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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나. 님의 서재입니다.

나는걸어갑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SF, 라이트노벨

완결

플나
작품등록일 :
2008.05.02 17:23
최근연재일 :
2008.05.02 17:23
연재수 :
8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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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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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510,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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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5.14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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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1)

DUMMY

-1


무엇이 문제였을까. 계속되던 잠에서 깨어난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아무튼 분명한 건, 내 정신이 세상을 향해 나왔다는 것이었다.


천천히 몸에 힘을 넣어가며 감각을 체크했다. 저쪽 왼쪽 발가락이 내 의지에 따라서 부르르 떨렸다. 아직 완전하게 컨트롤은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움직이긴 움직였다. 이번에는 신경을 눈꺼풀에 집중했다. 파문(波紋)과 같이 흔들리던 눈꺼풀이 움직였다. 동시에 빛이 망막을 통해 들어왔다.


‘윽.’


강했다. 나는 다시 눈꺼풀을 닫았다. 하지만 빛에 적응해야 했기에, 다시 용기를 내어 눈을 떴다. 뒤이어 고통의 시간이 지나면서 주변의 모습이 형체를 갖춰갔다. 각기 다른 명암과 색을 가지고.


‘여기는 어디지?’


시각 가운데로 향하듯 솟아있는 나무들. 이걸로 봐서는 도로나 사람 사는 곳이 아닌, 어딘가 야산 비슷한 분위기가 났다. 그리고 가지에 듬성듬성 나뭇잎이 달려 있는 걸로 봐서는 봄이나 여름은 아닌 듯 했다. 나는 뭔가 다른 걸 보기 위해 눈을 돌렸다. 그러나 누워있는 상태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이것이 전부였다. 목이 아직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시 시간이 더 지나고 청각이 회복되었다.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에 움직이는 낙엽 소리도 들려왔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꽤 강한 걸로 봐서는 가을 정도 된 것 같았다.


‘휴...’


잠에서 깨어난 마냥 정신이 혼탁했다. 시간. 장소. 어느 것 하나도 불분명했다. 더군다나 몸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는지 말을 듣지 않았다. 오직 보고 듣는 것만 가능했다. 숨 쉬는 것만 빼고.


‘이건 뭐 거의...’


죽었다고 봐도 옳을 것이다. 아마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회복되려면 일주일은 걸리겠지. 물론 죽지는 않을 것이다. 육체가 완전히 파괴되지 않는다면, 허기로는 죽지 않는다. 이놈의 몸은 신체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에너지를 대기 중에서 흡수하니까.


이때 멀리서 규칙적인 낙엽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사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사람을 만났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젠장.’


대책 없는 시간 동안 소리는 더욱 커져갔다. 그리고 그 소리가 최대로 커졌을 때, 비명소리 역시 함께 들려왔다.


“꺄악-!”


꺄악? 고개를 돌릴 수 없기에 확인은 못 하는 상황. 그래도 들리는 목소리로 추론한 상대방의 정보는 다음과 같았다. 여자. 그리고 나이는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 어쨌든 비명소리 이후 다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천천히 접근하는 모양이지.


“살아... 있어?!”


이윽고 내 시야 안으로 소녀의 얼굴이 들어왔다. 예상대로 앳된 얼굴의, 교복차림의 소녀였다. 그녀는 한동안 내 시야 안에서 움직이더니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아저씨, 아저씨.”


누가 아저씨라는 말이야. 나는 듣고 있다는 신호로 눈을 깜빡였다. 그걸 본 소녀는 깜짝 놀라면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내 다시 조심스럽게 접근해 왔다. 얼굴에는 처음에 보였던 공포가 아닌, 호기심이 가득했다.


“진짜 살아있네요? 난 죽은 줄 알았는데.”


무슨 말버릇이 그래. 그렇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말을 할 수 있으려면 시간이 더 걸릴 모양이다. 나는 그녀의 말에 답하듯 눈을 깜빡였다. 재차 움직이는 눈을 본 소녀는, 손가락을 뻗어 내 눈을 위 아래로 쫙 폈다.


‘!’


아주 신기하다는 표정이었다. 당하는 내 기분 따위는 생각지 않는 것 같은.


“일단 듣고 볼 수는 있단 말이죠? 잠깐 기다려 봐요. 뭐 먹을 것 필요해요?”


먹을 거라. 하지만 준다고 해도 먹을 수는 없었다. 눈과 신체 일부분만이 움직이는 상황에서 뭘 먹는다는 말인가.


“흠... 확실히 먹을 수는 없겠네요. 그러면 물이라도 가져오죠.”


