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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하사담 님의 서재입니다.

메뚜기 영혼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체프라
작품등록일 :
2019.04.01 20:07
최근연재일 :
2019.05.04 14:53
연재수 :
31 회
조회수 :
5,951
추천수 :
18
글자수 :
168,894

작성
19.04.23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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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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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3쪽

6화. 가진 자의 품격(4)

DUMMY

에어백이 터진 차량을 지켜보며 걱정스러운 탄식만 할 뿐 아무도 선뜻 다가서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사고 차량에 몰려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조수석에서 어린 사내아이가 멀쩡하게 걸어 나왔던 것이다.


“거기 뿔테안경 쓴 아저씨. 일일구에 전화 걸어주세요. 빨리요!”


어른스럽고 차분한 말투였다. 많아봐야 이제 겨우 일곱, 여덟 살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아이의 입에서 나올 것 같지 않은 냉정한 말투였다. 게다가 강렬하게 번뜩이는 것이 아이의 눈빛이 살아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운전석으로 간 사내아이가 안간힘을 쓰며 차 문을 열었다.


“아줌마. 아주머니. 정신 차려 보세요. 네!”

“아줌.. 마? 애 엄마가 아닌가 봐.”


의식을 잃은 듯한 운전석 여자의 뺨을 두드리는 사내아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사내아이는 침착하게 여자의 호흡을 확인하고, 다친 곳이 없는지 찬찬히 살폈다.


잠시 의식을 잃은 것이 분명했다. 육안으로 보이는 외상은 없었던 것이다. 에어백까지 터졌으니 부상을 당했다고 해도 그다지 심각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 일이었으므로 아이 몸인 재하는 구급차가 도착할 때까지 운전자를 있는 그대로 놔두기로 마음먹었다.


혼이 재하인 사내아이가 시선을 급하게 돌렸다. 김 비서가 부들부들 손을 떨며 제 몸 곁에 주저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혼이 재하인 사내아이가 빠른 걸음으로 김 비서 쪽으로 걸어갔다.


“너무 걱정 마세요. 특별히 다른 부상은 없는 것 같으니까. 머, 병원에 가서 사진은 찍어봐야 알겠지만. 별일 없을 겁니다.”

“네? 아니 너.”


재하 몸을 꼼꼼하게 살핀 사내아이가 김 비서를 위로하는 것이었다. 차에 부딪혔는데 아무렇지 말하는 사내아이가 김 비서는 눈에 거슬렸다. 경황도 없는 마당에 어린놈이 뭘 안다고. 김 비서는 어이가 없었지만 괜찮을 거라는 그 사내아이 말을 믿고 싶어졌다. 혹시 모르지 않은가. 대단한 능력을 가진 아이일지도 모르는 일이고.


“정말 괜찮아?”

“보세요. 어디 피나는 데는 없잖아요. 호흡도 정상인 것 같고. 물론 외상성 내출혈은 검사해 봐야겠지만.”

“그.. 래?”

왠지 사내아이 말에 신뢰가 가는 것이 김 비서는 마음이 한결 놓였다.


“움직이지 말고, 일단 그대로 놔두세요. 손대지 말고.”

“그, 그래.”


호텔 안으로 소방서 구급차가 도착했다. 119 구급 대원들이 흩어져서 환자의 상태를 살폈다. 운전석에 있던 여자는 의식이 돌아온 듯했다. 그 여자는 제 발로 일어나 구급차 들것에 올라가 힘겹게 누웠다.


“엄마, 엄마! 아저씨. 우리 엄마 살려주세요. 네에!”


들것에 누운 여자 곁을 졸졸 따르던 사내아이가 엉엉 울면서 엄마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펑펑 우는 모습이 사뭇 천진난만한 아이의 모습이었다.


좀 전과 너무 다른 사내아이의 행동에 구경꾼들이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내아이를 지켜보던 김 비서의 얼굴에 의심이 가득했다. 순간, 김 비서의 날카로운 시선이 재하에게 옮겨졌다.


