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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ition :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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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나
작품등록일 :
2020.01.21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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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4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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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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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6화 : 슬픔(Grief) (3-2)

DUMMY

* * * *


포도스트로마의 북한 입국 6일 후, 1988년 2월 1일 월요일 8시 38분.

서울 예장동, 안기부 본부


일반적인 사무실 분위기였다. 아침부터 출근한 사람들은 자기 일을 앞에 놓고 분주했다. 전화하는 사람, 서류를 보거나 만드는 사람들의 모습은 여타 회사들과 다르지 않았다. 바쁜 타이프 소리 사이로는 이질적인 컴퓨터 키보드 소리가 이따금 섞여 있었다.


정은정 과장과 함성필 대리는 그런 사무실 사이를 지나, 얼떨떨한 표정으로 회의실을 향하는 중이었다. 젊은 남자 수사관 하나가 그들을 안내했다. 책상 하나하나를 지날 때마다 힐끗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큰 관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파견 첫날.


어느 정도 텃세를 각오했지만 예상은 달랐다. 오히려 무관심에 가까웠다. 인사를 위해 만난 2차장이나 실장의 반응은 데면데면했다. 그러나 잠시 뒤 회의실 문이 닫힌 순간, 그것이 틀렸음을 알 수 있었다.


“앉으시죠.”


회의실 문을 닫는 젊은 수사관은 말 그대로 젊었다. 아무리 많이 봐도 20대 중반을 넘지 않을 나이였다. 하지만 그런 나이와는 별개로 바라보는 표정은 매서웠다. 마르면서 날카로운 얼굴은 정확히 두 사람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이어가던 침묵을 깨고 수사관이 입을 열었다. 얼음같이 차가운 목소리였다.


“난 9국 파견자들을 관리할 강치환 수사관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순간 정은정 과장이 손을 들어 함성필 대리를 제지했다. 그러고는 강치환 수사관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관리... 라. 어떤 의미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단어 그대로입니다.”

“알겠습니다.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은정 과장이 순순히 대답하자 강치환 수사관의 표정이 조금 흔들렸다. 아마도 격한 반발을 예상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파견 전 들었던 한강진 국장의 예상이 그대로 맞았음에 놀라울 따름이었다.


저번 주 금요일 오후, 국장실에서 그가 말했다.


“분명 기 싸움을 하려 들겠지. 시작하자마자 꽤 거친 언사를 던질 거야. 애송이가 나올 지도 모르고.”

“그럼 어떻게 할까요??”

“수긍하면서 적당히 맞춰 줘.”

“네?”

“세게 나온다는 건 관심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물론 업무 세부 사항을 협의할 때는 가차 없어도, 일단은 그쪽에서 뭐라 하던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면 하네.”

“알겠습니다.”

“두 사람 다 욱 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정은정 과장은 부드러웠던 그의 마지막 표정을 떠올리며 강치환 수사관을 바라보았다. 조금 얼굴을 가다듬던 그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자리는 이따가 안내해 드리죠. 먼저 이걸 읽어 주십시오.”


그는 몇 장으로 된 서류 두 부를 각각의 앞에 던졌다. 정은정 과장은 시선으로 함성필 대리를 진정시키면서, 느릿한 손놀림으로 그것을 펼쳐봤다. 그곳에는 각종 복잡한 조건이 가득 담긴 비밀서약서와 근무 수칙 등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마지막 페이지를 펼치자 강치환 수사관이 종용하듯 손가락을 뻗어왔다.


“거기 끝부분에 사인하면 됩니다.”

“좀 읽어보고 할까 하는데요.”

“특별한 내용은 없어요. 그냥 하면 됩니다.”

“특별한 내용이 없다면 이렇게 복잡하지는 않을 거 같네요. 읽어보고 내일 드려도 되죠?”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강치환 수사관은 약간 물러서는 것 같았지만, 여전히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자리로 가시죠.”


그가 일어섰고 회의실 문이 다시 열렸다. 세 사람은 사무실 중간을 가로질러 구석을 향해 움직였다. 그렇게 안내받은 책상은 구석에 있었지만, 말끔하게 정리되어 깨끗한 은색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주변에는 사람이 없어서 크게 주목받지도 않았다.


