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노인(老人) 한재선(韓再善) (1)
장현민이 저녁 알바를 하는 편의점, ‘24H’.
평소라면 고즈넉해야 할 편의점 앞은 묘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편의점에 들러 음료수나 담배 따위를 사가던 사람들은 왠지 모를 오한을 느끼곤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적안마희(赤眼魔姬) 김선희는 편의점 건너편에 있는 커피숍에 앉아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CCTV가 네 개… 쳇! 유동인구도 많네.’
근처가 우범지역이기라도 한 건지, 언뜻 보인 CCTV만도 네 개가 넘는다. 평소라면 이런 곳에서 무공을 펼치는 일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았을 터였다.
김선희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냉정하게 보면 끼어들지 않는 편이 좋은데…….’
천무지체는 전설에 불과하다. 기나긴 강호의 역사 속에서도 실제로 나타난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은가. 그렇게 보면 지금의 소동은 그야말로 해프닝에 불과한 것이었다.
하지만 만약…….
만약 장현민이 진짜로 천무지체라면?
놓칠 수 없는 탐스러운 먹잇감이다.
해프닝에 불과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면서도 물 수 밖에 없는 떡밥, 최소한 진짜인지 가짜인지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할 떡밥이었다.
지금도 천무지체의 소문을 들은 무림인들이 속속들이 서울로 몰려들고 있으리라.
‘일단 지금은 주변에 무림인들이 없는 것 같은데.’
김선희가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전, 두 명의 사내들이 어깨를 부딪치고는 서로 신경질을 부리다가 떠났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그것을 단순한 시비로 느꼈겠지만 김선희는 그들이 무림인임을, 멱살을 틀어쥐고 주먹질을 하는 간단한 몸놀림 속에 한 줄기 경력(經力)이 숨어있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떠난 후, 짧게나마 공백이 생겼다.
무림인이 사라진 공백.
‘문제는 이 공백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지. 누가 은신해 있을지도 모르니.’
김선희가 아래입술을 질끈 깨물며 갈등했다.
갈등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좋아. 움직인다.’
여기서 더 눈치를 본다면 적안마희라는 별호가 울 것이다. 아무도 나타나지 않으면 좋고, 누가 나타난다면 마땅히 대적하여 천무지체를 확보하리라.
마침 신호등이 파란 불이 되었다. 김선희는 우아하게 아메리카노를 들고 도도한 척 걸음을 옮겼다.
문제는 횡단보도 중간쯤에 갔을 때 일어났다.
“김선희, 이 썅년! 네가 내 남친이랑 바람을 피워?!”
“뭐, 뭣?!”
우두둑, 소리와 함께 김선희의 목이 뒤로 꺾였다. 누군가가 김선희의 탐스러운 긴 생머리를 쥐어 챈 것이다.
김선희가 눈물이 고인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소, 소요선자(逍遙仙子)?”
이제 갓 서른이나 되었을까 싶은 여자가 자신의 머리채를 쥐어뜯고 있었다. 언뜻 보면 평범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그녀는 소요선자라는 별호를 가진 강호의 고수로 당금 무림에는 몇 없는 여검객이었다.
지금은 검 대신 김선희의 머리카락을 쥐고 있었지만.
“사람 잘못 보셨어요! 놔, 놔요!”
적안마희 김선희가 일지마공(一指魔功)으로 소요선자의 거궐혈을 찔러나갔다.
하지만 선공을 빼앗긴 대가는 참혹했다.
소요선자가 머리카락을 휘젓는 게 더 빨랐던 것이다.
결국 김선희는 강제로 헤드뱅잉을 즐기게 되었다.
“너 김선희 맞잖아! 어디서 발뺌이야!”
빵빵-
신호등이 바뀌어 빨간 불이 되었는데도 두 여인이 실랑이를 계속하자 지나가던 차량이 클락션을 울려댔다.
소요선자가 입술을 달싹여 전음의 수법을 펼쳤다.
[같이 물러나 주시지요, 적안마희. 근처에 무림맹의 고수가 일곱은 있답니다. 물론 사파의 고수들도 많겠지만… 여기에서 시간을 끌면 우리 모두에게 손해가 될 거예요.]
무림맹의 고수가 일곱이나 있다는 말을 들은 김선희가 이를 질끈 깨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신호가 바뀌어 다시 파란불이 된 차였다. 김선희와 소요선자는 인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만에 하나 있을 반격에 대비해서 소요선자는 잡은 머리를 놓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가 빠르게 김선희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크흐흐. 소요선자를 붙잡아 주다니 고맙네, 적안마희. 나는 편의점에서 헛개수라도 사다 마셔야겠어.]
김선희의 안색이 뒤바뀌었다. 방금 들린 목소리는 틀림없이 무음살(無音殺) 김우근의 것이었다.
무음살 김우근은 살수무공을 익힌 고수로, 돌다리를 두들겨 보고도 믿지 못해 바지춤 걷고 물속을 걷는다고 할 정도로 신중한 성격이었다.
