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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부 님의 서재입니다.

취업무림(就業武林)

웹소설 > 작가연재 > 무협, 현대판타지

촌부
작품등록일 :
2016.01.29 12:11
최근연재일 :
2016.03.20 15:58
연재수 :
5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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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3,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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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81,137

작성
16.02.08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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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제5장> 21세기 수련법 (3)

DUMMY

칠성권과 벽운장, 그리고 한재선이 만든 이름 없는 권장을 마친 장현민이 유검세(流劍勢)에 입문했을 무렵이었다.

기말고사 덕택에 일찍 수업을 마친 장현민은 헬스클럽이 아니라 집으로 향했다. 수련할 때 입던 체육복도 빨고, 겸사겸사 물건도 좀 챙길 요량이었다.

아연동 달동네로 올라가는 길은 언제나처럼 가팔랐다.

느릿느릿 언덕길을 올라가던 장현민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멀찍이서 엄마의 그림자가 보인 탓이었다.

엄마는 낡은 유모차에 빈 병을 가득 싣고 주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폐지를 줍는 사나운 할머니들에게 쫓겨 종이는 만져 보지 못하고 빈 병을 모으는 중이었다. 차가운 손을 호호 헤아리던 엄마가 구차스럽게 빈 병을 주워들었다.

엄마는 빈 병을 유모차에 넣고서야 장현민을 발견했다.


“왔어, 아들?”


머뭇거리던 엄마가 배시시 웃어보였다.

엄마의 멋쩍은 미소에 오히려 화가 울컥 솟아올랐다.

암에 걸린 몸이 뭐가 좋아서 웃는단 말인가. 아무리 병원비와 빚이 급해도 그렇지, 왜 아픈 몸을 이끌고 나와서 저러고 있단 말인가. 자기도 한 달에 이백씩 버는데…….

하지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장현민은 억지로,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왜 나와 있어, 엄마.”

“운동하려고… 암 환자도 운동 열심히 해야 된대.”


엄마가 머쓱한 얼굴로 유모차를 등 뒤로 숨겼다. 혹시 아들이 짜증을 부리면 돈 때문에 하는 게 아니다, 운동 하는 중에 주운 것뿐이다 핑계를 대려는 모양이었다.

장현민이 일그러진 미소를 감추며 말했다.


“그럼 산책 같은 거 해. 병 줍지 말고.”

“알아, 아들. 운동 하는데 보여서 그냥 주운 거야.”


장현민이라고 어찌 엄마의 속을 모르랴? 공부해야 할 아들에게 일을 시켜놓고 자기만 누워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푼돈이라도 벌어보려는 것이었을 테다.


“유모차 버려, 엄마. 나 돈 벌잖아. 한 달에 이백이나 벌어. 빚은 아빠가 갚고 있으니까 엄마는 걱정 안해도 돼. 엄마도 알잖아, 장(張)씨 고집.”


장현민이 의젓하게 말하고는 엄마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엄마는 끝까지 유모차를 놓지 않았다.

유모차를 드르륵 끌던 엄마가 다른 손으로 장현민의 손등을 만지작거렸다. 문득 엄마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한창 공부할 나이에 돈을 버는 아들이 불쌍했다. 최신 핸드폰 대신 벽돌 나르고 배추 나르던 손이 불쌍하고, 의젓한 척 참아내려고 애쓰느라 문드러졌을 속내가 불쌍했다.

그러고 보니 아들의 손이 너무 차가웠다.


“손이 이렇게 찬데 왜 장갑 안 꼈어?”

“나 장갑 싫어하는 거 알잖아. 갑갑해.”

“그래도 껴야지. 우리 아들은 왼손만 차잖아.”


알고 보면 그것 역시 인당과 옥당이 굳은 탓이라 할 수 있었다. 신주(神株)라 할 만한 인당이 굳었고, 기주(氣株)라 할 만한 옥당이 굳었으니 기운은 성하나 음양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엎치락뒤치락하는 것이다.


“껴 봐야 갑갑하다니까. 얼른 들어가자, 엄마.”


