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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나. 님의 서재입니다.

나는걸어갑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SF, 라이트노벨

완결

플나
작품등록일 :
2008.05.02 17:23
최근연재일 :
2008.05.02 17:23
연재수 :
8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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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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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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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4.10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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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나는 걸어갑니다 최종화 (1)

DUMMY

최종화 : 걷지 못하는 자들의 싸움(1)


이듬해 4월 13일 수요일.


슬슬 봄기운이 퍼지기 시작하고 눈이 거의 녹았을 무렵, 나는 위그드라실에 몸을 실었다. 모함과 상대를 하는 만큼 위그드라실 없이는 곤란했기 때문이다.


출발 시간은 일부러 해질녘으로 잡았다. 높은 하늘에서 보는 일몰 광경을 보기 위해서였다. 물론 과거와는 일몰을 보는 환경 자체가 달랐다. 옛날을 기준으로 한다면, 일몰을 본다는 건 전투가 밤으로 넘어가는 것이었으니까. 지금처럼 느긋하게 시트에 기대서 본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하나 걱정스러웠던 건 내려가는 길에 있을 수 있는 하늘과의 충돌이었다. 그러나 남쪽으로 오면서 천우회의 영토로 들어왔지만 하늘은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꽤 편하게 갈 수 있다고 생각한 순간, 외부 통신이 들어왔다.


-반복한다. 미확인 비행 물체는 속도를 줄이고 3-7-5 구역으로 이동하도록.


갑자기 놀란 마음에 레이더를 살피자 멀리 150km 남쪽에 모함 한 척이 떠 있었다. 형태로 봐서는 천우회의 KV-1(V)였다.


‘이거 뭐라고 대답한담.’


딱히 지금 싸울 이유도 없었다. 어차피 대놓고 크게 붙자고 합의를 본 이상, 당장 긁어 부스럼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계속해서 나를 불렀다.


-반복한다. 미확인 비행 물체는 속도를 줄이고 3-7-5 구역으로 이동하라. 응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

“젠장.”


욕지기를 하면서 응답 버튼을 누르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손가락이 버튼에 닿기 직전에 다시 통신이 들어왔다.


-반복한다. 미확인 비행물체는... 제, 제독님? (뭔가 덜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

-비켜봐-! 아, 아. 현하님, 들리십니까? 저 마이크 스토너 중장입니다.


목소리와 이름을 들으니 생각이 났다. 작년 황철규 대장과 있을 당시 땅에 내려왔던 천우회의 제독. 난 갑자기 난입한 그를 떠올리면서 버튼을 눌러 답했다.


“잘 들리오.”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

“뭐 나보다 더 잘 알지 않소?”

-껄껄껄. 그렇군요. 그럼 이틀 뒤에 거기서 뵙겠습니다.

“뭐... 잘 알겠소이다. 그럼.”


작은 광점으로만 보이는 모함은 움직임을 달리하더니 멀리 사라졌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다시 시트에 몸을 기댔다. 부산까지 남은 거리는 대략 100km정도. 슬슬 착륙준비를 해야겠군.


5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섬 상공에 도달했다. 나는 주변을 선회하다가 최대한 조용히 휘미래 집 앞에 위그드라실을 착륙시켰다. 집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은 걸로 봐서는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아니면 알아차릴 이유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


무심히 들어간 집 안에는 내가 예상한 사람 외에 한 명이 더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린이. 정빈이. 휘미래 말고. 지금쯤 하늘에서 매우 바쁠 거라고 믿었던 사람.


“작전 개시일 모레 아냐?”

“약간 짬이 나서 내려왔습니다.”

“스카이피아의 참모총장이 단신으로 적진에 있는 걸 알면 가만히 두지는 않을 것 같은데.”

“생각하시는 것 보다는 안전합니다.”


황철규 제독은 술을 한 잔 했는지 얼굴에 홍조가 올라 있었다. 나는 웃으면서 그의 옆에 앉았고, 그걸 본 휘미래는 기다렸다는 듯 잔과 수저를 가지고 왔다.


“이런. 저녁도 안 먹었는데.”

“안주로 때워.”


