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비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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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미명이 밝아오는 새벽부터 시작된 이 표행의 일과는 해가 떨어지기 직전인 유시까지 계속되었다.
기다란 뱀의 행태처럼 기다란 상단을 이끄는 표두 남연지는 밤을 보내기 위해 한적한 잡초지대에서 멈춰 섰다.
“오늘은 여기서 쉬도록 하겠다.”
- 따그닥 따그닥
그녀 옆에서 말을 몰아가던 주도방은 덥수룩한 수염사이로 입을 벌렸다.
“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주도방은 학사(學士)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학문의 길을 애초에 포기하고 몸을 단련하길 좋아했다.
그리고 그는 쟁자수를 걸쳐 표사가 된 사례여서 이쪽 세계에서는 꽤나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항상 하던 경계 대형을 유지할까요?”
그는 표행 경험만으로 따져 볼 때, 웬만한 표국의 표두보다 더 대단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
남연지는 그런 주도방을 한가로운 눈길로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오늘은 쟁자수들에게 수하물의 상태를 파악하라고 지시하고 다른 표사들은 뒤따르는 서민들이 행장을 풀 때까지 경계를 서게 하세요.”
“예! 바로 그리 전하겠습니다. 이럇!”
- 따그닥 따그닥
능숙하게 말을 모는 주도방은 한때 종남파의 속가제자로 들어가 무공을 수련한 적이 있어서 천성쾌검(天星快劍)이란 무학까지 익힌 검의 대가였다.
그는 고집스러운 성품 탓에 종남파에 오랫동안 머물진 못했으나 검에 내공을 주입하는 경지에는 이미 올라 있었다.
주도방은 나이가 사십 대 초반인데 무공수위는 이미 일류고수에 올라 있어서 표사들 중에는 그를 꺾을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내 지시를 따르거라. 서둘러 일과를 마무리하고 표두님을 편히 쉬게 해드리자!”
고집스런 성품의 주도방이 연약한 체형의 남연지를 이토록 열정적으로 따르는 이유는 그녀의 탁월한 상황판단 능력과 이리에 밝은 두뇌 때문이었다.
주도방은 그녀보다 무공수위가 뛰어났지만 표행을 이끄는 능력은 한참이나 뒤쳐졌다.
“수레를 저쪽 기슭으로 모두 모으고 경계 진형을 새로 짠다.”
“예!”
주도방의 묵직한 지시가 떨어지자, 수레들이 한쪽 모퉁이로 몰려들며 체계적인 방어 진영이 만들어졌다.
이 같은 형태의 움직임은 지금까지 매일 반복되고 있어서 표행을 따르는 강대운은 이에 조금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오늘은 여기서 휴식인가 보군.”
강대운의 나직이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수레 난간에 걸터앉은 소년이 말을 받았다.
“히히, 그런가 봐요.”
이 소년은 지저분해 보이는 자신의 볼때기로 환한 미소를 만들어냈다.
“형아야, 오늘도 재밌는 얘기 해줄 거지?”
“태수야, 너는 지치지도 않냐?”
“헤헤, 아버지를 자주 따라다녀서 이 정도는 별로 힘들지 않아!”
태수라 불린 소년은 표행을 쫒아오는 서민무리에 속한 아이였다.
그리고 매사에 가만히 있는 걸 싫어하는 태수는 하루 종일 표물 사이를 돌아다녔는데, 우연히 이들의 보호를 받는 강대운과 친해지게 되어 항상 그를 따라다니게 되었다.
- 타탁 쓰으윽
강대운은 타지도 못하는 말의 고삐를 잡아끌어 근처 나무에 단단히 고정을 시켰다.
- 쓰스슥 쓰스슥
그리고는 가만히 말의 갈퀴를 쓰다듬어주었다.
“으응?”
수레에서 내려온 태수는 말을 쓰다듬는 강대운에게 다가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형은 그 말을 무척 좋아하나봐? 여태껏 한 번도 말에 올라타지 않았으니··· 다른 어른들은 자기 발이 아플까봐 내려오지도 않는데.”
- 쓰윽
소년을 의식한 강대운은 말에 걸어둔 자신의 행장을 챙긴 뒤, 신형을 돌려세웠다.