“여기를 쓰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오늘은 방금 문서를 읽어보시죠. 이따가 다시 오죠.”


어색한 인사가 끝나자 강치환 수사관은 사무실 안쪽으로 휙 돌아섰다. 그렇게 거리가 멀어지자 정은정 과장과 함성필 대리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 이때 함성필 대리가 분통을 터트리며 말했다. 다만 목소리를 낮춘 상태였다.


“이런 대접을 받을 줄은 몰랐네요.”


자극적인 단어 - 「관리」 같은 - 와 태도에 화가 난 듯, 그는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정은정 과장은 오히려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팀장님 말씀대로 흘러가긴 하는데... 좀 알쏭달쏭하네.”

“어떤 게요?”

“진짜 기를 누를 생각이었다면 아마 진짜 허름한 자리를 줬을 테니까.”

“음...”

“조금 복잡한 거 같아. 일단은 기다려 보자.”

“네.”


정은정 과장은 불편한 의자에 등을 기대며 사무실 먼 곳의 천정을 바라보았다. 모두 자기 일에 집중하는 분위기가 공간 전체에 퍼져 있었지만, 자신들을 향한 묘한 기류 역시 느껴졌다. 마치 힐끗힐끗 훔쳐보는 것과도 비슷했다. 거기에는 드러난 것 이상으로 복잡한 감정들이 섞여 있었다.


그녀 역시 조직 생활을 한 건 오래되지 않았다. 하지만 15명이 넘는 사람의 생명을 맡은, 과장 자리에서의 시간은 짧았음에도 많은 경험을 가져다주었다. 특히 언제나 죽음이 앞에 있다는 절박함과 간절함은 조직 분위기와 흐름을 읽을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느끼고 있는 이러한 복잡한 ‘냄새’ 역시, 이러한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렇게 아무 일 없이 의자에 기댄 채 뒹굴뒹굴한 지 10분 정도 지난 때였다. 구둣발 소리 하나가 커지면서 정은정 과장 쪽을 향해왔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세우면서 함성필 대리의 어깨를 두드렸다. 졸던 그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잠시 뒤 강치환 수사관이 서류뭉치 하나를 들고 다가왔다. 꽤 두꺼운 서류였다.


“......”


하지만 그는 그녀 앞에서 서류를 들고 가만히 서 있었다. 잠시 뭔가를 고민하던 그는 얼음장 같은 표정으로 그것을 내밀며 말했다.


“일단은 명령대로 해야겠군요. 따라오시죠.”

“...?”


정은정 과장은 마치 던지듯 건넨 서류를 엉겁결에 받았다. 그리고 기다리지도 않고 돌아선 강치환 수사관을 따라가기 위해, 함성필 대리와 함께 일어섰다.


자리를 옮긴 회의실에서도 침묵은 이어졌다. 정은정 과장은 받은 서류를 넘겨보려다 강치환 수사관의 반응을 기다리기로 했다. 이윽고 그가 차가운 눈 뒤로 은근한 분노를 드러내며 말했다.


“작전에 실패했음에도 그런 표정으로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게 놀랍군요. 게다가 뒤치다꺼리까지 하게 만들다니요.”

“......”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 말에 목 뒤쪽으로 긴장이 서렸다. 옆자리의 함성필 대리가 분을 삭이며 깊은숨을 내뱉는 동안, 그녀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변명을 내리눌렀다. 그리고 그녀는 분명 ‘한 번은 들을 거라던’ 한강진 국장의 말을 곱씹었다.


“걱정하는 건 아니지만... 노파심에 얘기해 두겠네. 실패에 대한 언급도 분명 있겠지만 그냥 넘기도록 하게. 상대가 더 강하게 나올 명분은 주지 않는 걸로.”


그녀는 강치환 수사관의 눈을 빤히 쳐다보다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래요. 실패했죠. 그래서 여기 있는 겁니다. 다시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뻔뻔하게...!”

“보다 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좀 뻔뻔해질 필요도 있지 않을까요?”


변하지 않는 얼굴로 말하는 그녀를 보며, 강치환 수사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정은정 과장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서류를 자기 앞으로 정리하며 말했다.


