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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하사담 님의 서재입니다.

메뚜기 영혼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체프라
작품등록일 :
2019.04.01 20:07
최근연재일 :
2019.05.04 14:53
연재수 :
3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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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49
추천수 :
18
글자수 :
168,894

작성
19.04.0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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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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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1화. 이상한 노인네(1)

DUMMY

그날은 대학 졸업식을 앞둔 해의 1월 끝자락이었다.


추운 바깥 날씨에도 마음은 조금 여유로운 금요일 저녁이었다.


여의도 고급 한식당에서 마주한 재하와 동주는 마냥 신이 나 있었다. 재하가 취업 턱으로 한턱을 내는 자리였던 것이다. 이미 취업한 동주가 앞서 한턱낸 것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다.


살짝 술기운이 오른 동주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야. 너 뭔가 있지? 솔직히 말해. 갑자기 태주 그룹에서 출근하라고 했다는 게 말이 돼?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이 자식이 정말. 누굴 바보로 아나. 그리고 대기업 하반기 모집이 끝난 지가 언젠데,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싱긋이 웃기만 하는 재하를 보며 동주가 말을 이어갔다.


“혹시 그때, 여기서 강 전무를 만나서 그런가? 그것참! 네가 그렇게 부러워하더니만... 결국은 이런 데서 다 만나고, 또 그 사람 밑에서 일까지 하게 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단 말이야.”

“그 자식도 참! 말이 안 될 건 또 뭐 있냐? 생각하기 나름이지.”

“어라? 이놈 말하는 것 좀 보소. 그럼, 네가 태주에 입사한 게 말이 된다고? 퍽이나.”

어이없어 하는 동주가 눈을 흘기며 비아냥거렸다.


선뜻 반박하지 못한 재하는 흐릿한 미소를 흘리며 술잔을 들이켰다. 아무 데라도 일단 취직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자신이 이렇게 떡하니 대기업에 취직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물론, 온전히 제 실력으로 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생각해 보면 동주 말처럼 말도 안 되는 일이기는 했다. 곰곰이 돌이켜보면 재하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시골내기인 자신이 대학에 간 것도, 도망가듯 군대에 입대하여 개고생을 한 것도, 그리고 또 어디 그것뿐이던가.


문득 생각하기 싫은 아픈 기억이 재하 머릿속을 치고 들어왔다.



해남 땅 끝 마을에서 서울로 유학 온 재하는 어느 틈엔가 황금만능주의에 흠뻑 빠져버렸다. 서울 사는 동기들을 따라 강남 클럽에 다녀온 뒤로 그랬던 것 같다.


강남은 그에게 신세계였던 것이다. 말로만 듣던 것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거기서는 돈이 곧 신(神) 이었다. 가진 것에 따라 대접이 달라졌고, 노는 물이 달라지는 곳이었다. 계급이 존재하는 곳, 돈의 가치를 절실하게 보여주는 곳이기도 했다.


재하는 점점 더 나은 물에서 놀고 싶은 욕심이 생겨났다. 그러기 위해선 절실하게 돈이 필요했던 것이다. 돈에서 품의가 나오고, 매너가 나오는 것이었다.


그날은 북상하는 장마전선의 영향으로 서울에 낮부터 비가 억수같이 내리기 시작했다.


새벽 늦게까지 클럽에서 놀다 온 재하는 한참 잠에 빠져있었다. 휴대폰 벨이 수도 없이 울리고 나서야 겨우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안 떠지는 눈을 간신히 뜬 재하는 발신자를 확인했다. 이제 겨우 열 살인 늦둥이 여동생이었다.


“어, 윤주야.”

재하는 쉰 목소리를 내며 무덤덤하게 동생 이름을 불렀다.


“오빠! 아빠가. 아빠가.”

“아빠가 왜.”

심각한 여동생의 분위기에 재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계속 흐느껴 우는소리에 재하는 짜증스럽게 물었고, 그제야 윤하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듣는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 아빠가 타고 나간 배가 전복되었다는 것이다. 믿기지도 않았지만 여전히 재하는 궁금했다. 농사일만 하시던 아빠가 갑자기 왜 배를 탄 건지.


건강상의 이유로 한동안 배를 타지 않았던 아빠가 돈 때문에, 아니 자신 때문에 배를 다시 탔다는 것을 재하는 장례식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았다.


돈이 필요했던 재하가 머리를 굴렸던 것이다. 학원을 다녀야겠다며, 학원비 일 년 치를 한꺼번에 내면 엄청 싸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재하는 며칠 후 제 통장에 입금된 금액을 보고 함박웃음을 지었었다.


