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신무적

인연의 끝자락에서 (4)

운무신전에서 여러 조사를 받았던 무영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감찰대에 그대로 털어놓았다.

그가 아는 한 마교는 암습을 당한 피해자일 뿐이고, 사태를 일으킨 혈봉궁은 죽어 마땅한 가해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을 두고 차분히 생각을 정리해 보니, 이상한 추론이 가능했다.

‘소교주님은 진정 능사구미호를 포획하기 위해 능운령에 온 것일까? 정녕 혈봉궁의 암습은 알지 못하셨을까?’

그가 품고 있는 의문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내가 매복자의 존재를 밝히자마자, 수라대를 호출하여 혼심을 다해 본교에 충성할 것을 맹세시킨 점도 이상하다. 소교주님이 아무리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히 대응한다지만··· 그땐 지나칠 정도로 대처가 자연스러웠어. 마치 기다리고 있던 일이 벌어진 것처럼···.’

무영 앞에 멀뚱히 선 조인걸은 상념에 빠진 상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만약 만상지객 허임풍의 말처럼 소교주님이 처음부터 모든 것을 계획하고 이곳에 왔다면? 그렇다면 수라대가 죽을 거라는 걸··· 아니, 그들을 애초에 희생시키려고 하신 건가?’

이십 명의 수라대원은 설주연을 오년 동안 그림자처럼 따라다녀서 수족이나 마찬가지였다.

“흐음···.”

무영은 그런 수하들을 그녀가 그저 계획의 일부로 사용했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내 목숨까지도 그 계획안에 들어가 있었던 건 아닐까?’

섬뜩한 상념에 다다른 무영이 표정을 굳히는데, 참다못한 조인걸이 헛기침을 발해왔다.

“흠흠, 날이 깊었습니다. 고심할 것이 있다면 내일 하도록 하십시오.”

“난 오늘이 올 거라고도 기약하지 않았네. 곧 죽어도 여한이 없으니, 상관하지 말게.”

“정 그러시다면···.”

조인걸은 고집스런 무영을 피해 자리를 뜨려했다.

그런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긴박한 인기척이 들려왔다.

- 탁 탁 탁

“부장님, 큰일 났습니다!”

조인걸은 야단 떠는 수하에게 눈살을 찌푸렸다.

“침입자가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왜 이리 소란스러운 것이냐?”

뛰어난 신법으로 등장한 마룡보의 고수는 참혹한 실상을 고하기 위해서 어렵사리 입을 벌렸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이곳에 침입한 것 같습니다.”

조인걸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소식에 쌍심지를 치켜세웠다.

“뭐야?”

현재 마룡보는 최고 수위의 방어체제(防禦體制)를 구축한 상태여서 설사 강호를 떠들썩하게 만든 절정고수라 하더라도 이곳으로의 침입은 불가능했다.

“대체 누가, 어디로 침입을 했단 말이냐?”

“그게···.”

조인걸 앞에 부복한 수하는 반신반의(半信半疑)한 태도를 말을 이었다.

“침입자의 흔적을 발견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단지?”

이해 못할 소리를 이어가던 마교인은 입술을 작게 웅크렸다.

“소교주님이 보이질 않습니다.”

“뭐··· 뭐야?”

이 말을 듣는 순간 조인걸은 마치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무림정사연맹에서 조사를 받고 나온 소교주는 감정적으로 매우 예민한 상태여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했는데, 갑자기 그녀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만약 그녀가 누군가에게 납치라도 당했다면 마룡보의 고수들은 교주의 손에 하나같이 죽어나갈 터였다.

“하아···.”

조인걸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지, 연신 머리를 흔들어댔다.

“확실한 것이냐?”

상황을 보고하러 온 수하는 머리를 더욱 조아렸다.

“시비가 우연히 소교주님 방문이 열린 것을 보고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소교주님이 지금 침실에 계시지 않은 건 제가 확인을 마쳤습니다.”

“설마 침입자가 이곳에 침투해서 소교주님을? 그런 엄청난 고수가 존재한다고?”

“내실에는 아무런 저항의 흔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어쩌면··· 잠깐 자리를 비우신 것 같기도 합니다.”

“지금 바로 마룡보 전체를 수색하겠다!”

급박한 명을 내려 받은 수하는 서둘러 장내를 벗어났다.

- 파팟

그가 떠나자, 계속해서 침묵을 지키던 무영이 착잡히 입맛을 다셨다.

“누군가가 납치를 했다기보다는 잠시 나처럼 산책을 나가신 것 같네.”

“그건 모르는 일이지요. 일단 소교주님의 신변확보가 중요하니, 행방부터 파악해보겠습니다.”

“흐음···.”

무영은 조인걸의 의견이 옳다는 점을 알았으나 쉽사리 신형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가슴속에 맹렬히 타오르던 맹목의 불꽃이 조금은 사그라졌기 때문이다.

‘난 언제나 그분의 생명을 귀히 여겼거늘··· 소교주님에게 난 그저 이용 도구일 뿐인 걸까?’

