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존재 의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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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과일 바구니?”
장영조가 떨떠름한 얼굴로 반문했다. 조종욱의 기감을 피해 멀리 숨는 바람에 대화 내용을 엿듣지는 못했지만, 저게 그냥 과일 바구니가 아니라는 것에 전 재산과 손모가지를 걸 수도 있었다.
“괴협! 이 시벌!”
종아리가 부러진 채로 쓰러져 있던 조종욱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깔을 빼서 먹물을 쪽 뽑아버릴 눔아! 저게 왜 그냥 과일 바구니여, 돈 바구니지! 바구니 하나당 오백만 원짜리 봉투 다섯 개, 합이 오천만 원 들어있잖어! 아녀?”
“저, 저 아저씨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재빨리 표정을 관리하긴 했지만, 일순간 당황이 스쳐 지나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장현민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단련된 연기력을 한가득 끌어올렸다.
“무슨 소리에요. 아저씨는 통장만 줬지, 현찰은 안 줬잖아요.”
불과 몇 분 전의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뒤집는 장현민이었다.
조종욱은 그야말로 미치고 환장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워매, 혓바닥에 무슨 구리스 발랐는갑네! 이 시벌, 왜? 난 아랫도리에 두 개 달렸다고 구라도 쳐 보지? 어째 10분 전에 받은 걸 이러코롬 날름 뒤집는당가!”
“저 아저씨, 통장 걸리니까 거짓말 하는 거예요.”
장현민이 장영조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장영조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확인해 보면 알겠지. 조 장로. 나 국정원의 장영조입니다.”
장영조가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어 조종욱에게 내밀었다.
조종욱은 신분증을 흘끔 보고는 이를 질끈 깨물었다.
“아무래도 이야기를 좀 들어봐야겠는데… 아무래도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마약을 했다는 제보를 받았으니 저 사람도 임의동행 좀 해야겠고. 그리고 과일 바구니는…….”
장영조가 장현민을 흘끔 돌아보았다.
다시 한 번 공포감이 찾아들었다. 눈앞의 소년은 그냥 소년이 아니라, 수가 틀리면 사지를 부러트려 버리는 괴협인 것이다. 그나마 법 체계는 조금 존중하는 것 같지만 그것도 겉모습 만이다. 만약 밉보이면 뽀로로 탈을 쓰고 나타나 자신을 두들겨 팰지도 모른다.
‘진퇴양난이네, 이거.’
그렇다고 그냥 지나갈 수도 없었다.
만약 모른 척 넘어갔다가 서일중에게 들키면 박살이 난다. 아니, 무엇보다 국정원 요원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이상 당연히 지나치면 안 될 일이었다.
“일단 한 번 확인해보지요.”
한숨을 푹 내쉰 장영조가 긴장한 얼굴로 과일 바구니로 걸어갔다.
걸어가면서도 흘끔흘끔 뒤를 돌아보는 것이, 혹시라도 괴협이 마음을 바꾸어서 자신을 두들겨 팰까 걱정되는 눈치였다.
‘괴협이 돈 욕심이 많은 모양인데…….’
장영조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애써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오천만 원이 든 과일 바구니라면 나도 받고 싶다. 학생. 학생은 오천만 원이 들어있는 바구니를 받으면 뭐 할 거야?”
과일 바구니 앞에 선 장영조가 쪼그려 앉아서 과일들을 뒤적거렸다. 당장이라도 괴협이 들이닥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공연히 등골이 서늘했다.
‘괴협은 뭐라고 대답할까? 집? 아니면 차를 뽑겠다고 하려나?’
지금은 그나마 풀렸지만, 괴협의 집안이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장영조도 알고 있었다. 어쩌면 대학교 학비에 쓰겠다거나 가족들에게 쓰겠다는 대답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대답은 장영조의 예상과는 다른 것이었다.
“마약퇴치운동본부에 기부요.”
“뭐?”
과일을 뒤적거리던 장영조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뒤에서 장현민의 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번 돈이라면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오천만 원이 생긴 거면 마약퇴치운동본부에 기부할 거예요. 아까 들어보니까 마약 판매로 번 돈인 것 같더라고요.”
장영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장현민을 바라보았다.
괴협이 뽀로로 탈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 사파에서도 그렇게 생각했으므로 괴협을 찾아온 것일 터이다.
그리고 뽀로로 탈에게 잡힌 조폭은 다름 아닌 마약 사범이었다.
‘허! 협객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더니.’
장현민의 시선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오랜 기간 범죄자들을 상대했던 장영조는 장현민의 말이 결코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장현민은 정말 그 돈이 자기 돈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국고로 환수하는 게 낫지 않아?”
“국가가 제대로 써주면 모르겠는데… 그건 아닐 것 같아서요.”
장현민이 나직한 어조로 대답했다.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나이인지라 국고가 어떻게 쓰이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국고 환수는 차선이라는 점은 확실했다.
짧은 인생이나마 살아본 결과, 국가가 돈을 제대로 쓰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국가가 돈을 개판으로 쓸 것 같다? 하하! 그 말도 일리는 있지. 그럼 그냥 가지지 않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을 거 아냐?”
