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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하사담 님의 서재입니다.

메뚜기 영혼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체프라
작품등록일 :
2019.04.01 20:07
최근연재일 :
2019.05.04 14:53
연재수 :
3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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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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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글자수 :
168,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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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04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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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딴생각(1)

DUMMY

음식을 앞에 두고 넋 놓고 있는 재하에 동주가 소리 높여 말했다.


“야, 뭐 해?”

“응?”

“안 마실 거야?”

“아, 아니. 마셔.”

재하가 재촉하듯 빈 잔을 내밀어 보였다.


동주는 급하게 술병을 기울였고, 찰찰 술잔을 넘친 소주가 재하 손등을 타고 내렸다. 동주는 재밌다는 듯 히죽거리며 입을 뗐다.


“어쨌든, 태주에 취직한 거 축하해. 배는 좀 아프지만.”

“고맙다. 근데, 너무 배 아파하지 마. 너한텐 여진족이 있잖아.”

“이 자식이 또! 너, 내가 하지 말라고 그랬지? 듣기 싫다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 여진이가 싫어서. 그치? 은비 때문에.”

“뭐? 거기서 은비가 왜 나와!”

“솔직히 말해서 여진이 때문에 은비랑 헤어진 거잖아? 걔가 아무 말 안 했으면, 둘이 계속 잘 만났을 거고, 안 그래?”

“자식이, 아니라니까. 아니라고.”

재하는 질색하며 고개를 돌렸다.



재하는 아르바이트하면서 은비를 처음 만났고, 같은 대학에 다닌다는 인연으로 좀 더 깊은 관계로 발전했다.


은비는 재하가 일하는 가게로 이따금 놀러와 저녁을 사 주곤 했다. 그것이 힘들었던 재하에겐 유일한 삶의 활력소였다. 하지만 은비를 동주와 그의 여친인 여진에게 소개하고 나서부터 슬슬 금이 가기 시작했다.


여진은 이웃에 살던 동주와는 동네 친구였다. 그러다가 성인이 되면서 서로 연인 관계로 발전했던 것이다. 어느 날 재하가 은비를 소개하는 자리에 동주는 여진을 데리고 나왔다. 그때만 해도 재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공교롭게도 은비와 여진이 같은 여고 출신이라는 사실에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순간 은비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지는 것만 빼고는 분위기는 그럭저럭 괜찮았던 것이다.


여진은 은비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듯했지만, 은비는 여진을 잘 모르는 눈치였다. 하긴 그럴 수 있는 일이지 않은가. 같은 학교에 다녔다고 해서 모두 기억하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은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은비가 일이 있어 빠지고 동주와 여진, 그리고 재하 그렇게 셋이서 술자리를 가졌던 날이다. 술기운이 살짝 오를 즈음이었다.


한참 뜸을 들이던 여진이 재하 씨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여고 학창시절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건에 관한 이야기였다. 물론 은비가 그 사건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것이다.


사건의 내용은 대충 이랬다. 교생 실습을 나온 남자 선생님을 은비가 먼저 유혹했을 거라는 추측이 깔렸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하여튼 뭐가 틀어져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습이 끝나갈 무렵 교생 선생님이 자신을 성폭행했다며 은비가 공개적으로 학교에 터트렸다는 것이다.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 모두들 쉬쉬했다고 했다. 들리는 얘기로는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며 교생 선생님이 억울해 했다고 했다.


학교 측은 교생 선생님의 주장에 동조하는 기색이었지만, 이유야 어찌 됐든 교사와 여학생 간의 부적절한 교제는 해당 교사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는 일이이지 않겠나. 교생 선생님이 학교에서 자취를 감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시험 기간이 도래하자 술렁이던 학생들의 관심도 금방 사그라졌다고 했다. 은비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학교를 무사히 마쳤다는 것이다.


재하는 모든 게 의심스러워졌다. 그녀가 자신한테 했던 모든 행동들이 내숭으로 와닿는 것이었다. 자신과 처음 관계를 가진 날을 떠올리며 ‘어쩐지, 쇼였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쪼잔한 남자라고 비웃을지 모르겠지만 은근히 불쾌했다. 막상 좋지도 않은 과거를 듣고 나니 무작정 그녀가 꼴 보기 싫어졌다. 그녀의 과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처음인 것처럼 내숭떨며 솔직하지 못했던 것이 싫다며 자신을 합리화하기에 재하는 급급했다.


