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걸어갑니다 (에필로그) -完
에필로그 : 황철규 대장의 마지막 말.
현하님. 들리십니까. 아마 개방 채널로 드리는 말씀이니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이제 제 마지막 계획을 행하려고 합니다. 머릿속에만 있었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이죠. 사실은 좀 멋지게 해보려고 했는데, 의외로 죽은 자의 검이 너무 강력하더군요. 저도 이렇게 순식간에 끝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아무튼 이 함선은 조만간 거대한 폭발을 일으킬 것입니다. 일종의 자폭이죠. 핵융합로 및 SSG의 폭주개방형 폭발이라 아마 주변 반경 100km 정도가 완전히 날아갈 겁니다. 아, 땅이 어떻게 될까 걱정하시는 얼굴이 눈에 선합니다만 너무 걱정은 마십시오. 괜찮을 겁니다. 이미 땅에는 폭발의 피해를 막기 위한 실드 제너레이터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아시죠? 좀 무리해서 촘촘히 설치해 놨으니 별 피해는 없을 겁니다.
현하님. 결국은 정빈이와 나린이 말고는 제가 직접 땅으로 보낸 사람은 없군요. 생사를 같이한 전우들이 아쉬워 지는 순간입니다만...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한 것은 그들 대다수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이죠.
현하님. 여전히 당신이 저를 기억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카타클리즘을 목도한 세대 중 하나이고, 그것을 마음에 담고 살았던 세대였습니다. 그러나 하늘로 올라간 이후로는 그걸 입에 담을 수 없었죠. 하지만 당신은 살아있었기에, 저로 하여금 남은 인생에 중대한 결심을 하게 해 주셨습니다. 속으로는 저도 정말 많은 고민을 했죠. 하늘의 자살. 스스로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없어져 버리는 행동. 이걸 정말로 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요. 그러나 전 당신을 보고 결심했습니다. 당신을 설득하면서 제 마음을 설득했습니다. 힘들지만, 정말 힘들겠지만... 영원히 사라지기로 말이죠.
그리고 사과드릴 것도 있군요. 전 여전히 당신이 이오타를 잊지 못한다는 걸 이용했습니다. 이건 아시는 대로 틀린 선택이 되고 말았습니다만... 조금이라도 당신을 하늘과 연관짓기 위해 한 제 행동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정빈이를 하늘에서 떼어놓아 당신에게 보내기 위해 그녀를 아프게 한 것, 그리고 나린이를 당신의 눈앞에 떨어트린 것... 그렇게 500년간 평안했던 당신의 삶을 깨트린 것도 용서해 주십시오.
현하님. 전 말이죠. 어쩌면 제 자신이 단 한사람에게서라도 영원히 남기 위해서, 영원히 기억되기를 바랐던 건지도 모릅니다. 그날 밤 저는 현하님께 하늘을 기억해 달라고 말씀드렸지만... 사실은 저를 기억해 달라고 말씀드린 것이었습니다.
이제라도 얘기하니까 속이 좀 후련하군요.
제가 한 판단들이 모두 옳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저는 제 동료들을 죽음으로 몰았고, 많은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잊기 위해 기억하는 존재를 모두 없앤다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많은 사람을 원치 않는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지금도 날 향해 돌아보는 우리 오퍼레이터의 얼굴이 눈에 선하군요. 하하.
그러나... 저희 존재 자체가 죄였다는 것은 사실이라 믿고 싶습니다. 언젠가 사라져야 하는 존재라는 것도 믿고 있습니다.
이제 모든 하늘은 사라지게 될 겁니다. 천우회도, 스카이피아도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가 결국에는 잊혀지게 되겠죠.
그것으로 저는 만족합니다. 당신이 행하려고 했던, 생각했던 결론은 아니겠지만... 이런 속죄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잠시 뒤면 본 함의 고도는 80km에 다다릅니다. 세팅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 곧 폭발하겠지요.
그럼.
항상 건강하시길.
나는 테이프 레코더의 스위치를 껐다.