곧 잔이 채워지고 나는 한잔을 넙죽 마셨다. 그리고 정신없이 안주를 먹는데 제독이 서류 뭉치 하나를 상 위로 끄집어냈다. 간단한 철로 고정시켜놓은 그것은 손때가 묻어서 너덜너덜할 정도였다.


“뭐지?”

“자세한 작전 계획입니다. 어제 오전이 되어서야 초안이 나왔죠. 워낙 큰 전투라 계획 세우기도 쉽지 않더군요.”

“두 개 세우기가 쉽지 않았다는 말로 들리는군.”


그는 내 말에 크게 폭소했다.


“하하하. 맞습니다. 정확히 하면 함대 사령관들을 위한 승리 시나리오와 저를 위한 다른 시나리오 두 개를 짜느라고 힘들었습니다. 이 서류가 지저분한 이유도 꼬박 하루 반 동안 제 계획대로 수정하느라 그랬죠.”


나는 대답 대신에 잔을 비웠다. 그도 함께 잔을 비운 후 서류의 첫 번째 장을 펴 넘겼다. 그곳에는 제목으로 보이는 “향수Nostalgia” 라는 커다란 글씨와, 작게 인쇄된 구체적 내용들, 그리고 거기에 빨간 펜으로 조목조목 첨부를 한 함장의 필기체가 섞여 있었다.


“현하님.”

“음.”


뭔가 말을 하려던 그는 잠시 고개를 돌리고 있다가 술 두 잔을 연거푸 마셨다.


“현하님. 저도 인간인 모양입니다.”

“그런가.”

“그래도 한때는 전우였던 사람들까지 모조리 쓸어버릴 걸 생각하면 견디기 힘들군요. 분명 이것은 제 꿈이고 바람이긴 하지만, 과연 잘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별 수 없잖아. 여기까지 왔는데.”

“맞습니다.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는 아귀가 되어야겠죠. 그리고 전투의 말미에서 양 측의 세력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


황철규 대장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다시 잔을 들어 한번에 비웠다.


“보시면 아실 겁니다. 아마 그것으로 하늘의 꿈은 끝나게 되겠죠.”


그는 웃고 있었다. 잔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 가까운 곳을 향하는 시선으로 웃고 있었다. 나는 지짐을 집던 젓가락을 살며시 놓고 대장에게 말했다.


“그날 보내준 책은 잘 받았네.”

“역시 그때 놓치고 가신 겁니다.”

“그랬나. 미안하군.”

“괜찮습니다. 참고로 저도 그것이 코어에서 나온 거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꽤나 많이 울었습니다.”

“허무해서?”

“네.”

“하지만 어쩌겠나. 그게 진실이었는데. 어쩌면 거창한 걸 바랐던 우리들이 바보였을지도 모르지. 참, 천우회와는 이야기 끝난 건가? 이번 전투에 대해서 말이야.”

“네. 규모나 일시에 대해서는 이미 얘기가 끝난 상태입니다. 또 위그드라실이 움직일 것도 얘기를 해 두었습니다만... 설마 오다가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아니. 그냥. 사실은 오다가 마이크 스토너 중장을 만났거든.”

“싸우신 겁니까?”

“그건 아니고. 뭐 그때 가서 만나자고 했어.”


식탁에는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이미 다른 사람들은 잠에 들었고, 시계 역시 12시를 넘기고 있었다. 나는 느린 손놀림으로 빈 뚝배기를 긁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결국 진실은 진실이 되지 못하고... 그저 하나의 거대한 폭탄이 되고 말았군.”

“......”


대장은 다시 한잔을 마셨다. 그의 앞에 쌓은 술병도 어느 사이엔가 네 병이 되어 있었다. 황철규 대장은 손에 든 빈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나를 바라보았다.


“현하님. 언젠가 당신은 이 세상의 마지막 인간이 될 겁니다.”

“그런가.”

“그렇게 된다면 하나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별로 대단한 건 아닙니다.”

“들어볼까.”

“시간이 흘러 만약 혼자가 되시더라도, 지금 있었던 일들을 기억해 주시겠습니까? 하늘에 갔던 인간과. 싸웠던 인간과. 그리고 그 인간의 마지막 모습을요.”

