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야농곰의 서재입니당

리드리스 일대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완결

야농곰
작품등록일 :
2018.01.26 10:19
최근연재일 :
2018.09.30 17:30
연재수 :
206 회
조회수 :
67,727
추천수 :
957
글자수 :
1,177,611

작성
18.02.21 00:10
조회
391
추천
4
글자
12쪽

빈 자리

DUMMY

하쉬는 자신이 불타오르고 있음을 알았다. 무시하려해도 전신을 불사르는 고통은 진짜였다. 한줌 재가되어 사라져야 마땅했을테지만 품 속에 품은 탑의 잔재는 푸른 화염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래도 죽겠지.’


여기가 자신의 끝임을 하쉬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몸 상태는 더할 나위 없이 최악인데다가 탑의 잔재는 곧 부숴진다. 품 속에서 잔재가 붉게 물들었을때, 하쉬는 탑의 잔재에서 강력한 힘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을 느낀 순간 어떻게 사용해야할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불완전한 마력의 구체를 받아낼 수 있었던 것 또한 잔재의 힘이었을 것이다. 그 어마어마한 마력을 지닌 푸른 구체체를 받아내는건 하쉬 자신의 실력만으로는 턱도 없었을테니.


-네놈! 성기사, 끝까지 내 앞에 서있으려는것이냐!


분노한 목소리. 푸른 악마의 손이 지면을 파고들었다. 빗줄기를 제외하면 한 줌의 바람도 불지 않는데 놈의 몸뚱아리는 폭풍이라도 맞딱뜨린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하쉬는 옅게 웃었다.


“벌레··· 그렇게 부르던게 아니었나?”


성기사라는 그 작은 한마디가 여지껏 오만하게 내리깔아보던 놈과 자신이 같은 위치에 서 있음을 알려주었다.

낡은 퇴역병사의 검을 세워 검날을 놈에게로 향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퇴역병사의 검 또한 마지막을 맞이하려하고 있었다.

전신의 균열로 보아 휘두를 수 있는 횟수는 단 한번.

그러나 그걸로 충분하다.


‘마지막에 함께해주는군. 그걸로 충분하오.’


오만하게 분노하고 일행을 비웃고 탑을 깨부순 압도적인 힘을 휘두르던 푸른 악마는 끝까지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불사르며 안간힘을 쓰고있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가라앉는다.



“너도 결국은 다를바 없었구나.”



-쿠오오오오!


울부짖는 악마와 만신창이 성기사가 서로를 노려본다.

처음의 여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제는 한 마리 짐승밖에 남지 않았다. 하쉬는 이 상황에 이르러 오히려 의식이 뚜렷해지고 있었다. 전신을 끊임없이 달구던 불꽃은 마법진이 삼키기라도 했는지 사라졌고 온 몸을 빗줄기가 식히고 있었다.

줄기줄기 닿을때마다 수증기가 피어오른다.


-내가, 내가 이대로 사라질줄아느냐아아아아!


미련이 많군.

하쉬는 팔을 뻗어서 놈과 자신의 거리를 가늠했다. 대략 서른 걸음. 하쉬라면 순식간에 좁힐 수 있는 거리였다. 또렷해진 정신과 다르게 육신은 비명을 지른다.


“쿨럭-”


기침을 토한하쉬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내부를 관조했다. 방금 구체를 막았기 때문일까? 푸른 악마의 일격에 부서졌던 늑골 하나가 폐를 꿰뚫었고 전신의 근육은 당장이라도 멈추라는듯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다가 심장은 마지막으로 펌프질하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온 몸의 피가 차게 식었다. 체온이 싸늘하게 식어간다.

기회는 딱 한번.

육신은 죽어있는것과 같았다. 알고는 있었지만 혹시나하는 기대가 없었던건 아니었는지라 미련을 가지고 있었다. 그 한 줌의 아쉬움조차 털어버리고 하쉬는 칼끝에 자신의 의지를 담았다. 쏜살같이, 아니 쏜살보다도 빠르게 나아간 하쉬는 저항하는 푸른 악마의 미간을 정확히 겨냥한다.


