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암사 님의 서재입니다.

무림실세 왕백수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암사
작품등록일 :
2022.06.14 22:05
최근연재일 :
2024.02.25 01:09
연재수 :
115 회
조회수 :
114,813
추천수 :
1,166
글자수 :
581,133

작성
22.09.28 18:00
조회
469
추천
4
글자
11쪽

뿌리가 썩은 나무는 새싹이 돋지 않는다

안녕하세요.




DUMMY

중원 동부에 위치한 안휘성은 무림의 가장 큰 기둥인 무림맹의 본부이자 맹주인 남궁 천율이 가주로 있는 남궁 세가의 본가가 있는 정파 무림의 총 본산이다.

남궁 세가가 정사 대전 이후 무림의 중심으로 등장한 건 정파 최고수인 남궁 천율이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사 대전 당시 사파와 마교, 혈교의 연합은 대부분 중원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전장은 중원의 중부에서 만들어졌다.

중원 동쪽 끝에 위치한 남궁 세가와 모용 세가, 그리고 개방과 하북 팽가 등은 전장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피해를 줄일 수 있었고, 오랜 전란이 끝난 후에 피해를 수습하는 속도도 월등히 빨랐다.

그렇게 다른 문파들보다 먼저 세력을 모으고 힘을 재정비한 남궁 세가와 모용 세가는 무림맹을 장악하고 모든 권력을 독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남궁 세가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무림맹 본부에는 소의 뿔을 닮았다 하여 우각호(牛角湖)라 불리우는 호수가 있었고 그 한 가운데 우각정(牛角亭)이 있었다.

무림맹의 맹주이자 정파 무림의 최고 권력자인 남궁 천율은 우각정에 앉아 드넓은 호수 위에서 뛰어노는 새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런 생각없이 날고 헤엄치는 것처럼 보이는 오리의 자맥질이나 학의 날개짓에는 모두 생존 혹은 효율적인 사냥을 위한 저들만의 비밀스러운 노력이 담겨 있었다.

남궁 천율의 시선에 불편함을 느꼈는지 오리 한 마리가 호수면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 올랐다.

남궁 천율이 그것을 보고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잔을 들었다.


"눈빛으로 널 죽일 순 없겠지. 내가 검으로 수 천, 수 만을 죽였다 해도 그건 어려운 일인 게야."


안광(眼光)으로 사람을 죽인다. 남궁 천율은 혈교의 고수가 자신의 사악한 눈빛만으로 정파의 고수들을 혼란에 빠지게 만들고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걸 직접 보았다.

절대로 불가능하다 여겼던 일이 벌어지는 전장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리라 믿었던 그들에게 어둠의 술법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세상의 산물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많은 것들을 잃었던 오랜 전란 이후, 남궁 천율에게 남은 건 사파와 어둠의 세력에 대한 증오 뿐이었다.

십 년의 태평성대 속에서도 남궁 천율을 지탱시켜준 것도 바로 사악한 세력은 독을 품은 잡초처럼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부친의 유언이었다.

그러나 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 무림에 남은 건 물 밑에서 벌어지는 권력 다툼과 쌓여가는 황금 뿐, 그와 수 많은 무인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무엇인가는 그 안에 보이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정파 무림의 최강자는 지쳐가고 있었다.

조속한 재건이 중요했던 무림에는 더 이상 고수들이 나오지 않았고, 평생을 연마해야 가능한 화경 이상의 실력자는 더욱이 나오기가 힘들었다.

전장에서 목숨을 건 싸움을 헤쳐 나온 것만 백 차례가 넘었던 남궁 천율에게 무인들은 드디어 정파에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생사경의 경지를 넘볼 인물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남궁 천율이 생사경의 놀라운 경지에 도달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니, 생사경에 도전하는 것조차도 세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세상엔 영웅이 있어야 했고, 그 영웅이 혼란을 잠재울 강력한 영향력을 보여줘야만 했다.

피폐해진 땅 위에서도 무엇이든 갉아먹으려는 쥐새끼들은 어디에나 있었기 때문에 남궁 천율의 존재감으로 그것들의 기세를 눌러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남궁 천율은 전쟁이 끝나면 약선 두 사람과 함께 수련을 떠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 곳, 무인으로서 그리고 사람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경지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약선은 동쪽 끝 동굴에 쳐박혀 기괴한 책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살아남은 정파의 지도자들은 남궁 천율이 자리를 비우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무림맹이 중원의 혼란을 정리하면 그 때 떠나자.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렇게 지내온 세월동안 남궁 천율의 가을 하늘처럼 맑았던 기운과 새벽의 별과도 같았던 눈동자는 빛을 잃고 탁해져 갔다.

무림맹주는 이제 자신이 엊그제 무엇을 하려 했는지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중년의 지친 무인이 되어 있었다.

이제 마흔을 넘었으니 아직 많다고 할 만한 나이도 아니고 그의 무공은 여전히 중원에서 대적할 상대가 없지만, 그의 정신은 세월을 멀찍이 앞서 가고 있었다.