제 집 어딘가에 숨겨 둔 돈이라도 있는 것처럼 재하는 당당하게 요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름 농한기에 여윳돈을 마련할 방법은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이다. 급하게 돈이 필요했던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배를 타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장례식을 치르고 서울로 다시 돌아온 재하는 2학기 등록을 앞두고 휴학계를 제출했다. 죄책감에 서둘러 군에 입대하기로 한 것이다. 돈이 좋다지만, 돈 때문에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전방 부대에서 군 복무하던 재하가 일병 계급장을 달고 있을 때였다. 화창한 어느 날, 재하는 저를 면회 온 사람이 있다는 전갈을 받았다. 사람 구경하기 힘들 만큼 삭막한 부대인지라 재하는 한 걸음에 달려갔다. 저를 찾아온 사람이 누구인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위병소 옆 면회실로 들어갔을 때는 노인네만 보였다. 두리번거리는 재하를 세 명의 노인네가 먼저 알아보고 갑자기 주변을 에워싸는 것이 아닌가. 범상치 않은 포스에 기가 눌린 재하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누..구?”

“우리? 자네 부친이랑 잘 아는 사람.”

“예?”


실실 웃으며 노인네들이 재하 양팔을 붙잡고 끌며 억지로 의자에 앉혔다.



한 노인네가 호리병과 나무로 만든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다른 노인네는 병뚜껑을 열어 잔에 음료를 따랐다. 검붉은 빛깔을 띤 게 흔히 보던 음료수는 아닌 듯했다.


잔이 채워지자 한 노인네가 멀뚱히 눈을 치켜뜬 재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마시게.”


얼떨떨한 재하는 살짝 입을 대고 홀짝거렸다. 쓴맛이 혀끝을 자극했다. 재하 취향은 아니었다.


“허허. 얼른 마시게.”


인상을 구긴 재하에 한 노인네가 매서운 눈매로 째려보며 재촉했다. 시킨 데로 몇 모금 더 홀짝거린 재하는 살짝 기분이 언짢아졌다. 노인 주변을 아무리 살펴봐도 치킨 같은 다른 음식은 없는 듯 보였다.


“저, 저희 아빠랑은 어떻게.”

“허허, 막쇠 이놈이 이승을 너무 오래 떠돌다 보니 이젠 우릴 다 몰라보는구려.”

“어허, 그러게 말이오.”

“모른 체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그냥 집행하시지요.”

“네? 막..쇠라니, 저 말입니까? 저 아닙니다. 막쇠.”


어느 누구도 재하 말을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았다. 한 노인네가 경멸하는 듯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놈이 언제까지 우리 눈을 피해 도망 다닐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더냐? 어리석은 놈 같으니. 어젯밤에 이 부대에서 자살하고 온 망자가 그러더군. 남의 육신에 옮겨 다니며 불로장생하고 있다는 자의 말만 믿고, 저도 혹시나 해서 자살해 본 거라고.”

“네? 그, 그건 또 어떻게.”


어젯밤 군부대 화장실에서 한 병사가 자살한 일이 있었다. 제대를 며칠 앞둔 병사였던지라 그의 자살에 대해 모두들 의아하게 생각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꺼린 군부대 지휘관들이 철저히 함구할 것을 지시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한낱 민간인에 불과한 노인네가 알고 있다는 사실에 재하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린 단번에 그 자가 막쇠 네놈이란 걸 확신했지. 그래서 이렇게 데리러 온 거고. 그러니 이제 달아날 생각 말고, 우리랑 함께 가게나.”

“어, 어딜 말입니까? 그리고 전,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막쇠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착각하신 게.”

“어허, 그놈 참!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뗄 생각인 게야!”

“어르신.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제가 가서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여기서 잠시.”

정신이 이상한 노인네라 생각한 재하는 위병소에 가서 도움을 청하고자 했다.


“어허, 그래도 이놈이! 어디서 잔꾀를.”


한 노인네가 허리에 차고 있던 호리병을 빼서 양손으로 잡았다. 그러더니 호리병 뚜껑을 열고는 병 입구가 보이도록 재하에게 겨누었다.


재하가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자 노인네의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뭔가 잘못된 것을 눈치챈 듯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뒤, 한 노인네가 허탈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 정말 하재아가 아닌 게야?”

“네? 아, 하재아 병장님 찾아오셨습니까?”


그제야 노인네가 자신을 잘못 찾아왔다는 것을 재하는 알아챘다. 부대 선임 중에 자신과 비슷한 이름을 가진 사병이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던 터라, 전달 과정에서 착오가 생겼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재하가 오던 길에 위병소에서 위병근무를 마치고 복귀하던 그와 마주쳤기에 대번에 기억났던 것이다.


“저는 하재하 일병입니다. 아, 가 아니고, 하.”

재하는 자신의 명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 이런! 낭패로다!”

“어쩐지, 혼을 빼는 묘약을 넙죽넙죽 마시더라니.”

“엉뚱한 자가 이걸 마셨으니, 이제 어쩐답니까. 한나절은 족히 가겠는데.”

검붉은 액체가 담긴 잔에 눈길을 돌린 노인네가 난감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생활관 쪽에서 여러 발의 총성이 울리는 것이 아닌가. K-2 자동소총을 난사하는 소리가 분명했다. 이내 폭발음까지 들렸다. 수류탄이 폭발한 것이 틀림없었다. 땅 진동이 재하 몸으로 전달되자마자 군부대 내에 사이렌 소리가 급박하게 울렸다. 비상이었다.