구급차 들것에 실려 구급차로 이동하는 재하를 쫓아서 김 비서는 서둘러 따라갔다. 들것이 구급차량에 올려지고, 통화 중이던 김 비서는 구급 대원과 함께 구급차에 올라탔다.


구급차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병원을 향해 달렸다. 전화 통화를 마친 김 비서가 곁에 앉은 구급 대원에게 조용하게 물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죠?”

“여기서 제일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갈 건데요.”

“그러지 말고, R대학병원으로 가주세요. 거기 지금 이야기를 해 두었다고 하니까요.”


제 몸으로 혼이 돌아온 재하는 일부러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저를 걱정하는 김 비서에 재하는 은근히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어딘가 다쳤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확실한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아픈 척하고 있는 게 나을 듯싶었던 것이다.


대학병원 응급실에 도착한 재하는 간단한 진찰을 받은 후, 곧바로 침대에 실린 채 검사실로 이동했다. 김 비서가 없는 검사실에 들어서자마자 재하는 이제 막 의식이 돌아온 듯 행동했다.


제 몸 어디에도 통증이 없는 걸로 봐서는 큰 부상은 없는 듯했다. 팔다리도 살짝 움직여 보았다. 재하는 마냥 신기했다. 혼이 아이한테 순간적으로 옮겨간 것도 그렇고, 차에 부딪혔는데도 제 몸에 상처하나 없다는 것이.


의료진들도 하나같이 운 좋은 케이스라고 수군거렸다. 혼이 빠져나간 몸이라 그런 건가, 재하는 추측만 할 뿐이었다.


검사실에서 나오는 재하 곁으로 긴장한 얼굴로 김 비서가 달라붙었다.

“개, 괜찮아요?”

“아, 네. 이상 없데요.”

“많이 놀랐죠?”

“그럼요. 이사님이 저 때문에.”

갑자기 김 비서가 울먹거렸다.


“이상 없다고 하니까... 이제 걱정 안 해도 돼요.”

“그, 그래도.”

“그나저나 어쩌죠? 선생님들이 그래도 며칠은 두고 봐야 할 거라고 하던데. 당분간 회사에 못 갈 것 같은데.”

“별걱정을 다... 회장님이 아무 걱정 말고, 이사님 잘 보살펴 드리라고 하셨어요.”

“회, 회장님이? 우리 차 회장님?”

“그럼요. 여기 대학병원도 회장님이 잘 아시는 원장님이 계신 병원이라 소개해 주신 거고.”

“오, 그래요?”


재하 얼굴에 미소가 흘렀다. 정 대표 일로 내심 찜찜했었는데, 차 회장의 화가 풀린 것 같아 재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던 것이다.


어찌 되었든 재하는 나이롱환자처럼 한 해를 병원에서 마무리해야만 했다. 엄청 지루한 시간이 될 게 뻔했지만 말이다.




연말을 며칠 앞두고 태주 그룹 회장실로 소포가 도착했다. 김 비서가 조심스럽게 차 회장 책상 위에 올려두고 나갔다.


차 회장이 종이상자를 열고 물건을 확인했다. 검고, 붉은 빛깔이 감도는 실로 짠 가는 팔찌와 회색빛 깃털이었다. 차 회장은 물건만 꺼내고 빈 상자는 책상 옆에 내려두었다.


만족한 얼굴이었다. 먼저 팔찌를 왼쪽 손목에 찼다. 그리고 깃털을 재킷의 장식 구멍에 꽂았다. 뚜벅뚜벅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썩 어울리는 장식이었다. 제 모습을 확인한 차 회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밖엔 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내일 또 출근길이 막히겠다는 걱정에 차 회장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마음 한 편에서 걱정을 들어내면 또 다른 걱정이 들어와 자리 잡는 것만 같았다. 제 삶이 늘 그렇게 반복되는 것 같아 차 회장은 헛웃음을 지었다.




해가 바뀌고 정권도 바뀌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재하는 그것이 자신과 태주 그룹에게 위기가 될 줄을 미처 알지 못했다.