남궁 천율은 자신의 빈 술잔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호수 한 가운데로 가볍게 던졌다.

그리고 수면으로 떨어지려는 잔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에서 뻗어나온 공력이 물에 닿기 전 잔을 산산이 부숴 가루로 만들었다.

잔 대신 흙 가루가 떨어진 수면에는 잔잔한 파문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맹주를 시중 드는 시녀는 이제 열 아홉이 된 어린 아이였다. 큰 빚을 지고 야반도주를 한 부친을 대신해 노비가 될 뻔한 것을 남궁 세가에서 데려와 일을 시켰다.

처음엔 모든 것이 무서웠던 작은 아이는 이제 맹주에게 유하(柔嚇)라는 이름까지 받고 그의 친구가 되었다.

유하가 보는 남궁 천율은 혼을 다른 곳에 두고 몸만 이 곳에 둔 껍데기 같았다.

그의 시선은 항상 유하에겐 보이지 않는 먼 어딘가로 향해 있었다.

오늘도 빈 잔을 들고 자신의 혼이 있을 법한 장소를 보고 있는 그의 잔을 채워주려 다가간 유하는 맹주의 손이 비어있는 것을 보고 잠시 당황했다.

남궁 천율은 유하에게 손짓을 하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더 안 마실란다. 손님이 온 것 같으니."


"술상을 다시 차려올까요?"


"아니 됐다. 저 갑갑한 놈은 술도 마실 줄 모르지 않느냐."


맹주가 '갑갑한 놈'이라 부르는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남궁 세가의 크고 작은 모든 업무를 관장하는 총 주무관이자 무림맹의 재정 담당관인 송 지명이었다.

아직 서른이 안 된 나이에 무림맹과 남궁 세가의 중요 직책을 도맡은 송 지명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희고 앳된 얼굴을 하고 있어 언뜻 보면 스무 살이 조금 넘은 한량 정도로 보였다.

전란으로 가족을 모두 잃고 천애 고아가 된 그는 뛰어난 지력을 인정받아 남궁 세가의 출남 담당이 되었고, 남궁 천율의 절대적 지지를 기반으로 무럭무럭 힘을 키워 나갔다.

송 지명이 남궁 천율과 잘 맞았던 부분은 바로 사파와 마교에 대한 끝을 모르는 증오심이었다.

송 지명은 무림의 정파들이 무공을 기르는 데만 힘을 쏟다 갑자기 일어난 전쟁에 힘이 고갈되면서 고전을 했다고 판단했다.

전쟁은 넓직한 계곡에서 일대일로 실력을 겨루는 논검의 장이 아니다. 생업에 종사해야 할 남자들이 모두 검을 들고 나가 목숨을 잃다 보니 중원의 생산 기반이 무너지고 전쟁에서 이긴다 해도 남는 건 황량한 벌판 뿐이었다.

지명이 살던 지역에서 나름 존경받던 학사였던 그의 부친은 정파 곳곳에 숨어든 마교의 세력을 경고했다는 이유로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 한 마리까지 모두 몰살당하는 큰 화를 입었다.

그래도 부친은 위기를 감지하고 아들만은 유학을 핑계로 황실이 있는 장안으로 보낸 덕에 장자인 지명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변을 당한 자신의 집에서 가족의 시신조차 남지 않은 본가의 참혹한 모습을 본 지명에게 남은 건 사파에 대한 복수심 뿐이었다.

그는 부친이 남긴 가르침을 잊지 않았고 항상 경계를 늦추지 말고 군비를 쌓고 곰팡이처럼 중원 곳곳으로 파고드는 사파의 세력을 끊임없이 색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남궁 천율이 생각하는 바와 일맥상통했기에 지명은 무림맹주의 비호 아래 자신의 이상을 펼쳐나갈 수 있었다.


평소라면 맹주가 봐야 할 서류를 한 무더기 들고 찾아왔어야 할 지명은 빈 손으로 우각정에 올랐다.

남궁 천율이 지명을 흘깃 보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오늘은 가신들이 한 놈도 궁시렁거리지 않았단 말이냐? 아니면 드디어 네 선에서 다 처리하기로 결심한 것인가?"


지명의 얼굴이 밝지 않았다. 항상 심각한 얼굴에 낯빛이 밝지 않아 썩은 계란이라는 비아냥을 듣는 지명이지만 오늘은 특히나 어두운 얼굴이었다.


"안 좋은 일이라면 빨리 들어버리는 게 편안하게 잘 수 있는 비결이니라.

무슨 일인지 고하거라."


지명이 그제서야 고개를 들었다. 그의 손에는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지금 여러 문파에 이것이 돌고 있다고 합니다."


"그게 무엇이냐?"


"정사 대전을 즈음하여 남궁 세가와 모용 세가가 발행했던 어음입니다."


남궁 천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재정에 관한 문제에는 깊이 관여하지 않던 그였지만, 부친이 한창 전쟁터에서 보낼 때는 자신이 남궁 세가의 대소사를 모두 관장했던 시기도 있었다.


