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플나. 님의 서재입니다.

나는걸어갑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SF, 라이트노벨

완결

플나
작품등록일 :
2008.05.02 17:23
최근연재일 :
2008.05.02 17:23
연재수 :
84 회
조회수 :
113,819
추천수 :
265
글자수 :
510,481

작성
07.08.28 21:05
조회
795
추천
2
글자
13쪽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10)

DUMMY

얼마나 잤을까. 먼 곳에서 흘러오는 알 수 없는 기분에 눈이 번쩍 떠졌다. 여전히 몸은 피로했고 관절 곳곳에서 무거움이 느껴졌지만, 상체를 일으킨 나는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나무문이 열렸다. 동시에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방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긴 숨으로 찬 공기를 밀어내며 이불을 걷었다. 이윽고 완전히 일어난 나는 문지방을 밟고 밖을 향해 섰다.


“일어나셨소?”

“네. 간밤에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여행하는 사람을 도와주는 건 당연하지요.”


할아버지는 웃으며 마당을 쓸고 있었다. 그러다 잠깐 비질을 멈춘 그는 고개를 돌려 먼 산을 바라보았다. 덩달아 나의 시선도 같은 곳을 향해 있었다.


확 개여 맑은 날씨. 비 때문인지 산 곳곳에 펼쳐져 있는 안개. 그리고 안개와 산을 연결하는 어떤 것. 아마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산불이 났다고 했을 것이다. 간밤의 습기를 가득 머금은 산이 구름을 피어 올리는 모습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진한 구름은 흡사 하얀 손과 같이 녹색의 숲에서 흘러나와 하늘을 향했다.


알 수 없는 기분은 저것 때문이었나. 보통 익숙지 않은 풍경이 주변에 있으면 반사적으로 그걸 느끼곤 했다. 사실 별 쓰잘데기 없는 능력이라고도 생각하지만, 이럴 경우에는 꽤나 유용했다. 저 풍경도 분명 30분 안으로 사라질 테니까.


산에서 구름이 생기는 광경은 바다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습한 공기가 산을 타고 오르면서 구름이 생기는 해안과는 달리, 산의 모습은 그보다 훨씬 얌전했다. 결국 땅이 붙잡고 있는 정적은 하늘의 구름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모양이다.


한참동안 구름이 피어오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바다와는 달리 단맛이 느껴지는 공기는 청량감이 가득했다. 그제야 난 내가 바다가 아닌 땅으로 들어왔음을 깨달았다. 정신없이 산을 넘느라 땅이니 바다니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한잠자고 여유가 생기니까 겨우 알게 된 건가.


“이제 어디로 갑니까?”

“안동으로 갈 예정입니다. 곧 출발해야죠.”


할아버지는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비질을 계속했다. 몸이 시키는 걸 따르자면 이곳에서 더 쉬어야 했지만, 일단은 한시라도 빨리 안동에 도착하고 싶었다.


“피곤해 보이는데, 좀 쉬었다 가지 그러오?”

“괜찮습니다. 더 이상 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도 아침은 먹고 가시구려.”

“네. 감사합니다.”


알고 보니 여기는 노부부가 함께 사는 집이었다. 할머니가 차려온 식탁은 간결했다. 밥을 먹으며 이곳에 사람이 얼마나 남았냐고 물으니 10명 정도가 남았다고 했다. 그리고 젊은 사람을 보려면 안동까지는 가야 된다고도 했다.


이 얘기를 듣자 확실히 인구가 줄어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이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마을도 사라지겠지. 이렇듯 인류의 발자국은 비와 바람에 씻겨 점차 없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라짐에 연연하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집 떠나는 나그네처럼 그들은 그렇게 사그라져갔다.


그리고 아침공기가 열기를 품어 살짝 떠오를 무렵, 나는 다시 출발했다. 산을 넘었기에 길은 전체적으로 평탄했다. 물론 곳곳에 낮은 언덕이 몰려있어 아주 경사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넘어온 길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곧게 뻗은 나무 아래 끈질기게 이어진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나무 그림자 사이로 드문드문 햇빛이 들어왔다.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태양에 눈이 간질거렸다. 길은 올곧았지만 올곧지 않았다. 얼핏 직선처럼 보이는 길은 직선이 아닌 무수한 자연의 선을 지니고 있었다.


약간 높은 곳에 멈춰 길 저편을 바라보았다. 자연의 선은 길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아니, 지배라기보다는 원래 그랬다. 그렇다 아니다를 따질 것이 아니었다.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길은 그저 하나의 자연이 만들어낸 선 중 하나였던 것이다.


어쩌면 인간의 세월도 이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순간순간에는 자연과 떨어진 듯 보이지만, 그 전체를 놓고 본다면 그저 자연이 불어놓은 한줄기 바람이 아니냐고... 어쩌면 둘을 따로 놓고 본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지도 몰랐다.


며칠 동안 줄곧 걸었기에 피로는 상당히 누적되어 있었다. 하지만 다리는 가벼웠다. 보통 목적지가 가까워지면 몸이 가벼워지기 마련이다. 이런 법칙은 지금의 나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다.


