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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나. 님의 서재입니다.

나는걸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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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플나
작품등록일 :
2008.05.02 17:23
최근연재일 :
2008.05.02 17:23
연재수 :
8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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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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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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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8.17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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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9)

DUMMY

2화 : 땅으로, 땅으로.


3일 뒤.


난 지도를 보다 갈림길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이제 해안 도로를 버려두고 내륙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건 사실 고민이라고 말하기 힘들었다. 어차피 들어가야 하는데, 그냥 가기 싫어서 부리는 투정에 가까웠다. 본능 같아서는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그냥 쭉 올라가고 싶었지만, 목적지는 내륙으로 6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게다가 날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눈앞에 펼쳐진 산맥이었다.


“넘어 가야겠군.”


슬슬 구름이 몰려오는 걸로 봐서는 조만간에 한바탕 비를 뿌릴 징조였다. 그렇지만 밤이 되려면 아직 멀었으므로 일단 산을 넘기로 했다.


마냥 계획 없이 산을 타는 건 아니었다. 입구에 서서 바라보니 도로는 꽤 쓸 만하게 보였다. 물론 도로의 특성상 굽이쳐 산을 오르긴 해도, 가야할 길이 뚜렷하다는 건 묘하게 나를 안심시켰다.


“헉, 헉.”


숨을 골라가며 산을 올랐다. 그러자 멀리서 봤을 때 몰랐던 도로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다. 앞서 나름 괜찮다고 한 생각은 지금 보니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역시 정비되지 않은 도로가 멀쩡할 리는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람 손이 탄 건 아마 수 십 년, 길면 수 백 년 전일 터. 요철 모양의 측대(側帶)는 예전의 색 - 노란색과 검은색이 혼재한 - 을 거의 잃어버리고 콘크리트의 잿빛만이 남아 있었다. 측대 위쪽, 산사태를 막기 위한 철조망 역시 상당부분 유실되어 무너진 곳이 많았다. 그래도 도로는 완전히 끊어진 곳 없이 사람이 지나갈 정도는 되었다.


두터운 구름이 내려오면서 산 위쪽으로 줄을 그어놓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마치 구름이 산을 먹은 것이 아닌, 산이 구름에서 내려온 것 같았다. 이렇게 구름과 산이 겹치면서 거리감이 생기자 비에 대한 걱정이 커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바닥을 펴 하늘을 향해봤지만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았다.


걸어가는 건 많은 생각을 수반한다. 어쩌면 보행 자체가 지루하기 짝이 없기에, 그저 생각만으로 자신을 달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순간 나의 이런 행동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나는 왜 단순히 여행을 위해 장거리 보행도 마다않는 걸까. 이는 흡사 내가 살아있는 이유와도 비슷했다. 나는 왜 살아있는 걸까? 영원히 죽지 않기 때문에? 아니면 다른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


사라져가는 인간을 바라본다는 건 슬픈 일이었다. 어쩌면 나는 마지막 한 사람으로 남아 ‘인류는 멸종했습니다.’ 라고 말할 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때가 오면 나는 더 이상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인간으로서 내 존재를 사라지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생각하든 답은 없었다. 어쩌면 인류의 가장 큰 소망을 이룬 나였지만, 그것으로 발생할 문제에 대해서는 진지한 고민을 별로 해보지 않았다. 영생(永生)에 부작용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사라진 다음, 다음은... 아마 이 생명은 순수한 고통이 되겠지. 끊임없는 고통이 되겠지.


하지만 나에게 다시 인간을 흥(興)하게 할 능력은 없었다. 그들은 이미 자신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개개인의 삶에 집착할지언정 그 뒤의 일에는 집착하지 않았다. 마치 늙어 죽을 날을 바라보는 노인처럼, 인류는 그들의 삶을 방관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그렇게 여기는 지금, 나에게 그들을 바꿀 힘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하늘은? 하늘은 과연 무얼 하고 있는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지만 결코 땅에 내려오지 않는 그들은 무얼 하고 있는가? 여기에 관해서는 뚜렷한 답이 존재했다. 무언가 큰 변화가 없다면, 아마 하늘의 사람이 땅으로 내려올 일은 없을 것이다. 내 삶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싸우겠지. 땅의 생명이 끊어진 이후에도 계속해서.


