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플나. 님의 서재입니다.

나는걸어갑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SF, 라이트노벨

완결

플나
작품등록일 :
2008.05.02 17:23
최근연재일 :
2008.05.02 17:23
연재수 :
84 회
조회수 :
113,823
추천수 :
265
글자수 :
510,481

작성
07.04.06 00:05
조회
1,066
추천
2
글자
26쪽

나는 걸어갑니다 19화 (2)

DUMMY

황철규 대장이 떠난 것은 그로부터 사흘이 지나서였다. 멋진 중절모를 흔들면서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정말 그가 자신이 말한 것을 실행할 것인지 궁금했다. 저런 모습만 보면 거의 촌부에 가까웠기에. 어떻게 봐서는 잔혹한 일을 하리라고 믿기는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는 반드시 하리라는 것을.


다음날 오후에는 다리 보수공사에 참여했다. 나무로 된 섬의 다리는 아직 모자란 점이 많았다. 특히 저번 태풍의 영향으로 일부가 부서졌고, 곧 올 겨울을 위해서라도 보수공사는 반드시 해야 했다.

한참 나무를 자르던 난 이마의 땀을 닦으면서 다리를 바라보았다.


‘음...’


솔직히 얘기해서 이 다리가 겨울을 견딜 수 있을까 의문스러웠다. 아무래도 이 근방 사람들에게는 처음 지어보는 다리고, 나무로 되어 있기에 강도에도 좀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눈에 이러한 걱정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부서지는 것을 예상하면서, 부서질 경우 당연히 다시 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마디로 딱히 고민이 없었다.


나가는 것만을 생각하고 좌절해도 다시 나가는 인간의 모습.


사실상 이제 끝이 보이고 그 한계를 인정하는 단계까지 왔다. 누구도 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인간의 부흥을 바라보지 않는다. 오늘 사라지는 사람을 따라서, 자신도 내일 사라질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살아있는 동안만은, 그 시간만은 그냥 흐르게 놔두지 않았다. 살아가고 또 살아갔다. 부서질지 모르는 다리를 지으면서. 헐어가는 책으로 공부를 하면서. 아이를 키우면서...


과연 한 종(種)이 스스로의 멸망을 바라볼 수 있는 걸까? 그것을 알면서도 그냥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걸까? 사람은 사라지고 사라지고 또 사라지건만. 그냥 그 그리움을 가슴에만 묻어놓고, 점차 적막해져가는 세상을 어떻게 그냥 바라볼 수 있는 걸까?


본능만을 바라본다면 분명히 이상했다. 분명 동물의 종족 번식은 최고의 목표가 아닌가. 그러나 지금의 인간은 사라지는 주변을 그저 그리움이라는 감정 하나만으로 버티고 있었다. 자신의 죽음을 알면서도 좌시하고 있었다.


“지친 거겠지.”


오늘 분 공사를 끝내고 돌아온 시간은 늦은 오후였다. 나는 휘미래가 타준 차를 받아들고 함께 테라스에 있었다. 테라스 앞으로는 바다가 널찍이 펼쳐져 있었다.


“지쳐?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이야? 살아 있는 동안은 분명히 열심히 나아가잖아?”


휘미래는 내 반문에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이런 거 있잖아. 그냥 자기 살아있는 동안은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믿음. 분명 지금이 인간 전체의 위기라면 위기겠지만... 보통은 그런 거 생각 안 하고 사니까. 그저 평화롭기만 바랄 뿐.”

“.......”

“그냥 바라보는 거지. 그냥 자기 인생 살아가는 거고.”


휘미래는 흐르는 답변을 내어 놓으며 먼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엷게 스러지는 노을은 서쪽 하늘을 따뜻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녀의 집 오른쪽으로 떨어지는 태양의 색 입자들은, 붉은 기운을 가득 머금은 채로 얼굴에 달라붙었다.


“죽지 않는 너라면 잘 알 텐데.”

“뭘?”

“그리움.”

“......”

“인간이 정녕 그리움을 안다면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거야. 그건 과거에 지나간 진실을 그리워한다는 말이 될 테니까. 하지만 지금 인간의 삶은 제대로 된 그리움을 알기에는 너무나도 짧다고 보는데.”

“그런가.”

“4000년을 넘게 살아온 넌 어떻게 생각해?”


