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의 계산 착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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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사에 계산적인 조귀는 입을 오물거리며 이해타산을 따져보았다.
‘일단 믿어 볼 수밖에 없는 건가?’
어차피 혼자 힘으로 능운령에서 살아나갈 가능성은 전무했다.
오직 자신을 살릴 수 있는 이는 눈앞에 선 운영지존 진해광 밖에 없었다.
“당신은 매사에 거짓과 협잡(挾雜)을 부리지 않는 사람이니··· 그 말을 한번 믿어보지.”
조귀는 진해광을 면전에서 만난 것도 기적이어서 구태여 입씨름을 벌이지 않았다.
공연히 상대의 심기를 어지럽혀봐야 자신에게 이로울 점이 없는 것이다.
“어지간한 사람은 절대 모르지만 노부는 알고 있어. 혈봉궁의 사대책사 중 한 명인 진혈미책(嗔血媚責) 방회가 이곳에 와있다는 걸 말이야.”
그저 혈봉궁의 사대책사 중 하나가 와 있다는 사실만을 알았던 진해광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상대를 다그쳤다.
“진혈미책 방회라면, 남을 속이는 일을 밥 먹듯이 한다는 심계의 달인이로군··· 그가 능운령 어디에 와 있는 거지?”
조귀는 그 정체를 들추기 전에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크크, 혈봉궁은 그 어떤 추악한 짓을 저지른 자라도 들어갈 수 있는데, 입궁하면 상승의 비급과 영단까지 제공하지.”
이 같은 이야기는 진해광도 잘 아는 것이어서 묵묵히 고개만을 끄덕였다.
“그런데 어느 날 능운령에서 만난 괴인이 내게 말을 걸더군. 살괴삼마의 악명은 익히 들어왔으니, 혈봉궁에 들어와 달라고 말이야. 하지만 우린 단박에 거절했어. 어차피 영약은 빼앗으면 그만이고, 비급을 준다는 제안도 관심이 없었거든.”
“······.”
조귀는 상대의 반응을 살피며 계속해서 악취가 풍기는 입술을 들썩였다.
“그 괴인을 보내고 문득 궁금해졌지. 그를 보낸 자가 과연 누굴까? 뒤를 쫒아가 보니, 그가 천금보상단으로 들어가더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보낸 자의 정체를 알아냈네.”
“설마··· 천금보라면?”
진해광이 놀라움을 표하는 동안, 조귀의 게슴츠레한 눈빛이 크게 번뜩였다.
“천금보 상단의 분타주 사마진··· 그가 바로 혈봉궁의 책사 방회라네.”
“······!”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 언급되자, 진해광은 경악스런 표정으로 눈을 부릅떴다.
천금보는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최근 능운령 내의 상권을 거의 장악하다시피 한 상단이었다.
그 기세가 어찌나 대단한지 절대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았던 옥광보 상단의 세(勢)마저 따라잡고, 모든 이들이 인정하는 최고의 상단으로 거듭난 상태였다.
“그렇구나. 천금보는 암묵적으로 혈봉궁의 지원을 받아서 그토록 혁혁한 발전을 이룬 것이야! 진혈미책 방회가 손수 사업에 손을 대고 있으니, 장사수완이 좋을 수밖에···.”
신뢰가 가지 않는 마두의 제보였으나 이 말은 꽤나 신빙성이 있었다.
최근 들어 세력이 커진 천금보 상단은 필요 이상으로 능운령의 다른 상단들을 견제했고, 또 태의원을 비롯한 많은 시설에 직접적인 투자를 벌이며 손을 뻗치고 있는 것이다.
진해광은 이제껏 그런 행동들이 상권을 잡기 위한 장삿속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혈봉궁주 불사불귀 구소기의 심계가 이토록 깊을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단순히 감찰대를 와해시키려는 게 아니라, 우릴 밀어낸 후 능운령의 모든 기관을 장악하려 하다니···.’
진해광은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저 혈봉궁의 행태가 도를 지나쳤다고만 여겼는데, 실상은 오래전부터 마수를 뻗치고 있던 것이다.
‘그들의 계획을 반드시 무너뜨려야 한다. 무조건적인 천금보 상단의 탄압은 다른 천하 무림인들의 눈총을 받을 수 있으니··· 어서 마땅한 대안을 찾아야 해!’
이 일은 단순히 혈봉궁인과 책사를 색출하는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진해광은 위급한 사안을 처리하기 위해 서둘러 몸을 돌렸다.
