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계획은 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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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습지 안내인 낙취는 매사에 돈을 밝히고 더러운 수단도 가리지 않는 성품이어서 그와 일행을 맺으려는 이가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괴습지 내에서 방향 감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길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의 더러운 성정을 뒤에서 욕했으나 감히 선관오위를 함부로 대할 수 없어서 소청이라는 꿈보다 해몽 좋은 별호를 붙여놓았다.
“흠흠···.”
사마진은 음흉한 눈매를 다듬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낙취님과 같이 갈 일행으로 진권왕과 단악이검, 그리고 악사비를 준비시켜 놓았습니다.”
진권왕(鎭拳王)은 호북성에서 이름을 날리는 초일류 고수로 권법을 익힌 자들 중에 그를 모르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
그의 강맹한 두영권법(竇靈拳法)은 대적하는 자의 영혼까지 뚫어 버린다는 무서운 평가를 받고 있었다.
또, 단악이검(丹齷二劍)은 동강에서 활동하는 괴인들로 유독 붉은 옷을 좋아해서 항상 홍의를 챙겨 입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초일류 고수이기도 하지만 일단 검을 뽑으면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는 성정을 가지고 있어서 강호 무림의 그 누구도 그들과 시비를 만들려하지 않았다.
“······.”
함께할 일행의 전력을 가늠해본 낙취는 굳은 안색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작 그들로 운무궤계에 들어가겠다는 게냐? 거기다 악사비는 누구냐? 처음 듣는 녀석인데···.”
“악사비는 가명입니다. 그의 진짜 이름은··· 벽마괴살 적살입니다.”
- 꿈 틀
낙취의 안면 근육이 꽤나 격한 반응을 일으켰다.
“광동성 희대의 마인, 적살 말이냐?”
“그렇습니다.”
“어떻게 그런 괴물을 포섭한 게냐?”
사마진은 그의 시선을 회피하며 작게 대답했다.
“그건 이번 여정과 관계없는 일이니, 답해 드릴 이유가 없습니다.”
“마음대로 해라.”
낙취는 들고 있던 금자를 내려놓으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적살 같은 노마두가 함께 간다면 더 이상 든든할 게 없지. 그보다··· 여정을 떠나가기 전에 모두 한번은 모이는 게 좋을 것이다.”
“자리를 준비하지요.”
대화를 끝낸 사마진은 별실을 나와 작은 화원을 지나쳤는데, 갑자기 불쾌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사례금을 한 번에 챙겨 오라고 할 때는 언제고 그것을 고작 선금으로 받겠다고? 내 이 영감을 반드시 응징하리라···.’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다는 건 사마진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능운령 내에서 선관오위 몸에 손을 대는 일은 감찰대와의 전면전을 불사하겠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흥, 그래 봐야 능운령에서 뿐이지··· 괴습지에서는 불미스런 변고가 얼마든 생길 수 있지 않겠어? 거기다 이번에 들어가는 곳이 운무궤계라면···.’
잠시 더러운 암계(暗計)를 계획하던 사마진은 돌연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연맹에서 우리 혈봉궁의 존재와 계획을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사마진은 무림 정사연맹이 장묵을 공격한 흉수를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혈봉궁인을 색출하기 위해 금지령을 발동한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금지령이 해제되었으니, 분명 정사연맹에서 무언가를 알아냈다는 걸 의미했다.
‘일을 더 서둘러야겠군. 그 물건만 찾는다면··· 이번 일은 아무래도 좋아!’
혈봉궁의 책사인 방회가 직접 선관오위를 찾아온 것은 그만큼 이번 사안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가 찾으려는 물건은 마도 무림의 신물로 불리는 천마신보령(天魔神寶令)이었다.
이는 백여 년 전에 천마신교 역사를 통틀어 두 번째로 강했던 혈마대제 마환이 괴습지 정벌 때 가져갔다가 소실된 것으로, 그 가치는 백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천마신보령은 모든 마도인을 복종시키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어서 얻기만 한다면 마도 무림의 하늘로 섬김을 받게 될 것이다.
‘천마령만 손에 들어오면 혈봉궁이 진정한 마도의 하늘로 추앙받을 테지. 그러면 천마신교 또한 우리 마음대로 흔들 수 있을 것이다.’
