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는 그 자리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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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여전히 쏟아지는 하늘. 그 특유의 우중충함이 어느 정도는 사라지는 게 비가 곧 그칠 것이란 징조인 듯하다.
그런 하늘 아래에 어떤 두 남자가 각자 우산을 머리 위로 펼친 채 서 있었다. 나이 차이가 상당히 나는 그 둘이었지만, 체격이 건장하고 인물이 훤하다는 점은 똑 닮아있었다.
이만 돌아가 보겠다며 걸음을 옮기는 자기 아버지의 등 뒤로 아들은 하나만 알려달라고 물었다.
“아버지보다 더 잘하려면 뭘 해야 할까요?”
생각하지도 못했던 아들의 절박한 질문. 그런 지혁의 질문에 우진은 씁쓸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돌리며 자기 아들을 바라보았다.
“나보다 잘한다는 게 뭔데?”
“그건…….”
그러게? 대체 그게 뭘까?
생각해보니 정말 막연한 질문이었다. 자신은 뭘 잘하고 싶었던 걸까?
“소속 팀 우승시키기? 다승왕 같은 타이틀 홀더? 리그 MVP? 골든 글러브? ……이런 걸 따는 게 잘하는 거라면 지혁이 넌 뭘 해도 내 뒤만 따라오게 될 뿐이야.”
“…….”
“네가 정말 죽도록 듣기 싫어했던 ‘이우진의 아들’이란 말을 듣기만 하겠지? 자기 아버지가 갔던 길, 해왔던 업적들을 따라간다는 말이 나오겠지?”
나의 목표는 무엇이지? 이 전쟁터에 뛰어든 이유는 뭐였지? 이유는 있었다. ……정말로? 그게 전부일까?
지금 난 뭘 하고 싶지? 1군에서 살아남는 것? 마운드 독점? ……겨우 그 정도?
갑자기 삶의 목적이 불확실해진 지혁은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뭘 하고 싶어? 뭐가 되고 싶어? 좋아하는 게 뭐야?”
그런 아버지의 계속되는 물음에 그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느끼는 걸 내뱉기로 했다.
자신은 잘 모르니까, 위대한 아버지라면 내가 찾지 못한 답을 찾아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나잇값 못하고 부모에게 의지하는 셈이었다.
질문에 대한 제대로 된 대답은 아닌 셈이었지만, 우진은 아들의 말을 정성껏 들어주었다.
“……어처구니없어하셨지만, 프로가 되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확실해요. 정말로 그거였어요. 문아랑 헤어지고 싶지 않았어요. 미연이랑은, 떨어질지도 모르는 결정이었지만,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어요. 눈 돌아갔으니까요.”
“뭐…… 그런 아이라면 그럴 수도 있어. 응, 이해한다. 그런데 지금도 둘이 같이 잘 있잖아? 설마 잘 있으니까 벌써 목적의식이 없어졌다는 건 아니지? 그래서 나 이겨 먹겠다고 이러는 거 아니지? 만약 헤어지면 야구 그만둘 거냐?”
“이젠 무작정 이겨 먹겠다는 생각 안 해요…… 아마. 그리고 그런 일이 있다고 그만두고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런 무책임한 일을 하게 되는 남자가 누구 아들인지 뻔한 상황에 여럿 피해가게 할 수 없죠. 저도 프로예요.”
잠시 우산 밖으로 손을 내밀어 비를 확인하고 지혁은 다시 말을 이었다.
“……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정말 생각 없이 무턱대고 한 입단이겠죠. 제가 뭐 이야깃거리가 있었던 것도 아니니. 그렇게 입단하니 금수저라던가, 연줄이라며 의심하더라고요. 실력이 특별하게 잘난 것도 아니니 그런 의심은 더 심해지기만 하고……. 2군에 있을 때, 어쩌다 던질 기회가 생겨도 얻어맞기만 하고, 아버지 이름 대고 들어왔으면 아버지 반의 반 정도라도 해보라고 하고.”
“그러게 인터넷 오래 하지 말라니까.”
“……인터넷만 그런 건 아니었어요.”
“뭐? 허허, 참나……!”