바람은 잔잔했다. 그녀는 차를 한 모금 머금었고, 나 역시 찻잔을 기울였다.


“누군가가 사라지는 꿈이라면 많이 봤었지.”

“단지 꿈인가?”

“[시간은 현실을 꿈으로 만들었다]가 정답일까.”

“하하.”

“네 말대로 인간이 진실을 깨닫고, 그것을 그리워하기 위한 시간은 너무나도 짧은지 몰라. 나도 지금 와서, 그것도 인간의 끄트머리에 와서야 서서히 과거에서 진실과, 그리움을 느끼기 시작했으니.”


내 말이 끝나고 휘미래는 한참동안 날 바라보았다. 의아해진 나는 고개를 돌리면서 물었다. 물론 이 와중에도 차를 홀짝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왜?”

“느낀다라. 절대 찾는다라고 얘기하지는 않는군.”

“찾지는 않아. 다만 느낄 뿐이야. 정확히 하면 찾고 싶지 않아.”

“왜?”

“찾았다고 하면 못 찾은 내 과거가 부끄러워지니까.”


짧은 휘미래의 웃음 이후로 침묵이 이어졌다. 저녁 해는 이제 모습을 감추려고 했다. 찻잔도 어느새 빌 듯 말 듯 낮게 찰랑거렸다. 나는 잔을 살살 흔들다가 마지막 한 모금을 입에 털어 넣었다.


“어이. 현하.”

“왜?”

“하나만 더 묻자. 여름이냐 겨울이냐?”

“뭐가?”

“말했잖아. 하늘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질 거라고.”

“아마 내년 봄이나 여름이 될 것 같은데. 대장이 정확하게 시간을 정해주진 않았어.”

“그런가... 그런데 만약에 말이야.”

“어.”

“전투가 황철규 대장이 원하는 대로 끝나서 하늘이 땅으로 내려온다고 가정 한다면.”

“음.”

“그런다고 다시 인간의 시간이 돌아오는 건 아니겠지?”

“당연하지 않을까? 만약 하늘 전체가 땅으로 내려오면 몰라도, 대장의 계획대로라면 다시 땅을 밟을 수 있는 하늘의 인간은 채 수 백 명이 되지 않을 걸?”

“잔혹하군.”

“이것도 그들이 하늘에 간 대가일거야.”

“인과응보에 너무 목숨 거는 거 아냐?”

“그럴지도.”


맘껏 자신들의 시간을 누린 인간은 결국 완전한 존재도 되지 못하고, 그렇다고 오랜 기간동안 존재를 지속시키지도 못한다... 그저 한 굴레 속에서 사라질 뿐이다. 사라진 많은 주변으로 인한 긴 그리움에 아픈 가슴을 잡고, 아무런 걱정도 없이 편안히 사라져 간다.


긴 우주의 시간 안에 한줄기 바람을 불어 놓고.


시뻘건 저녁놀이 감싸던 주변은 어느덧 검게 변해가고 있었다. 난 함께 어두워지는 마음을 부여잡으며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은 곧 고민으로 바뀌었고, 잠시 뒤 내린 결론은 조금 더 여기 있는 것이었다.


“안 들어가?”

“조금만 더 있다가.”

“그럼 먼저 들어간다.”

“그래.”


휘미래가 먼저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빈 찻잔을 들고 멀리 바다를 바라보았다. 어둠이 스며드는 바다는 점차 하늘과 같은 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때 뒤쪽에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현하님?”

“정빈이구나.”

“네.”

“왜 나왔어?”

“여기 계신다고 해서...”

“옛날이야기라면 거의 다 해줬는데.”

“그것 때문은 아니에요.”

“그럼?”


그녀는 두 잔의 차를 쟁반에 받쳐 들고 있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 잔을 받아들었고, 정빈이 역시 찻잔을 들고 마시기 시작했다. 둘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있었다. 나 역시 굳이 기다리지는 않았다. 적당히 때가 되면 말을 시작할 테니까. 그런데 이렇게 뜸 들이는 것도 오래간만이군.


“왜?”


오히려 채근하는 건 내가 되었다.


“그...”

“이제 그렇게 어려워 할 상대는 아니잖아?”


웃으면서 정빈이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망설임의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렵게 나를 바라보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오리지널과 카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아. 이게 남아 있었군. 난 그녀의 물음에 한동안 고민했다. 오리지널과 카피의 차이점이라. 사실 생각해보면 답은 없었다.