장영조가 눈을 가늘게 뜨고 질문했다.
도대체 어째서일까?
장현민의 시선이 불현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며, 몇 만 원 정도는 가족들이랑 옷 사 입는 것도 괜찮을 것 같긴 해요.”
“으하하하!”
장현민의 얼굴을 본 장영조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괴협에 대한 공포감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장현민이 평범한 소년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욕심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네. 당연히 자기가 쓴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야.”
“그런가요?”
불현듯 장현민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고 보니 그 돈을 자기가 쓸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따지고 보면 눈 먼 돈인데, 왜 내 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속세에서 도(道)를 좇다…….’
스승님의 말을 떠올리자 갑자기 가슴이 간질간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떠오를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장현민은 저도 모르게 가슴께를 어루만졌다.
장영조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어쨌든 과일 바구니는 진짜 그냥 과일 바구니네.”
“뭐여, 시벌?”
조종욱이 눈살을 찌푸리며 외쳤다.
“어?”
장현민도 의아해하긴 마찬가지였다.
장영조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장현민은 과일 바구니를 내려놓을 때 미리 돈을 꺼내어 근처의 하수구에 떨어트려 놓았다.
그러므로 저 과일 바구니는 진짜 그냥 과일 바구니가 맞다.
하지만 그건 장영조가 조금만 주위에 주의를 기울이면 금방 들킬 만한 얕은 수였다. 장영조가 앉은 위치 상 틀림없이 하수구가 보였을 텐데, 그는 아무것도 못 본 척 하고 있었다.
“학생, 오천만 원이나 생겼는데 전액 기부해서 되겠어? 한 오백 정도는 학생이 써도 돼. 간이 그렇게 작아서 뭐해?”
장영조가 장현민을 바라보며 실소를 지어보였다.
‘만약 사사로운 욕심으로 돈을 받은 거였다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오천만 원으로 괴협에게 빚을 지우는 건 좋은 선택이지. 한 번쯤은 넘어갈 만 해.’
장영조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돈은 남이 쓰고 생색은 내가 낼 수 있다면 나쁠 것이 없다.
조종욱이 버럭버럭 고함을 질러댔다.
“아니, 씨벌! 제대로 찾아본 거여? 이 눔이나 저 눔이나 똑같은 새끼덜 아녀, 이거! 야, 국정원! 다시 한 번 찾아 봐! 괴협 몸 수색도 해 보고!”
“예. 그렇게 하지요, 뭐.”
장영조는 장현민에게 몸수색을 요청했고, 장현민은 순순히 그에 응했다.
당연히 장현민에게서는 돈 봉투가 나오지 않았다.
“이 시벌! 무공이 아니라 소매치기를 배웠나! 어디다 숨겼어! 괴협, 이 시벌 놈아! 어디다 숨겼냐고!”
조종욱이 가슴을 쾅쾅 치며 외쳤다.
사실, 조종욱이 이처럼 장현민을 닦달하는 데에는 생돈을 뺏긴 데에 대한 분노도 있지만, 시간을 끌기 위함도 있었다.
장현민이 뒤늦게 깨달았듯이, ‘통나무 장사’는 정사 양측의 갈등을 유발하고도 남을 만한 민감한 사안이었다.
일이 확대될 것을 우려한 사도맹은 조기에 사태를 수습하고자 장로인 조종욱을 투입해 사건의 당사자인 괴협과의 협상을 시도했지만, 결과는 이렇듯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괴협이 뒤통수를 쳐버리고 만 것이다.
이제 정사 갈등은 확정된 셈이고, 국정원까지 개입했으니 어쩌면 사파에 토벌령을 내려질지도 모른다.
‘수습할 길이 없어, 수습할 길이. 맹(盟)에 연락을 취해보려 해도 시간을 끌 수가 없고… 시벌, 외통수인가?’
조종욱이 안 굴러가는 머리를 최대한 굴려보았지만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리고… 결국엔 상동파 위치도 밝혀져부렀어. 시벌, 아무리 얻어맞았다고 해도 그렇지, 사내 놈이 줏대도 없이 그걸 불어버리면 어떡혀?’
조종욱이 눈을 질끈 감았다.
‘상동파는 사도맹 소속이 아니다’는 말은 결코 거짓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도맹이 상동파를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사도맹은 그들을 예의주시하고 있었고, 덕택에 그들의 뒤에 무언가 거대한 세력이 앉아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조종욱은 일이 끝도 없이 커질 것만 같다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불길한 예감만큼이나 짜증도 솟구쳤다.
조종욱이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장현민을 바라보았다.
‘시벌. 생각하면 할수록 빡치네. 나 진짜 삥 뜯긴겨?’
- 작가의말
늦어서 죄송합니다...ㅠㅠ
감기에 걸려서 시름시름 앓고 있어요.
어찌어찌 연재분을 올리긴 했지만 두통이 많이 심하네요.
감기 조심하세요, 독자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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