황철규 대장의 말 대로 거대한 폭발이 있었지만 땅은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결국 모함 코어의 붕괴는 하늘의 함대 전체와 날뛰던 죽은 자의 검까지 전부 날려버리고 말았고, 이제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위기에 처했던 나 역시 폭발 덕에 살아남았다. 충격파는 땅에 추락한 위그드라실을 좇아온 적들을 간발의 차로 삼켜버렸던 것이다.
물론 나는 실드 발생 범위 안쪽에 있었기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
바다에는 수 십 개의 모함들이 박혀 있었다. 난 그곳을 보면서 레몬 티를 한 모금 마셨다.
이제 하늘은 사라졌다. 레몬의 맛과 함께 묘한 기분이 마음을 뒤덮었다.
마침내 싸움은 멈췄지만...
서글펐다.
무언가 가슴 한 구석에서 사라진 느낌이었다. 상실에 대한 감각은 이제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풍경에 가깝게 고정되었던 하늘이 사라진 건 나에게도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끝나고 돌아온다고 얘기했던 황철규 대장이 죽었기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날 땅으로 ‘추락한’ 하늘의 사람은 1000명 가까이 되었다. 전멸하는 하늘을 피해서, 가까스로 땅으로 내려온 하늘의 사람들. 그들은 사라져버린 하늘을 보며 절규하거나, 소리치거나, 멍하니 바라보았다. 심지어 자살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은 땅에 안착할 수 있었다.
반면 땅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땅의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의 삶을 영유해갔고, 끊임없이 이어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하늘의 사람이 내려온 건 그저 새로운 사람이 생겼다는 것 외에 다른 의미는 없었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길을 걷고 있었다. 붉게 물든 단풍은 요 며칠 사이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진귀한 광경이다. 오래 전 봄에 피고 지던 꽃들처럼 짧은 기간만 볼 수 있었다. 나는 손바닥 모양의 빨간 잎을 하나 따다가 랩탑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수종(樹種)이 거의 바뀌어버린 이곳에도 겨울이 찾아오고 있었다. 나름 많던 활엽수는 거의 사라지고 삐죽한 잎을 지닌 소나무만이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는 바스러지는 낙엽을 밟으며 앞으로 나가다가, 길모퉁이에 서서 정면을 바라보았다.
꺾인 길 앞으로 보이는 바다. 차갑게 맑은 바다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거의 다 왔군.”
카타클리즘이 마무리되고 이후 많다면 많은 변화들이 있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러한 변화들이 인간의 멸종에 끼친 영향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땅은 사라져갔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니까.
이제 서울은 얼음에 완전히 파묻혀 아무도 살지 않았다. 부산은 아직 몇몇의 사람이 있긴 했지만, 몇 개 남지 않은 촛불처럼 마지막을 작게 태울 뿐이었다.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걸음은 빨라졌다. 바다를 향한 섬의 작은 절벽. 그곳에는 여전히 짧은 풀과 낮은 나무가 가득한 작은 초원이 있었다. 걸어온 길옆에 무성하던 송림은 이제 이곳까지 접근했다. 예전에 비하면 햇빛은 훨씬 다양하게 움직이며 자신을 변화시켰다.
다시 한 번 발걸음의 소리가 바뀌었다. 흙바닥을 걷는 것이 아닌 풀을 밟고 헤치며 나가는 소리. 긴 거리를 걸었음에도 걸음은 여전히 가벼웠다. 마음 역시 덩달아 가벼웠다.
나무의 향과 바다의 향이 섞여서 코를 간질였다. 풀들은 마치 고개를 돌리듯 바람과 함께 휘날렸다. 난 그 풀들이 매만지는 길 아닌 길을 지나며 작은 언덕을 넘었다. 이윽고 언덕 위의 키 작은 소나무를 기점으로 집 한 채가 내 눈에 들어왔다. 지금도 여전히 백색을 띤, 느긋하게 보이는 이층의 집이었다.
이제 난 문 앞에 서서 고리를 두드린다. 안쪽에 희미하게 빛나는 인간의 촛불을 느끼면서.
“어서 와요.”
“오래간만이야.”
“많이 춥죠?”
“서울보다야 괜찮지.”