새 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대기업 군기잡기에 들어갔다. 먼저 전 정권에 호의적이었던 기업을 대상으로 불법 정치자금 의혹을 제기했다. 그로 인해 차 회장의 친정인 혜성 그룹에 불통이 튀었던 것이다.


소영의 아버지인 혜성 그룹 차 회장이 지난 정권 실세 핵심 인물에게 수십억 뇌물을 제공했다는 협의로 수사 선상에 올랐다. 물론 돈을 받은 정치인이 표적이었지만 혜성 그룹 차 회장도 사정 칼날을 피해 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걸로 의심받는 인물들이 줄줄이 소환 조사를 받으면서, 혜성 그룹 차 회장도 뇌물 제공으로 언론의 플래시를 받아야만 했다.


혜성 그룹 간부급 직원 8명이 배임과 업무상 횡령 혐의로 입건되면서 수사는 급물살을 탔다. 혜성 그룹 차 회장의 입장도 난처해졌지만 태주 그룹에게도 그 여파는 미쳤다. 혜성 그룹과 거래가 있던 태주 그룹 계열사에 대해서도 자금 흐름을 조사한다며 압수수색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돈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진 혜성 그룹 차 회장의 전 운전기사였던 모 씨에게 결정적인 증언이 나왔다는 기사가 흘러나왔다. 혜성 그룹 차 회장을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해 조사하기로 했다는 뉴스까지 나왔다. 소환 이후엔 구속영장을 청구할 것이라는 예상이 덧붙여졌다.


급기야 현 정부에 미운 털이 박힌 혜성 그룹과 태주 그룹에 조만간 엄청난 파장이 있을 거라는 지라시가 증권가에 나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두 그룹 주가는 연일 급락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태주 그룹 차 회장은 이를 갈았다. 분하고 원통했지만 살아있는 권력 앞에서는 저라고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인맥을 통하는 것도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녹록지가 않았다. 정권이 바뀌면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모두 숨을 죽이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렇다고 제 아비가 당하는 것을 손 놓고 구경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2월 봄기운이 완연한 어느 날, 차 회장은 재하를 회장실로 은밀히 불렀다.


“바쁘신 우리 회장님께서 어쩐 일로 저를 다 찾으시나?”

회장실로 들어서며 인사하는 재하 목소리에 비아냥거림이 흠뻑 묻어났다.


퇴원하고 나서 차 회장과 처음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었다. 전화상으로 안부 전화는 한두 번 있었지만, 재하는 서운했던 마음이 여전히 가시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상황이 너무 안 좋게 돌아가고 있어요. 당신 투정이나 듣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다고요.”

“무.. 슨 일이라도.”


살얼음 위를 걷듯 사뭇 진지한 차 회장의 표정에 재하 얼굴에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홍보 이사, 아니 재하 씨가 나 좀 도와줘야겠어요.”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무슨 일입니까, 네?”

“정부의 압박이 엄청 심한 건 아시죠? 그래서 말인데.”


재하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자 차 회장이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차 회장은 할 말이 많았던지 재하에게 숨고를 틈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점점 가슴이 조여드는 느낌이 들었다. 재하는 차 회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스라치며 벌떡 일어났다.


“안 돼요. 그건.”

“앉아요. 내 말 아직 안 끝났으니까.”

“그래도 그건.”

무의식적으로 다시 자리에 앉은 재하가 두려운 눈빛으로 말했다.


“어차피 VIP도 사람이에요. 강 회장이나 차 지점장과 다를 게 없다고요.”

“허, 말이 쉽지... 그게 가능이나 할 것 같아요? 경호가 얼마나 삼엄한데.”

재하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가능하죠, 그럼. 제 말대로만 하면 충분히 가능해요.”

“아, 싫어요. 못해요.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 죽이고 싶지 않아요.”

“이유가 왜 없어요? 우리 회사를, 그리고 우리 아버지를 해코지하는데. 재하 씨와는 아무런 상관없다는 머, 그런 뜻이에요?”


