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위무사 추월 제52화
무협소설보다는, '소설무협'을 써 보고 싶었습니다. 수사적 표현이기는 하지만, 무협이라는 장르를 가진 소설을 써 보고 싶은 마음을 담은 표현입니다.
[호위무사 추월] 제52화 (제11장) 부여성의 혈투
“그 점은 미안하구나. 그러나 역사를 봐라. 장자가 아닌 내가 권좌에 오르려면 피를 흘릴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네 피가 나를 황제로 만들 것이다. 기꺼이 그 제물이 되어줄 수는 없겠느냐?”
신념은 확고할수록 무서운 것이었다. 보다 못한 추월이 다시 나섰다.
“형제간에 어찌 그리 모질 수 있는지요?”
“추월, 추월이라. 과연 천하절색이야. 거기다 무공고수이고. 나이만 어리다면 거두고 싶군. 진작 궁에서 그대를 눈여겨보지 못한 게 아쉽군.”
동문서답이었다. 하긴 추월은 2 황자가 보기에는 일일이 대꾸할 필요도 없는 하찮은 호위무사일 뿐이었다.
“전하, 추월이란 계집을 사로잡아 대령(待令)하겠나이다.”
감히 대화에 끼어들지 못하고 뒷전에 있던 첩형관 초무심이 허리를 굽히며 2 황자에게 아뢰었다.
“아니다. 큰일을 앞두고서 계집에 홀려서야 되겠느냐. 계집이야 차고 넘치는 것. 그건 그렇고 첩형관, 언제까지 이 일을 마무리할 생각인가?”
“오늘 중으로 주루를 불태우는 한이 있더라도 명을 봉행하겠나이다.”
초무심이 넙죽 절하며 결의를 보이자 2 황자는 가볍게 안면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대는 어찌 백성 귀한 줄을 모르느냐? 빈대 한 마리 잡자고 화공을 하면 주루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상점들과 그 백성들은 어쩌란 말이냐? 그 원성이 고스란히 폐하께 가지 않겠느냐?”
“송구하옵나이다. 소신이 식견이 부족하여 전하의 심기를 크게 어지럽혔나이다.”
초무심은 냉큼 땅바닥에 오체투지하였다. 그러고도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그만 탓할 노릇도 아니었다. 동창이 언제 백성 걱정을 해본 적이 있기나 하겠는가?
“무릇 신하라면 윗전의 심기를 살펴 일을 처리해야 하는 법,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온 것은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아우의 근황도 살피고, 폐하의 소환명령 조서도 전달하기 위함이야. 오해 없도록.”
2 황자는 마땅치 않다는 고갯짓을 하며 마차에 올랐다. 아랫것들은 품위를 몰랐다. 죽일 때 죽이더라도 그 방법이 장차 보위에 오를 자신에게 누가 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었다.
누군가의 칼인지도 모르게 3 황자가 비명횡사하고 나면 자신이 애도를 표하여 형인 2 황자의 도리를 다하는 모습을 조정의 대소신료들에게 보여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당연히 백성들에게는 아우를 잃은 2 황자의 애통해하는 마음이 어느덧 덕으로 변해 입에서 입으로 건너갈 터였다.
그런데 첩형관이란 놈이 봉황의 뜻을 제대로 읽지 못하다니. 자칫 형이 아우를 죽였다는 오명을 덮어쓸 뻔하지 않았는가?
2 황자는 행여 착오라도 생길까 저어하여 측근을 남겨 수시로 첩형관을 깨우치게 하였다.
“하명대로 봉행(奉行)하겠나이다.”
봉황의 큰 뜻을 뱁새가 알았는지 몰랐는지, 2 황자가 탄 마차가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초무심은 오랫동안 굽힌 허리를 펴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상반신을 일으켜 세우는 순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수도 없이 많은 화살이 월후에게 날아들었다.
“공자님, 위험합니다.”
타노는 충분히 대비하고 있었다. 그는 월후의 앞을 가로막고 나서며 철죽을 맹렬히 휘둘러 화살을 쳐냈다.
무상검결, 회 -
철죽에 맞고 튕겨 나가는 화살을 추월이 회자결을 써서 처음 쏘아질 때보다 더 강하게 되돌려 보냈다.
윽 으윽 윽 -
활을 쏜 자들이 대중없이 쓰러졌고, 초무심은 황급히 수하들 등 뒤로 숨어들어 갔다.
내친김에 추월과 타노가 초무심을 쫓아 주루 밖으로 나오자, 곧바로 살수들이 뒤로 빠지고 남궁철우를 비롯한 정사파 무리들이 앞으로 나왔다.
“오늘은 그만하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월후가 먼저 주루 안으로 들어가자 추월과 타노도 그 뒤를 따랐다.
환희루의 별채로 돌아온 월후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하긴 15년 만에 만나는 형이, 비록 배다른 형제이지만, 죽음을 던져 놓고 갔다. 짐작하고는 있었으나 직접 들은 것과는 그 충격이 비할 바가 아니었다.
권력이 무엇이기에 형이 아우를 죽이려 한다는 말인가? 어쩌면 그가 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곱 살에 궁을 떠난 그는 권력의 생리를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목숨은 스스로의 것이었다. 왜 남이 나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려 드는가? 그는 용인할 수 없었다.