눈에 가해지던 압력이 사라지면서 소녀가 사라졌다.


“......”


다시 혼자만의 시간이 왔다. 하늘 저편으로 흐르는 구름을 보면서 이곳이 어디인지 추측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채 10초도 지나지 않아 이것이 쓸데없는 생각임을 깨달았다.

도대체 여긴 어딜까. 시간은 또 어떻게 된 거지.

허나 물으면 뭐하나.

답을 줄 수 있는 대상은 지금 어딘가에 갔는데.


‘먼저 움직일 수 있게 해야겠군.’


잡념을 버리고 눈을 감았다. 정신을 집중하여, 몸의 통제권을 얻기 위해 힘을 끌어 모았다. 오래된 화석같이 굳어있던 가슴 속의 무언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가슴 속에서 작은 회오리가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회오리는 아직 미악해서, 신체 구석구석에 쌓여있던 먼지 전체를 날리지는 못했다.


‘아직 좀 더 있어야 하나.’


회복에는 시간이 걸릴 듯 했다. 원래 먹지 않는다고 죽는 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최소한의 신체구조만 유지하는 상태에서 이 이상을 바라는 것도 힘들었다. 결국 뭔가 먹을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좀 괜찮아요?”


마침 적당한 타이밍으로 소녀가 돌아왔다. 날 보고 씨익 웃던 그녀는 시야 밖에서 뭔가를 뒤적거리더니, 물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안에는 투명한 색의 액체가 들어있었다.


“마시는 건 가능해요?”


되든 안 되든 해봐야지. 나는 긍정의 의미로 눈을 깜빡였다.


“좋아요. 그럼.”


갑자기 입 안으로 뭔가가 쑥 들어왔다. 느낌이 정확치는 않았지만, 가느다란 것이 바로 빨대였다. 나는 최대한 입술에 신경을 집중하여 입을 밀폐공간으로 만든 다음, 횡격막을 아래로 당겼다. 그러자 달달한(미각이 회복된 건 지금 깨달았다) 액체가 쭉 밀고 올라와 입을 채웠다.


“꿀물이에요.”


감사 표시는 나중에 해야겠군. 어쨌든 뭔가가 몸 안에 들어오자 바로 변화가 일어났다. 느리지만 에너지 연소가 시작되었고, 말초신경 일부가 작동을 시작하면서 감각에 일었던 안개 일부가 걷혔다. 그렇지만 여전히 몸 전체를 움직이는 건 불가능했다.


‘2~3일은 걸리나.’


그럭저럭 꿀물을 다 넘기자 소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주변의 낙엽을 모아다가 주섬주섬 내 몸을 덮었다. 꽤 센스 있는 아이였다.


“오늘은 이렇게 있어요. 설마 오늘 내일 죽는 건 아니겠죠?”


설마 죽겠어. 역시나 긍정의 의미로 눈을 깜빡이자, 소녀는 웃으면서 멀어져갔다.

다음날. 소녀는 어김없이 어제와 비슷한 시간에 날 찾았다. 어제와 똑같이 교복을 입고 있는 걸로 봐서는 학교에서 마치고 바로 오는 것 같았다.


“비가 안 와서 다행이에요. 자요. 마셔요.”


이번에는 꿀물이 아니었다. 의외로 점성이 있는 것이 뭔가를 탄 것 같았다. 나는 눈으로 그녀에게 어제와의 차이점을 물었다.


“미숫가루에요. 좀 빡빡한 걸로 넘어가야죠.”


솔직히 알아들으리라고는 생각 안 했는데. 의외로 그녀는 눈치가 빨랐다.

3일이 지나자 말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먹는 것이 적긴 했고 그마저도 하루의 텀이 있긴 했지만, 먹을 것이 들어오자 몸의 회복은 더욱 빨라진 것이다.


“말 할 수 있어요?”

“그럭저럭.”

“움직이는 거는요?”

“그건 아직.”

“다행이네요. 전 계속 말 못하면 어떡하나 했거든요.”

“어쨌든 좀 살 것 같군. 정말 고맙다.”

“그런데 아저씨는 누구에요?”

“나?”


잠깐 내가 누구인지 생각했다. 이름은 김현하. 성별은 남자. 나이는... 잘 모르겠고. 여기서 깨기 전에는 뭔가 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이대로 대답해 줬다가는 문제가 더 커질 것 같아서 그냥 얼버무리기로 했다.


“그냥 지나가던 사람.”

“지나가던 사람이라. 어쨌든 아저씨 보통 사람은 아니죠?”

“보통 사람이 뜻하는 바가 뭔데?”

