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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나. 님의 서재입니다.

나는걸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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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플나
작품등록일 :
2008.05.02 17:23
최근연재일 :
2008.05.02 17:23
연재수 :
8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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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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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
글자수 :
510,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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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6.03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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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1쪽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5)

DUMMY

3화 : 하늘의 강.


나린이는 휘미래의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 지금 밖으로 내보내자니 걱정되는 점이 많았고, 어차피 휘미래도 상당히 심심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여행 계획은 원래라면 내일로서 마지막이었다. 그래도 난 며칠 더 머무르기로 결심했다. 솔직히 말해 9월이 되기 전까지는 이곳에 있어도 상관없었다. 독촉이 있으면 있겠지만, 내가 여기로 온 것을 아는 사람 역시 없으니.


“잘 됐네. 마침 같이 살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뭐 시킬 일은 있고?”

“글쎄. 조수나 시켜먹어야겠군.”


조수. 이 단어는 나로 하여금 거의 잊고 있던 사실을 상기시켰다. 바로 휘미래가 의사라는 사실을. 사실 의사라고 해도 집 자체가 병원은 아니었고, 사람 사는 곳과의 거리도 상당하여 실질적인 업무를 보는 일은 거의 없었다.


“뭐 시내야 진(眞)이 있으니까. 아마도 네가 데리고 오지 않은 이상 환자는 없겠지.”

“그런가.”

“그래도 내가 죽고 나면 나린이도 알아서 살아가야 할 테니... 조금씩 이것저것 가르치려고.”


하늘의 배가 돌아간 지 사흘. 생활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맑은 날씨와 적당한 바람은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다. 부드럽게 흘러가는 해는 하늘 높이 올라가며 그림자를 짧게 만들었다. 기둥 너머로 튀어나온 지붕도 이제는 자기 크기만큼의 그림자만 만들 수 있었다.


휘미래는 집 밖에서 빨랫감을 너는 중이었다. 휘미래보다 조금 큰 키의 나린이는 그 옆에 서 일을 돕고 있었다. 나는 창 너머 집안에서 테이블에 앉아 둘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장난도 치면서 일하는 것이 의외로 금방 가까워진 것 같았다. 난 아직 강나린 중위... 아니, 나린이하고는 이야기도 제대로 못 해봤는데. 역시 여자끼리는 뭔가 통하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곧 덜컹 소리가 들리며 나린이와 휘미래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둘은 연신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 강 서쪽은 거의 사람이 없어. 이곳 동쪽에야 조금 살고 있는 수준이지.”

“그렇군요.”


대충 들리는 걸로 봐서는 현재 땅의 상황에 대해 말해주는 것 같았다. 휘미래는 창 밖으로 손가락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고, 나린이는 섬 서쪽의 땅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 중 휘미래가 나에게 다가왔다.


“어이, 현하. 쌍안경 좀 줘봐.”

“왜?”

“당연하잖아. 보려고 그러지.”


가방에서 쌍안경을 꺼낸 난 그것을 휘미래에게 건넸다. 휘미래는 능숙한 솜씨로 우측 접안렌즈의 시도(視度)를 맞추더니 섬 서쪽을 바라보았다.


“산과 산 사이에 건물이 보일 거야. 조금 멀긴 한데...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할 수는 있어.”

“네.”


이제 휘미래에게서 쌍안경을 건네받은 나린이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휘미래보다는 긴 시간동안 바다 저편을 바라보던 나린이는, 쌍안경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정말 사람의 손이 없다는 게 느껴지네요.”

“그렇긴 해도 보기 싫은 건 아냐.”


심드렁한 휘미래의 말 대로 폐건물들이 보기 싫은 풍경은 아니었다. 과거 인간이 빚은 물건들은 부서지고 쓰러지고 바람에 깎여나갔다. 하지만 그러한 모습은 흡사 물에 녹는 잉크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섞여버린 물과 잉크처럼 저들도 하나의 풍경으로서 자리 잡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저기 다리는 사용할 수 없나요?”