“이 녀석은 전 주인에게 상처를 받은 적이 있어서 조금 신경을 써줘야 해.”
“그게 무슨 상관이야?”
“왜냐면 동물도 사람처럼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지. 내가 자신을 아껴주면 이 녀석도 정말 위급한 상황에서 날 배신하지 않을 거야.”
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태수은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눈을 부릅떴다.
“동물이 사람처럼 감정을 느낀다고? 그러면 말을 이리 묶어두면 안되지!”
따지듯이 말에게 다가간 태수는 심각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 묶여있으면 밤새 얼마나 지루하겠어? 난 일다경만 가만히 있어도 심심해 죽을 것 같은데···.”
“훗, 그건 걱정하지 마라.”
강대운은 싱그러운 미소로 키가 작은 태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 말은 다 큰 성인과 같아서 한 자리에 오래 머물러도 지루해하지 않아. 아마 하루 종일 걸어 다녔으니, 이렇게 있는 게 오히려 안락하고 편안할 걸?”
“그래? 어른들의 세계는 신기하구나···.”
아직 성인의 심정을 느껴본 적 없는 태수는 여전히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무에 묶인 말을 바라보았다.
“잘생긴 말아, 너무 걱정 하지마!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내가 한 번씩 와서 말을 걸어줄게.”
한적한 장소에 묶인 대완구는 소년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입술을 크게 뒤집어 깠다.
- 푸드드득
눈앞에 선 동물의 행동을 쳐다보던 태수는 강대운이 멀리 사라진 사실을 알아차리고 짧은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였다.
“형아! 날 두고 혼자 가면 어떡해?”
“자고로 좋은 잠자리를 차지하려면 빨리 움직여야 하는 법.”
“치 좋은 자리는··· 또 외딴 나뭇가지 위에서 잘 거잖아?”
강대운은 옥광보 상단과 동행은 하였지만 야영지에서 노숙을 할 때만큼은 그들의 보호가 아닌 자신만의 안식처를 만들어 휴식을 취했다.
어차피 노숙은 그에게 너무나 익숙했고, 괴습지에 비하면 이런 평온한 숲의 밤은 휴양처와 다름이 없는 것이다.
“난 잘 때만은 조용한 걸 좋아해. 그분들이 귀찮거나 시끄러운 건 아니지만, 이렇게 한적한 공간에서 상념에 젖어드는 게 아무래도 좋아. 또 혼자 있는 게 운치도 있고···.”
“쳇, 할 수 없네. 그럼, 내가 형을 챙겨줄게. 나랑 같이 운치 있게 놀자.”
“······.”
강대운은 상대가 자신의 의중을 알아채지 못하자, 멋쩍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네가 운치라는 말을 잘 모르나 본데, 자고로 운치라는 것은···.”
- 스슥 스슥
친절하게 단어의 뜻을 설명하려던 강대운은 수풀을 헤치는 인기척에 몸을 돌려세웠다.
“으응? 여기까지··· 어려운 걸음을 하셨군요?”
“······.”
수풀을 헤치고 장내에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표두 남연지였다.
“예.”
무덤덤한 표정으로 강대운을 한번 응시한 남연지는 뒤늦게 자신이 찾아온 사유를 밝혔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요.”
남연지는 속에 있는 말을 꺼내기 위해 옆에 자리한 태수를 먼저 바라보았다.
“얘야, 오늘 저녁은 증불수백채(蒸佛手白菜)란다. 네게도 음식을 나눠줄 생각이니, 빨리 가서 자리를 잡거라.”
“네에?”
자그마한 체형의 태수는 눈방울을 크게 반짝였다.
“우와! 웬일로 그런 거창한 요리를?”
“모두 지쳤으니까, 몸보신을 하려는 게지.”
“와아! 혀··· 형아? 나부터 빨리 가서 자리 잡을게!”
신이 난 태수는 달음박질하여 순식간에 장내를 벗어났다.
“······.”
장난기 많은 소년이 사라지자, 남연지는 차분한 음성으로 상대에게 질문을 건넸다.
“그래, 여정에 불편함은 없으신가요?”
강대운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덕분에 아무 근심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설마 이런 걸 물어보시려고 직접 오신 건 아니죠?”