장현민이 고집스레 엄마를 끌어당겼다.

‘이거 가져가야 돼’ 라고 말할까봐 일부러 더 세게 끌어당겼더니 엄마가 하는 수 없다는 듯 유모차를 놓았다.

장현민은 재빨리 유모차로 다가가 쓰레기가 가득한 전봇대 아래에 버려 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엄마의 손을 붙잡고 허름한 단칸방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째서일까?

그 날부터 무공 수련이 엉망이 되기 시작했다.

유검세는 낙엽 한 잎을 칼끝에 올린 후 초식을 펼치는 것으로 입문하는데, 도대체 어째서인지 초식만 펼치면 얼마 지나지 못해 낙엽이 찢어지고 마는 것이다.

한재선은 노호성을 터뜨리는 대신 한심스럽다는 듯 장현민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차곤 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수업이 정상으로 돌아간 탓에 장현민은 5시가 넘어서야 헬스클럽에 도착했다. 평소처럼 가방을 구석에 집어던진 장현민이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스승님, 저 왔어요.”

“쯧! 오늘은 늦었구나.”


스마트 폰을 들여다보던 한재선이 눈을 치켜떴다.

장현민이 괜시리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기말고사 끝나서 정상수업 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 놈의 양놈 공부, 참 길게도 배운다.”


한재선이 투덜거리는 사이,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장현민이 목검을 쥐어들었다. 한재선이 헛웃음을 머금었다.


“헐! 바로 시작하다니 제법 기특한 데가 있구나?”

“일찍 시작해야 어떻게든 익히죠.”


장현민이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렸다. 칠성권이나 벽운장, 운리미풍보의 경우엔 적어도 초식만큼은 쉽게 배웠는데 유검세만큼은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다.

장현민은 선반에 있는 양철통으로 다가가 낙엽 한 장을 꺼내고는 조심스레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묵묵히 낙엽을 바라보던 장현민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도대체 왜 제대로 안 되는 걸까?’


처음엔 매끄럽게 진행되다가, 선운휴봉(仙雲休峰)의 초식에만 이르면 낙엽이 찢어지고 만다. 가끔 힘이 지나치게 들어갔을 때에는 낙엽이 펑 터져버리는 수도 있었다.


‘힘을 아무리 빼도 낙엽이 찢어져. 힘을 빼는 게 아니라 다른 요령이 필요한 것 같은데…….’


어쩌면 손목을 비트는 게 요령일 수도 있었다.


‘한 번 시험해 보자.’


장현민이 혀로 입술을 축이고는 낙엽을 후, 불었다.

낙엽이 팔랑팔랑 허공을 유영하자 장현민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느리게 목검을 뻗어나갔다.

유검세의 첫 번째 초식은 유운출현(流雲出現)이라는 것으로, 저만치서 모습을 드러내는 구름처럼 부드럽게 펼쳐지는 초식이다. 도가(道家)의 공부다보니 강맹하다기보다는 음유한 성질을 띠고 있으며, 힘을 쓴다기보다는 상대의 힘을 돌려주는 식에 가까웠다.


‘이제 시작!’


장현민은 손목을 살짝 퉁겨 목검에 낙엽을 얹었다.

찌직-

그 순간, 작은 소리와 함께 낙엽이 반으로 갈라졌다. 초식을 펼치기는커녕 시작하자마자 사고를 치고 만 것이다.

한재선이 한심하다는 얼굴로 혀를 끌끌 찼다.


“쯧쯧쯧. 너무 날카롭구나. 기세를 줄이지 않으면 유검세를 배웠다 말하기도 어렵겠다. 그동안 금방금방 배우던 놈이 이제야 하늘 높은 줄 아는 게지.”

“솔직히 이건 너무 어려운 것 같아요.”

“놈, 변명하기는?”


한재선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장현민이 스승님을 못마땅하게 노려보고는 목검을 들어올렸다. 생각해보면 스승님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다.

도대체 왜 유검세만은 유독 이렇게 어려운 걸까?