“그럼 넌 자신이 뭐라고 생각하는데? 오리지널? 아니면 카피?”

“그건...”

“먼저 내 입장에서 봤을 때 넌 오리지널이야. 이오타가 아니면 오리지널이라는 말이겠지.”

“......”

“물론 느낌만으로 정할 건 아니라고 본다만, 느낌 말고 정할 수 있는 것도 없잖아. 생체학적으로 본다면야 당연히 넌 이오타니까. 그걸 뛰어넘는 판단은 이오타를 알고, 너를 아는 나만이 할 수 있다고 보는데.”


내 대답에 정빈이는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살짝 벌렸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생체학적으로 같다는 건 항상 마음에 걸리겠지. 또 자신이 누구냐 라는 판단을 타인에게 맡기는 것도 문제일 테고. 하지만 널 바라보는 사람이 너밖에 없다면 네가 오리지널인지 카피인지 알 수 있을까? 결국 이건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봐. 답은 없다는 거지.”


내가 생각하기에 이건 본인의 문제였다. 출생에 메여 살 것인가 혹은 떨쳐버릴 것인가. 이것은 철학이나 과학으로 들어간다면 너무나도 어려운 문제였기에, 결국 판단은 당사자가 해야 된다고 믿는 것이다.


“잊어버려. 땅으로 내려온 이상 너에게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네...”


풀죽은 정빈이를 보니 뭔가 다른 화제가 필요함을 알았다.


“그런데 황철규 대장이 너보고 남으라고 하더냐?

“이제 굳이 올라올 필요는 없다고 하셨어요.”

“그렇군. 참, 땅으로 내려올 이유는 찾았어?”

“네. 찾았어요.”


질문에 답하면서 표정이 확 밝아졌다. 아마 그녀도 분위기 반전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그리고 부산으로 내려온 이후부터 쭉 얘기하기 시작했다. 모함이 떨어진 것부터 시작해 여러 가지 사건들에 대해서.

그녀는 ‘그리움’에 관한 얘기를 많이 했다. 땅에 내려와서 느낀 사람에 대한 그리움. 땅을 알고 나서 느낀 땅에 대한 그리움.


‘그리움이라...’


난 아무 말 없이 그냥 웃었다. 문득 이오타의 기억이 떠오르는 순간이었지만, 난 그 기억과 지금의 기억을 억지로 연관짓지 않기로 했다. 내 자신에게도 말하지 않았던가. 둘은 다르다고. 어쩌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둘의 공통적인 모습은... 인간 전체가 지니고 있을 모습일지도 모른다. 비단 정빈이와 이오타만 지닌 모습이 아닌.

헌데 말을 마친 정빈이가 갑자기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제가 이걸 알고 있다고 해도, 하늘에 대한 설득은 못하겠어요.”

“네 잘못은 아니지. 그게 가능했다면 그들이 아직까지 저 하늘에 있지 않을 테니까.”

“......”

“황철규 대장도 그걸 잘 알고 있어. 말이나 평화적은 설득은 이미 어렵다는 걸.”


난 바다를 바라보면서 황철규 대장이 한 말을 떠올렸다. 하늘로 간 인간이 땅으로 내려오기 위해서는, 하늘에 간 것을 잊어야 한다는 말. 그리고 잊기 위해서 기억하는 존재를 모두 없애버릴 거라는 말.


“그래도 그건 너무 잔인하잖아요...”


그는 이것을 대가라고 표현했다. 인간이 하늘로 간 대가. 그 인과응보. 응당 치러야 할 고통. 하지만 이건 정빈이 말대로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하늘로 간 값을 치르는 데 엄청난 생명을 투자해야 한다면, 그건 과연 옳은 것인가? 그러나 난 황철규 대장이 택한 방법에 아무런 반론도 제기하지 못했다. 본질만을 본다면 500년 전에 내가 한 일 역시 비슷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한 번 실패한 것도 알기 때문에, 그가 택한 방법이 틀렸다고는 여기지 않았다.


“몰라. 그러나 분명한 건, 이 방법이 최선이라는 거야.”

“......”

“논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겠지.”