재하가 선뜻 반박을 못하고 묵묵히 차 회장을 바라봤다. 차 회장의 눈빛이 살기로 번뜩였다. 재하는 차 회장의 심기를 더 이상 건드리지 않으려 머리를 굴렸다.


“그럼, 밑에 있는 것들만 족치면 되잖아요? 굳이 VIP를 건드리지 말고.”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차 회장이 앙칼진 목소리로 재하를 꾸짖었다.


“아니 무작정 안 된다고, 화부터 낼 게 아니라.”

“이봐요 재하 씨. 홍보 이사님!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요? 밑에 있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에요? 재하 씨 혼자서 어느 세월에 다 제거해요? 또 그 사람들을 제거한다고, 우리한테 하는 해코지가 멈춰질 것 같아요? 어림없는 소리! 우두머리가 바뀌지 않으면 밑에 것들을 아무리 제거해봐야 소용없다고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한참을 비아냥거리던 차 회장이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 자리를 떠났다. 재하는 잠시 고민했다. 그녀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빈자리는 어차피 새로운 사람으로 채워질 것이고, VIP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압박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VIP를?’

그렇게 쉽사리 재하는 차 회장의 뜻을 따를 수가 없었다. 재하는 고개 들어 창가에 서 있는 차 회장을 바라봤다. 묵묵히 자신의 확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아무리 그래도 이번 일은 힘들 것 같네요. 제가 다른 방법을 한번 찾아볼게요.”

재하 말에 차 회장의 한쪽 볼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그러니까 회장님.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네?”

“..........알았으니까. 그만, 나가보세요.”


품위 있게 착 깔은 차 회장의 목소리에 살기가 흥건하게 묻어났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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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8화. 고독한 해결사(1) 19.05.01 116 0 9쪽
29 7화. 근본 없는(4) 19.04.29 114 1 12쪽
28 7화. 근본 없는(3) 19.04.27 122 1 10쪽
27 7화. 근본 없는(2) 19.04.26 194 1 11쪽
26 7화. 근본 없는(1) 19.04.25 123 0 12쪽
» 6화. 가진 자의 품격(4) 19.04.23 138 0 13쪽
24 6화. 가진 자의 품격(3) 19.04.21 157 2 11쪽
23 6화. 가진 자의 품격(2) 19.04.20 137 1 15쪽
22 6화. 가진 자의 품격(1) 19.04.19 154 0 13쪽
21 5화. 어쩌면(4) 19.04.17 150 0 15쪽
20 5화. 어쩌면(3) 19.04.16 181 0 13쪽
19 5화. 어쩌면(2) 19.04.15 211 1 11쪽
18 5화. 어쩌면(1) 19.04.13 202 0 11쪽
17 4화. 나쁜 생각(4) 19.04.12 170 0 12쪽
16 4화. 나쁜 생각(3) 19.04.11 168 0 13쪽
15 4화. 나쁜 생각(2) 19.04.10 171 0 14쪽
14 4화. 나쁜 생각(1) 19.04.09 193 0 14쪽
13 3화. 어린 양의 피(4) 19.04.08 226 1 15쪽
12 3화. 어린 양의 피(3) 19.04.07 214 1 10쪽
11 3화. 어린 양의 피(2) 19.04.06 151 0 11쪽
10 3화. 어린 양의 피(1) 19.04.06 184 0 15쪽
9 2화. 딴생각(4) 19.04.05 169 1 12쪽
8 2화. 딴생각(3) 19.04.05 192 0 11쪽
7 2화. 딴생각(2) 19.04.04 189 1 12쪽
6 2화. 딴생각(1) 19.04.04 225 0 10쪽
5 1화. 이상한 노인네(5) 19.04.03 229 1 15쪽
4 1화. 이상한 노인네(4) 19.04.03 263 1 9쪽
3 1화. 이상한 노인네(3) 19.04.02 320 1 13쪽
2 1화. 이상한 노인네(2) 19.04.02 292 2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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