“...!!”

“분명 저는 사람이 하늘로 간 걸 잊기 위해 이런 일을 한다고 말씀드렸죠. 그렇지만... 바라보고 끝까지 기억할 한 사람만은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힘들게 말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내 대답은 그가 원하는 것이었다.


“알겠네. 약속하지.”

“감사합니다.”


이제 잔 기울이는 소리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금 시작된 침묵 속에서 집 밖을 지배하는 건 단순하게만 느껴지는 바람 뿐. 나는 대장 앞의 술병을 센 후에 그가 과음으로 힘들지는 않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말짱한 눈으로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슬슬 침묵이 늘어지는 느낌이 들자 황철규 대장이 다시 말을 시작했다.


“현하님. 이곳을 꼭 지켜 주십시오.”

“당연하지.”

“당신에게 쏟아질 공격을 줄여볼까 했는데 제 권한 밖이더군요. 지금 함대 사령부에서는 대략 4~5개 함대를 당신에게 투입할 예정입니다. 아마 천우회도 비슷할 테니까, 대략 모함 10척과 중전함 30척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둘이 한꺼번에 오지는 않겠지?”

“그러지는 않을 겁니다.”

“뭐 그럼 그것대로 다행이군. 카타클리즘 당시에는 모함만 해도 대략 150척과 싸웠으니까.”

“솔직히 걱정하지는 않아요.”

“하하하.”

“아무튼 부탁드립니다.”

“알겠어. 걱정 마.”


여기서 그는 빈 병을 가지런히 모으기 시작했다. 하나 둘 병을 들어 다섯 병을 자신의 앞에 쌓던 대장은 마지막 술병을 열었다.


“현하님. [죽은 자의 검]을 아십니까?”

“죽은 자의 검?”

“네. 카타클리즘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생겨난 상징 같은 겁니다. 그러고 보니 여기도 하나 있군요.”

“설마, 요 앞에 떨어진 모함을 말하는 거야?”

“바로 맞추셨습니다.”


황철규 대장은 이 ‘죽은 자의 검’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건 나도 처음 들어보는 거라, 꽤 흥미가 당겼다. 대장은 마지막 술병을 들어 술을 따랐다.


“땅으로 향한 모함은 우리가 땅에 꽂은 칼이다. 그것은 땅을 상처 입힌 우리의 영원한 속죄의 상징이 될 것이며, 우리가 지닌 땅을 향한 마음이 될 것이다. 땅을 위해 싸운 하늘의 칼, 모함이여. 너희들은 땅으로 돌아가라.

“땅을 향한 모함은 우리가 땅을 위해 피를 흘린 것에 대한 영원한 표식이 될 것이다. 죽은 자의 검이여, 영원 하라.”

“죽은 자의 검은 카타클리즘 이후에 생겨난 상징입니다. 물론 땅으로 떨어진 모함이야 카타클리즘 이전에도 있었습니다만, 그 형태가 둔탁했기에 지금의 고기동모함처럼 길쭉한 막대 형태로 푹 박히는 경우는 거의 없었죠.”

“오호.”

“그렇기에 보통 카타클리즘 전에는 [땅과 하나가 된다]라는 말을 더 많이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껏 힘들게 떨어트려 놨더니 거창하게 포장을 해놨군.”

“딱히 말씀드리자면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할까요. 들으면 아시겠지만 카타클리즘 이야기는 쏙 빠셔 있으니까요.”

“수는 얼마나 되는데?”

“좀 많습니다. 카타클리즘 이전에도 떨어진 모함의 수는 많고, 그 이후로도 많은 수가 땅으로 추락했으니까요. 물론 기껏해야 5~10년에 한 척 수준입니다만.”

“카타클리즘 당시 떨어진 것만 100척으로 잡으면, 대략 300~400척 쯤 되겠군.”

“네.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건 왜?”


난 대장이 이 말을 꺼낸 이유가 있을 거라 믿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이유를 물었다. 하지만 그는 옅게 웃기만 할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대답을 기다리던 나는 고개를 갸웃 돌리면서 말했다.


“뭐가 있긴 있는 모양이군.”