“남쪽 항구 다리 말이군. 아마 건너가기는 힘들 거야. 곧 무너질 거란 얘기가 있어서.”


섬의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향해 툭 튀어나온 형세를 하고 있었다. 간단히 얘기하면, 섬을 포함하여 세 개의 손가락이 바다를 향한 모습이었다. 결국 세 개의 손가락 사이에 두 개의 만(灣)이 있었고, 두 개의 다리는 손가락과 손가락을 연결했다. 그리고 지금 나린이는 섬의 서쪽과 반대편을 연결하는 다리를 보고 있었다.


“한 번 가보고 싶네요.”

“다음에 기회 한 번 내 보자.”

“네.”

“그럼 오늘 공부를 시작해 볼까.”


휘미래는 나에게 쌍안경을 돌려주고 나린이를 데리고 서재(書齋)로 들어갔다. 그곳은 요 몇 년 동안 연 일을 본 적이 없는 장소였다. 더구나 말이 서재지, 거의 창고나 다름이 없었다. 헌데 나린이에게 일을 가르쳐 주기 위해 엊그제 개방한 것이다. 뒤이어 뭔가 찾는 소리가 나더니 둘이서 책을 한 아름 안고 나왔다.


“어디로 가져갈까요?”

“이층으로. 일단 다 읽어놓고 있어.”


한발 한발 움직일 때 마다 책 위의 먼지가 흩날렸다. 쿵쿵거리는 계단소리가 들리고 곧바로 책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뒤, 휘미래가 느릿한 걸음걸이로 1층으로 돌아왔다.


“나린이는?”

“읽을 거 던져줬어. 아마 한참 걸릴 거야. 이제 점심이나 해 봐야지.”

“가르칠 만 해?”

“꽤 똑똑해. 아마 따로 선생짓 해야 할 일은 없지 않을까. 어차피 책이 있으니.”

“그렇군.”

“그런데 넌 뭐 할 거 없냐? 며칠 그냥 집에만 있었잖아.”

“밤에 나가려고.”

“밤?”

“간만에 보고 싶은 게 생겨서. 그러고 보니 요즘도 오징어 잡으러 나가나?”

“어. 근래가 시즌이니까. 아마 3~4일마다 한 번씩은 나갈걸.”

“다행이군. 요 며칠 못 봤으니 오늘은 나가겠네.”

“그럴지도. 알아봐줘?”

“아냐. 괜찮아.”


빙하기가 오면서 평균기온은 하루가 다르게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해수면 역시 눈에 보일 정도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기온의 하강이 단순히 해수면의 하강만 일으키는 건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다 속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곳 부산도 이제는 과거 북쪽에서 보이던 물고기들이 당연하게 잡혔다. 사실 종은 뭔지 모르지만, 과거에 보던 조만조만한 생선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오징어는 꾸준히 잡히는 모양이었다. 이유는 잘 몰랐다. 가을이나 겨울로 넘어가는 시기가 되면 몇 척의 배들이 오징어를 잡으러 간다고 했다. 잡는 방법의 변화는 없었다. 여전히 대낮처럼 밝은 전등을 수 십 개 켜놓고 그물에 잡힌 오징어를 끌어 올렸다.


가끔 밥상에 오르는 오징어를 보면서 어떤 풍경을 떠올렸다. 오늘같이 적당히 구름이 있는 날이라면 더더욱 기대하는 풍경. 그 옛날 누군가와 함께 보았던 풍경. 그리고 나는 오늘 다시 그것을 보러간다.


저녁을 먹고 해가 거의 사라져 어둑어둑해질 무렵, 나는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보통 입는 옷에 쌍안경을 넣은 가방을 들었다. 밖으로 나오자 떨어지는 해가 눈에 들어왔다. 구름은 띠와 같이 붉은 노을을 뒤에 두고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일몰의 풍경은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차츰 형태를 바꾸는 구름 사이로 태양은 신기루같이 흐려져 갔다.