거의 식어버린 차를 홀짝였다. 정빈이 역시 나와 같은 자세로 테라스에 기대어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렇게 말없이 있는 동안 시간은 흘러 완전한 밤이 되었다. 차츰 눈이 아닌 귀와 피부가 예민해져갔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어떤 소리들의 집합은, 사라진 빛을 대신하여 주변을 채우고 있었다.


그렇게 대화가 끊어지고 정빈이도 나도 그저 찻잔만 만지고 있었다. 점차 줄어드는 차를 보면서 조바심 아닌 조바심이 일었지만, 그냥 아무렇지 않게 서 있었다. 분명한 건 정빈이 얘기가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거다. 겨우내 그녀와 대화를 해봤던 나는 표정만 보고도 대화의 진행 방향을 예측할 수 있었다.


“현하님.”

“응?”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으세요?”

“그날이라니?”

“해경정 중위가 온 날이요.”

“......”

“저 사실, 해경정 중위에게 현하님을 좋아하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의외의 말에 그녀를 바라보자 정빈이도 날 향해 돌아섰다. 정빈이는 억지로 미소를 만들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어색한 표정만큼이나 말 역시 불안감이 느껴졌다.


“그 사람이 저에게 고백했죠. 하지만 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어요. 누군지 얘기하지는 않았지만요. 그러다가 현하님의 말에서 그가 알게 된 거예요.”

“... 무슨 말인지 알겠다.”


아마도 나는 그때 ‘데리고 있었다’라고 대답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그렇게 표정이 굳었던 것이군.


“그리고 따라 나간 저에게 얘기하기 시작했죠. 영원히 사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에 대해서요.”

“정빈아, 그건...”

“들어봐요. 이제는 저도 아니까요. 해경정 중위는 말했어요. 영원히 사는 사람을 사랑하는 건... 신을 사랑하는 것과 비슷하다고요.”

“신...”


신이라니. 갑자기 속에서 웃음이 올라왔다. 어쩌면 그는 나보다 영생(永生)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중위는 나와 만날 걸 대비하여 질문을 준비했을 정도였으니, 생각이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신과는 누구도 함께 걸어가지 못하니까요.”


정빈이의 말은 떨리고 있었다. 억양은 힘들게 진동하며 상승곡선을 탔다. 나 역시 그녀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 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걸어가지 못한다는 것. 다른 모든 사람들은 자신과 함께 걸어가고, 함께 마지막을 지낼 사람이 존재했다. 설령 마지막의 시기가 다르더라도 비슷한 걸음을 할 거라는 믿음은 존재했다. 그러나 내 경우에는... 완전히 다르지 않는가. 난 그저 많은 사람들을 멀리서 바라보는 어떤 달과 같은 존재로 변해 있었다.


“만약 사람이 영원히 산다면, 그 사람은 죽어가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게 될 거라고도 말했죠. 또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건 인간이 아니라는 말도요.”


정빈이가 말한 해경정 중위의 지적은 정확했다. 분명히 내 자신의 존재는 무한하기에, 타인에게 분노를 가질 필요가 없었으니.


“맞아. 어쩌면 나에게 분노란 없을 지도 몰라. 타인에 대한 분노 같은 건 자신의 존재가 흔들릴 때 생기는 거니까. 나도 내 존재가 무한하다고 느낀 순간 분노는 사라졌어.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분노가 사라졌다고 해서 그 자리를 사랑이 채우는 건 아니라는 말이야. 달관이라는 게 사랑도 될 수 있지만 무관심도 될 수 있으니까.”

“현하님은 지금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으신가요?”

“글쎄. 네가 보기에는 어때? 내가 타인을 사랑한다고 봐?”

“모르겠어요.”

“난 아마 무관심에 가까울 거야.”

“그럼, 이제 영원히 사람을 사랑하시는 일은 없는가요?”

“그렇지 않겠지. 하지만, 그건 엄밀히 말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 거야.”

“왜 그런가요?”


정빈이의 말은 어려움을 담고 있었다.


“타인과 내가 이미 다른 존재라는 걸 인식한 순간부터, 그 둘 사이의 사랑은 같은 존재의 사랑이 아닌 것이 되니까. 이를테면... 내가 이 풍경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같다는 말이야.”

“그럼 이오타는요? 이오타는 사랑하지 않으셨나요?”

“그건...”


정빈이의 목소리 떨림이 심해지고 있었다.