“그 교생 쌤이랑, 몇 번이나 잤는데? 좋았어?”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내뱉은 날이 은비와의 마지막 날이 되고 말았다.



지나서 생각해 보면 얼마나 어리석은 질문이었던가. 한 번이면 괜찮은 거고, 두 번이면 안 되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자신에게는 은비가 처음이었던 재하는 그때는 용납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자신과 헤어지고 나서 잘 지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서운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졸업하자마자 그 어렵다는 태주 화재에 취직까지 했다고 하니 대단하지 않은가. 저 하나쯤 없어도 너무 잘 지내고 있는 것에 재하는 은비를 놓아주기로 했던 것이다.



“안 나와? 나와 빨리!”


씁쓸하게 미소를 흘리던 재하는 계산대 앞에서 언성을 높이는 남자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깔끔한 차림에 제법 부티가 흐르는 중년 남성이었다.


동주가 눈살을 찌푸리며 구시렁거렸다.


“저 자식은, 자기 집 안방인 줄 아나. 시끄럽게.”

“야, 들을라?”

“머, 어때서. 자식이 매너가 없잖아. 남들 식사하는데.”

“야.”

“뭐! 자식이 쫄기는. 야, 걱정 마. 요즘은 맞으면 돈 벌어.”

“자식이, 그걸 말이라고. 얻어맞고 돈 벌어서 뭐 하게?”

“말이 그렇다는 거지, 자식이. 누가 얻어맞는데? 어!”

동주가 갑자기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재하가 궁금해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은 너무 놀라 숨을 멈추었다. 두 사람의 시야 안에 은비가 들어왔던 것이다. 재하의 옛 여친인 배은비 말이다.


소리쳤던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고 나가자 은비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그 뒤를 따라 나갔다. 둘이 다툰 것이 분명했다.


“이야... 쟤도 양반은 아닌가 보다. 어떻게 여기서 나타나냐?”

“식당인데, 머. 못 올 데 온 것도 아니고.”

“괜찮아?”

“뭐가?”

“자식이, 까칠하기는. 그래도 한때는 여친이었잖아? 딴 남자랑 있는 걸 봤는데, 괜찮냐고. 응?”

“안 괜찮으면? 따라 나가서 저 자식이랑 한번 붙어봐?”

“체. 자신 있으면 그렇게 해 보던가. 그럴 가치는 있냐? 사실 내가 좀 그래서 말을 안 했는데.”

동주가 재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동주는 여진에게 들은 말을 차분하게 전했다. 은비가 직장 상사와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것이다. 물론 그 직장 상사는 유부남이었다. 은비가 일명 그 남자의 ‘세컨드’라는 것이다. 재하는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헛소리 말라며 동주를 면박했다. 그러자 이번엔 자기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며 동주의 목소리가 격앙됐다.


직장 회식 후에 동주가 다니는 건설사 사무실 실장이랑 같이 그의 집에 갔다가 우연히 은비를 봤다는 것이다. 실장이 사는 아파트는 고급 아파트라고 했다. 그 아파트 같은 라인의 아래층에서 은비가 내리는 걸 봤다는 것이다.


은비가 내리고 나서 실장이 그랬다는 것이다. 쟤, 세컨드라고. 은비가 남자랑 같이 내리는 걸 여러 번 봤다고 실장이 말했다는 것이다. 지점장님, 자기 그렇게 부르는 걸 들었다고까지 했다. 아침에 아파트에서 나가는 것도 몇 번 봤다며 확신을 주었다고 전했다.


“안 그럼, 걔가 무슨 돈이 있다고 그 비싼 아파트에 살겠냐. 안 그래?”

“전세겠지.”

“전세는 싸고?”

“무슨 아파트인데?”

“성수동 한강뷰.”

“몇 동 몇 호.”

“뭐 하게?”

“그냥.”


갑자기 두 사람 사이에 찬바람이 느껴졌다.