“어르신. 저, 빨리 가봐야 합니다. 그럼.”

재하가 언성을 높여 급하게 말하고는 면회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노인네들이 ‘이보게!’라며 입을 모아 저를 부르는 듯했지만, 재하는 앞만 보고 달렸다. 아무리 군대가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늦으면 죽음이었다.



실탄을 분배 받아 출동하던 재하가 들은 말이 한 병사가 총기를 난사하고 무장 탈영했다는 것이었다. 그 탈영병이 우연히도 하재아 병장이라는 것은 좀 더 나중에야 알았지만.


국방부는 대책 본부를 설치하고 인근 지역에 ‘진돗개 하나’를 발령했다. 수색을 위해 전 부대원들이 무장하여 출동했다. 추적과 교전이 일어났지만, 하루가 지나 진돗개 발령은 해제되었다.


그가 산속 어딘가에서 자살했다는 소문과 월북했다는 소문까지 떠돌기는 했지만 확인된 것은 없었다. 그다지 궁금해하는 병사들도 없었다. 그놈 때문에 밤새 뺑이 친 걸 생각하며 모두 이를 갈 뿐이었다.


시간이 제법 흘러 재하가 선임자가 되었을 때 부대 내에 떠도는 이야기가 있었다. 하재아 병장이 탈영 전에 남긴 혈서가 있었다는 것이다.


‘날 찾아온 대가다. 더 이상 날 찾지 마라.’


그 내용을 듣자마자 재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은 단순했다.


“이런 썅, 개, 시발 노무 새끼.”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그놈 대신 얼마나 괴롭힘을 당했던지. 그놈 때문에 개고생한 걸 생각하면 분통이 터졌다. 그 사건 이후로 군부대 내에 감도는 살벌한 분위기에 재하는 숨조차 마음대로 쉬지 못했던 것이다. 하루하루가 시베리아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자칫 잘못 걸렸다가는 초주검이 될지도 모르는 분위기였다.


저를 잘못 찾아왔던 이상한 노인네를 떠올릴 틈조차도 재하에겐 없었던 것이다. 그냥 대학교 일학년 다 마치고 군에 입대를 했더라면, 하재아 그놈과 군 생활이 겹쳐지지 않았을 텐데. 재하는 이를 갈며 후회했다. 노는 것에 미쳐 거짓말한 것이 결국은 화근이 되었지만 말이다.


그때부터 뭔가 꼬인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를 죽게 한 죄책감에 재하는 지난날을 후회하며 살아야 했다. 그런 재하 기억 속에 잠시 잊혔던 이상한 노인네가 다시 떠오른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였다.


작가의말

부족하나마 좋은 평가 부탁드리고요. 9,10화 완결을 목표로 하는 단편이오니 끝까지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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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8화. 고독한 해결사(1) 19.05.01 116 0 9쪽
29 7화. 근본 없는(4) 19.04.29 114 1 12쪽
28 7화. 근본 없는(3) 19.04.27 122 1 10쪽
27 7화. 근본 없는(2) 19.04.26 194 1 11쪽
26 7화. 근본 없는(1) 19.04.25 123 0 12쪽
25 6화. 가진 자의 품격(4) 19.04.23 137 0 13쪽
24 6화. 가진 자의 품격(3) 19.04.21 157 2 11쪽
23 6화. 가진 자의 품격(2) 19.04.20 137 1 15쪽
22 6화. 가진 자의 품격(1) 19.04.19 154 0 13쪽
21 5화. 어쩌면(4) 19.04.17 150 0 15쪽
20 5화. 어쩌면(3) 19.04.16 181 0 13쪽
19 5화. 어쩌면(2) 19.04.15 211 1 11쪽
18 5화. 어쩌면(1) 19.04.13 202 0 11쪽
17 4화. 나쁜 생각(4) 19.04.12 170 0 12쪽
16 4화. 나쁜 생각(3) 19.04.11 168 0 13쪽
15 4화. 나쁜 생각(2) 19.04.10 171 0 14쪽
14 4화. 나쁜 생각(1) 19.04.09 193 0 14쪽
13 3화. 어린 양의 피(4) 19.04.08 226 1 15쪽
12 3화. 어린 양의 피(3) 19.04.07 214 1 10쪽
11 3화. 어린 양의 피(2) 19.04.06 151 0 11쪽
10 3화. 어린 양의 피(1) 19.04.06 184 0 15쪽
9 2화. 딴생각(4) 19.04.05 169 1 12쪽
8 2화. 딴생각(3) 19.04.05 192 0 11쪽
7 2화. 딴생각(2) 19.04.04 189 1 12쪽
6 2화. 딴생각(1) 19.04.04 225 0 10쪽
5 1화. 이상한 노인네(5) 19.04.03 229 1 15쪽
4 1화. 이상한 노인네(4) 19.04.03 262 1 9쪽
3 1화. 이상한 노인네(3) 19.04.02 320 1 13쪽
2 1화. 이상한 노인네(2) 19.04.02 292 2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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