- 쓰윽
그러자 뒤에 웅크려 있던 조귀가 다급한 음성을 내뱉었다.
“날 풀어주기로 한 걸 잊지 말게!”
“······.”
신형을 멈춰 세운 진해광은 슬쩍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자네의 제보는 감찰대와 능운령에 큰 힘이 되었네. 내 약속을 바로 지키도록 하지.”
진해광은 뇌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대기하던 간수를 불러들였다.
그러자 건장한 체격에 짙은 회색 무복을 걸친 두 명의 간수가 그 앞에 부복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하명하십시오.”
그들의 눈에서는 범상치 않은 정기가 흘러나왔는데, 이는 필시 절정에 다다른 무인의 기운이었다.
“······.”
진해광은 그들을 내려다보다가 담담하게 지시를 내렸다.
“이 자를 놓아주고 다시는 잡아들이지 마라.”
“예!”
- 꿈 틀
뇌옥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조귀는 눈살을 찌푸리며 괴성을 토했다.
“멈춰랏!”
풀어준다는 데도 노성을 터트리는 조귀의 태도는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여기서 풀려난다 해도 능운령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고로, 네가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날 잡을 수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도 있겠지.”
진해광은 냉랭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무얼 원하나?”
조귀는 조심히 옥문으로 다가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자네가 친서를 써주게. 왕래문을 통해 능운령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말이야.”
여기서 나가 봐야 성문에서 진을 치고 있는 감찰대를 뚫고 능운령 밖으로 나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왕래문을 통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감찰대장의 친서를 받는 것뿐이다.
“좋다.”
진해광은 수하에게 먹과 종이를 가지고 올 것을 명하고 직접 글씨를 써 내려갔다.
- 쓱 쓰스슥
감찰대장의 인장까지 찍힌 서신은 바로 조귀에게 전달됐다.
“이제 살아서 얼굴을 마주할 일은 없겠군.”
“크크크··· 다시는 능운령으로 돌아오지 않을 테니, 그렇다고 봐야겠지?”
그런데 조귀는 생각보다 일이 쉽게 진행되자, 괜스레 기분이 나빠졌다.
‘뭔가 기분이···.’
- 끼이이 철컹
하지만 이미 뇌옥의 문은 열리고, 자신을 배웅해 주기 위해 두 명의 간수가 따가운 눈총을 날려 왔다.
***
어둠이 내려앉은 수풀들 사이로 자그마한 붉은색 불빛이 하늘거렸다.
- 따닥 따닥
어둠속에서 타들어 가는 땔감을 보살피던 연평권은 결국 불편한 속내를 토해냈다.
“은평이 이 녀석은 대체 어딜 싸돌아다니기에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거야?”
넓게 우거진 고목들 사이에는 임시 거처가 만들어져 있었는데, 노숙을 하며 며칠 머물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연평권은 미시(未時)에 식재료를 사러 간 조은평이 땅거미가 지는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않자, 크게 걱정이 되었다.
“또 사건에 말려든 걸까···.”
옆에 쌓인 땔감 중 하나를 집어 불꽃 속에 내던진 연평권은 불안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철없는 사제에 대한 신변 보호를 자신이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에휴··· 다 큰 녀석의 보호자 신세라니.”
그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다가 얼마 전 있었던 미심적인 사안을 떠올렸다.
‘흐음, 수사를 벌이는 감찰대에게 살괴삼마에 관한 모든 소식을 알렸는데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지? 그들은 대체 무슨 속셈일까?’
복잡한 상념에 잠긴 연평건의 귓가에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 또 각
“은평이냐?”
“······.”
멀리 떨어진 우거진 수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인영은 조은평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굴곡진 체형을 가지고 있었다.
“사형, 이 녀석 잡아왔어요. 그리고··· 특별한 귀인도 모셔 왔습니다.”
임시거처에서 반가운 얼굴을 마주한 연평권은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허허, 운학서생이시군요? 이런 곳에서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강대운도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은공을 베푼 분들을 다시 보니, 저도 참 좋습니다. 객방을 얻지 못해 노숙을 하고 계시다고요?”
그의 곁에 선 사화령이 조심히 앞으로 나섰다.
“갑자기 금지령이 떨어지는 바람에 능운령에 발이 묶여 버렸어요.”
“흐음, 그렇다면 이화궁인도 능운령을 벗어나지 못한 건가요?”
“네, 아마 그녀들도 저희처럼··· 어디선가 노숙을 하고 있을 겁니다.”