아무것도 하기가 싫은 토요일이었다. 재하는 언제나 그랬듯이 하루 종일 방에서 뒹굴었다. 그러다 문득 호기심이 발동했다. 동주가 말 한 것이 사실인지 확인해 보고 싶어졌던 것이다. 대충 패딩을 걸쳐 입은 재하는 얼마 전에 마련한 중고차를 몰고 이촌동 리베라 아파트로 향했다. 해는 이미 어둑어둑 지고 있었다.



20여 분을 달려간 재하는 동주가 알려준 105동 6라인 앞에 차를 주차했다. 시동을 끄지 않은 채 마냥 건물 출입구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아니면 그뿐이었고.


밖은 제법 어두워졌고, 가로등 불빛 사이로 눈발이 흩날렸다. 재하는 되돌아가기 전에 잠시 땅을 밟았다. 은비가 산다는 아파트를 둘러보고 싶었다. 제법 괜찮아 보이는 아파트였다. 어쨌든 좋은 곳에 산다니 다행이지 않은가. 재하는 쓴 미소를 흘리며 제 차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머!”

쓰레기봉투를 든 은비가 정색하며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이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너무 갑작스럽게 마주쳤다. 마음에 준비도 하지 않았는데, 그녀와 정면으로 맞닥뜨린 것이다.


얼떨떨해하는 재하에 은비는 얼른 고개를 피했다. 재하는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러나 할 말은 해야 했다.


“아, 안녕. 잘 지냈어?”

“네가 여긴...”

“아, 아는 선배 집에 왔다가.”

“그, 그래? 그럼, 잘 가.”

“으, 은비야.”


재하가 부르자 가려던 은비가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 얼굴에 상처가 보였다. 멍든 자국까지.


“얼굴이 왜.”


재하가 놀란 얼굴을 하자 은비는 어깨를 들며 얼굴을 감추려 애썼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녀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것이 분명했다. 서둘러 작별 인사를 고한 은비는 부리나케 달아났다.


‘그 신발 새끼가.’


어제 식당에서 본 남자 얼굴이 눈앞에 선했던 것이다. 달아나듯 멀어지는 은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재하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재하에겐 여전히 아프고, 미안한 마음이 많은 은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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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8화. 고독한 해결사(1) 19.05.01 115 0 9쪽
29 7화. 근본 없는(4) 19.04.29 113 1 12쪽
28 7화. 근본 없는(3) 19.04.27 121 1 10쪽
27 7화. 근본 없는(2) 19.04.26 194 1 11쪽
26 7화. 근본 없는(1) 19.04.25 123 0 12쪽
25 6화. 가진 자의 품격(4) 19.04.23 137 0 13쪽
24 6화. 가진 자의 품격(3) 19.04.21 157 2 11쪽
23 6화. 가진 자의 품격(2) 19.04.20 136 1 15쪽
22 6화. 가진 자의 품격(1) 19.04.19 153 0 13쪽
21 5화. 어쩌면(4) 19.04.17 150 0 15쪽
20 5화. 어쩌면(3) 19.04.16 181 0 13쪽
19 5화. 어쩌면(2) 19.04.15 210 1 11쪽
18 5화. 어쩌면(1) 19.04.13 202 0 11쪽
17 4화. 나쁜 생각(4) 19.04.12 169 0 12쪽
16 4화. 나쁜 생각(3) 19.04.11 167 0 13쪽
15 4화. 나쁜 생각(2) 19.04.10 170 0 14쪽
14 4화. 나쁜 생각(1) 19.04.09 192 0 14쪽
13 3화. 어린 양의 피(4) 19.04.08 226 1 15쪽
12 3화. 어린 양의 피(3) 19.04.07 213 1 10쪽
11 3화. 어린 양의 피(2) 19.04.06 151 0 11쪽
10 3화. 어린 양의 피(1) 19.04.06 184 0 15쪽
9 2화. 딴생각(4) 19.04.05 168 1 12쪽
8 2화. 딴생각(3) 19.04.05 192 0 11쪽
7 2화. 딴생각(2) 19.04.04 188 1 12쪽
» 2화. 딴생각(1) 19.04.04 225 0 10쪽
5 1화. 이상한 노인네(5) 19.04.03 229 1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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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화. 이상한 노인네(3) 19.04.02 320 1 13쪽
2 1화. 이상한 노인네(2) 19.04.02 291 2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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