남연지는 자신을 반기지 않는 상대의 태도에 의아함을 느끼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느끼셨는지 모르겠는데, 여러 방면으로 당신에게 특별히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다른 분도 아니고 고명한 소 노사님이 직접 신변 보장을 부탁하신 분이니까요.”
“네, 감사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모두 편하게 대해주시더군요.”
표행을 시작한지, 십일 만에 강대운을 찾아온 남연지는 자신의 볼을 긁적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제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말이죠.”
“네?”
남연지는 어깨 앞으로 흘러나온 머리를 뒤로 넘기며 눈매를 가다듬었다.
“소 노사님은 중원 무림에 떠도는 명성과 다르게 사람들과 인연 맺기를 그다지 즐기지 않으십니다.”
강대운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리 알고 있습니다.”
“그런가요?”
사내와 시선을 마주한 남연지는 상대의 기도에서 별다른 특이점을 찾아내지 못하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 중원에 알려지지 않는 청년 고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진 않은 것이다.
‘으음··· 이 남자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군. 거기다 나보다 열 살은 어려 보이니, 어쩌면 진짜 운학서생 일지도 몰라.’
갑작스레 소계성의 신변보호 부탁을 받은 남연지는 이 청년이 운학서생일거라고 확신했다.
소계성이 전담으로 호위하는 운학서생의 나이가 약관 정도이고 또 자신의 아버지가 그동안 신신당부하며 신변보호를 해 온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이상하다고 여겼어요. 소 노사님은 인간관계도 별로 없으신데, 당신처럼 약관밖에 안 되는 청년과 면식이 있으시다니··· 제게 신변을 부탁한 걸 보면 서로가 무척 친밀한 사이라고 여겨지는데 말이에요.”
자신을 수상하게 바라보는 남연지의 태도에 강대운은 담담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제 정체와 내력이 수상하신 거군요? 그런데··· 저도 남 표두님이 무척 수상합니다.”
“예?”
예상치 못한 상대의 답변에 남연지는 살짝 당황한 모습을 내비췄다.
그런데 이미 그녀를 마주한 강대운의 눈에는 의심의 눈초리가 가득했다.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소노사님은 인간관계가 그리 넓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제게 남 표두님을 소개해주셨으니··· 그 관계가 무척 수상하군요.”
“······.”
상대 내력을 파악하기위해 다가온 남연지는 오히려 자신이 심문당하는 입장이 되자, 말문이 막혀버렸다.
‘이것봐라?’
보통은 거대 표행의 표두가 다가오면 그 위세에 눌려 움츠려드는 게 정상인데, 이 청년의 반응은 이완 정 반대였다.
‘역시 보통 사내가 아니야.’
남연지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자신을 마주하는 상대에게 괜히 겁이 나기 시작했다.
“수상해할 것 없어요. 그분과 저는 조금 인연이 있는 것뿐이니.”
그녀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며 상대의 눈을 마주보았다.
‘아직은 내가 그 사람의 여식이란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 돼. 그건 내게도 결코 좋지 않으니.’
남연지는 이런 일에 갑자기 공개되면 옥광보상단 팔대 표두에 오른 자신의 명성에도 금이 갈 거라 생각했다.
그녀가 이 자리에 오른 것은 순전히 자신의 실력과 노력이었는데, 이것이 자칫 부앙불괴 소계성의 줄을 탄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이 남자 정말 보통이 아닌데? 무림인도 아닌 사람이 이토록 기세가 등등하고, 호기롭다니··· 정말 내 추측대로 운학서생인건가?’
자신의 추리에 더욱 확신을 가진 남연지는 자세를 바로하고 상대에게 냉랭한 음성을 발했다.
“사리판단을 잘하시는 분이신거 같아 미리 드리는 말씀인데··· 제게 이리 무례하게 행동하셔서 좋을 것이 없습니다.”
“지금 그 말이 제겐 협박처럼 들리는데, 제 착각인가요?”
“듣기에 따라 다르겠죠.”
“흠···.”
강대운은 자신의 진짜 내력을 상대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턱을 쓰다듬으며 서둘러 대책을 간구했다.
‘이 여인과 소 노사님의 관계를 지금 유추해내지 못하면 내가 조금 곤란해지겠는데?’
- 작가의말
오늘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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