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회복(回復) (3)
손가락으로 담배의 필터를 두드리던 서일중이 벽에 등을 기댔다.
그의 얼굴에 문득 비틀린 미소가 떠올랐다.
“천마의 무덤? 와우! 이런 참신한 개소리는 처음 들어 봐. 너무 재밌어서 영화로 내도 될 것 같아.”
조롱 섞인 어조로 김태연을 비꼬던 서일중이 이내 표정을 바꾸었다. 장난스러운 기색은 가득하던 눈동자에 얼음장처럼 차가운 기운이 어린다.
“장난치지 마라, 요희궁주. 난 그딴 개소리를 듣고 싶은 게 아니야. 진실을 알고 싶은 거지.”
김태연이 무심한 눈으로 그런 서일중을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자존심 하나로 살아온 무림인, 타인이 억누른다고 억눌릴 사람이 아닌 것이다.
잠시 뒤, 김태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당금 벌어진 사건이 사건이니 제가 한 수 물러야겠죠. 좋아요. 처음부터 설명하겠어요.”
서일중이 대답 대신 어디 한 번 지껄여보라는 듯 턱짓을 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을 정리하던 김태연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먼저 남송(南宋) 때의 일부터 시작해야겠군요.”
강호 무림의 역사 속에는 수많은 마교가 존재한다. 조정의 뜻에 반하여 사교(邪敎)로 지정된 종교는 교리의 선악과 관계없이 마교로 몰려 토벌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 진짜 마교라 할 만한 종교는 단 두 개뿐이었다.
원나라 때는 반원복송을, 청나라 때는 반청복명을, 서구 열강이 득세할 때는 반외세 운동을 벌이는 등 대세에 거스르는 짓만 골라 하다가 멸망한 백련교와 그들의 뿌리라고 할 만한 배화교(拜火敎)가 바로 그것이다.
배화교는 9세기 경, 당나라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역사는 짧았지만, 배화교 특유의 철학적인 교리와 만민평등 사상은 백성들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만민평등 사상은 당시의 실정엔 맞지 않는 것이었다.
당나라 무종은 배화교를 사교로 지정한 후 그를 믿는 이들을 모두 주살하라는 명을 내렸고, 그때부터 배화교는 마교라 불리게 되었다.
배화교가 무림인들의 공포의 대상이 된 것은 송나라에 이르렀을 때였다. 당대 배화교주였던 방랍(方臘)이 어둠 속에서나마 세력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반란이 천마(天魔)라는 극강의 마인을 낳았던 것이다.
“천마의 무공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강했죠. 비록 마인이었지만, 천마는 달마나 장삼봉, 천괴와도 비견될 만한 고수였어요. 어쩌면 그들마저도 능가했는지도 모르죠.”
일인당천하(一人當天下)!
천마의 무위는 ‘홀로 천하를 당해낸다’ 라고 전해질 정도로 고강했다. 실제로 그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서른 네 개의 문파를 멸문시켰으며, 상처 하나 없이 오백여 명의 고수를 대적해 그들을 전멸시켰다.
“어쩌면 그 역시 천무지체였을지도 모르죠.”
김태연이 장현민을 흘끗 바라보았다. 장현민에게서 고작 2년 배운 강호초출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살기를 느꼈던 김태연이었다.
서일중 역시 장현민을 바라보긴 마찬가지였다.
“다 아는 이야기는 넘어가지, 요희궁주. 무림인의 칠 할 가까이가 죽긴 했지만 어쨌든 무림대연맹은 천마를 죽이는 데 성공했어. 그리고 그 시체를 열 두 조각으로 나눠 각 성에 효시했지. 천마의 무덤이 존재하지 않는 까닭은 바로 그래서야.”
“말씀대로예요. 문제는 마뇌(魔腦)가 천마의 무공이 모두 적힌 비급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에요.”
“뭐?!”
서일중은 등골에 소름이 오싹 돋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천마의 무공이 모두 적힌 비급이라니! 그것을 얻는 이가 나온다면 강호는 새로운 천마를 맞이하게 될 터였다.
“말도 안 돼. 마뇌는 천마가 죽기 전에 죽었잖아.”
“살아있었어요. 아니, 그는 살아만 있었던 게 아니라 천마의 재림을 꿈꾸었죠. 그는 천마의 무덤을 만들어 비급을 숨긴 다음, 성화령(聖火令)을 녹여 만든 여덟 개의 패에 그 위치를 기록했어요. 모든 작업은 무림인들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진행되었고, 마침내 성공했죠.”
