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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ition :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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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나
작품등록일 :
2020.01.21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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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4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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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2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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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 슬픔(Grief) (3-3)

DUMMY

싸늘한 그의 말에 정은정 과장이 대답 없이 서류를 넘겼다. 가장 먼저 들어온 내용은 ‘대략 1개월 전, 일본 선적으로 위장하여 부산에 입항한 북한 화물선을 통해 다량의 마약이 유통 되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 물량은 국내 주류 마약인 필로폰과 다른 헤로인 계열로, 높은 순도를 바탕으로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는 문구도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내용이 이어졌다. 바로 1~2주 내로 위장선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화물선의 부산 입항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나머지 분량은 이를 입증하는 광범위한 근거 자료들이었다. 정은정 과장이 미간을 좁히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니까, 향후 들어올 화물선에 대해 조사가 필요하다는 건가요?”


강치환 수사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추가적인 정보를 요구하는 그녀의 시선에, 표정을 구기면서 입을 열었다.


“... 물론 입항하는 선박과 선원에 대한 조사는 꼼꼼히 하고 있는데... 문제가 몇 가지 있죠.”


그는 살짝 회의실 문을 한 번 바라본 후, 소리를 낮춰 말을 이어갔다.


“먼저 유입 루트를 확실하게 알 수 없다는 점, 그리고 한 번에 유입된 양이 엄청나다는 점, 마지막으로... 순도가 높지만 효과는 크지 않다는 거죠. 확인한 바로는 시중가도 저렴하게 잡혀있죠.”


정은정 과장의 미간이 더더욱 좁혀졌다. 앞 두 개의 문제만 놓고 보면 지금 상황에서 나올 결론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즉, 유통에 볼리셔니스트가 가담했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차가운 눈 그대로 강치환 수사관이 고개를 위아래로 짧게 흔들었다. 이때 함성필 대리가 말했다.


“순도가 높다... 불순물이 적다... 꽤 조직적인 생산자가 배후에 있겠군요. 거기에 효과가 강하지 않다... 간 보기 물량을 대량으로 풀다니, 완전히 작정하고 달려든다는 얘기처럼 들리는군요.”


이번에도 강치환 수사관은 대답 없이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정은정 과장은 은근 서로를 견제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서류를 앞뒤로 넘기며 신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저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건가요? 이 일과 관련해서?”


강치환 수사관의 눈에 또다시 서리가 내려앉았다. 그는 눈동자를 내리깔면서 차분히 말했다.


“특별한 건 없습니다. 조만간 볼리셔니스트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작전안이 나올 겁니다. 그냥 거기에 맞춰 행동해 주시죠.”

“......”


철저하게 자신들의 명령에 따르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은 양보할 수 없었다. 적어도 거동할 수 있는 공간은 만들어야만 했다. 정은정 과장이 말했다.


“작전안이 나오면 저희 의견을 드릴게요.”

“의견은 필요 없소.”

“제가 생각하기에는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정말 괜찮은가요?”


그녀의 말에 강치환 수사관의 눈빛이 약간 바뀌었다. 설명을 요구하는 것 같은 눈치였다. 정은정 과장은 서류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지역을 좀먹는 행위가 볼리셔니스트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분명 예지가 있었을 텐데 대응이 없었다는 점, 대충 1개월 전이라면 상어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하기 시작한 시기라는 점, 우리나라가 마약에서는 그리 특별한 시장이 아님에도, 큰돈을 들여 시장을 공략하려고 한 점...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지 않나요?”

“......”

“물론 다 준비하고 계시겠지만... 노파심에 말씀드려요.”


가볍게 말을 끝낸 그녀를 앞에 두고 강치환 수사관의 얼굴에 그늘이 살짝 스쳐 지나갔다.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조용히 말했다.


“어쨌든 작전안이 나오면 알려주겠소.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 좋소.”

“그래요. 고생하셨어요.”


정은정 과장은 별 말 없이 함성필 대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함성필 대리는 순순히 일어서는 그녀에게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정은정 과장은 눈빛으로 그를 조용히 시키고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강치환 수사관은 혼자가 된 회의실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이때 문이 열리면서 중년의 남자 하나가 들어왔다. 적당히 살찐 모습에 벗겨진 머리만 봐서는 중간 관리자 정도로 보였다. 강치환 수사관이 그를 보고 자리에 고쳐 앉았다. 남자가 말했다.


“그래, 어때?”

“쉽게 굽히지는 않는군요.”

“흥... 제깟 놈들이 그래봤자지.”


남자가 회의실 문 쪽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지금 막 사무실 밖으로 나가는 두 사람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남자는 사라지는 정은정 과장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


“진짜로 젊은 계집년을 보내다니 한강진이도 맛이 갔구만. 싸움 좀 한다고 과장이면 개나 소나 과장이겠군. 설마, 희생양으로 보낸 건가?”