‘무협 소설에서 보면 검은 만병지왕(萬兵之王)이라잖아. 원래 다른 무공보다 검이 유난히 어려운 게 아닐까?’


백일창(百日槍),천일도(千日刀),만일검(萬日劍)이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스승님도 마음에 도가 창이 아니라 검을 세우라고 말한 걸 보면 확실히 뭔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손목에 스냅을 주는 건 아니야. 선운휴봉까지 가기는커녕 유운출현의 초식 때부터 낙엽이 찢어졌잖아.’


그렇다면 극단적으로 힘을 빼는 것도 시험해 볼 만 하다. 장현민이 이번에는 검을 쥐는 게 아니라 손아귀에 걸치듯이 들고는 유운출현을 펼쳤다.

장현민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오, 이번엔 된다!’


하지만 이번엔 선운망향(仙雲望鄕)의 초식이 문제가 되었다. 낙엽을 얹은 채로 태극 문양을 그리듯 원을 그리는데, 음결(陰結)에 이르자마자 낙엽이 찢어져버린 것이다.

한재선이 또다시 혀를 끌끌 찼다.


“여전히 기세가 강하구나. 지나치게 날카로워.”

“도대체 어떻게 해야 기세를 죽이는데요? 힘을 빼도 잘 안 되고, 검을 걸치듯이 쥐어도 잘 안 되는데요.”

“나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도 바르게 되고[吾之心正卽天地之心亦正], 나의 기운이 순하면 천지의 기운도 순하게 된다[吾之氣順卽天地之氣亦順]고 했다. 네 마음이 그렇게 강퍅한데 어찌 기세를 죽일 수 있겠느냐?”


한재선이 물끄러미 장현민을 바라보았다.

평소의 장난기 어린 표정이 아니었다. 깊이를 모를 바다처럼 심유한 눈동자가 숨겨둔 속내까지 파고드는 것 같아서 장현민은 시선을 피해버리고 말았다.

묵묵히 앉아있던 한재선이 질문을 던졌다.


“네 마음의 검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느냐?”

“유검세를 향해 서 있죠, 뭐.”


장현민이 뚱한 얼굴로 중얼거리고는 낙엽을 한 잎 더 꺼냈다. 그리고 유검세의 기수식을 취하는데, 문득 스승님의 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화가 나 있구나.”


화는 하나도 안 났는데.

장현민은 공연히 입술을 비죽거리며 다시 한 번 검로를 펼쳤다. 유운출현, 선운망향의 초식까지 무사히 펼쳤지만, 선운휴봉에 이르러서는 역시 별 수가 없었다.

장현민이 한재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스승님, 이거 도대체 어떻게 해야…….”

“왜 그리 화가 나 있는 게냐?”


한재선이 다시 한 번 같은 소리를 주워섬겼다.


“화 안 났다니까요.”


장현민은 감히 한재선과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또다시 시선을 피했다. 짜증도 슬슬 생겨났다. 아무렇지도 않은데 자꾸 화가 난 사람으로 몰아가니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고 이상한 감정도 울컥울컥 솟아오르는 것이다.

어째서인지 문득 엄마가 생각났다.


‘유운출현, 구름이 일어나듯이…….’


장현민이 느릿하게 검을 펼쳐 나갔다.

흔히 검로를 펼치는 것을 명상에 비유하곤 한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자기 안에 침잠하는 것처럼, 검로를 펼치는 것 역시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길 중 하나였다.

그 와중에 수만 가지 잡상이 일어나는 것은 어쩌면 수련자에게는 일상과도 같은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집중! 집중해야 해.’


장현민이 마음을 다잡아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불현듯 추억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과거의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엄마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의 일이었다.

항암치료 탓에 머리카락이 몽땅 빠져 있었지만 엄마는 항상 밝았다. 소은이를 만나면 꼭 껴안아주었고, 신이 난 소은이가 되지도 않는 발음으로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면 ‘진짜?’라며 맞장구를 쳐주곤 했다.

소은이는 엄마를 많이 좋아했다.