-소용없다! 이 벌레같은 것아!


겨우 일개 인간의 공격 따위에 자신이 상처입을리가 없다고 생각한건지 푸른 악마는 막지 않았다. 무릎꿇은채 한 팔을 지면에 박아넣고 남은 팔을 휘두른다. 공기를 무겁게 가르고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위협용이었다. 놈은 지금 하쉬를 진심으로 공격할만한 여유 따윈 없었다.


‘너에겐 각오가 부족했다.’


그게 하쉬와 푸른 악마의 승패를 갈랐다.

파리를 쫓는 손짓에 두번 당하지는 않는다. 하쉬는 고개숙여 놈의 손짓을 피해냈다. 그리고 되돌아오려는 팔을 보았다.


‘무덤에서 반성해라.’


이 상황에 이르러서 얕보고 있단게 네 패인이다.

푸른 악마의 다리에 박혀있는 비루의 창을 힘껏 밟았다. 비루의 창 끝이 크게 휘었고 발판 삼아서 높게 뛰어올랐다.

슈웅, 머리까지 뛰어올랐고, 하쉬의 칼은 푸른 악마의 미간을 꿰뚫었다.


-크하하, 네놈같은 벌레가 날 죽일 수 있으리라···?!


놈은 이제까지 없었던 당혹감을 표정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마법진이 발동했을 때보다도 훨씬 더한 감정이었다.


“그래.”


단순히 칼을 내찌른게 아니었다. 칼끝에는 붉게 물든 탑의 잔재가 있었다. 푸른 불길을 밀어낸 탑의 잔재라면, 푸른 불길 그 자체나 마찬가지인 놈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줄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비루의 창이 다리를 파고들어도, 하쉬의 검이 가슴을 가르더라도 어리석은 벌레라며 비웃던 놈은 드디어 자신이 벌레라 칭한 것들의 앞에서 절망의 감정을 여실없이 드러냈다.


-크오오오오오!


최후의 단말마. 한쪽밖에 들리지 않는 귀엔 놈의 울음소리가 그렇게 들려왔다.


-어째서 네게 반응했단말이냐!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이미 빗줄기와 마법진에 의해 주변 일대의 불은 꺼졌다. 심지어 놈의 전신에서 타오르던 불꽃들조차 사그라들어 꺼져있었다.

승부는 이미 갈렸다.


-의지를 실현시키는 위대한 금속, 미스릴! 그 미스릴이 수호자도 아닌 한낱 인간따위에게 자신의 힘을 빌려주었다는 말이냐!


“······.”


그런 거창한게 아니다. 그저 어렴풋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을 뿐이니까. 탑의 잔재에 미간을 꿰뚫리자 지면을 뜯어서라도 견뎌내던 놈이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하쉬에게는 미약한 바람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후우―”


하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죽음을 상상해보지 않은건 아니었다. 사람은 나고 또 언젠가 죽는다. 불사란 존재하지 않고 영원이란 없다.

그러나 그게 오늘일거라곤 상상해본적 없었는데.


“여기까지로군.”


또 이런 죽음을 생각했던건 아닌데.

우중충한 하늘 아래서 죽는다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절대, 절대로! 잊지 않겠다! 파멸은 반드시 너희를 찾아가리르으아아아아!


저주섞인 말과 함께 마침내 푸른 악마가 마법진 속으로 빨려들어가자 마법진은 할 일을 끝냈다는듯이 웅웅거리며 사라졌다.

이제 더 이상 푸른 악마는 없다.

비루의 마음을 좀먹던 어둠은 사라진 것이다. 능히 세계를 위협할 악마는 있어야할 장소인 무덤속으로 되돌아갔다.


“하쉬!”


이미 망가진 육신을 따라서 정신도 마모되어갔다. 이제 허락된 시간은 정말 촌각에 불과했다. 하쉬는 힘겹게 몸을 돌렸다. 일행 모두가 걱정스런 눈초리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이들을 다시 볼 수 없다고 하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삐걱이는 기분이다.

