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기습신지를 지배하는 자 (3)
필요 이상으로 까다로운 주문에 강대운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분 앞에서 웃으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초지일관 위풍당당하던 무황백호는 돌연 작은 두려움을 내보였다.
{ 나도 정확한 그 이유는 모른다··· 단지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원래 나와 같은 백호가 둘이나 더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둘은 신수님과의 면담을 요청했다가 화를 입고 말았다. }
무황백호가 둘이나 더 있었다는 증언에 강대운의 입이 쩍 벌어졌다.
“아.. 아니, 화를 입었다는 말은 죽임을 당했다는 뜻입니까?”
{ 그렇다. }
무황백호는 과거를 회상하듯 멀리 떨어진 괴설봉을 바라보았다.
{ 그 둘은 각각 백 년의 간격을 두고 신수님께 뵙기를 청했는데, 면담 이후 아무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그래서 난··· 절대로 그분과 대면하지 않는다. }
강대운은 어이가 없어서 자기 볼 주위를 긁적였다.
“그럼 앞서 죽은 두 백호님은 웃어서 죽은 것이 확실한 겁니까?”
{ 그렇다고 들었다. 신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니, 사실이겠지. 아무튼 그 분 앞에서 절대 이빨을 보이지 말거라. 이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충고이자, 경고다. }
백호의 털 갈퀴를 움켜잡은 강대운은 다부진 눈방울로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느리게 걷던 무황백호는 다시 네 다리를 교차시키며 공간을 일그러트리듯 앞으로 나아갔다.
- 팟팟 팟팟팟
백호는 순식간에 괴설봉 밑자락까지 도달했는데, 정상에서부터 불어온 차디찬 한기가 그들의 머리털을 훑고 지나갔다.
- 휘이이이잉
강대운은 뼈를 시리는 한파에 입고 있던 의복을 굳게 동여매었다.
“으··· 상당히 춥네요.”
하지만 그런 철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만년설의 차디찬 한기(寒氣)는 강대운의 전신을 난도질하듯 덮쳐왔다.
{ ······. }
무황백호는 등 위에 탄 강대운의 몸이 식어가는 것을 느끼고 안구에서 현광을 터트렸다.
- 스물 스물
그러자 온화한 경력이 백호 몸에서 흘러나와 주변 일 장(一丈)에 달하는 지역을 감싸버렸다.
“갑자기 따뜻해졌네요?”
그 경력 범위 안에 들어간 강대운은 그제야 지독한 한기를 몰아내며 정신을 바로 잡았다.
“백호님,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내 사명을 수행했을 뿐이다. }
“감사한건 감사한 거죠.”
{ 내 일이라니까? }
한사코 감사 인사를 받지 않는 백호를 향해 강대운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이런 일에 수줍음이 많으시군요?”
{ ······. }
“어떻게 생각하시든 백호님은 제 은인이십니다.”
- 파팟 팟팟팟
대답을 회피한 무황백호은 신형을 날려 하늘 끝에 닿은 절벽 위를 빠르게 내달렸다.
- 꽈악
백호 등 뒤에 달라붙은 강대운은 그 아찔한 높이와 직각에 가까운 절벽에 크게 놀라며 있는 힘껏 털을 움켜쥐었다.
“장난 아니네요.”
잠시 뒤, 괴설봉 정상에 오른 무황백호는 몇 차례 호흡을 가다듬었다.
{ 거의 다 왔다. }
괴설봉을 마주한 강대운은 눈앞에 펼쳐진 경이로운 경관에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세상에··· 이곳은 정말 신세계로군요?”
괴설봉은 매번 눈보라에 가려져 있어서 이곳의 진정한 모습은 보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는 날씨여서 이곳의 절경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얼음의 신이 있다면 분명 여기에 살고 있을 거예요.”
인간의 침입을 허락한 적 없는 괴설봉은 자연이 만든 조각품처럼 웅장한 기세의 바위가 사방에 가득했다.
그리고 그 위로 수정보다 투명한 얼음이 매끄럽게 사위를 감쌌는데, 인간계에 존재하는 경관 같아 보이지 않았다.
- 피잉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빛을 받아낸 이 얼음바위들은 다채로운 무지개 색을 띠며 사방팔방으로 빛을 쏘아 댔다.
그 다양한 색은 마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색을 모은 듯해서 낭만적인 분위기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강대운 마저 감성에 취해갔다.
“전 복 받은 놈이군요. 이곳에 오다니.”
이 신비한 절경에 사로잡힌 강대운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괴설봉의 구석구석을 뜯어보았다.
“정말 멋지네요.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그 뒤에 선 무황백호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 나도 이곳에 오면 매번 놀라곤 한다. 나는 주변 산악지대를 모두 돌아다녔는데, 여기만큼 아름다운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
백호는 아쉽다는 듯 말을 이었다.