“그때 겨울에 보여주신 모습은 뭐였죠? 그녀의 관 앞에서 눈물 흘리고, 아파하던 모습은 무엇이었나요?”

“정빈아.”

“사랑하셨잖아요! 이오타는 정말 사랑하셨잖아요!”

“정빈아.”

“정신을 잃을 만큼, 모든 걸 바칠 만큼 사랑하셨잖아요! 헌데 그렇게 사랑했으면서 왜 지금은, 지금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


폭발하듯 말을 마친 정빈이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뭔가 위로를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미안하다.”

“결국... 경정씨와 똑같은 말씀만 하시는군요. 그는 아마 대화의 끝이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겠죠...”

“.......”

“손 내밀면 닿을 것 같은데, 정말 곁에 있을 것 같은데...!! 그냥 바라만 봐야 한다는 게 너무... 너무 힘들어요...”


아무 말 없이 정빈이를 안고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녀는 내 품에서 계속 울고 있었다. 아마 한동안은 이렇게 있어야 되지 않을까.


가까이에 귀뚜라미 한 마리가 울고 있었다.

뒤쪽 창에서는 희미하게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11월 7일.

서울. 대학 강의실 안.


“그러니까, 현재의 자연 상황 하에서 최대 가능 인구는 5억이 채 되지 않는다...”


거의 다가온 겨울의 입구에서 나는 강의에 열중하고 있었다. 작년과는 달리 정빈이도 없었고 서울에서의 내 주변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기에, 한결 수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허나 제대로 말하자면 아무 것도 생각하기 싫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대로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고, 여름이 가기 전에... 나에게는 커다란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갑자기 강의실 문이 열리면서 한 사람이 들어왔다. 말끔한 밤색 정장을 입고 서류가방을 든 그 남자는 절제된 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노크도 없이 들어온 사람이었지만 풍기는 엄숙함은 나로 하여금 다른 데에 신경을 쓰지 못하게 만들었다. 잠시 뒤 교단 위까지 올라온 남자는 나에게 편지 봉투 하나를 건넸다.


“뭐죠?”

“스카이피아 참모총장님이 부탁하신 겁니다. 열어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작전에 대한 자세한 개요는 추후 손정빈 소령을 통해 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작전?”


봉투는 아주 고급스러운 재질의 종이로 되어 있었다. 나는 작은 풀로 된 봉인을 뜯고 연분홍색의 편지지 하나를 꺼냈다. 그곳에는 황철규 대장의 친필로 보이는 글씨가 또박또박하게 적혀 있었다.


현하님께.


오늘 오전에 있은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작전명 “향수Nostalgia”의 실행일이 정해졌습니다.

정확한 일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듬해인 A. C 5689년 4월 15일, 오전 11시입니다. 참고로 당 일시는 천우회와의 조정을 거친 후 결정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완벽하게 구상된 작전은 아니지만, 좀 더 자세한 걸 알고 싶으시다면 붙임을 참고해 주십시오.

그럼 진실이 있는 그곳에서 뵙겠습니다.

그때까지 건강하시길.


스카이피아 유니버설 도미니온 참모총장 대장 황철규


“음...”


붙임이라는 말에 다시 봉투 안을 살펴본 나는, 한 장의 인쇄용지가 더 있음을 확인하고 그것을 펼쳤다.


[Top Secret]


제 목 : 작전 실행 결의안

수 신 : 카탈리스트 우주작전사령관


1. 근 거 : 비밀문서 생산에 관한 조항 LOS-OP 2항 52조, A. C 5688년 11월 7일 주요 함장급 이상 주요 지휘관 회의시 참모총장 구두지시.

2. 상기 근거에 의거 다음 작전의 실행을 결의합니다.


*작전명: “향수Nostalgia.”

*발의 일시: A. C 5688년 11월 7일 08시 30분.

*실행 일시: A. C 5689년 4월 15일 11시 00분.

*목적: 전진 없는 현재의 상황을 타파하고 하늘의 완전한 질서 추구, 진실의 습득.

*위치: 추후 통보.