그가 미지근하게 반응하는 동안 조급해진 조인걸이 먼저 신형을 움직였다.

“제가 서쪽 전각부터 시작해서 화원 쪽을 맡겠습니다. 무영님은 남쪽을 맡아 주십시오!”

- 파팟

벌써 저 멀리 뛰어가는 조인걸을 묵묵히 바라보던 무영은 뒤늦게 제정신을 차렸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 파팟

삽시간에 전각 지붕위로 올라선 무영은 사위를 내려다보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마룡보 장내를 가만히 뜯어보았다.

“이 오밤중에 어딜 가신 걸까? 혹 정말 누가 납치를 하기라도?”

설주연의 흔적을 찾아 사위를 두리번거리던 무영은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공간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저곳이 왜 이리 어수선하지? 평소엔 인적이 무척 드문 장소인데···.”

무영이 수상이 여긴 장소는 마룡보 내에 병실이 마련된 후원이었다.

그동안 마룡보의 마교인들은 의원신세를 질 일이 없어서 이곳이 매우 한산했는데, 최근 혈봉궁과의 결전에서 살아남은 수라대원 때문에 그나마 사람 냄새가 풍기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죽은 듯이 누워만 있는 처지여서 이런 작은 소란이 일어날 이유가 없었다.

‘아무래도 한 번 가보는 게 좋겠군.’

생각을 정리한 무영의 신형이 허공을 맹렬히 가로지르며 오십 장 거리에 있는 누각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 쉬시시시식

그가 바닥에 발을 안착시키기도 전에 귓가로 몇몇 여인의 음성이 파고 들어왔다.

“어쩌지? 그래도 보고를 해야 하지 아닐까?”

안색이 창백해진 시비를 마주보던 또 다른 시비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짓을 했다간 우리 목이 달아날지도 몰라. 그러니 그냥 잠자코 있자.”

무영은 거침없이 두 시비의 뒷 공간을 장악해 들어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무얼 숨기는 게냐?”

“아!”

“저흰···.”

하얀 의복을 정갈히 차려입은 두 명의 시비는 어여쁜 외모를 가진 여성이었다.

그런데 그들 의복에는 진득한 핏자국이 가득해서 이것만 봐도 이들이 심상치 않은 사건에 연루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핏자국은 무엇이냐?”

무영의 싸늘한 시선을 받은 두 시비는 다리를 벌벌 떨며 겨우 대답했다.

“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건 병실에 누워있는 수라대원의 핍니다.”

“마··· 맞습니다. 저흰 병실에서 그들을 간호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상대의 그럴듯한 대답에 무영의 노기가 조금 수그러들었다.

“흐음···.”

그리고는 가만히 그들이 나눈 대화를 곱씹어 보았다.

“아까 보고해선 안 된다던 사안은 무엇이냐?”

“그, 그건···.”

두 시비는 이번 질문에 답변을 바로 내놓지 못했다.

이와 관련된 일은 함부로 발설할 수 없기 때문이다.

“······.”

하지만 시비를 마주한 무영의 심경은 그들의 처지를 고려하고픈 상태가 아니었다.

“내 인내심을 시험하는 구나.”

무영은 두 번 생각지 않고 시비 둘의 목덜미를 양손에 하나씩 움켜쥐었다.

“컥!”

“앗···!”

허공으로 떠오른 두 시비는 발을 동동 구르며 고통스런 몸부림을 내보였다.

“······.”

최근 심리상태가 매우 흉험해진 무영은 시간을 끌지 않고 상대를 몰아세웠다.

“입을 열지 않으면 둘 다 목을 비틀어 버리겠다!”

살벌한 무영의 엄포에 시비는 오줌을 지리며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은 이를 확인하고 그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 털썩

“쿨럭 쿨럭!”

“헉헉···.”

가녀린 목을 부여잡으며 자신의 생사를 확인한 두 시비는 겁에 질린 채 눈물을 흘려댔다.

“소··· 소교주님이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말하면 저희를 죽일 거라고···.”

예전의 무영이었다면 이 정도 선에서 분명 물러났을 것이다.

“······.”

그러나 그는 이미 이전과 많이 달라진 상태였다.

“말해라.”

무영이 물러나지 않자, 시비는 할 수없이 대답에 임했다.

“벼··· 병실에 소교주님이 와 계십니다.”

엄비가 발설되자, 다른 시비도 얼른 말을 이었다.

“요즘 밤이 늦으면 매번 이곳을 찾고 계십니다. 저흰 아무 말도 하지 말라 하셔서··· 보고를 올리지 못했습니다.”

“······.”

무영이 아는 한 소교주가 부상당한 수라대원을 다시 찾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들은 그녀의 착실한 말이 되어 전장에 투입되었고 또 살아서 돌아왔지만 사실 큰 의미는 없는 것이다.

“알겠다. 너흰 조용히 용무를 보거라.”

두 시비를 떠나보낸 무영은 돌연 커다란 두려움에 직면했다.

‘겨우 살아남은 그들에게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을 벌이시려고?’

무영은 단호한 걸음으로 수라대원이 누운 병실을 향해 걸어갔다.