추월은 월후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때에 따라서는 말보다는 부드러운 손길이, 그 손길을 통해 전달되는 진심이 훨씬 위로가 될 때가 있었다.
얼마간 굳어있던 월후가 추월을 향해 돌아앉았다. 그리고 타노와 기철중을 함께 불렀다.
“여기서 나갈 방안이 있겠나?”
“제 의제가 아는 샛길을 통하면 환희루를 벗어날 수는 있을 듯한데, 그 이후가 문제입니다.”
쭈뼛거리는 기철중을 제치고 타노가 대신 설명했다. 포위망은요? 하고 추월이 확인했다. 포위망이 환희루에 바짝 붙어 있으면 샛길로 나갈 여지가 없었다.
“다행히 포위망이 환희루와 좀 떨어져 있습니다. 아마 너무 바짝 포위망을 구축하면 빠른 경신술을 이용해 돌파해 나갈까 염려한 듯싶습니다.”
하긴 그동안 추월 일행은 되도록 살인을 피하기 위해 싸우기보다는 포위망을 돌파하는 방법을 몇 번 쓴 적이 있었다.
“그럼 새벽쯤에 출발하도록 하지.”
결론은 월후의 몫이었다. 추월이 어르신이 남겨준 비단 주머니를 풀어봐야겠다고 하자 모두의 시선이 거기에 쏠렸다.
추월은 두 번째 금낭을 열어 종이쪽지를 꺼내 소리 내어 읽었다.
“현재 있는 지역의 성문에 청색 깃발을 꽂아라. 삶의 활로가 열릴 것이다.”
“그게 다 입니까?”
타노가 물었고, 추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이내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청색 깃발을 꽂으러 가겠어요.”
“아닙니다. 그런 일이라면 아무래도 제가 가는 게 나을 듯합니다.”
타노는 일어서려는 추월을 말리고 나섰다. 그리고는 그가 가야 하는 그 이유까지 설명했다.
“아씨는 공격의 표적이 되어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저 같은 경우는 그리 중요한 인물이 아니니 그렇게 결사적으로 막지는 않을 거라고 봅니다.”
수긍할 만했다. 그래서 경계가 가장 느슨해지기 쉬운 오경 무렵에 샛길로 빠져 나가되, 발각되는 즉시 타노는 성문으로 향하기로 정해졌다.
밤 동안 잠을 자는 대신 운공조식으로 내공을 한껏 갈무리한 타노는 기철중을 앞세워 보퉁이를 등에 지고 별채 추녀 밑 달 그늘에서 기다렸다.
잠시 후 추월과 월후가 합류하자 그들은 소리 없이 별채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뒤꼍을 좀 더 돌아가면 별채 주방이 있고, 거기에 식재료를 들이는 쪽문이 있었다.
일반인은 이용하지 않는 그 문을 나서면 바로 옆집 포목점 뒷문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기척도 내지 않고 포목점을 지나 또 다른 옆집으로 건너갔다.
* * *
십하작은 낭인왕 파산권 진무강이 이끄는 낭인부대원이었다. 그는 본래 지방의 한 작은 흑도방파의 부대주를 맡고 있었는데, 그 방파가 문을 닫으면서 떨어져 나와 낭인을 자처했다.
그는 여자 없이는 하루도 못 사는 인간이었다. 부대주 때도 돈만 생기면 기루로 달려가고는 했으니 늘 빈털터리였다.
돈이 없으면 몰래 담장을 넘어 여염집 여자를 납치했다. 그에게 무공이란 여자를 훔치거나 정력을 키우는데 필요한 수단이었다.
이번에 낭인왕을 따르면서 목돈을 쥐게 되자 예전의 버릇이 또 도졌다. 소문으로만 듣던 환희루의 최고 기녀 매난국죽을 품을 기회였다. 그런데 살수들이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었다.
그는 속이 탔다. 몰래 환희루에 들어갈 방법을 찾다가 골목을 빠져나오는 수레를 보았다. 분명 들어갈 때는 채소를 한가득 실었었는데 나올 때는 빈 수레였다.
멀찍이서 수레를 뒤쫓다가 한갓진 곳에서 수레를 끄는 남자를 족쳐 샛길을 알아냈다.
흐흐흐흐 -
웃음이 절로 나왔다. 밤이 이슥해지면 환희루로 들어가자. 매난국죽 네 기녀 중 누구를 고를지 생각하니 십하작은 벌써부터 입안에 침이 가득 고였다.
잠복근무가 끝난 삼경부터 몸이 달아하다가 사경이 되자 십하작은 천천히 움직였다. 같이 잠복 교대를 하고 와서 바로 잠이 든 조원들이 깨지 않게 조심스레 방을 나왔다.
대문 옆 감나무 꼭대기에 걸렸던 달이 차츰 기울어 달그림자가 깊어지고 있었다.
그는 달 그늘을 딛어 쪽문을 통해 환희루로 들어갔다. 있는 손님들은 다 도망가고 오는 손님들은 없어 선잠에 빠져있던 당번 기녀가 반색하고 맞았다.
급한 나머지 전낭부터 꺼내주었다. 매난국죽 중에 손님이 빈 기녀로 불러달라고 했다. 당번 기녀가 뾰로통해지더니 전낭을 돌려주었다.
“다해서 기껏 오십 냥이네요.”
“기껏이라니, 내 닷새 목숨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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