*투입 함대:


1함대사령부

1st "Angel Eyes" AE

2nd "Casablanca" CA

3rd "Britz" (Rebuild) BR

4th "Illuminator" IL

5th "Moon River" MR

6th "Over the Rainbow" OR

7th "Annihilator" AN

8th "White Fox" WF


2함대사령부

9th "Plasma Knight" PK

10th "Lightning Strike" LS

11th "It will be a Good day" GD

12th "Black Dragoon" BD

13th "Zikron" ZR

14th "Arizona" AR

15th "Home world" HW

16th "Princess of Flowers" PF


3함대사령부

17th "The Rule" TR

18th "Faust" FT

19th "Quiet Country Cafe" CC

20th "Mythology" MG

21st "Gurps" GS

22nd "Perfect Weapon" PW

23rd "Nameless" NL

24th "Holy Knight" HK


*투입함선(예정)


모함(Mother Ship Class) 22척.

중전함(Heavy Warship) 66척.


*다음 작전을 승인한다.


참모총장 대장 황철규

참모차장 중장 발렌틴 루타

1함대사령관 중장 선우휘

2함대사령관 중장 에밀리 이그니스

3함대사령관 중장 마스카츠 이타치


스카이피아 작전사령부-008


난 한동안 받아든 쪽지를 가만히 들고만 있었다. 기다리고는 있었지만 막상 날짜가 나오고, 또 그것이 예상 외로 빠른 것을 알게 되자 마음이 이상스레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이제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려는 걸까. 이때 가장 앞자리에서 앉아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태림이가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교수님, 무슨 일이죠?”

“아무래도 방학이라도 해야 될 것 같군. 일단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다.”

“네?”

“내년 봄에 하늘의 마지막 싸움이 일어날 거야.”

“...!!”


순간 강의실 내로 정적이 흘렀다. 그러고 보니 내가 여기에 대해서 말을 해준 적이 없는 것 같군. 예상대로 잠시 뒤 태림이가 질문을 던졌다.


“하늘의 마지막 싸움이라뇨?”

“말 그대로다. 아마 이 전투에서 모든 것이 판가름 날 거야.”

“어떻게요? 설마 하늘을 상대로 전투라도 하시는 겁니까?”

“아직 자세한 걸 말하기는 일러. 시간도 좀 남았고. 여하튼 모든 것이 변할 거다.”


나는 이렇게 말을 끊고 편지를 가져온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그는 함께 고개를 숙이다가 뭔가 생각이 난 듯, 서류 가방에서 종이봉투 하나를 꺼냈다.


“이것도 함께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뭐죠?”

“그때가면 필요하실 거라고 했습니다.”

“필요?”


아직까지도 뭔가 받을 게 있었나? 나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제법 큰 봉투를 받아서 열기 시작했다. 그러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강의실 내부를 조용히 채웠고, 이윽고 오래된 책 한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걸 본 난 숨이 턱 멈춤을 느꼈다.


“이, 이건!!”

“꼭 필요하실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그는 마치 자신에게 묻지 말라는 움직임으로 강의실을 빠져 나갔다. 하지만 책에 정신이 쏠려 있던 나는 그가 나가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황철규 대장...!!’


책을 단상 위에 올려놓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이 책은 그의 손으로 들어갔던 것인가. 갑자기 내가 카타클리즘을 끝내고 무엇을 남겼는지 생각했다. 하늘의 전투는 다시 시작되었고, 그들의 신앙은 여전했으며, 땅은 노쇠하여 사라져가는 지금.

500년 전 카타클리즘이 남긴 건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인가.


돌아온 이 책은 나에게 또 한번의 카타클리즘을 강요했다. 아마도 이 책을 중심으로 하늘은 불나방같이 달려들 것이리라. 불나방같이 사그라질 것이리라. 불나방같이 잊어버릴 것이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이 하늘에 갔다는 걸 완전히 잊어야 하겠죠.’


인간은 완전히 기억하지도, 완전히 잊지도 못한다. 기억과 망각의 완전한 끝은 없다. 오직 단 한 가지 방법을 빼고. 기억과 망각을 할 존재를 사라지게 만들면 된다. 하지만 이 방법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부정하는 것.


나는 인간이다.


한동안 책은 단상 위에 있었다. 그 뒤로는 초점이 맞지 않은 강의실과 학생들이 넓게 퍼져 있었다. 이때 태림이의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이번에는 책의 형상이 희미하게 변했다.


“무슨 책이죠?”

“알고 싶은가, 태림군?”

“네.”


난 쓰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간단한 거야. 대충 알 거라고 믿는데.”