혈봉궁이 천마신교를 조종할 수만 있다면 더는 감찰대나 정파 무림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와룡객잔을 빠져나가는 사마진의 발걸음은 행복한 상념에 젖어 점차 빨라져 갔다.
***
- 웅성 웅성
전장을 방불케 하는 왕래문의 전경은 들어가려는 사람과 나가려는 사람들이 한데 섞이며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야심한 밤부터 시작된 이 난리통은 해가 중천에 뜬 지금까지도 나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행장을 짊어진 청성의 문인들은 신형을 돌려 아쉬운 심정을 토해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제가 뭐 한 게 있나요?”
연평권은 다시 한 번 포권을 취했다.
“이번 여정에서 강 서생님을 만난 건 정말 행운이었습니다.”
그를 마주한 강대운은 차분히 예를 갖췄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옆에 서있던 사화령도 살랑거리는 눈매를 내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능운령에서의 일들은 잊을 수 없을 거예요.”
“저도 여러분을 잊지 못할 겁니다.”
강대운이 정답게 대답하자, 사화령 옆에 선 조은평이 다부지게 입술을 깨물었다.
“강 서생님 덕분에 저와 청성파의 이름이 드높아졌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연이은 감사인사에 강대운은 쑥스러운 듯 연신 손사래를 쳤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보다 산속에서는 날이 일찍 저무니, 어서 떠나십시오.”
그의 재촉에 연평권이 일행을 대표하여 마지막 작별인사를 고했다.
“발을 떼려니, 쉽게 떨어지질 않는군요. 허나 인연은 이게 끝이 아닐 겁니다. 살아 있다면··· 또 뵐 날이 오겠지요.”
강대운은 이에 크게 동의했다.
“맞습니다. 언젠가는 또 만나게 될 겁니다.”
청성의 문인과 강대운은 시원섭섭한 교감을 나누며 서로를 떠나보냈다.
- 터벅 터벅
그들이 왕래문의 웅성거리는 인파 사이로 몸을 의탁하자, 순식간에 그 모습이 인파 속으로 동화되어 버렸다.
“······.”
강대운은 잠시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이다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다른 일행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청성파는 먼저 떠났습니다.”
“예···.”
그가 다가간 곳에는 피풍의(避風衣)와 죽립을 깊게 눌러쓴 네 명의 여인이 서 있었다.
이화궁인들은 선불객잔을 처음 찾았을 때와 같은 차림으로 이별을 준비 중이었는데, 그 모습이 하나같이 침울해보였다.
연화는 아쉬운 마음에 주변을 작게 쓸어보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솔직히 능운령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는 너무나 막막했어요. 적혈문의 이목을 피해서 소희를 치료해야만 했으니까요.”
그녀의 음색에는 상대에 대한 정감이 강하게 묻어나왔다.
“그런데 우연히 강 서생님을 만나 모든 일을 처리하고 홀가분하게 떠나게 됐으니··· 이에 대한 보답은 이화궁에서 어떻게든 감당해 내겠습니다.”
연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연이 재빨리 말을 받았다.
“무엇보다 굉장한 가치를 지닌 청음단을 저희에게 내어 주셨잖아요? 우리 이화궁은 백골난망(白骨難忘)의 빚을 진 거예요.”
곁에 선 진령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미리 충분한 금자를 가져오지 못했으니, 나중에 섬서성 이화궁을 꼭 찾아주세요. 그러면··· 정말 신선이 부럽지 않은 대접을 해드릴게요.”
그들의 애절한 태도에 강대운은 가느다란 미소를 머금었다.
“중원무림에서 제게 빚을 진분은 한두 분이 아닙니다.”
곧 강대운의 눈매에 미묘한 안광이 서렸다.
“그리고 저는 빚을 두고 보는 사람이 아니어서 반드시 그 대가를 받기위해 여러분들을 찾아 갈 겁니다. 혹 나중에 제가 요구하는 것이 지나치다고 하지 않으시려면 마음의 준비를 지금부터 단단히 하셔야 할 겁니다.”
강대운은 이미 삼년 동안 괴습지 안내인으로 활동하며 많은 금자를 모아놓은 상태였다.
‘눈앞에 금자는 내게 별 의미가 없지. 오히려 금력으로는 살 수 없는 이들과의 친분이 내게는 더 값어치가 있어.’