아연동으로 이사하던 날, 집이 갑자기 좁아진데다가 익숙하지도 않은 집안일을 하느라 짜증이 나 있는데 소은이가 엄마가 보고 싶다고 칭얼거렸다.

장현민은 저도 모르게 버럭 고함을 질렀다.


“엄마는 지금 아프다고 했잖아! 돌아가실지도 모른다고! 자꾸 그러면 오빠도 가버린다!”


아차, 싶은 마음에 돌아보니 소은이가 울음도 터뜨리지 못하고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은이는 한참 뒤에야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처럼 오빠도 다른 곳으로 가버릴까 봐 무서웠는지, ‘오빠, 미안해. 소은이가 잘못했어’ 라며 엉엉 울었다.

장현민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난 화가 난 게 아니야. 화가 나지 않았어.’


찌직-

또다시 낙엽이 찢어졌다.

장현민은 신경질적인 얼굴로 양철통으로 다가가 낙엽을 한 장 더 꺼내들었다. 낙엽을 올려놓고 유검세를 펼치다보니 또다시 서글픈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유치원에서 오줌을 싼 소은이를 데려다가 옷을 갈아입히다보니 마음이 유난히 쓸쓸해졌다.

자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는 싫어서 ‘엄마 보고 싶지?’ 라며 동생을 부추기자 소은이가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장현민은 꼭 소은이 때문에 엄마를 찾아가는 양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늦은 시간이라 면회는 금지였지만, 장현민은 몰래 숨어 엄마의 병실로 향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는 게 재미있었는지 소은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도착한 병실에서 엄마가 울부짖는 걸 봤다.



‘너무 아파. 여보, 내가 왜 아파야 하는 걸까. 왜 나만. 차라리 죽고 싶어. 죽어서 편해졌으면 좋겠어. 아냐. 내가 왜 죽어. 생때같은 내 새끼들 두고 내가 왜 죽어. 아파.’



장현민은 얼른 소은이의 눈과 귀를 막았다. 엄마가 일그러진 얼굴로 우는 걸 소은이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동생의 귀를 막은 것이 효과가 있었을까?

소은이는 엄마가 울부짖는 걸 들었을까…….

찌직-

종잇장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낙엽이 세 조각으로 갈라졌다. 목검을 쥔 장현민의 손이 파르르 떨려왔다.


“무엇 때문에 그리 화가 나 있는 게냐?”


장현민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언제 다가온 건지, 한재선이 앞에 서 있었다.


“저는 화가 난 게 아니에요.”

“그럼 왜 표정이 엉망진창인 게냐?”


한재선의 말에 장현민의 말문이 막혔다.

한재선이 헛웃음을 내뱉으며 질문했다.


“마음이 그렇게 흔들리는데…….”

“왜요? 저는 마음이 흔들리는 것도 안 되나요?”


여태 한재선의 시선을 피하던 장현민이 그를 노려보았다. 장현민의 눈동자에서 귀화(鬼火)가 일렁였다.

겉으로는 투덜댈지언정 엇나감 없이 한재선의 가르침을 따라오던 장현민이었다. 다른 아르바이트를 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장현민은 항상 예의 바르고 성실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을까.

토해내지 못한 감정이 쌓이고 쌓여 문드러진 것을.


“스승님은 연세가 있으시니까 다 아시겠죠. 세상이 다 그런 거라고! 너만 힘든 게 아니라고! 아픈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수십, 수백 명 있다고 하시겠죠! 그런 건 위로가 안 돼요. 엄마가 아파서 울부짖는 소리를 들어본 적 있으세요? 그런 사람에게도 왜 화가 났냐고 물을 수 있으세요? 암에 걸려놓고도 엄마가 빈 병 줍는 걸 보면서도 난……!”


쿵!

장현민이 목검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그리고는 가슴 속에 있던 말을, 소은이 때문에 참고 엄마와 아버지 때문에 참았던 말을 토해냈다.


“도대체 왜 나만! 왜 우리 가족만 이러는 건데!”


어찌 보면, 아직 세상을 모르는 소년의 치기 어린 원망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재선은 그것을 탓하는 대신 눈을 지그시 감을 뿐이었다.