“나중에 보여드리겠습니다. 다만 미리 운을 띠운 이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보다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화재를 돌리죠.”

“알겠네.”


더 묻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거의 반강제로 화제를 바꿔버린 대장은 짐짓 다른 말을 하기 시작했다.


“현하님. 하늘은 말이죠.”

“음.”

“권력입니다. 아무런 권한도 없는 껍데기만의 권력.”

“......”

“그들은 거기에 취해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아요. 언젠가, 언제든지 땅을 지배할 수 있을 거라 믿는 환상의 권력은 하늘의 인간을 완전히 그곳에 묶어두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저도 그들과 같은 부류일지도 모르죠.”

“자네는 땅의 사람이지 않나.”

“500년을 하늘에서 살았다면 하늘의 사람일 겁니다. 솔직히 전 많은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책임이라...”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였다지만 지금까지 하늘의 싸움을 끌고 온 책임도 있고, 그 하늘 속에서 많은 진실들을 부정한 책임도 있습니다. 이오타나 카타클리즘 등, 많은 것들을 말이죠. 특히 이오타에 관한 건... 정빈이에게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환경에 방치해버리고 말았으니까요.”

“......”

“이제 마지막 병이군요. 제법 마셨나요?”


이제는 더 이상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나도, 그도, 잠자는 사람들도.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 남은 술을 홀짝이면서 한동안 그렇게 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시계는 새벽 두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다음날 오전 황철규 대장은 다시 자신의 위치로 돌아갔다. 그때도 그랬듯이 아무 일도 없는 편안한 표정으로 문을 나섰다. 다시금 중절모를 눌러쓰고 손을 흔드는 모습은, 내일 있을 일 따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듯 보였다.


“조심해서 돌아가게. 끝나고 보기로 하지.”

“끝나고 말씀이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너희들도 잘 있어라. 다음에 보자꾸나.”

“총장님...”

“아. 대규모 전투라 땅이 염려되어 천우회와의 합의 하에 실드 제네레이터를 좀 달아 두었습니다.”

“실드 제네레이터?”

“네. 저기도 하나 있죠.”


대장이 손가락을 들어 가리킨 곳에는 사람 크기만 한 뭉뚝한 막대 형태의 구조물 하나가 올라와 있었다. 나는 그의 시선을 따라 움직인 곳에 몇 개의 동일한 구조물이 더 있음을 확인했다.


“웬만한 피해에는 실드가 충분히 방어를 해 줄 겁니다.”

“꼼꼼하군 그래.”

“그럼 돌아가 보겠습니다.”


대장은 마지막 짧은 인사를 하고 떠났다. 나는 슬픈 표정의 아이들의 어깨에 손을 올려주면서, 그의 뒷모습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능력으로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갑작스럽게 떠오른 욕구이긴 했지만 그런 만큼 간절했다. 대장은 정말로 하늘의 모든 것을 없애 버리려는 걸까. 도대체 어떤 마음이 그로 하여금 이런 거대한 변화를 이끌도록 만들었을까. 본인 스스로가 하늘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그가, 과연 하늘을 날려버릴 수 있는 걸까. 그건 땅의 사람인 내가 이 별을 날려버린다는 말과도 같은데.


그러나 지금 와서 분명해진 건, 그는 반드시 카타클리즘을 하리라는 사실이었다.





-4월 15일. 아침 10시 30분.


나의 시선은 하늘을 향해 있었다. 휘미래의 집 앞에서 몸을 풀면서, 황철규 대장이 가져다 준 위그드라실의 보급 파트들을 손보고 있었다. 분명 장기전이 될 것이므로 내심 보급에 대해서 걱정이 있었다. 그러나 대장은 내 마음을 읽고 컨테이너 한 박스 분량의 물품을 보내주었다.


“괜찮은 선물이군.”


이때 뒤쪽에서 굉음이 나면서 뭔가가 머리 위로 휙 지나갔다. 편대 비행을 하는 아홉 척의 스카이피아 측의 모함이다. 전장 2km가 넘는 것들이 삼각(Delta) 대형으로 나는 것을 보면 정말 하늘은 넓다는 생각이 든다. 머리 위를 지나 뒤쪽으로 날아가던 모함들은 손가락이 펴지듯 각각 다른 방향으로 산개, 고도를 높여갔다.