“그러니까, 보통 사람이라면 아저씨 같은 상황에서는 죽는 게 당연하다는 거죠.”

“내가 안 죽을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는데?”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느낌? 만약에 죽었다면 어쩔 뻔 했어?”

“음... 그건 그거 나름대로 별 수 없네요.”


소녀는 마치 딴청을 피우듯 대답했다. 나는 그런 대답에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어쩌면 그녀의 판단이 정확하다고 느꼈다. 확실히 나는 죽지 않으니 말이다. 나는 소녀에게 내 몸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그녀는 영생(永生)을 비롯한 몇 가지 얘기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걸 믿으라고요?”

“뭐 믿지 않아도 상관은 없어. 아무튼 네 말대로 보통 사람은 아니니까.”


다시 이틀이 지나자 상체를 움직이는 것이 가능해졌다. 돌아본 주변은 예상대로 어딘가의 산 중턱이었다. 소녀를 통해 장소도 알아냈다. 바로 부산의 그림자 섬. 마지막 기억이 서울에서 끊어졌음을 생각하면 이 위치는 조금 의외였다.


‘도대체 얼마나 온 거야...’


기억하지 못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어깨 위로 떨어지는 낙엽. 처음 눈을 떴을 때보다 바람이 차가워진 걸 느꼈다. 더 추워지기 전에 움직일 수 있어야할 텐데. 이때 멀리서 소녀가 다가왔다.


“일어났네요?”

“슬슬. 아직 상체만 움직이는 수준이지만.”

“흠... 그럼 좀 사람답게 만들어야겠네.”

“응? 무슨 말이야?”

“이거 먹으면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녀는 꽤 큰 미소를 지으면서 나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안에는 빵과 우유가 들어 있었다. 소녀는 내가 봉투를 받자마자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갔다. 그리고 10분 뒤, 소녀가 돌아왔다. 꽤 커다란 거울을 들고서.


“거울?”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어떤 지도 몰라요?”

“내 모습?”


소녀는 거울을 내 앞에 세웠다.


“헉.”


턱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겨지는 긴 털이 다리까지 나 있었다.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겨지는 긴 털이 다리까지 나 있었다. 그 털들 사이로 보이는 상의 역시 눈에 확 들어왔다. 광택이 나는, 타이즈 타입의... 파일럿 슈트. 이런.


이렇게 거울을 통해 확인한 모습은 충격이었다. 뒤숭숭하게 자란 수염과 머리카락. 꼬질꼬질한 얼굴. 누가 봐도 걸인, 아니면 숲 속의 기인(奇人)을 연상케 할 모습이었다. 뭐 짐승이라고 해도 적당히 수긍할 정도였으니까.


“도대체 뭐야?”


옷이야 이해를 하겠지만(거부감이 없었다), 수염과 머리카락은 충격이었다. 도대체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야? 그러나 이렇게 내가 나 자신에게 놀라는 모습이 소녀에게는 이상하게 비친 것 같았다.


“왜 그래요? 자신이 왜 그렇게 된지 기억 못해요?”

“아...”

“어쨌든 기억이고 자시고, 그 흉측한 털부터 제거해야 될 것 같네요.”

“네가 자르려고?!”

“당연하죠. 그 꼴로 있을 거예요? 대충이라도 다듬어야지. 가위도 가져왔어요.”


책망하듯 말하며 소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나서 소녀는 보자기를 내 목에 두르고 난 뒤, 부엌에서나 쓸법한 커다란 가위를 쥐고 내 뒤에 섰다.


“그거... 이발용 가위 맞아?”

“잘 모르겠는데요. 보이는 거 아무 거나 가져온 거예요.”

“......”

“자, 갑니다.”


싹둑 소리가 나면서 온몸에 소름이 확 돋았다. 그러나 같은 소리가 연이어 반복되자, 피부의 떨림도 이내 진정되었다. 후두둑 소리를 내며 긴 머리카락이 땅으로 떨어졌다. 곧 바닥에 머리카락이 수북이 쌓였다.


“그런데 넌 여기 왜 온 거냐?”

“가끔 혼자서 산에 올라와요. 여기 뒤쪽에 바다가 좋으니까.”


그녀는 가끔 이곳에 온다고 했다. 조금만 더 가면 산 정상이고, 그 너머로 넓게 바다가 펼쳐져 있다고 했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해 뜨기 전에 일어나 일출(日出)을 보러 갈 정도라고도 했다.

아무튼 주기적으로 산을 오르던 그녀의 눈에 내가 보인 것이다. 올라가던 중 바람에 낙엽이 움직이자 사람 얼굴이 스르르 나왔다는데... 하마터면 까무러칠 뻔 했단다.