"그래, 기억이 난다. 무사들을 지원하기 위한 돈이 너무나 부족했던 시기였지.

그런데 그것이 왜? 무림맹이 전쟁 당시의 어음을 지불하지 못해서 파산할 정도로 기울었더냐? 이런 때를 대비해서 지금까지 돈을 모은 것이 아니냐?"


"하지만... 금액이 우리 생각보다 많습니다."


지명이 호들갑을 떨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는 남궁 천율은 유하를 시켜 술상을 물렸다.

지명은 단구와 맥당이 목숨을 걸고 훔쳐 온 어음을 맹주에게 전해주었다.

찍혀있는 인장을 확인한 남궁 천율이 미간이 찌푸려졌다. 의심의 여지없는 남궁 세가의 인장이었다. 오래 되서 색이 바랜 종이에 찍힌 흐릿한 인장에는 당시의 다급한 심정이 담겨있는 듯 했다.

남궁 천율은 당시 무림맹의 장로들이 어음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알고 있었다.

상단의 장사치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걸고 투자했던 재물을 쉽게 포기하려 하지 않았지만, 목숨을 걸고 무림의 평화를 지켜낸 정파 무사들에게 기둥 뿌리를 뽑아서 내놓으라고 할 만한 명분은 없었다.

그래서 무림맹은 먼저 무기한 지급 기일 연장을 먼저 시도한 후, 이런 저런 구실을 붙여 어음을 가진 상단 자체를 무력화 시켰다.

여전한 힘을 가진 무인들에게 대적할 수 없었던 상단주들은 대부분 어음을 폐기 처분하고 아무리 사정이 급해도 그것만은 꺼내들지 않았다-라는 것이 지금까지 남궁 천율이 알고 있는 어음 사건의 전말이었다.


'발행한 어음 숫자를 전부 세 보진 않았었지. 그 오랜 시간동안 어음을 숨겨두고 기회를 노리는 자가 있었다는 건가. 이제와서 대체 왜?'


이럴 때 남궁 천율이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한 가지였다.

무림맹의 뿌리를 흔들려는 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건 누구겠는가.


"이 어음을 뿌리는 자가 누군지 알아봤느냐? 마교와의 연관성을 철저하게 조사해야 할 것이다."


썩은 뿌리를 가졌다 해도 이 거목이 사라지면 독버섯들은 어디선가 또 다시 뿌리를 내릴 것이다. 남궁 천율은 이제는 푸른 새싹이 돋지 않는 무림맹이라는 거목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일생의 소망이었던 무인으로서의 도약을 손에서 놓은 지금, 그에게 남은 건 무림맹의 존치와 사파의 완전한 멸망 그것 뿐이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무림실세 왕백수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정말로 갈려 나갔습니다. 22.10.08 182 0 -
공지 100번 치면 바위도 뚫는다. +1 22.09.24 144 0 -
공지 안전장비는 날 지켜주지 못한다. 22.09.17 115 0 -
공지 앞뒤가 바뀐다는 건... 22.09.08 181 0 -
공지 공지입니다. 22.08.19 867 0 -
115 왜 아무도 남지 않았는가 24.02.25 45 1 13쪽
114 고요한 학살 23.02.05 146 3 12쪽
113 청무회(3) 22.11.03 298 2 6쪽
112 청무회(2) 22.10.08 447 4 7쪽
111 청무회(1) 22.10.07 360 5 10쪽
110 협객행 22.10.06 374 5 9쪽
109 권력의 달콤한 맛 22.10.05 402 5 9쪽
108 이름을 알리다 22.10.04 407 7 10쪽
107 동상이몽(3) 22.10.01 450 7 10쪽
106 동상이몽(2) 22.09.30 427 5 10쪽
105 동상이몽(1) 22.09.29 452 4 10쪽
» 뿌리가 썩은 나무는 새싹이 돋지 않는다 22.09.28 470 4 11쪽
103 회의 소집(5) 22.09.27 459 6 10쪽
102 회의 소집(4) 22.09.24 482 8 9쪽
101 회의 소집(3) 22.09.24 478 5 10쪽
100 회의 소집(2) 22.09.22 465 7 9쪽
99 회의 소집(1) 22.09.21 521 7 9쪽
98 이름을 알리다. 22.09.20 513 8 9쪽
97 제대로 훈육할 생각이라면 매를 들어야 한다 22.09.20 504 8 9쪽
96 진창에 발을 들였으면 더러워질 각오를 해야 한다(2) 22.09.16 571 8 11쪽
95 진창에 발을 들였으면 더러워질 각오를 해야 한다(1) 22.09.15 552 7 8쪽
94 날아오르려면 땅을 박차야 한다 22.09.14 584 9 10쪽
93 와호장룡(臥虎藏龍) 22.09.13 598 5 14쪽
92 들개 떼의 눈에 띄다 22.09.12 609 6 13쪽
91 와신상담(臥薪嘗膽) 22.09.11 606 7 1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