{ 신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이곳은 내 거처가 되었을 테지···. }
작게 으르렁 거리던 무황백호는 괴설봉 중심에 자리한 동혈로 다가간 뒤, 자세를 낮추었다.
{ 저 안으로 들어가면 신수님이 계실 것이다. }
“네? 아, 네···.”
바닥에 내려선 강대운은 돌연 작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흐음···.”
무황백호와 같은 전설적인 영물도 두려워하는 신수를 보려니, 겁이 난 것이다.
- 쓰윽
그는 쉽사리 발을 떼지 못하고 신형을 돌려 백호를 바라보았다.
“제가 왔다는 걸 그분께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백호는 작게 도리질을 쳤다.
{ 이미 모든 걸 아시니, 가서 만나 뵈기나 해라. }
강대운은 이왕이면 자신을 태워준 무황백호가 끝까지 동행을 해주었으면 싶었다.
아직 저의를 알 수 없는 신수보다는 오만한척하지만 정 많은 백호와 함께하고 싶은 것이다.
“백호님, 그러지 마시고··· 이 참에 저와···.”
그러나 백호의 태도는 매우 단호했다.
{ 난 절대! 절대로 신수님과 대면하지 않는다. }
“······.”
백호의 의지를 마주한 강대운은 할 수 없이 동혈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터벅 터벅
그런데 이 동혈은 바닥 전체가 석질(石質)과는 거리가 먼 매끈한 빙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엄청 미끄럽네?”
강대운은 혹시나 넘어질까 싶어서 조심히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갔다.
- 쓰슥 쓰슥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자, 도적 같은 어둠이 밀려와 눈에 보이던 모든 빛을 빼앗아 버렸다.
“흐음···.”
앞으로 나아가려고 벽을 더듬던 강대운은 손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한기에 연신 몸을 떨어댔다.
“여긴 정말 춥구나. 이런데서 어떻게 생명체가 살 수 있지?”
벽을 따라 어둠을 헤쳐 나가던 강대운은 한줄기 신비한 빛줄기를 발견하곤 마른침을 삼켰다.
“저, 저기로 가면 되나?”
그때 동혈 전체를 울리는 육중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그래, 이리로 오거라.”
강대운은 그 소리에 놀라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무황백호와 달리 진짜 음성을 발하고 있었다.
‘백호님은 음파를 이용해 심어(深語)를 만들어 의사를 전달했는데··· 신수님은 마치 사람처럼 음성을 발하는 구나?’
거북이가 기어가듯이 찬찬히 나아가던 강대운은 다시금 터져 나온 육중한 소리에 크게 놀라고 말았다.
“뭘 그리 꾸물대는 게냐?”
“네네, 갑니다. 가요!”
***
“세상에···.”
객잔 청소에 열을 내던 왕보는 낯선 이방인들의 출현에 어안이 벙벙했다.
“오호, 여러분은 어디서 온 귀인들이십니까?”
“크크··· 그래, 귀인은 귀인이지. 자네가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겠지만 말이야.”
“오호호호.”
“자자, 어서 들어가자고!”
선불객잔에 갑자기 들이닥친 이 이방인들은 얼핏 봐도 백 명은 족히 되어 보였다.
그 숫자를 일일이 세어본 왕보는 당황했던 표정을 지우고 천연덕스런 미소를 피어 올렸다.
‘지금까지 왔던 손님을 모두 합친 숫자 같은데? 흐흐흐, 드디어 우리 객잔에도 손님이 몰리는구나.’
상황파악을 마친 왕보는 서둘러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객잔이 좁아서 모두가 이용하시긴 불편하실 겁니다. 제가 야외에 남는 탁자를 설치해 드리겠습니다.”
상냥한 인상의 종율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서둘지는 말게. 그보다 안에 객방은 있는가?”
“예, 세 개밖에는 없지만, 방마다 두 개의 침상을 갖추어 놓았습니다.”
왕보는 이 많은 손님들이 변방의 객잔에 나타난 이유에 대해서 조금도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허황된 꿈에 젖어 값싼 미소를 흘리기만 했다.
‘이거 장사가 이리 잘되면··· 확장공사라도 해야겠는데?’
망상에 사로잡힌 왕보는 입이 귀에까지 걸려버렸다.
“······?”
종율은 무심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우린 모두 여기서 묶고 갈 것이네. 객방이 부족하다면 식사 후에 탁자를 치워주게 거기서 쉴 수 있도록.”
“예, 그리 하겠습니다.”
지금 선불객잔을 찾은 이들은 혈봉궁 제일의 무력집단 귀수신이었다.