“진짜 놀랐다고요. 그런데 잘 보니까, 시체가 아닌 거예요.”

“아닌 줄은 어떻게 알았어?”

“느낌이 있잖아요. 음... 썩지 않았다는 느낌?”


단어 사용이 원색적이군. 그러고 보니 슬슬 해가 질 때가 되었다. 해가 지는 방향은 산 반대쪽인가. 그럼 뜰 때는 바다 쪽이겠군. 그러고 보니 서울은 해가 지는 방향이 바다 쪽이었지.

그렇지만 왜 여기에 왔고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전혀 기억에 없었다.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한 건 아닌지... 괜한 걱정이 생겼다.


“자, 수염 깎아요.”


소녀의 말에 난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난 그녀가 내민 면도칼을 받아서 거울 앞으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래. 일단은 정상인으로 돌아오는 게 먼저야.


“조심해요. 다치지 말고.”


삭삭 소리와 함께 수염 역시 땅으로 떨어졌다. 거의 끈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의 긴 수염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흘렀기에 수염이 이 정도로 자란 걸까.

마침내 수염까지 마무리 지은 나는 거울을 통해 소녀가 깎아준 머리를 들여다보았다. 부엌가위로 자른 것 치고는 괜찮은 솜씨였다.


“좀 짧게 잘랐어요. 괜찮죠?”

“괜찮은데.”

“그나저나 자르기 전에는 완전히 짐승 같더니, 좀 다듬으니까 사람 같네요.”

“그래? 고마워.”


이후부터 그녀는 매일 한 번씩 날 찾아와 먹을 걸 주곤 했다. 그녀와 대화를 많이 나누고 싶었지만, 소녀가 왔다 가는 시간이 짧았기에 많은 대화를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매일 산에 오르내리는 것에 약간 의심을 산 것 같다고 말했다.


“슬슬 주변 눈초리가 이상해져서요.”

“하긴 그러겠지. 산등성이에서 남자 키운다는 말은 할 수 없으니까.”


다시 사흘이 지나고 내 몸 역시 꽤 회복되었다. 하체까지 감각이 모두 돌아온 걸 확인한 나는, 천천히 힘을 줘가며 몸을 일으켰다. 곧바로 관절과 근육 곳곳에서 올라온 통증에 약간 비틀거렸지만, 나는 균형을 잡고 일어설 수 있었다.


몇 년 만인지는 몰랐다. 그러나 다시금 두 다리로 서서 바라본 대지는 여전히 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 가지만 남은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산 아래 사람의 흔적들. 그리고 그 위쪽으로 보이는 바다. 불어오는 바람은 내 머리카락을 흔들어 넘기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 나는 살아있음을 느끼고 있으리라. 수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내 심장은 뛰고 있고, 육체가 살아 있음을 느끼고 있으리라.


그렇게 정작 몸이 회복되자 갑자기 방향감각이 사라졌다. 과연 난 무엇을 하기 위해 깨어난 것일까?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하지만 답은 없었다. 그저 거대한 상실감만이 가슴에 가득했다.


뒤이어 과거의 기억들이 물밀 듯 몰려왔다. 얼마나 지났는지도 알 수 없는, 빛 바래가는 기억들이. 뜻 모를 상실감과 뒤엉킨 기억의 조각들은 부러진 갈비뼈마냥 가슴을 찔렀다.


“울어요?”


언제 왔을까. 소녀는 어느 사인가 내 옆에 서 있었다.


“언제 왔냐?”

“방금요. 옆으로 돌아왔어요. 놀래주려고. 그런데 우는 모습 보니까 그럴 마음도 없어졌네요.”

“......”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 말대로 난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감정으로 우는지도 몰랐다. 눈물은 그냥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무언가가 나로 하여금 정확한 과거를 떠올리지 못하도록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억은 떠오르지 않을지언정,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자요. 옷이나 갈아입어요.”


대답 없이 소녀가 내미는 옷을 받았다. 그녀는 내가 옷을 받자마자 등을 돌렸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파일럿 슈트를 벗고 옷을 갈아입었다. 의외로 딱 맞는 것이 놀라웠다. 그간 눈대중으로 사이즈를 잰 것인가.


“이제 어떡할 거예요?”

“내려가야지.”

“내려가서 뭐 할 건데요?”

“그건 잘 모르겠는데.”


모른다는 말에 소녀가 표정을 구겼다.


“모른다는 게 말이 되요? 영원히 산다면, 뭔가 새로이 배울 시간도 많다는 말이잖아요.”