3시간 정도 더 걸었을까. 어느 순간엔가 주변에 건물이 많아졌다고 느꼈다. 숲 사이로 보이던 건물들은 이제 하나의 거리가 되어 내 시야를 채웠다. 그리고 그 사이로 걸어가는 몇몇 사람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드디어 도착했구나.’


물어간 곳에 놀랍게도 여관이 있었다. 전문적으로 외지인을 받는 여관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운데, 그것이 단층이 아닌 2층 건물이라는 데에 더욱 놀랐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곳은 남쪽에서 북서로 올라가는 길목이라 이동 인구가 제법 된다고 했다. 아마 남쪽에서 이어진 강의 최상류에 있는 도시이기 때문에 그런 모양이었다.


낡았지만 깔끔하게 정리된 방에 짐을 풀었다. 시간은 아직 점심 먹기 전이어서, 밖으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자자, 그럼 가 볼까.”


태양빛 가득한 거리는 한산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여행한다고 했을 때 비가 왔던 건 정말 오래간만인 듯 했다. 보통은 맑은 날씨가 이어지곤 했는데... 갑작스런 폭우에 하늘이 무심하다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정말 원망한다면 내가 다 바보 같겠지.


시답잖은 생각에 낄낄거리며 앞으로 나갔다.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사람의 모습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문이 열린 몇몇의 건물이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거리. 가로수. 그리고 산.


이 세 가지가 얽혀 어지럽게 보일 것만 같은 나의 시선은 왠지 정리되어 있었다. 하나 둘 내 옆을 지나가는 건물들과 사이사이에 걸쳐진 가로수들. 그 뒤로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 녹색의 산. 태양과 바람은 그 모든 것들의 향기를 담고 형태를 비추고, 여유로운 숨결의 감각을 자극했다.


예전의 기억, 더 예전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바다와는 다른 종류의 포근함을 전하는 이곳.


그것이 정확히 어떤 것에서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마치 어머니 같다고 느끼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언제, 어디서의 기억에서 온 포근함일까. 기억은 남지 못했지만 다행히 그것이 주는 보석만은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까 전 보다는 많은 사람이 거리로 나왔다. 혼자가 아니라는 묘한 안도감에 낮은 웃음을 지었다. 나도 사람이기에 홀로 남겨졌다는 느낌은 싫었다. 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 둘 구경하면서 거리 구석구석을 걸어 나갔다.


“응?”


갑자기 정리된 도로가 나타났다. 가지런히 길 양 옆을 채우고 있는 나무들은 전부 가지치기가 되어 있었고, 아스팔트 역시 새로 깐 듯 흑색이 완연했다.


“오호...”


사실 부산에서조차 이런 도로는 보기 힘들었다. 그렇기에 나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길로 다가섰다. 나는 주변의 사람에게 도로에 대해서 물었고, 이 길이 멀리 영주까지 뻗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주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걸어 봐야 되겠군.


시선을 푹 숙이고 걸으며 발로 전해오는 감각에 집중했다. 사실 이런 곳에서 딱딱한 발소리를 듣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흙바닥을 생각했을 뿐이었는데.


분명 흑색의 길은 주변으로 펼쳐진 갈색의 땅을 칼과 같이 자르고 있었다. 그래도 가로수는 예의 그 자연스러움으로 부담을 한결 덜어주었다.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온몸에 붙은 태양의 입자가 하늘로 떠오르며 몸이 차가워졌다. 그리고 자리를 대신 메운 것은 녹색과 갈색의 산의 씨앗들이었다. 이들은 태양보다 좀 더 약하고 가냘파 보였지만, 밤에도 왕성한 기운으로 날아다니는 꾸준함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으로 바다가 아주 멀리 저 멀리 있음을 깨달았다. 휘미래의 집에서 만질 수 있는 분주한 파란 물방울이 여기서는 전혀 사락거리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기분에 마음은 묘한 들뜸으로 흔들렸다.


항상 있던 것이 없어서 불안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 몸은 따뜻한 요람에서 점차 잠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푸른색과 흙색의 정령들은 점차 몸과, 눈과, 코를 꽉 채워 버렸다.


웃음소리. 계곡의 냄새. 흙의 감촉.

어느 하나 어색함이 없었다.


세상은 제자리를 찾아가는 중이다. 인간의 손에 의해서 강제로 자신의 위치를 잃었던 물질들이 지금 제자리로 돌아간다. 땅에 있어야 하는 것은 땅으로, 물에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로, 하늘에 있어야 하는 것은 하늘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정확히 깨닫고 돌아가고 있었다. 인간의 고리로 인하여 잠시, 잠시 흔들렸던 모든 존재들은 다시 제자리로 향하고 있다. 그러나 종국에는 이러한 고리의 움직임조차 하나의 커다란 고리 속의 작은 움직임이 될 터였다. 인간의 고리든, 자연의 고리든, 생명의 고리든...


