맹주는 제가 맡겠습니다. 아니,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고수들도 제가 맡지요.”
나는 하설기의 말을 자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설기와 백절인은 물론 다른 장로들도 깜짝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니, 권성 하나는 커녕 구파일방의 장문인 하나조차 감당할 수 없는 놈이!」
「이놈이 련주가 되더니 맛이 간 건가? 아니면 신마에게 무공을 배우더니 간이 배밖으로 나온 건가?」
「미친 놈.」
장로들이 마음이 귀 따갑게 들려왔다.
나는 그들의 의구심을 풀어주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과거 제가 구파 중에서는 화산, 아미, 청성, 무당에게 도움을 준 바 있습니다. 또 오대세가 중 남궁세가와 팽가는 사돈이며 당문은 두 말할 것 없고요.”
구파와 오대세가 중 절반은 내게 직간접적으로 신세를 졌다.
그들이 입은 은혜가 적지 않으니 내게 직접 칼을 뽑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시다시피 정파의 허례허식은 전시라고 하여 함부로 벗어던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무림 정의를 위해 모인 이상, 대의명분 없이는 칼을 뽑을 수는 없거든요. 그것이 사파연합 한 가운데라 하더라도.”
내 말에 장로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던 중 백절인이 의문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렇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소? 병력을 모아 연합 본부를 찾은 그들이 빈손으로 가는 것 역시 믿기 어려운 일이오.”
“이미 휘두른 칼이라면 멈출 수 없겠지요. 하지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면요?”
“그게 무슨······?”
백절인이 말끝을 흐리며 관심을 보였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무공은 몰라도 이빨만큼은 단 한 번도 패배한 바 없었다.
입만큼은 절대고수였다.
그리고 그 실력으로 그들을 설득시켜야만 했다.
“그들을 본부 안까지 안내하는 겁니다. 전쟁이 아니라 초청인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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