“그건... 그렇지.”

“그럼 됐잖아요. 배우면 되겠네. 몸 쓰는 거 어려우면 공부나 해서 애들 가르치면 되겠네요.”


그녀는 당연한 듯 나에게 말했다. 확실히 생각해보면 나에게 뭔가를 배울 시간은 무궁했다. 결국 나는 얼떨결에 소녀의 말에 수긍하고 말았다.


“맞는 말이군.”

“그렇죠?”

“그럼 뭐 배울 장소는 있어? 뭐든 간에.”

“서울에 대학이 있다고 들었어요.”

“서울에 대학이라...”


이 말에서 약간의 위화감이 느껴졌다. 지금 당장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럼 제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예요. 이제 낙엽 속에서 잠자지 말고, 움직이도록 하세요. 인간이면 인간답게 살아야죠.”

“하하.”


인간이면 인간답게라. 분명 지금 나에게는 인간답게 살아갈 이유를 찾는 것이 제일 큰 목표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녀의 말 대로 뭔가 배워야만 했다. 그렇게 당장의 목표라도 정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참. 이름이라도 가르쳐 줘.”

“이름이요? 휘미래. 휘미래에요.”





나린이와 정빈이는 휘미래의 말을 거의 넋을 빼놓고 듣고 있었다. 남의 과거, 그것도 부끄러운 얘기를 재미있게 듣는 모습을 보니 약간 부아가 치밀었지만, 딱히 말릴 이유도 없었다. 어찌되었든 사실은 사실이니까. 그래도 뭔가 감정 표현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읽던 책을 덮고 반대편 테이블에 앉아있는 휘미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휘미래. 적당히 해줘. 벌써 60년 전인데... 그만 까먹을 때도 됐잖아.”

“너도 얘들 표정 보면 그런 생각 안 들 걸? 하하하. 그리고 내가 기억력이 좀 좋지. 잊고 싶어도 잊혀지질 않으니 어쩌겠냐.”


뒤이어 정빈이와 나린이의 질문공세가 들어왔다. 특히 정빈이는 그 관심이 더했다.


“현하님, 진짜에요?”

“거짓말이라면 내가 중간에 컷 했겠지.”

“도대체 몇 년이나 잠들어 계셨던 거예요?”

“잠들기 전의 기억이 완전하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대략 200년 정도 있었을 거야.”

“우와.”

“문제는 카타클리즘 이후부터 잠들기 이전의 기억이 희미하다는 거지. 이때 뭘 했는지 나도 잘 몰라. 어쨌든 실질적으로 제대로 된 생활을 하게 된 건 60년 정도 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

“음... 그럼 그 직후에 서울로 올라가신 거예요?”

“그건 아냐.”


그러고 보니 사건 하나가 있었군. 나는 기억을 가다듬으면서 의자에 등을 기댔다. 세상으로 돌아오고 처음 겪었던 일. 거의 잊고 있었던 사바소를 다시 일깨운 사건. 기억 속에는 ‘꽤 재미있었던’ 정도로 남겨진 일이었다.

이때 정빈이와 내 눈이 마주쳤다. 아차. 또 이야기의 빌미를 주고 말았군.


“해주실 거죠?”

“하아. 알겠다.”





-2


“지금 몇 년인데?”

“5703년이요.”

“오천... 칠백?!”

“네.”




-------------------------------------------------------

(주- 카타클리즘 발발 시기 : 5250년)



아하하;;;


다른 글 쓰면서 진도가 잘 안나가던 터에... 그냥 생각만 하고 있던 내용을 적어봤습니다. 어차피 본편은 완결났고 해서(후반부 수정은 제법 했습니다만) 가뿐한 마음으로 썼지요.


현하와 휘미래가 처음 만나게 된 이야기입니다. 현하의 꽤 꼴사나운 모습을 휘미래가 알고 있지요.ㅡㅡ;;


분량은 앞으로 두 개 혹은 세 개 정도로 끝날 것 같네요.




그럼. 항상 건강하시길.


From PlasmaKNight.(I.N)

Written By PlasmaKNight.(I.N)


이상, 제 4의 기사 플라즈마 나이트였습니다.

* 정규마스터님에 의해서 문피아 - 자연 - 일반 (gon) 에서 문피아 - 하 - 연재 완결(etc_fine) 으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8-03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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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나는 걸어갑니다 18화 (2) +6 07.04.02 1,023 2 12쪽
56 나는 걸어갑니다 18화 (1) +5 07.04.01 1,136 3 29쪽
55 나는 걸어갑니다 17화 (3) +6 07.03.30 1,044 2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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