“그래, 그렇구나.”


장내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잠시 뒤, 한재선이 조용히 목검을 쥐어들었다.


“알고 보니 정해(情海)에 들었던 것이로구나.”


한재선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느냐? 수도하는 이는 속세의 삿됨을 등지고 산에 들거니와, 또한 속세의 정해를 두려워하여 산에 드느니라. 비워내고 비워내도 다시 채워지는 것이 정(情)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느냐. 정해에 들면 집착이 생기고, 집착이 생기면 너처럼 천지의 운행이 어찌하여 이러느냐고 따지게 되지.”


풍화된 바위 같은 스승님의 얼굴에서 문득 그리움의 냄새가 났다.

스승님도 정해에 들었던 적이 있었던 걸까.


“허나 천리란 원래 그러하니라. 얼어 죽는 사람이 나온다고 천지가 돌보더냐? 천지는 그토록 불인(不仁)한 것을… 네가 따진다고 천리를 바뀌었을 것이면 애초부터 일이 벌어지지도 않았으리라.”


장현민이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숙였다.


“네 마음의 검은 지금 어디를 향해 있느냐?”


한재선이 목검을 들고 가볍게 손목을 휘둘렀다. 워낙에 동작이 작아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유검세의 초식이었다.

놀랍게도, 선반 위 양철통에서 낙엽들이 쏟아져 나와 허공에 수를 놓았다. 무리를 지어 낙엽이 날아다니는 모습이 꼭 따스한 봄날에 나비가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들릴 리 없는 곳에 소리 지르고 닿지 않을 곳을 겨누고 있구나. 허당이로다, 허당.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어찌 허당이 아니라 할까?”


장현민도 알고 있었다. 아무도 병에 걸리지 않고, 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바꾸려 해도 바꿀 수 없는 자연의 이치에 시비를 걸어봐야 뭐가 남겠는가.

하지만 분노와 슬픔만은 참을 수 없었다.


“과거는 지나갔으니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 존재하지 않는다. 알고 보면 과거도, 미래도 모두 허상일 뿐… 그에 마음을 두고 있다면 이 또한 허당이긴 마찬가지겠구나. 정녕 그러하냐?”


장현민은 나비처럼 춤추는 낙엽들을 지켜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트렸다. 한참을 떠돌던 낙엽들이 다시 중력의 법칙을 따라 바닥으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묻노라.”


검로를 멈춘 한재선이 조용히 장현민을 바라보았다.

장현민은 스승에게서 훈계가 아닌 위로를 보았다.


“네 마음의 검은 어디를 향해 있느냐?”


장현민은 저도 모르게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마지막 낙엽 한 장이 손 위에 소담스레 내려앉았다.

장현민의 눈에서 눈물이 몇 방울 새어 나왔다.


“제게…….”


사실 세상을 원망한 것이 아니었다.


“제게 향해 있습니다.”


엄마에게 짜증을 부리지 말 걸. 좀 더 웃어줄 걸. 대화를 좀 더 많이 나누어 볼 걸. 엄마가 만들어 준 장갑을 창피하다고 내팽개치는 것이 아니라 끼고 다닐 걸.

장현민이 눈물을 참으려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어느 날엔가 소은이가 돼지 저금통을 자랑스럽게 들이민 적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도 형편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 먹고 싶은 것을 참고 나름대로 용돈을 모았던 모양이었다.

돼지 저금통에는 2,000원도 안 되는 동전이 들어있었다.

왜 그때 화를 냈을까. 우리가 이 정도 돈도 없을 것 같냐고, 과자나 사먹지 뭐하러 모았냐고 왜 화를 냈을까.

사실은 기뻤던 건데, 안쓰럽고 미안했던 건데…….

한재선이 장현민의 손을 맞잡아 낙엽을 그러쥐게 했다. 손바닥과 손끝에서 낙엽의 꺼슬한 감촉이 느껴졌다. 손을 덮은 스승님의 따뜻한 온기가 마음 깊숙이 파고들었다.

한재선이 따스한 얼굴로 말했다.