“그런 건 아닌 거 같습니다. 말은 잘 하더군요.”

“아무튼 선봉에 세워서 칼질이나 실컷 하게 하라고. 공을 세우게 하지는 말고.”

“......”

“생긴 건 반반하던데 또 모르지. 그쪽 칼질도 잘 하는 거 아냐? 크흐흐흐...”

”......“


시답잖은 농을 던진 남자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밖으로 나가려던 남자는 뒤돌아 강치환 수사관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잘 「관리」 하라고. 알겠지?“

”알겠습니다.“


상부의 의도가 조직 아래쪽으로 내려오면서 바뀌는 경우는 종종 있는 일이었다. 사실 최초 들었던 얘기는 상부가 이번 파견에 어느 정도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이었다. 파견이라고는 해도 그토록 염원하던 「볼리셔니스트」란 존재를 조직에 끌어들였기에. 따라서 그들의 용처(用處)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말도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의도가 하부 조직에는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특수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고, 과장이 직접 왔다고 했지만 젊은 여자였으며, 더구나 작전에 실패한 실패자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과 대등하게 무언가를 하라는 상부의 뉘앙스를 대공수사실 수사관들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당장 자신부터 심적 반발이 심했다. 꾹 눌러 참은 화가 편안해 보이는 여자의 얼굴을 본 순간 터져 나왔다. 징벌적 성격으로 이루어진 파견에서, 위축되지 않은 저 표정은 뭐란 말인가. 게다가 인외(人外)의 힘을 가진 괴물이라기에 대인관계가 서투를 것이고 따라서 이용하기 쉬울 거라는 예상도 크게 빗나갔다.


오늘 만난 사람은 간부의 느낌을 물씬 풍기면서 옆의 하급자를 적절히 통제할 수 있는, 그저 노련한 현장 지휘관이었다. 아마도 가슴께에서 흔들리는 가죽 홀스터 – 그 안에 있어야 할 「칼」이라는 물건은 청사 진입 때 맡겨 두었을 것이 분명한 - 만 아니면 정말로 과장으로 봐도 무리는 없을 터.


”제기랄.“


욕지기를 삼키며 강치환 조사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류를 정리한 그는 회의실 밖으로 나가 사무실 자기 자리로 향했다.


이때 주변에서 몇몇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다가왔다. 주로 오늘 왔다 간 9국 사람들의 신변에 관한 물음이었다. 하지만 그다지 대답하고픈 생각이 없던 강치환 수사관은 질문을 잘라내고 자기 자리에 돌아갔다.


그는 속칭 ‘호사가’들이 했던 추측을 떠올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생각 외로 실제와 추측 사이의 괴리가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 9국 볼리셔니스트의 파견이 결정되면서 내부적으로는 난리 아닌 난리가 났다. 실패자들과 같이 일하라는 상부의 뉘앙스에 대한 반발은 둘째 치고, 그들이 어떤 인간인지에 대한 추측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알음알음 퍼진 9국 현장지원과의 전투력 분석 문서, 어디선가 구해온 신원조회 문서, 여러 번 팩스를 통하면서 열화되어 알아보기도 힘든 증명사진 몇 장이 소스의 전부였다. 그러나 그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했다. 온갖 얘기들이 사무실을 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추측성 분석들이 입과 입을 통해 흩어져 갔다.


거기에 괴담과도 같은 「볼리셔니스트」에 대한 자료들과 보안사 「V」에 대한 정보가 섞였다. ‘외계인이 나타났다’ 수준의 기사를 싣는 주간지의 연재 기사와 V가 보여준 잔혹하면서 인간 백정 같은 에피소드들이었다. 그걸 듣는 자신도 실제인지 의심이 들 정도의 이야기였다. 이렇게 B급 슬래셔 영화의 잔혹함까지 더해지자 호사가들의 입방정은 극에 달했다.


당사자들이 몰라서 다행이지, 거의 조리돌림에 가까운 말들이었다. 여기에는 간극이 큰 조건들 – 젊은 여자, 과장 – 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아마도 나이 좀 있는 남자가 왔다면 이 정도의 관심은 아니었겠지.


어쨌든 입방아에 오르내린 여러 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몇 가지 키워드로 요약되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았다. 「실패자」, 「잔혹한 괴물」, 「젊은 여자」. 어쩌면 부정적인 요소만 잔뜩 남은 상태.


추측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실로 받아들여져 갔다. 아무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임에도 멋대로 형태를 만들어갔다. 덩치 크고 투박하며 무서운 얼굴의 여자일 거라는 구체적인 소문까지 퍼져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여론에 왜곡된 허상은 이미 대공수사실 전체에 퍼져 있었다.