그들은 추가적인 지시가 내려오기 전까지 울창한 수림지대에 숨어 있을 요량으로 이곳을 찾은 것이다.
- 쓰윽
급히 식사 준비에 들어가려던 왕보는 문득 떠오른 것이 있어 이들의 수장을 다시 찾았다.
“손님, 이거 어떡하지요?”
종율은 냉랭한 눈초리로 되물었다.
“무엇이 문젠가?”
“저··· 이렇게 많은 분들에게 대접할만한 식재료가 없습니다. 항상 소량만 준비해 두거든요. 시간을 주신다면 제가 능운상가에 가서 재료를 구해오겠습니다.”
그와 마주선 종율은 당연히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건 걱정 말게. 내 수하를 시킬 테니··· 자넨 그저 식재료 목록을 작성해주게.”
외딴 객잔에 찾아온 손님이 장까지 대신 봐준다고 하자 왕보는 황송함에 머리를 깊게 숙였다.
“아이구, 감사합니다. 최고로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헤헤···.”
종율은 신법이 탁월한 수하를 골라 식재료 목록이 적힌 종이를 전해주었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말고 다녀와라.”
“예.”
수하를 떠나보낸 종율은 유유자적 걸음을 옮겨 이 층 객실로 올라갔다.
귀수신은 백 명의 초일류고수들로 구성된 무력집단이지만, 그 안에서도 엄연히 상하계급이 존재했다.
그 중 폭뢰진검(暴雷縉劍) 종율 밑으로 가장 강한 무위를 지닌 네 명을 천귀사살(天鬼四殺)라 불렀는데, 이들은 개개인의 무위가 절정고수에 육박할 정도로 뛰어났다.
- 쓰슥
이층 복도 선 여인은 층계를 올라오는 종율을 보고 서둘러 입술을 벌렸다.
“대장, 어서 오십시오.”
이 여인은 천귀사살 중 유일한 여자인 악귀(惡鬼) 매도령이었다.
“······.”
곧 그녀 뒤에 널브러지듯 주저 않은 남자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흐흐, 대장 오셨습니까?”
지금 입을 연 사내는 천귀사살 중 살귀(殺鬼)라 불리는 최두인데, 살인하는 일을 밥 먹는 것보다 좋아하는 마두였다.
그리고 이층 복도 오른쪽 편에는 광기에 사로잡힌 사내가 바닥에 머리를 박고 엎드려 있었다.
“······.”
이 사내는 천귀사살의 수장겪인 천귀(天鬼) 오봉부로 무공 수위만큼은 귀수신에서 종율 다음가는 사내였다.
종율은 이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물었다.
“내가 쉴 방은 어느 곳이냐?”
“네, 대장! 이쪽 방을 쓰십시오.”
삐쩍 마른 중년사내가 마치 점소이라도 된 것처럼 종율에게 방을 안내했다.
이 자는 대귀(大鬼) 지소욱으로 천귀사살 중 가장 잔인한 손속을 지닌 마두였다.
종율은 층계에서 가장 가까운 객방으로 들어가려다가 신형을 돌려세웠다.
- 쓰윽
“일을 벌이기 전까진 괜한 살행을 일절 금하겠다. 그리고 객잔 주변에 매복조를 배치하도록 해라.”
“예예. 그리하지요.”
귀수신은 무공수위로 서열이 정해지는데, 서열이 높더라도 대화 간에 특별한 격식을 차리진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대장 종율에게 만큼은 모두들 이런 예를 표하곤 했다.
“내가 다녀오지.”
종율의 지시를 받은 지소욱은 이를 즉각 실행하기 위해 객잔 일층으로 내려갔다.
“지금부터 밑에 서열 순으로 두 시진씩 매복을 실시한다. 일을 벌이기 전까지는 일체 살행을 금지하니, 모두 명심하도록.”
백발에 나이가 지긋한 고두심은 귀수신 밑바닥 서열이어서 꼼짝없이 맨 먼저 매복에 투입되어야 했다.
“쳇, 또 걸렸군.”
고두심의 볼멘소리에 다른 귀수신 고수들이 싸늘한 눈빛을 보내왔다.
“어여 가라.”
“한 참 뛰어다닐 때지··· 암!”
사방에서 따가운 눈총이 쏟아지자, 고두심은 할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쓰윽
그리고는 그와 동일한 서열의 사후칠을 데리고 객잔 밖으로 나왔다.
“······.”
그런데 사후칠은 일전에 종율에게 일 년 동안 묵언할 것을 명받은 상태여서 불만조차 표하지 못했다.
- 작가의말
설주연이 갈때도 다가오는군요.
글의 흐름에 맞게 떠나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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