어느 정도 올랐다 생각한 곳에서 지도를 폈다. 현재 위치를 확인하면서 남은 거리를 쟀다. 출발하기 전 구간별로 측정한 거리를 합쳤더니 안동까지 대략 85km가 나왔다.(직선으로 따지자면 60km 남짓이지만, 길은 직선이 아니기에 거리는 거의 두 배 가까이 나온다)


‘15km 정도 왔나.’


소요된 시간은 2시간 반 정도. 지금 시간은 오후 4시. 산을 넘기까지 남은 거리는 30km. 5시간을 잡고 산 너머 마을 도착 예정 시간은 밤 9시. 만약 비가 오면 도착시간은 두어 시간 늦어지겠지만, 강행군 하리라 마음먹으며 가방을 고쳐 멨다.


구름의 색은 점점 짙어졌다. 고도가 오르면서 구름도 한층 가까워졌다. 공기도 바뀌어 습한 느낌의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왔다. 산의 일부는 안개에 가까운 구름에 가릴 정도였다.


“슬슬 오려나... 응?”


산을 따라, 하늘로 길게 뻗은 길 저편의 색이 일순 바뀌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흐릿하게 변한 것이다. 흡사 갑작스레 안개가 낀 듯 한 저 모습은...


“비다!”


나는 색의 변화가 구름의 이동 경로와 같다는 걸 확인하고 재빨리 우의(雨衣)를 뒤집어썼다. 그리고 우의를 입은 때와 동시에 거친 빗방울이 떨어졌다. 비닐 재질의 우의는 비와 부딪혀 커다란 소리를 냈고, 거기에 귀가 다 아플 정도였다.


“젠장!”


갑작스레 내리기 시작한 엄청난 비였다. 비옷을 입었다고는 해도 이런 비를 뚫고 걸어가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나는 일단 길에서 벗어나 커다란 나무 아래로 피했다. 동굴이 있으면 좋겠지만 일단은 조금이라도 비를 피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사서 고생이군.’


고생이라는 낱말에 웃음이 터졌다. 나무를 등지고 비를 피하는 내가 꽤나 꼴사나웠다. 단순히 여행 이상의 목적도 없는 곳에서 이런 고생을 하다니. 집에 있었다면 지금쯤 차나 마시면서 편하게 누워있을 텐데.


‘아니, 아니지.’


스스로 목적을 없애는 행위는 금물이다. 그렇지 않아도 의욕이 떨어지는 판인데, 대놓고 여행을 부정하는 말을 하다니. 아니지. 아니야.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웃음을 멈추고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가 날 봤다면 별 미친놈 다 있구나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조금 기다리자 비가 잦아졌다. 여전히 퍼붓고 있었지만 아까 전 보다야 훨씬 나았다. 우의 위로 흐르는 빗물과 한결 무거워진 신발을 느꼈다. 이런 일을 대비해 등산화를 신었지만, 엄청난 비 앞에 젖어버린 건 매 한가지였다. 신발이 젖자 보행속도도 뚝 떨어졌다. 이대로라면 9시 도착은 힘들어 보였다. 결국 야밤에 도착한다는 얘기인데. 이거 방이나 잡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남은 거리가 얼만데... 도착하고 나서 걱정을 하는 거야.’


일단 아무 생각 없이 걷기로 결정했다. 이빨을 깨물고 옷깃을 여미며 한발한발 힘을 줘가며 앞으로 나갔다.


비가 오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해까지 떨어지자 주변은 칠흑 같은 밤으로 들어섰다. 맑은 날이라면 분명 지금도 주변이 환해야겠지만, 흐린날 비에 구름까지 주변에서 덮쳐오자 밤이나 진배없었다. 끊임없이 내리는 비를 맞아가며 무거운 걸음을 옮기는 내 머릿속에는 빨리 언덕을 넘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일단 오르막이라도 끝나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몇 시간을 더 걸었을까. 여전히 비와 구름이 앞을 가리는 상태에서 난 오르막이 끝났음을 알게 되었다. 산의 정상은 아니었지만 이어진 길은 분명 아래쪽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가방이 조금 가벼워졌다. 이제 남은 거리는 대략 10km. 그래도 내리막이기 때문에 부담은 전에 비해 훨씬 작았다. 속도를 높여가며 S자로 꺾어진 길을 따라 내려갔다. 간혹 미끄러운 길이 나오긴 했지만 지금의 상승세를 막기는 무리였다.