“말도 안 돼, 말도…….”
서일중이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백 년 전, 천괴 한 조사께서는 마교의 잔당들을 만나게 되었어요. 천마금패에 대해서는 아마 그때 알게 되셨겠죠. 한 조사께서는 그들에게서 한 개의 금패를 빼앗아 파괴했고, 나머지 금패를 찾아 천하를 유랑했어요. 반선이 된 후에는 세속에 대한 관심을 끊었지만.”
“요희궁은 어떻게 그런 사실들을 알게 되었지?”
서일중 대신 도군이 심각한 얼굴로 질문했다.
“반선의 경지에 이르기 전, 천괴 한 조사께서는 본궁의 궁주를 만나게 되었지요. 당시 본궁은 개방과도 비견할 만큼 정보에 강했던 문파. 천괴 한 조사께서는 본궁의 무공을 고쳐 정파의 것으로 바꾸어 주는 대신, 천마금패를 찾으라는 명령을 내리셨어요.”
요희궁주는 천괴와의 약속을 충실하게 이행했고, 두 개의 천마금패를 찾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바로 그때 일어났다. 마교도들의 복수를 우려한 요희궁주는 천마금패를 파괴하는 대신 그것을 특정 장소에 숨겼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우려 때문이 아니라 천마의 무공을 차지하고 싶은 욕심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런 개 같은…….”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던 서일중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잠깐. 설마 마교도들에게 그 위치를 밝힌 것은 아니겠지?!”
“…….”
김태연이 대답 대신 눈을 질끈 감았다. 도군의 손에 구출되기 직전, 그녀는 이매탈로부터 ‘요희 엔터테인먼트에도 마교도들이 잠입해 있다’는 협박을 받았다. 하회탈이 했던 ‘네 제자들의 목숨을 거둬가겠다’는 협박의 연장선이었다.
그녀에게는 제자들의 목숨을 걸 만한 배짱이 없었다.
“하나의 위치는 밝혔어요. 나머지 하나의 위치는 가짜로 밝혔죠. 거짓과 진실을 반반씩 섞었으니 놈들도 두 개 전부를 가지지는 못할 거예요.”
“이런 개같은 년! 당장 위치 말해!”
서일중이 버럭 고함을 지르자 김태연이 기운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나는 용산 전쟁기념관 지하에, 나머지 하나는 전북 부안의 위도에 있어요.”
서일중은 김태연에게서 구체적인 위치를 듣자마자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신경질적으로 특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달음박질쳤다.
“구환도! 나다, 서일중! 지금 당장 전 병력 동원해서 용산 전쟁기념관 지하로 출동해! 나도 바로 그리로 간다! 뭐? 상황은 무슨 상황! 잔말 말고 일단 그리로 출동해! 지금 당장!”
서일중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잠시 특실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침묵은 한참이 지나서야 깨어졌다.
“허! 요희궁이 미친 짓을 했군, 미친 짓을 했어.”
도군이 작게 한탄하며 침대의 머리맡에 등을 기댈 때였다.
내내 침묵하고 있던 장현민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게에서 죽은 사람 이야기는 하지 않네요, 저 사람도.”
“…예?”
도군이 의아한 얼굴로 장현민을 돌아보았다.
하염없이 창가만 바라보고 있던 장현민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특실 내에 있는 모든 무림인들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장현민을 주시하고 있었다.
“벙어리장갑을 끼고 있던 여자애가 있었어요. 내 동생만한 나이의. 폭발에 휩쓸리는 것까지는 봤는데…….”
장현민과 시선을 마주친 도군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장현민의 눈동자에서 희미한 분노를 읽은 탓이었다.
“아무도 그 아이에게는 관심이 없네요. 고속도로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텐데,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없어요. 마음이 불편하지 않은가 봐요, 다들. 아니, 내가 이상한 건가?”
“그건…….”
도군이 억지로나마 미소를 지으며 말할 때였다.
장현민이 그의 말을 끊으며 질문했다.
“그 아이는 살았을까요?”
“으으음.”
도군은 장현민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눈을 질끈 감았다. 장현민에게서 한 가지 기질을 읽은 탓이었다. 무림인에게 가장 필요한 기질이지만, 동시에 가장 많은 문제를 야기하는 기질.
‘이런… 막내 사숙께 협객(俠客)의 기질이 있구나.’
도군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해갔다.
- 작가의말
요즘은 잘 보이지 않죠, 협객의 기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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