“힐난 받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말씀처럼 명백히 실패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기에 저희도 여기 있는 겁니다.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정론에 가까운 말이었다. 강치환 수사관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쏘아붙이듯 응수했다.


“허울뿐인 과장 직함을 달고 있는 자를 보내면서 말이오?!”


이 말을 들은 순간 정은정 과장은 알쏭달쏭했던 감정의 실타래 한쪽을 잡았음을 느꼈다. 지금 이 사람들은 자신이 제대로 된 과장이 아니라고 알고 있구나. 하긴 30살도 되지 않은 젊은 여자가 한 과의 과장이라면 믿을 사람들은 많지 않겠지.


‘그래서 그랬나.’


뭔가 심하게 무시당한 느낌이었지만 마음은 의외로 편안했다. 한강진 국장을 비롯하여 뒤에서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여유 있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건 보시면 아실 거예요. 허울뿐인지 아닌지는.”

“...!!”


정은정 과장의 웃음 섞인 반응에, 강치환 수사관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 정도까지는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젊고 거칠다고 해도 그도 안기부의 수사관이었다. 그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필사적으로 누르며 숨을 골랐다.


이내 안정을 찾은 강치환 수사관이었다. 얼음장 같은 얼굴로 돌아온 그가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은정 과장이 들고 있는 서류를 향해 손가락을 들었다.


“좋아요... 그럼 보여주시죠. 시작은 그 사건에서부터입니다.”

“......”


정은정 과장은 시선을 돌려 들고 있는 서류를 한 장 넘겼다. 제목은 간단했다. 「불법약물 유통에 관한 조사」였다. 하지만 이상함을 느낀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파견 온 이곳은 대공수사실이 아닌가.


“불법약물이라고요?”

“... 좀 더 읽고 얘기하세요.”


작가의말

항상 읽어주시는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행복하세요.

From PlasmaK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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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6화 : 슬픔(Grief) (2-3) 20.10.10 46 1 12쪽
104 6화 : 슬픔(Grief) (2-2) 20.10.09 47 0 14쪽
103 6화 : 슬픔(Grief) (2-1) 20.10.08 47 0 13쪽
102 6화 : 슬픔(Grief) (1-3) 20.09.26 49 0 14쪽
101 6화 : 슬픔(Grief) (1-2) +2 20.09.25 61 1 13쪽
100 6화 : 슬픔(Grief) (1-1) 20.09.24 56 0 13쪽
99 5화 : 추적(Pursuit) (6-3) (1부 끝) 20.09.19 56 0 15쪽
98 5화 : 추적(Pursuit) (6-2) 20.09.18 52 0 12쪽
97 5화 : 추적(Pursuit) (6-1) 20.09.17 49 1 12쪽
96 5화 : 추적(Pursuit) (5-5) 20.09.12 47 0 12쪽
95 5화 : 추적(Pursuit) (5-4) 20.09.11 48 1 13쪽
94 5화 : 추적(Pursuit) (5-3) 20.09.10 50 0 15쪽
93 5화 : 추적(Pursuit) (5-2) 20.09.05 47 1 11쪽
92 5화 : 추적(Pursuit) (5-1) 20.09.04 48 0 22쪽
91 5화 : 추적(Pursuit) (4-5) 20.06.14 52 0 13쪽
90 5화 : 추적(Pursuit) (4-4) 20.06.12 49 0 15쪽
89 5화 : 추적(Pursuit) (4-3) 20.06.01 46 1 10쪽
88 5화 : 추적(Pursuit) (4-2) 20.05.31 51 0 11쪽
87 5화 : 추적(Pursuit) (4-1) 20.05.30 47 1 10쪽
86 5화 : 추적(Pursuit) (3-4) 20.05.29 49 0 12쪽
85 5화 : 추적(Pursuit) (3-3) 20.05.25 52 1 12쪽
84 5화 : 추적(Pursuit) (3-2) 20.05.18 46 1 13쪽
83 5화 : 추적(Pursuit) (3-1) 20.05.17 48 0 13쪽
82 5화 : 추적(Pursuit) (2-5) 20.05.15 48 0 19쪽
81 5화 : 추적(Pursuit) (2-4) 20.05.12 48 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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