그가 움직였다는 건 곧 주변이 비어있다는 뜻과 같다.
‘젠장! 소요선자 이 년! 주변에 무림맹의 고수가 있다고 한 것은 구라였구나!’
김선희가 소요선자를 노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소요선자의 표정은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계속 그렇게 붙잡아 두시게. 내 추후 사례하지.]
이이제이(以夷制夷)라!
김우근은 소요선자와 적안마희가 주변에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적안마희가 움직이기를, 그래서 소요선자를 불러내기를 끈기 있게 기다렸다.
초조한 기다림이었지만, 결국에는 성공했다.
“하하하!”
김우근이 승리의 웃음을 터뜨릴 때였다.
치킨 배달용 오토바이 하나가 김우근에게 달려들었다.
“하하하… 느헉?”
무학이 경지에 달하여 오토바이 정도는 능히 피해낼 수 있는 김우근이었지만 승리의 기쁨에 취한 탓인지 그는 꼼짝도 못하고 치여 버리고 말았다.
아니, 어쩌면 그가 움직이지 못한 것은 목에 박힌 작은 바늘 때문인지도 모른다.
쇠털처럼 작고 얇은 바늘, 우모침(牛毛針) 말이다.
“아, 아저씨 괜찮으세요? 누가 119 좀 불러줘요!”
배달용 오토바이에서 내린 청년이 창백한 얼굴로 김우근을 감싸 안았다. 김우근은 청년이 당가의 인물임을, 그것도 당가팔수(唐家八手) 중 셋째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청년이 입술을 달싹여 전음성을 보내었다.
[천무지체를 사파에 넘길 수는 없지.]
“네, 네놈…….”
김우근이 무어라고 중얼거리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당가팔수 중 셋째, 당운호는 그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는 애통한 척 119를 외쳐댔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119 차량이 도착했다. 주위를 서성이며 구경하던 사람들이 두어 걸음 물러났다.
그 중에는 편의점 ‘24H’의 알바생, 이수영도 있었다.
“세상에. 이게 뭔 일이래?”
웅성대는 사람들 틈에서 사태를 구경하던 이수영은 119차량이 환자를 싣고 나서야 몸을 돌렸다.
문제집을 편 채 꾸벅꾸벅 졸고 있던 장현민이 출근한 이수영을 보고 반색했다.
“오셨어요? 좀 늦으셨네요.”
“대박, 대박. 밖에 오토바이가 사람 쳐서 119왔어!”
“어? 그래요?”
그제야 소란을 알아차린 장현민이 의아한 얼굴로 창문을 돌아보았다. 창문 너머로 119 차량이 출발하는 것이 보였다. 웅성대던 사람들도 떠나가는 것 같았다.
이수영이 삼각김밥 코너로 걸어가며 말했다.
“어떤 아저씨가 치였는데, 심하게 치였나보더라. 바로 기절하던데? 나 사람 기절하는 거 처음 봤어.”
“많이 안 다쳤으면 좋겠네요.”
“차에 치인 것도 아니고 오토바이에 치인 거니까 크게 다치지는 않았을 거야. 어머, 참치 마요네즈가 남았네? 유통기한 지나면 내가 먹어야겠다.”
삼각김밥의 유통기한을 확인한 이수영이 싱긋 웃었다.
장현민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건 자기가 먹을 계획이었다.
“아싸. 제육 도시락도 남았… 으음?”
뭔지 모를 오한 같은 것을 느낀 이수영이 뒤를 흘끔 돌아보았다. 뒤에는 장현민이 잔뜩 음영이 진 얼굴을 한 채 나라 잃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누나.”
촉촉하게 젖은 장현민의 눈망울이 마치 사랑하는 여인에게 버림받은 비련의 남자처럼 보였다.
이수영의 심장이 갑자기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그거 저한테 양보해주시면 안 돼요?”
“아, 안 되긴? 당연히 되지.”
어쩐지 붉어진 얼굴로 이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현민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런 걸로 감사는 뭘.”
이수영은 얼른 뒤돌아서 당황한 얼굴을 감추었다.
그래서 그녀는 장현민이 ‘계획대로’ 라고 중얼거리며 싸늘하고도 흡족하게 웃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이제 저 퇴근할게요. 물품 확인이랑 정산은 했고 오차 없어요. 입고된 물건은 창고에 넣어 뒀고요.”
“그래, 현민아. 고생했어.”
“네. 누나도 고생하세요.”
앞치마를 벗어서 곱게 갠 장현민이 고개를 꾸벅 숙여보이고는, 유통기한 지난 삼각김밥 3개와 도시락 2개를 챙겨서 편의점을 나섰다. 무림인들이 정사 골고루 섞어서 자신을 쫓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장현민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전거에 올라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 작가의말
하하하! 혼란하다, 혼란해!
(혹시 소제목에 나오는 이름이 거슬리시는 분이 있다면, 착각입니다. 동명이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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