같이 고생하는 것들끼리 뭉쳐야지 그런 일이 있느냐며 우진은 허탈하게 웃었다. 스카우트 팀의 선수 선별 과정과는 별개로, 그런 분위기가 있으니 한동안 2군 팜이 초토화됐던 건 아닌가 싶었다.
사실 고교 야구에서 날고 기던 선수들이라고 해도 그 상대가 안 되는 게 작금의 프로야구 수준이다. 제대로 배운 것도 없는 고졸 신인이 가자마자 잘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만약 지혁이 그런 케이스였다면 오히려 더더욱 지혁이 듣던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의 금수저, 재능 같은 소리가 왕왕 울렸을 테다.
사실 당시에도 첫 회만은 기가 막히게 잘 막던 덕에 떡잎은 푸르다고 평가받긴 했었다. 문제는 ‘이우진의 아들’이란 자신에 대한 주위의 시선과 기대치를 잘 알고 있는 지혁이 그 정도의 평가에 만족할 리가 없었다. 자기 수준을 알고 나서 얼마나 실망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The Pitcher의 아들’이란 타이틀을 달고서 야구를 한다는 게 얼마만큼의 부담감을 짊어지는 행위인지는 그 당사자 말고는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무엇을 해도 재능이니, 핏줄이니 하며 아버지의 이름이 따라다닌다. 야구에 있어서 자신이 무엇을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이뤄야 하는 어느 수준이란 것이 있었다. 스스로 이 전쟁터에 뛰어든 이상 반드시 남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그런 강박관념이 생기는 자리였다.
자신의 온몸 곳곳에 낙인처럼 붙어 있는 그 이름값이 얼마나 무거운지는 본인이 제일 잘 알았다. 아버지가 얼마나 위대했고, 그에 비해 자신은 얼마나 초라하고 볼품없는지. 자신이 해내지 못하면 아버지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이 자기에 대한 어떤 이야기들을 듣게 될지.
그러나 뭘 하든 그 결과물은 자신의 소유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아도 꼭 해내야만 하는 최소한의 과제들이 있었다.
“요즘에는 조금 편안했어요. 이름값이니 하는 얘기를 최근에는 못 들었던 것 같아요. 저도 생각 안 했던 것 같고. ……그런데 그렇게 되니까 왠지 저 스스로의 목표가 많이 작아져 있더라고요? 길게 던지고 싶다거나, 오래 하고 싶다거나. 계속 1군에서 야구하고 싶다, 강판당하고 싶지 않다 등등…… 뭔가, 다시 눈앞의 것들을 처리하느라 바빠졌어요. 예전처럼 절박해졌어요. 남들이 기대하는 제 모습을 생각했을 때, 지금 제가 보여야 하는 모습들은 이 정도가 아니었으니까! 내가 있어야 할 곳은 겨우 이 자리가 아니니까! 이우진의 아들이라면, 남들과 달라야 하는데…….”
“야 이 건방진 놈아!”
“……네?”
듣다 못 한 우진이 결국 화를 내고 말았다.
지혁으로서는 잘 들어주고 있다고 생각했던 아버지가 갑자기 또 화를 내기 시작했다고 느껴졌다.
“겉멋만 잔뜩 늘어서는…… 주제 파악 좀 해라!”
그런 아버지의 이어지는 호통에 아들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모처럼 잘 얘기한다고 생각했는데 뭐가 문제였을지 싶었다.
“뭐? 나처럼 해? 나보다 잘해야 해? 이우진의 아들이 뭐? 현실을 직시해라, 한심한 놈아! 넌 그냥 뽑을 사람 없어서 뽑은 그저 그런 자원이었어! 그냥 복권이라고! 버리는 셈 치고 질렀던 복권이 알고 보니 본전치기 정도는 됐던 게 너다! 얻어맞아? 당연히 얻어맞겠지! 남들보다 뒤떨어지는 게 당연하지! 남들만큼 안 했으니까!”
“저도 항상……!”
아버지조차 자기 노력을 몰라주는가 싶어서 울컥했다. 그러나 그랬던 지혁이 대답할 틈조차 주지 않고 우진은 말을 계속했다.
- 작가의말
2월이 되면 연재 간격이 조금 벌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공부하고 싶은 게 생겨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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