“녀석, 손이 차갑구나. 장갑이라도 하나 사주랴?”


장현민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터뜨리려 했다. 웃음 대신 비어져 나온 것은 서글픈 울음이었다.

엄마는 ‘나중이 되면 추억이 될 거야’ 라며 어린 시절에 장현민에게 만들어 주었던 장갑을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 홀로 집에 있느라 심심했던 소은이는 집을 뒤져보다가 장갑 뭉치를 발견하고는, 겨울이고 여름이고 장갑을 끼고 다니겠다고 고집을 부렸었다.

엄마가 고통 속에서 울부짖던 것을 본 다음 날이었다. 소은이가 준 2,000원 남짓한 동전을 들고 다시 한 번 병실을 찾았다.

그때의 따뜻한 햇살을, 엄마의 품에 달려들던 소은이와, 자신을 보고 웃어주던 엄마의 미소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때만큼은 장현민의 손에도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저 장갑 있어요.”


장현민이 조그맣게 속삭이며 눈가를 훔쳤다.



작가의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에는 하시는 일마다 모두 건승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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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제12장> 기연(奇緣) (3) +175 16.02.28 10,860 501 15쪽
32 <제12장> 기연(奇緣) (2) +209 16.02.27 11,415 498 12쪽
31 <제12장> 기연(奇緣) (1) +143 16.02.25 11,192 490 9쪽
30 <제11장> 회복(回復) (4) +115 16.02.24 11,567 484 7쪽
29 <제11장> 회복(回復) (3) +188 16.02.23 11,268 578 8쪽
28 <제11장> 회복(回復) (2) +125 16.02.22 11,227 545 11쪽
27 <제11장> 회복(回復) (1) +125 16.02.21 11,843 549 13쪽
26 <제10장> 소천괴(小天怪) (2) +135 16.02.20 12,313 499 11쪽
25 <제10장> 소천괴(小天怪) (1) +109 16.02.19 12,125 517 12쪽
24 <제9장> 검을 뽑기 전에…… (2) +117 16.02.18 12,179 561 12쪽
23 <제9장> 검을 뽑기 전에…… (1) +139 16.02.17 12,634 561 14쪽
22 <제8장> 화약고(火藥庫) (3) +107 16.02.16 12,764 562 17쪽
21 <제8장> 화약고(火藥庫) (2) +102 16.02.15 12,579 571 14쪽
20 <제8장> 화약고(火藥庫) (1) +85 16.02.14 13,005 603 16쪽
19 <제7장> 사자림(獅子林) (3) +89 16.02.13 13,339 585 13쪽
18 <제7장> 사자림(獅子林) (2) +132 16.02.12 13,578 655 14쪽
17 <제7장> 사자림(獅子林) (1) +123 16.02.11 13,964 579 16쪽
16 <제6장> 회자정리(會者定離) (2) +77 16.02.10 13,716 593 10쪽
15 <제6장> 회자정리(會者定離) (1) +81 16.02.09 13,869 626 15쪽
» <제5장> 21세기 수련법 (3) +117 16.02.08 13,846 616 18쪽
13 <제5장> 21세기 수련법 (2) +47 16.02.07 13,993 607 9쪽
12 <제5장> 21세기 수련법 (1) +38 16.02.07 14,527 551 10쪽
11 <제4장> 배사지례(拜師之禮) (2) +58 16.02.06 14,318 578 7쪽
10 <제4장> 배사지례(拜師之禮) (1) +63 16.02.05 14,895 608 15쪽
9 <제3장> 중년(中年) 호구 (2) +57 16.02.04 15,130 614 14쪽
8 <제3장> 중년(中年) 호구 (1) +63 16.02.03 15,842 620 10쪽
7 <제2장> 노인(老人) 한재선(韓再善) (3) +108 16.02.02 16,588 670 11쪽
6 <제2장> 노인(老人) 한재선(韓再善) (2) +89 16.02.01 17,388 719 11쪽
5 <제2장> 노인(老人) 한재선(韓再善) (1) +72 16.01.31 18,889 717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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