내색하지 않고 피식 웃었다.


“다들 꼴이 말이 아니구려.”


“하쉬! 여기까지와서 죽는다는게 말이 돼? 죽지 말라고! 죽지 마! 댁은 살 수 있어!”


하하, 웃음이 안 나올수가 없었다.

어린 리드라면 몰라도 잔뼈가 굵은 비루가 모를리가 없을텐데.

갑자기 궁금해졌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지금 자신은 어떻게 비칠까?


“하쉬! 죽지 않는거죠?!”


그렁그렁한 눈으로 리드가 올려다보았다. 이 어린 제자가 이런 순진한 표정도 지을줄 알았던가? 아쉽다. 좀 더 서로를 알아갈 시간이 필요했는데. 아직 스승으로서 아직 가르쳐주지 못한게 많은데. 아직 하지 못한게 많은데.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한데.


“글쎄···”


진한 아쉬움을 애써 삼키고 말을 흐렸다. 이미 자신의 끝은 코앞까지 다가와있었기에 하쉬는 뭔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리 많은 말을 할 시간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평생을 섬겼거늘, 잔인하게도 신께서는 작별할 시간조차 허락치 않으신다.


“리드. 그만! 그만해라.”


울며 메달리는 리드를 모던이 억눌린 음성으로 말려주었다. 리드에게 밀려 넘어질것 같았는데 고맙다고 해야하나? 침샘이 말라서 목소리가 나올지 모르겠다. 모던이 리드를 감싸안았다. 리드는 벗어나려 애쓰며 눈물로 표정을 일그러뜨린채 통곡하는게 보였다. 비루는 자신의 어깨에 손을 얹고 계속해서 말을 걸었지만 들리지 않았다. 한쪽 고막은 터졌다손쳐도 반대쪽 고막은 남았을텐데 왜 들리지 않을까?

그제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귀가 아니라 불타버린 뇌가 이미 ‘소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조차 마셸은 끊임없이 방법을 찾으려하는게 보인다. 그래, 그런 성격이었지.

반면에 벤자민은 경험많은 성기사답게 자신을 담담히 보내주려 하고 있었다.

시야가 회색으로 물들어간다.

하쉬는 최후의 힘을 쥐어짜 눈을 치떴다.


‘당신들이라면 맡길 수 있을것 같소.’


초점이 어긋난 눈으로 리드가 무어라고 말하는걸 보았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하쉬는 입술만 보고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있었다. 아니다. 입술을 보지 않았더라도 무슨 말을 했을지 알 것 같다.

그치만 단 한마디조차 소리로 나오지 않는다.

대답··· 해줘야하는데.

갑자기 시야가 낮아졌다. 아니다. 시야가 낮아진게 아니라 자신이 쓰러지고 있었다.

하쉬는 있는 힘껏 손을 뻗어 마지막 행동을 취했다. 사실 이미 오감은 사라져서 정말로 팔이 움직였는지 아니면 그저 착각일뿐인지 알 수 없었다.

아쉽지만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


걱정되는건 많고 미련도 남았지만.

하쉬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모든것이 새하얗게 변했다.




***




“······.”


그런 악몽을 꿔버렸다. 말도 안되는 꿈이었다.

소의 얼굴을 가지고 불타오르는 거대한 악마가 하쉬의 목숨을 앗아가는 꿈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괴물이 실존할리 없으니까.

나는 쓰게 웃으며 눈을 떴다.

바로 보이는건 상앗빛 천장이었다. 무늬 하나 없는 정갈한 방이었다. 언제나처럼 신전의 방이다. 그래, 기분나쁜 꿈일 뿐이다.

이것봐라. 그 꿈이 사실이었다면 난 아직 붉은 숲에 있어야 할거다.

너무 생생한 꿈이라서 놀라울 따름이다.


“하쉬?”


나는 하쉬의 이름을 불렀다.

약간의 불안감이 차오르는걸 애써 억눌렀다. 급히 상체만 일으키자 등줄기에 식은땀이 가득하다는걸 알았다. 그야 악몽을 꿨으니 그럴수도 있겠다 싶지만 땀의 양이 제법 심했다.