말하기 싫었다. 태림이 역시 내 마음을 아는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써먹은 걸 또 써먹는 건 예의가 아닐지도 모르지. 하지만 같은 일을 두 번 한다고 기억하는 것도 아니야. 어차피 결국에는 모두가 사라지는 결말이 오게 된 건가. 하늘도 사라지고, 곧이어 땅도 사라지겠지.”

“그게 인간의 길이라면 거부할 수 없겠죠.”

“...!!”


난 화들짝 놀라면서 현찬이를 바라보았다. 전혀 이런 말은 하지 않을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현찬이의 말은 의외로 담담하면서도 깔끔했다.


“두려워하는 것 보다는 낫다고 생각해요.”

“그러냐.”

“네.”

“좋아. 그런데 너희들에게 부탁이 하나 있다.”

“뭔데요?”

“난 너희들이 하늘의 마지막을 봐주었으면 한다.”


내 제안에 학생들은 매우 놀란 눈치였다. 하기야 곧 전화(戰火)로 휩싸일 곳으로 가자고 하니 놀랄 만도 하겠지. 그러나 난 별 일 아니라는 표정을 지어주었다.


“괜찮아. 그냥 바라만 봐주면 돼. 위험한 일은 없을 거야.”

“으음... 좋아요. 그런데 언제입니까?”

“내년 4월 15일.”

“겨울을 생각해면 그렇게 많이 남지는 않았군요.”


인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전투는 겨울이 끝나는 즉시 시작될 것이다. 그렇게 오늘 수업을 끝으로 2학기는 마무리 지어졌다. 이제 남은 건 추운 겨울 뿐. 나는 이 시간을 서울에서 보낼까 부산에서 보낼까 고민하다가 서울에 있기로 마음먹었다.





최종화 : 걷지 못하는 자들의 싸움(1)


-------------------------------------------------------


그럼. 항상 건강하시길.


From PlasmaKNight.(I.N)

Written By PlasmaKNight.(I.N)


이상, 제 4의 기사 플라즈마 나이트였습니다.



* 정규마스터님에 의해서 문피아 - 자연 - 일반 (gon) 에서 문피아 - 하 - 연재 완결(etc_fine) 으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8-03 00:39)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나는걸어갑니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84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20) +12 08.05.02 1,115 2 9쪽
83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19) +17 08.05.01 622 2 11쪽
82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18) +7 08.01.20 754 2 10쪽
81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17) +9 07.12.25 777 3 10쪽
80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16) +11 07.11.17 761 2 11쪽
79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15) +7 07.11.11 652 2 14쪽
78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14) +8 07.11.03 744 2 13쪽
77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13) +5 07.10.27 707 2 13쪽
76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12) +8 07.10.24 718 2 11쪽
75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11) +11 07.10.22 817 2 13쪽
74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10) +15 07.08.28 796 2 13쪽
73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9) +6 07.08.17 872 2 12쪽
72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8) +5 07.08.13 662 2 12쪽
71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7) +6 07.08.11 806 2 12쪽
70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6) +7 07.06.03 913 2 12쪽
69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5) +3 07.06.03 821 2 11쪽
68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4) +4 07.06.03 860 2 15쪽
67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3) +3 07.05.20 876 2 15쪽
66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2) +5 07.05.17 930 4 17쪽
65 나는 걸어갑니다 -번외 (1) +6 07.05.14 1,202 2 20쪽
64 나는 걸어갑니다 (에필로그) -完 +30 07.04.15 2,123 2 12쪽
63 나는 걸어갑니다 최종화 (4) +3 07.04.15 1,226 2 15쪽
62 나는 걸어갑니다 최종화 (3) +3 07.04.14 1,008 2 12쪽
61 나는 걸어갑니다 최종화 (2) +4 07.04.11 993 2 14쪽
60 나는 걸어갑니다 최종화 (1) +5 07.04.10 1,080 2 19쪽
» 나는 걸어갑니다 19화 (2) +4 07.04.06 1,067 2 26쪽
58 나는 걸어갑니다 19화 (1) +4 07.04.04 1,020 2 17쪽
57 나는 걸어갑니다 18화 (2) +6 07.04.02 1,023 2 12쪽
56 나는 걸어갑니다 18화 (1) +5 07.04.01 1,136 3 29쪽
55 나는 걸어갑니다 17화 (3) +6 07.03.30 1,044 2 16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