곧 이어 중전함 서른 척 가량이 박스 대형으로 날아갔다. 0.7km 크기의 이 배들은 모함이 맡기에는 너무 작은 국지전이나 화력의 지원, 지금 같이 큰 전투에서는 기동 요격전을 맡게 된다.


이렇게 거대한 함선들이 펼치는 고공 퍼레이드는 그 목적을 떠나서 하나의 거대한 장관이었다. 원근감과 공간감, 심지어 구름의 크기조차 무시해버리는 이러한 움직임과 규모는 쇼에 가까웠고, 이는 곧 있을 전투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었다.


스카이피아의 함선들이 저 땅 너머로 사라지자 이번에는 천우회의 함선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부메랑 모양의 전익형(全翼形, Flying Wing)의 모함들은 스카이피아와는 달리 가지런한 라인을 지니고 날아왔다. 쫙 늘어선 열 척이 만드는 선의 길이는 거의 수평선에 닿을 정도로 길었다.


마치 하늘을 청소하듯 날아온 모함 뒤로 역시나 중전함 편대가 거리를 좁혀왔다. 박스형이 아닌 X 형태로 날아온 배들은 잠시 뒤 중앙의 중전함 한척을 중심으로 산개를 시작했다. 순식간에 하늘의 공간을 가득 메워버린 그들은 곧바로 상승, 방향을 바꿔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대단한데.”


나는 입을 모으고 떠나는 함선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세력 과시가 끝났으니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될 것이다.


“이제 시작이에요?”

“그렇겠지.”


난 정빈이의 물음에 다시 위그드라실을 정비하면서 대답했다. 그녀는 컨테이너 앞으로 다가와 안쪽의 물건들을 휭 둘러보고 말했다.


“진짜 시작이군요.”

“음.”

“현하님는 두렵지 않으세요? 수많은 모함을 상대해야 되잖아요.”

“그걸 무서워했다면 지금 여기 있을 수 없겠지.”

“......”

“어쨌든 간에 할 일은 해야 되지 않을까.”


마지막 점검 패널을 내렸다. 이것으로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나는 파일럿 슈트로 갈아입기 위해 옷가지를 들고 집 안으로 움직였다. 이때 정빈이가 뒤에서 나를 향해 물었다.


“도와드릴 건 없나요?”

“딱히 없어. 걱정 말고 집에 있어.”

“...네.”


큰 전투를 앞두고 있음에도, 나는 내 마음이 이상스레 침착함을 깨달았다. 카타클리즘의 마지막 전투 정도는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규모인데 말이다. 긴장의 수준이나 몸의 반응도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다.


‘괜찮은 징조인가?’


스스로가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데에 놀라며 파일럿 슈트를 입기 시작했다. 옷을 입으며 옛날과 비교해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생각했다. 분명 이 마음의 안정은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기에 생긴 것이다.


‘분노... .분노인가.’


답은 금방 나왔다. 난 지금 어떠한 분노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스카이피아든 천우회든, 하늘 전체든. 500년 전 하늘과, 전투의 부조리와, 변화를 거부하는 땅에 대해 지녔던 분노가 지금은 없었던 것이다.


“후.”


낮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저었다. 분노가 아닌 다른 이유 - 카타클리즘을 마무리 짓는다는 - 가 있음을 잘 알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게 사실이었다. 인간을 가장 활동적으로 만드는 동기가 분노임을 나는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분노 없이 싸워야만 한다. 나는 주먹을 쥐고 결의를 다졌다.





최종화 : 걷지 못하는 자들의 싸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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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화는 3인칭 작가 시점으로 갑니다. 제 실력으로 1인칭은 도저히 어렵더군요.



그럼. 항상 건강하시길.


From PlasmaKNight.(I.N)

Written By PlasmaKNight.(I.N)


이상, 제 4의 기사 플라즈마 나이트였습니다.

* 정규마스터님에 의해서 문피아 - 자연 - 일반 (gon) 에서 문피아 - 하 - 연재 완결(etc_fine) 으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8-03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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