사화령은 이화궁인도 자신들과 신세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그들은 태의원에서 치료를 받은 터여서 더욱 늦게 거리로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대운은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과연 그럴까요?”
“네?”
강대운은 이화궁이 선불객잔 전체를 대여한 상황을 설명하고, 그들을 그곳으로 안내하려 했다.
“자, 설명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모두 짐 챙기세요.”
괜히 마음이 급해진 청성의 문인들은 대답도 잊은 채, 널브러진 자신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정리를 마친 사화령은 상냥한 미소를 머금고 강대운에게 다가왔다.
“저는 지금 눈앞에 선 강 서생님의 모습이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처럼 보여요.”
강대운은 그들이 피운 모닥불을 대신 정리하며 작게 대답했다.
“여러분들은 제게 은인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당연히 신경을 써 드려야지요.”
“맞다! 그러고 보니··· 강 서생님은 얼마 전, 소희 소저와의 접촉 때문에 큰 부상을 입지 않으셨나요? 그들을··· 다시 만나도 괜찮으시겠어요?”
“상관없습니다.”
강대운은 조금의 언짢은 기색도 없이 해맑은 미소를 머금었다.
“여자와 접촉을 해선 안 된다고 그들에게 주의를 준 적이 없으니, 남을 탓할 수는 없죠.”
“아···.”
지금껏 심보가 벼룩의 간만 한 사내만을 상대했던 사화령은 그 호탕한 모습에 괜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이 남자··· 꽤 괜찮은데?’
하지만 지금은 사위가 칠흑같이 어두운 시간이어서 그녀의 홍조를 알아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변 정리를 마친 강대운은 그들을 이끌고 선불객잔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터벅 터벅
여러 사안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그들의 시야에 허름하고 음침한 객잔의 모습이 들어왔다.
“다 왔네요.”
“이거 설마, 귀신의 집이나 폐가 같은 건 아니죠?”
선불객잔은 본래부터가 허름하고 낡은 모습의 목조 건물인데, 지금은 모든 출입로까지 판자로 봉해져있어서 정녕 폐가처럼 보였다.
“보기엔 그래도 엄연히 정상영업 중인 객잔입니다.”
강대운은 음침한 객잔으로 바짝 다가가 봉해진 대문을 작게 두들겼다.
- 똑똑 똑 똑똑똑
암호와 같은 운율로 그곳을 두들기자,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며 잠겼던 문이 조심히 열렸다.
- 끼이이이
굳게 봉해졌던 출입문이 열리자, 객잔 내부에 머물던 가느다란 불빛들이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객잔 밖이 워낙 어두웠기에 안에서 새어 나온 그 가느다란 불빛조차 매우 환하게 느껴졌다.
“······?”
고개를 내밀어 밖에 선 사람의 정체를 확인한 고연은 뒤늦게 강대운을 발견하고 크게 눈을 부릅떴다.
“아! 강 서생님?”
“잘 계셨죠?”
고연은 걱정스런 눈빛으로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몸은 다 나으신 건가요?”
“네, 걱정하지 마세요. 그보다 손님들을 모셔왔습니다.”
고연의 시선이 슬쩍 옆으로 돌아갔다.
“이분들은 청성파의···.”
“갑작스레 이리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격식을 갖춘 연평권의 인사에 고연은 서둘러 포권을 취했다.
“청성의 문인은 언제든 환영입니다.”
내부로 들어선 사화령은 일층으로 내려오는 진령과 인사를 나눴다.
“그간 잘 지내셨어요?”
“그럼요, 정말 잘 오셨습니다!”
이화궁인에게 청성파는 보통 존재가 아니었다.
죽어서도 씻을 수 없는 능욕의 위기에서 자신들을 구해준 은인 중에 은인인 것이다.
까무잡잡한 피부의 진령은 조심스런 태도로 그들의 행색을 둘러보았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괴습지에서 돌아오신 이후로도 줄곧 노숙을 하셨군요?”
그 말에 사화령의 양볼이 작게 붉어졌다.
“어찌하다 보니, 이리되었습니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네요.”
“아니에요. 미리 알았다면 저희가 모시러 갔을 텐데···.”
진령과 사화령은 여성스러움보다는 직설적이며 솔직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성정을 서로 아는지, 두 사람은 괴석사지에서 능운령으로 돌아오는 짧은 시간동안 무척 가까워진 상태였다.
두 사람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뜨끈한 시선을 맞추는 동안 겉늙어 보이는 인상의 연평권이 객잔 내부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소희 소저가 보이지 않는군요?”
- 작가의말
연화도 안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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