갑자기 모든 일이 허무해진다는 생각을 했다. 전투, 살인, 그릇된 모든 것들도 결국에는 커다란 고리를 형성하는 작은 움직임이 아닌가. 도대체 무엇이 나쁘고 무엇이 옳단 말인가? 그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은 과연 존재하는가?


‘하지만...’


난 인간이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다면 절대 포기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나아감을 멈추지 않는 인간이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지성있는 것들을 부정했던 그 남자를, 나는 ‘틀렸다고’ 여기지 않았던가. 언제나 실수하고 고통 받지만, 진실을 향해 나가려고 하는 인간을 믿지 않았던가. 가는 길이 진실인지 아닌지 정확하지 않지만, 항상 고뇌하는 인간을 믿지 않았던가.


‘노력하는 인간을 믿어 주어라. 노력이야 말로 인간과, 지성의 진실이 될 터이니...’


내 아버지의 말 대로.

이런 나의 믿음은 여전히 유효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인간의 발걸음이 끝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제법 오랜 시간을 걸었다. 멀리 있던 산이 눈앞에 자리 잡았을 때에야 나는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살짝 기운 해 아래로, 나는 아까와는 반대의 그림자를 잡고 아스팔트 위를 걸어갔다.


그렇게 다시 안동 거리로 돌아온 나는 점심을 먹기 위해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비빔밥을 시키고 먹고 있는데 두 명의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 둘을 본 순간 아까 산 아래 마을의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말이 생각났다. 젊은 사람을 보려면 안동으로 가라는. 그러나 비틀린 내 감각은 말하고 있었다. 그들이 땅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설마 어제 사바소를 사용한 게 문제였나?’


태연히 들어온 그들은 역시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밥을 시켰다. 그러나 그 사이사이에서 묻어나는 위화감은 떨칠 수 없었다.


‘그래도 저 정도까지 익숙하다면 역시 대지상작전(Counter-Ground Operation)부대겠군.’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곁눈질로 그들을 살펴보았다. 사복이지만 비슷한 스타일의, 땅에서는 보기 힘든 옷. 그리고 허리춤에 튀어나온 건 분명 사바소 소드. 그리고 예상대로 뭔가를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얽히면 귀찮은데.’


밥 먹는 속도를 약간 높였다. 빨리 먹고 도망가는 게 상책이지. 그리고 재빨리 그릇을 비운 나는 태연히 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때.


“실례지만 말씀 좀 묻겠습니다.”



------------------------------------------------------


에고고... 복학땜시 거주지를 옮겼더니 정신이 하나도 없군요. 덕분에 하숙집에 인터넷도 없어 겜방와서 올리는 중입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럼. 항상 건강하시길.


From PlasmaKNight.(I.N)

Written By PlasmaKNight.(I.N)


이상, 제 4의 기사 플라즈마 나이트였습니다.





* 정규마스터님에 의해서 문피아 - 자연 - 일반 (gon) 에서 문피아 - 하 - 연재 완결(etc_fine) 으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8-03 00:39)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5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나는걸어갑니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84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20) +12 08.05.02 1,115 2 9쪽
83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19) +17 08.05.01 622 2 11쪽
82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18) +7 08.01.20 754 2 10쪽
81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17) +9 07.12.25 777 3 10쪽
80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16) +11 07.11.17 761 2 11쪽
79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15) +7 07.11.11 652 2 14쪽
78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14) +8 07.11.03 744 2 13쪽
77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13) +5 07.10.27 707 2 13쪽
76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12) +8 07.10.24 718 2 11쪽
75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11) +11 07.10.22 817 2 13쪽
»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10) +15 07.08.28 796 2 13쪽
73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9) +6 07.08.17 872 2 12쪽
72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8) +5 07.08.13 662 2 12쪽
71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7) +6 07.08.11 806 2 12쪽
70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6) +7 07.06.03 913 2 12쪽
69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5) +3 07.06.03 820 2 11쪽
68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4) +4 07.06.03 860 2 15쪽
67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3) +3 07.05.20 876 2 15쪽
66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2) +5 07.05.17 929 4 17쪽
65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1) +6 07.05.14 1,202 2 20쪽
64 나는 걸어갑니다 (에필로그) -完 +30 07.04.15 2,123 2 12쪽
63 나는 걸어갑니다 최종화 (4) +3 07.04.15 1,226 2 15쪽
62 나는 걸어갑니다 최종화 (3) +3 07.04.14 1,008 2 12쪽
61 나는 걸어갑니다 최종화 (2) +4 07.04.11 993 2 14쪽
60 나는 걸어갑니다 최종화 (1) +5 07.04.10 1,080 2 19쪽
59 나는 걸어갑니다 19화 (2) +4 07.04.06 1,066 2 26쪽
58 나는 걸어갑니다 19화 (1) +4 07.04.04 1,019 2 17쪽
57 나는 걸어갑니다 18화 (2) +6 07.04.02 1,023 2 12쪽
56 나는 걸어갑니다 18화 (1) +5 07.04.01 1,136 3 29쪽
55 나는 걸어갑니다 17화 (3) +6 07.03.30 1,044 2 16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