하쉬의 이름을 불러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 방 안에 없는걸 보니 하쉬는 잠깐 외출한듯 싶었다. 답답한걸까? 하기사 그럴 수 있겠다. 그나저나 꿈의 내용이 너무 불길했는데 하쉬에게 조심하라고 말해둘까? 아니, 그런 바보같은 일은 일어날 수 없겠지만.


“윽···?”


손을 짚어 몸을 일으키려는데 손바닥이 아팠다. 왜?

손바닥에 칭칭 붕대가 둘러져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왜 붕대가 둘러져있나 싶어서 붕대를 풀어헤쳤다.


“아하하, 뭐야 이게?”


붕대가 감싸고 있던건 마치 단검으로 벤 것 같은 상처였다. 불길한 느낌이 드는걸 애써 무시했다.


“하쉬? 하쉬, 어딨어요?”


듣도보도 못한 상처가 갑자기 나 있는것이 의아하긴 했지만 일단 하쉬를 찾는게 먼저다. 상처가 있는 왼손이 아니라 오른손으로 문을 열었다. 그러자 소리없이 문이 열렸다.

의외로 문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신전은 바쁜게 아니었나? 새벽시간도 아닌데 사람이 없을리는 없을텐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뒷뜰에서 들려온다. 한 두명이 아니라 되게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신전의 뒷뜰로 향했다.

이제는 신전도 상당히 익숙해진 것 같은데.


“···아.”


그래, 아니었구나.

나는 이끌리듯이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좀 더 앞으로.

나를 보며 수군대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린다.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리드?”


마셸, 아니 마셸 형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하며 내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묘비의 가장 앞. 글을 배운게 후회된다.


[하쉬 그렌테일]

[듀란드 신성제국의 성기사]

[악마와의 싸움에 자신을 불태우고 여기에 잠들다]


“······.”


그래, 꿈이 아니었구나.

그 모든 일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이제 다시는 하쉬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작가의말

조회,선작,추천,코멘트는 언제나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리드리스 일대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56 대주교 2 18.03.06 337 4 12쪽
55 대주교 18.03.05 320 4 12쪽
54 교국으로 3 18.03.02 336 4 12쪽
53 교국으로 2 18.03.01 322 5 11쪽
52 교국으로 18.02.28 330 5 11쪽
51 빈 자리 6 18.02.27 336 4 13쪽
50 빈 자리 5 18.02.26 340 5 16쪽
49 빈 자리 4 18.02.23 340 6 11쪽
48 빈 자리 3 18.02.23 341 4 14쪽
47 빈 자리 2 18.02.22 343 5 14쪽
» 빈 자리 18.02.21 392 4 12쪽
45 푸른 악마 9 18.02.19 338 4 12쪽
44 푸른 악마 8 18.02.19 339 6 18쪽
43 푸른 악마 7 18.02.16 304 4 13쪽
42 푸른 악마 6 18.02.15 316 4 11쪽
41 푸른 악마 5 18.02.14 323 5 11쪽
40 푸른 악마 4 18.02.14 344 5 14쪽
39 푸른 악마 3 18.02.13 318 5 14쪽
38 푸른 악마 2 18.02.12 322 4 16쪽
37 푸른 악마 18.02.09 361 6 15쪽
36 붉은 숲 13 18.02.08 357 4 12쪽
35 붉은 숲 12 18.02.07 347 5 12쪽
34 붉은 숲 11 18.02.06 355 4 13쪽
33 붉은 숲 10 18.02.05 349 5 10쪽
32 붉은 숲 9 18.02.02 374 6 11쪽
31 붉은 숲 8 18.02.01 339 4 12쪽
30 붉은 숲 7 18.01.31 355 4 11쪽
29 붉은 숲 6 18.01.30 345 5 10쪽
28 붉은 숲 5 18.01.29 384 4 10쪽
27 붉은 숲 4 18.01.26 391 5 1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