과연 수 천, 수 만년이 지나면 내 기억을 들어줄 사람이 과연 있을까. 만약 없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그런 의문을 가진 채 나는 여전히 걸어가고 있다. 길게. 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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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아아. 드디어 끝났습니다. 대략 1달 반 정도 연재했는데, 의외로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군요. 역시 군대 말년만큼 열심히 쓰지는 못한 모양입니다.
다시 보니 마무리가 부실한 것에 수정 의욕이 꿈틀꿈틀 기어오르고 있습니다. 헌데 시간도 없고 여러 가지로 바빠질 것 같아서 이래저래 고민이군요.
팬픽에 가까운 마음가짐으로 시작한 글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처음 이 글에 손을 댄 것이 03년 초였으니, 장장 4년을 끈 것이죠. 사실 한 번 마무리는 04년도에 지었습니다만, 지금 보면 거의 병X 글에 가까워서... 그걸 어떻게 넷에 내어 놓았는지 얼굴이 다 화끈거릴 지경입니다.(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카타클리즘에 관해서.
어떻게 본다면 이 글은 카타클리즘 내용의 거대한 미리니름이 됩니다. 실제로 먼저 생각한 건 이보다 카타클리즘이 먼저이므로, 순서가 뒤바뀐 셈이지요.
01년 대학에 처음 들어가고 느지막한 시간에 하늘을 보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조각구름 하나가 있었는데, 저게 전함이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발단이었죠. 여기에 사람이 구름을 보는 것처럼 아무 관심도 없이 전함과 그 전함이 싸우는 것을 본다면? 하는 생각과 함께 구상에 들어갔습니다(물론 직후에 판타지를 쓰기 시작해서 구상으로만 끝났습니다만)
애당초 생각했던 건 정치 풍자였습니다. 아주 뻔하긴 합니다만, 나름 낑낑대면서 무관심한 사람들과 알아서 잘 싸우는 정치판을 그려보려고 했었습니다.(글 중간 중간에 나옵니다)
-카페 알파(요코하마 매물 기행기) by 아시나노 히토시
그러던 중 카페 알파를 접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작품이죠. 일상적인 풍경에 대한 관심과 지나가는 것에 대한 관심... 그래서 이러한 감정들을 글로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에 전에 생각했던 카타클리즘 내용을 넣어 이 글이 시작된 것이지요. 결국 이러한 출발은 글의 오리지널리티를 크게 떨어트렸습니다만, 후회는 없습니다.
-풍경의 묘사.
풍경을 글로 표현한다... 개인적으로 많은 좌절과 고민을 하게 만든 목표이자 문제였습니다. 그림이 시각만으로 바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반면에, 글은 적어도 한 번 이상의 생각을 통해서 받아들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방향을 잡은 건 눈으로 보이는 묘사가 아닌 보았을 때 느끼는 감정에 대한 묘사였습니다.
솔직히 잘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기에 취미로 사진 찍는 것이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풍경에 대한 좀 더 분석적인 시각을 도와주었으니까요.
-쉬운 SF.
딱히 설정을 복잡하게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냥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납득할 수 있는 수준에서 끝내려고 제한을 많이 뒀지요. 결국 SF치고는 상당히 가벼운 글이 되고 말았습니다만...(주제도 그래요. 딱히 탐구라고 할 것이 없죠) 원래 설정쟁이였던 과거를 생각하면 ‘헐’하고 웃고 맙니다.
후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이것 저것 질질 끌다가 겨우 완결시켰습니다. 지금까지 모자란 글 읽어주시느라 고생하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참고로 번외는 계속 연재됩니다. 어디까지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신변이 정리될 때까지는 번외로만 먹고살 것 같습니다. 사실 준비해둔 차기작을 수정하면서 쓰려고 했는데, 지금 시기가 시기인지라... 취직도 그렇고 슬슬 바빠지고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그럼. 항상 행복하세요.
From PlasmaKNight.(I.N)
Written By PlasmaKNight.(I.N)
이상, 제 4의 기사 플라즈마 나이트였습니다.
* 정규마스터님에 의해서 문피아 - 자연 - 일반 (gon) 에서 문피아 - 하 - 연재 완결(etc_fine) 으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8-03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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