하지만 일이 항상 잘 풀릴 리는 없다. 비가 너무 많이 온 탓 때문일까. 이런 폭우에 일어나지 않는 게 이상하다고 여기긴 했었다. 그러나 내 눈앞에서 벌어진 건 무슨 연유란 말인가.


“제기랄...”


난 앞쪽 길이 산사태로 사라지는 걸 보고만 있어야 했다. 빗소리가 너무 커 흙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지만, 뭔가 무겁고 거대한 것이 도로를 무너뜨리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아이고.”


나는 곧 막힌 길의 끄트머리에 섰다. 정신없이 내리는 비와 무심하게 무너져버린 길. 난 주변에 다른 도로가 있지 않을까 주위를 살펴보았다. 허나 보기에 길은 이것 하나뿐이었다. 다시 무너진 토사라도 밟고 넘어갈 수 있는지 확인했다. 하지만 진흙에 가까운 - 더구나 엄청난 경사를 지닌 - 흙더미를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안 쓰고 넘어갈까 했더니. 이거 대책이 없군.”


결국 땅이 안 되면 날아서 가면 된다. 하늘의 시선이 신경 쓰였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서서히 몸 주변으로 힘을 모으자 푸른 안개가 연기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발에 가해지는 압력이 줄어들면서 몸이 지면에서 떠올랐다. 속칭 사바소(Sabatho)라고 불리는 이러한 능력은 아주 오래 전부터 내가 지닌 힘이었다.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물리력을 행하게 하는 사바소를 통하여 나는 지금까지 여러 가지 일을 해 왔다. 500년 전 있었던 큰일도 어쩌면 그 범주에 속하겠지.


푸른 안개가 점점 짙어지면서 몸의 고도도 높아졌다. 그리고 넘어갈 수 있는 높이가 되었다고 느꼈을 때, 앞으로 나가면서 고도를 줄였다. 땅이 비에 젖어 미끄러우니 착지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그리하여 반대편 도로에 차분히 안착한 나는 뒤를 돌아 건너온 곳을 한번 바라보았다. 그러나 진짜 걱정은 다른 데를 향해 있었다.


‘들키지는 않았겠지?’


하늘은 무슨 산불 찾는 마냥 사바소를 찾아낸다. 그리고 그 정확성과 정밀성은 의외로 대단했던 걸로 기억했다. 다만 지금 비가 오고 구름이 두텁게 깔렸다고는 해도, 완전히 발각되지 않았으리라는 확신은 없었다. 만약 추적당했다면 오늘 내일 금방이라도 찾으러 오겠지.


‘그래도 뭐...’


다 쓸어버리면 괜찮을지도. 다만 내 여행이 방해받는 건 정말 견디기 힘든 귀찮음이었다.


“......”


잠깐 고개를 뒤로 젖혔다가 원상태로 돌아왔다. 그때 일은 그때 생각하기로 하고, 지금은 빨리빨리 내려가는 게 급선무였다.


마침내 산 아래 마을에 도착한 건 그로부터 2시간이 더 지나서였다. 비오는 작은 거리를 지나, 적당히 방이 있어 보이는 집 앞에서 염치불구하고 사람을 깨워 방을 잡았다. 초로의 주인아저씨는 오밤중에 민박 잡는 사람을 보고는 신기한 웃음을 보이며 놀라워했다. 하긴. 이상하게 보여도 할 말은 없었다.


옷을 갈아입고 젖은 옷을 마르기 쉽도록 펴 바닥에 널었다. 저녁은 당연히 먹지 못했으므로 배가 고팠지만, 지금 밥 달라고 할 순 없는 노릇이라 챙겨온 사과 하나로 끝냈다. 마지막으로 방에 불을 넣어달라고 부탁한 다음에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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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시는 분들께는 항상 감사드립니다.




그럼. 항상 건강하시길.


From PlasmaKNight.(I.N)

Written By PlasmaKNight.(I.N)


이상, 제 4의 기사 플라즈마 나이트였습니다.


* 정규마스터님에 의해서 문피아 - 자연 - 일반 (gon) 에서 문피아 - 하 - 연재 완결(etc_fine) 으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8-03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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