섬에서 나가기로 결심했다. 아마 풍경은 걸어서 나갈 즈음에서야 떠오를 것이다. 이제 나는 나무 아래로 맺힌 어둠을 바라보며 걷기 시작했다. 붉은 융단을 깔아놓은, 주변으로 나무가 빽빽한 긴 내리막길이었다. 그러나 누군가 칠한 듯 짙어지는 밤의 색은 사방으로 퍼지고 있었다.


긴 팔의 옷 위로 서늘한 바람이 지나갔다. 옷감과 피부가 맞닿는 곳에서 약간의 떨림이 일었다. 사락거리는 느낌에 소름이 살짝 돋았다. 분명 낮과 비교하면 기온은 확실히 떨어져 있었다. 주변은 이내 흑색의 무언가로 가득 찼다. 떨어지는 해가 만들던 노을 역시 산 뒤로 숨고 말았다. 붉은 테두리를 안고 형체를 가늠할 수 있었던 구름은 색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어둠은, 그 거대한 숨결 한 번으로 시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혀, 현하님-!!”

“?!”


뒤에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크게 불렀다. 크게 불렀다는 느낌과 상반되는 작은 성량. 이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꽤 멀리 있음을 알려 주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길 저쪽 위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나린이가 뛰어 내려오고 있었다. 소리를 질러 날 멈춰 세운 나린이는 한참을 뛰어서 내 앞에 도착했다.


“도, 도대체 걸음이 왜 그렇게 빠르세요?”

“그런 너는 왜 온 거야?”


상체를 숙이고, 무릎에 손을 올리고 가쁜 숨을 고르던 나린이가 힘들게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당황함과 얼떨떨함이 묻어 있었다.


“휘미래 언니가 가보라고 하셔서...”

“휘미래가?”

“네.”


휘미래의 이름이 나오자 상황이 이해가 갔다. 분명 나린이와 나는 아직까지 화해(?)하기 못했고, 그날 이후 긴 얘기를 나눈 일도 없었다. 따라서 휘미래는 둘만의 상황을 만들어 나와 나린이 관계를 회복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어디 가시는 건가요?”

“조금 멀리. 그런데 진짜 따라올 거야?”

“네. 따라가면 현하님이 누구신지 말씀해 주실 거라고 하셨어요.”


아직 이야기 한 게 아니었나? 휘미래가 나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았다는 건, 위의 내 해석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한 마디로 알아서 잘 해보라 이거로군.


“따라와. 조금 걸어야 될 거다.”

“알겠어요.”


1시간 정도를 더 걸었을까. 나는 예전에 많은 도로가 만나는 지점에 서 있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 이곳이 도로였다는 사실은 찾기 힘들었다. 더구나 밤이 되었기에 주의 깊게 봐야만 아스팔트의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에 얕아진 아스팔트를 뚫고 키 큰 풀과 나무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숲 사이로 희미하게, 잿빛의 건물들이 얼핏얼핏 모습을 보였다.


“이쯤일 텐데.”


다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달도 없는 하늘은 이제 별이 뜨고 있었다. 나는 이러한 어둠에 묻힌 주변의 정적을 깨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뭘 찾으세요?”

“아마 이쪽으로 가면 될 거야. 따라와.”


허리까지 오는 억새밭을 뚫고 숲 어딘가로 향했다. 확확 휘어지는 억새를 젖히며 앞으로 가던 나는 무언가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힘겹게 억새밭에서 탈출했다고 느낀 순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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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으로 보면 본편에 끼어드는 내용입니다. 정확히는 현하가 나린이를 땅에 남게 하고 난 직후의 이야기이죠.


두 개로 되어 있습니다.




그럼. 항상 건강하시길.


From PlasmaKNight.(I.N)

Written By PlasmaKNight.(I.N)


이상, 제 4의 기사 플라즈마 나이트였습니다.

* 정규마스터님에 의해서 문피아 - 자연 - 일반 (gon) 에서 문피아 - 하 - 연재 완결(etc_fine) 으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8-03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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