하지만 이 이미지는, 오늘 첫 만남에서 상당히 무너지고 말았다. 여자는 아름다웠고 남자는 선이 굵고 준수했다. 특히 여자는 누가 봐도 한 번쯤 시선을 돌릴 정도였다. 적당한 화장과 단정한 정장은 성숙미를 뿜어냈다. 아마 다들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자신들의 추측이 틀린 것에 꽤나 당황했으리라.


대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자는 당황하지 않았고 차분하게 반응했으며 조리 있게 말을 풀어나갔다. 그리고 박한 정보에서 날카로운 분석도 할 줄 알았다.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이루어진 30분 정도의 만남은 미리 정의해 놓은 키워드들의 느낌을 희미하게 만들어 버렸다.


”......“


문제는 또 있었다. 아까 그녀가 지적한, 분명 고려할 가치가 있는 사항들이었다. 「예지」의 존재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작동 메커니즘은 전혀 모르는 상태. 설령 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결재라인을 설득할 자신 같은 건 없었다.


”후...“


또한 이 시점에서 수익성 없는 시장을 두드리는 것도 의문이었다. 최근 소련-아프카니스탄 전쟁의 혼란을 틈타 대량의 아프카니스탄 산(産) 헤로인이 세계 각국으로 유통된다는 정보가 있었지만, 굳이 이곳까지 올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남자의 얘기처럼 간 보기 물량으로 보기에도 순도도 높고 양도 너무 많았다.


자신 역시 의문을 느끼고 비슷한 내용을 보고하긴 했다. 상부도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올림픽을 앞두고 일어난 대규모 테러에 모든 시선은 대(對) 테러에 몰려 있었다.


물론 마약도 급한 문제이긴 매한가지였지만, 지원은 후순위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새로 파견된 볼리셔니스트들이 이 작전에 투입된 것이었다. 아마 상부는 볼리셔니스트를 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할 획기적인 수단 정도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처럼 볼리셔니스트의 활약을 은근히 기대하는 상부와, 그걸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험하게 굴리려는 윗선과 관리자들, 그리고 그들과 9국을 연결해야 하는 자신... 이제 입사 3년 차의 신입인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무거웠다.


‘18.’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혀뿌리를 지나면서 한숨으로 변했다. 강치환 수사관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흔들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다음 화물선 입항 날짜를 고려하면 빨리 작전안을 정리하고 상부에 보고할 필요가 있었다.


* * * *


다음날, 1988년 2월 2일 화요일 10시 4분.

서울 모처(某處), 국가안전기획부 「제9국」 국장실.


작가의말

시험이 있어서 내일과 모레 연재는 어려울 거 같습니다.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항상 읽어주시는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행복하세요.

From PlasmaK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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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6화 : 슬픔(Grief) (3-2) 20.10.17 46 0 10쪽
107 6화 : 슬픔(Grief) (3-1) 20.10.16 41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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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6화 : 슬픔(Grief) (2-3) 20.10.10 46 1 12쪽
104 6화 : 슬픔(Grief) (2-2) 20.10.09 48 0 14쪽
103 6화 : 슬픔(Grief) (2-1) 20.10.08 48 0 13쪽
102 6화 : 슬픔(Grief) (1-3) 20.09.26 49 0 14쪽
101 6화 : 슬픔(Grief) (1-2) +2 20.09.25 62 1 13쪽
100 6화 : 슬픔(Grief) (1-1) 20.09.24 57 0 13쪽
99 5화 : 추적(Pursuit) (6-3) (1부 끝) 20.09.19 56 0 15쪽
98 5화 : 추적(Pursuit) (6-2) 20.09.18 52 0 12쪽
97 5화 : 추적(Pursuit) (6-1) 20.09.17 49 1 12쪽
96 5화 : 추적(Pursuit) (5-5) 20.09.12 48 0 12쪽
95 5화 : 추적(Pursuit) (5-4) 20.09.11 49 1 13쪽
94 5화 : 추적(Pursuit) (5-3) 20.09.10 51 0 15쪽
93 5화 : 추적(Pursuit) (5-2) 20.09.05 47 1 11쪽
92 5화 : 추적(Pursuit) (5-1) 20.09.04 48 0 22쪽
91 5화 : 추적(Pursuit) (4-5) 20.06.14 52 0 13쪽
90 5화 : 추적(Pursuit) (4-4) 20.06.12 49 0 15쪽
89 5화 : 추적(Pursuit) (4-3) 20.06.01 47 1 10쪽
88 5화 : 추적(Pursuit) (4-2) 20.05.31 52 0 11쪽
87 5화 : 추적(Pursuit) (4-1) 20.05.30 48 1 10쪽
86 5화 : 추적(Pursuit) (3-4) 20.05.29 49 0 12쪽
85 5화 : 추적(Pursuit) (3-3) 20.05.25 52 1 12쪽
84 5화 : 추적(Pursuit) (3-2) 20.05.18 47 1 13쪽
83 5화 : 추적(Pursuit) (3-1) 20.05.17 48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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