- 터벅 터벅

이번에는 그녀의 무자비한 살행에 어떻게든 제재를 가해보고 싶은 것이다.

- 드르르르 탁

병실에 다다른 무영은 마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설주연과 눈이 마주쳤다.

“··· 오랜만이네요.”

설주연이 먼저 인사를 건넸지만 무영은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

그의 눈에는 복잡한 의미의 시선만이 가득했다.

“수상히 보실 것 없어요. 악의로 이곳에 온 게 아니니까요.”

“흐음···.”

무영은 자신의 결례를 깨닫고 뒷수습을 위해 얼른 입을 열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였습니다···.”

그런데 그를 마주한 설주연이 돌연 고개를 조아리며 침울한 음색을 발해왔다.

“지금까지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전 알지 못했어요.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알려고 하지도 않았죠. 본연의 목적만 이루면 그만이라고 여겼으니까요.”

“······.”

청아한 대나무 숲을 등지며 공터로 나온 설주연은 월광(月光)이 내리쬐는 화원을 보며 말을 이었다.

“요 며칠 정말 많은 생각을 했어요. 이제껏 수많은 암계를 생각해내며 밤을 지새운 적이 많았는데, 이 정도로 머리를 싸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죠.”

설주연은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무영을 바라보았다.

“그가··· 그 남자가··· 제게 역겹다는 눈빛을 머금었을 때··· 처음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기분을 느꼈어요. 그리고 제 행동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해보게 됐죠.”

“그 남자라면··· 강 서생을 말하는 것입니까?”

무영의 질문에 설주연은 씁쓸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데 저를 다시 돌아보니, 정말 정이 떨어질 만 하겠더라고요. 목적을 이루기위해서라지만··· 전 수족처럼 따르는 수하를 계획의 일부로 이용했어요. 거기다 극비로 다루어야 한다는 이유로 지나치게 말을 아꼈죠.”

그녀가 말을 아낀 대상은 바로 눈앞에 서있는 무영이었다.

“······.”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에게까지 계획의 본질을 숨긴 것은 잘못이라 시인한 것이다.

“거기다 전 마룡보로 돌아온 이후로도 날 위해 생명을 바친 수라대가 아니라, 고작 귀여운 외형의 애완동물에게 빠져 있었어요. 차츰 시간이 지나다 보니, 이런 저의 모습에 화가 나더군요.”

“··· 그런 생각까지 하셨군요.”

“······.”

설주연은 다부진 눈매를 뽐내며 유유히 자신의 머리를 정리했다.

“앞으론 제가 많이 바뀔 거예요. 그 사람 앞에 다시 서게 됐을 때, 예전에 제가 아니도록···.”

무영은 가만히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는데, 벌써부터 여러 달라진 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전에 없던 진실한 감정이 느껴지는구나. 앞으로 언제 다시 돌변하실지 모르나··· 조금은 믿어보고 싶군.’

오랫동안 설주연을 지켜본 무영은 이처럼 행동하는 그녀를 결단코 본적이 없었다.

그리고 만약 그녀의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바뀌게 된다면 정말 많은 것이 달라질 터였다.

“······.”

하지만 무영은 아직도 내적 갈등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다시 이분을 믿고 따라야 할까? 그럴 수 있을까?’

무영의 사그라져 버린 맹목의 불꽃이 다시 타오를지는 상대를 조금 더 지켜보아야 알 것이다.

작가의말

이제 마교는 오랫 동안 나오지 않습니다.

아쉬운 분 없죠? ㅎㅎ

그나저나 선작이 2천명이나!!

저 나름의 작은 목표를 가지고 글을 쓰는 재미가 있네요.

여러 조언 댓글 남겨주시는 독자님 정말 감사해요~ ^ ^

[as******]

재미있어요~~

[강딘]

여우를 죽이는 것은 점 무리네요. 갑자기 바꾸어지기도 사람이 힘들고 차라리 풀어 주는 설정이나 다른 사람에 죽이게 하던지 직접은 점 무리요

[생각과반복]

여자의 마음이 어디로 튈지는 그 자신도 모르는 듯.

[홀어스로스]

더 사이코패스가 됐네요;

[홍곡]

잘 보고 갑니다^^

[엘앤디스]

재밋어요

[산양.]

이번 편 좋네요. 남은 연휴 마무리 잘하시기를~~

[풍운객잔]

정말 재미있고 좋은 글입니다.

[4cathars..]

풀어주는 설정이어떨지.... 후회한다면 푸러줘야

[드래곤식빵]

설주연이 무영에게 다가가 포옹하면서 작은 아버지처럼 곧잘 믿고 지낸세월이 참 그립네요 라고 말해주고 끝내시지...그래야 무영도 이해삼아 마음을 가라않힐 텐데...흠흠

[물물방울]

그렇게해서 변하는군요. 건필하시어요.

[cr******..]

아니 곰죽이는걸로 한소리 들어놓고 대오각성 하겠다 하면서 또 죽이다니... 이런 실수가 자꾸 보이네요

[ga******]

ㄳㄳ

[마아카로니]

건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