그는 몸을 고친 이후에 강호에서 여러 활동을 꿈꾸고 있어서 가능한 많은 무림인과 친분을 쌓으려했다.
“이제 그만 떠나셔야죠?”
“네? 아, 그래야죠.”
이화궁인과의 작별이 마무리되어 갈 때쯤, 그녀들은 돌연 자리를 피해 소희가 강대운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해 주었다.
“······.”
연화는 뒤늦게 연정에 눈을 뜬 소희가 가슴 아픈 이별에 큰 충격을 받을까봐 내심 노심초사하고 있는 상태였다.
‘첫 사랑은 이루어지기 힘든 법이니, 소희가 마음을 잘 추슬렀으면 좋겠구나.’
이화궁은 오로지 여자만으로 이루어진 집단이어서 만약 혼례를 치러도 남자는 궁 밖에 거처를 얻어 따로 살아야만 했다.
그런데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계속 떨어져 살아가는 그들은 결국 이별이라는 파국을 맞이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 때문에 이화궁의 여인들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 것을 강요받았고 그렇게 사는 이들이 많았다.
‘어쩌면 강 서생이 여자를 가까이 할 수 없는 신체인 것이 다행일지도 모르겠구나. 소희도 결국 자기 마음을 접어야 한다고 느낄 테니···.’
연화가 진령과 고연을 데리고 두 사람에게서 멀찍이 떨어지자, 머뭇거리던 소희가 수줍게 죽립을 들추고 입을 열었다.
“제가 못난 모습을 너무 많이 보여드렸죠?”
“섬서제일미이신 소희 소저에게 못난 모습이라뇨?”
“그런 뜻이 아닌 걸 잘 아시면서···.”
“······.”
그녀의 수줍은 반응에 강대운은 한가로이 자신의 볼을 긁적였다.
“청음단의 효능으로 극한의 음기를 지니게 되셨으니, 다음에는 혈명장에 적중당해도 해를 입지 않으실 겁니다. 또 앞으로 무공 수련에 혼신을 쏟는다면 절정의 경지에 오를 수도 있겠죠.”
“예···.”
지금 소희에게 무학에 관한 일은 중요하지 않았다.
“강 서생님은 능운령에서 계속 사실 건가요?”
“일단은 그렇습니다. 제 몸을 치료할 만한 곳이 여기밖에 없거든요.”
소희는 입술을 잘근 씹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앓고 계신 질환은 반드시 치료되실 거예요··· 괴습지에는 천하에 다시없을 귀한 약초가 많으니까요.”
“그렇습니다. 저도 그날이 어서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소희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용기를 내어 강대운과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 만약 그 음양절맥이 완쾌되신다면··· 제게 전서구를 띄워주세요.”
그녀의 황당한 요구에 강대운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예? 그건 왜···.”
“지금 하지 못한 행동을 그때라도 하고 싶어요··· 그러니까··· 그냥 그렇게 해주세요.”
“······.”
소희가 지금 하지 못하는 행동은 분명 신체적 접촉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흐음, 내게 연정을 느껴봐야 좋을 것이 없는데···.’
따가운 강대운의 시선에 얼굴이 달아오른 소희는 몸을 비비 꼬다가 이화궁인이 기다리는 장소로 달아나버렸다.
- 탁 탁 탁
강대운이 멀리 왕래문으로 떠나가는 이화궁인에게 손을 흔들자, 그녀들도 화답하듯 정답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 웅성 웅성
그리고 곧 그녀들도 왕래문의 수많은 인파 사이로 동화되어 본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흐음···.”
강대운은 일행을 맺은 사람들을 왕래문까지 나와 배웅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들을 떠나보내고 나면 왠지 모르게 가슴 한편이 쓸쓸해지고 적적해지기 때문이다.
“술이 고픈 날이군.”
그리고 이런 기분이 들 때마다 그가 찾아가는 주루 하나가 있었다.
그곳은 선불객잔의 고독하고 기괴스런 분위기가 아닌, 각양각색의 사람들 정취가 느껴지는 장소였다.
“이봐, 오늘도 빈자리가 없나?”
“예예··· 죄송합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능운상가 초입에 자리 잡은 정감루(情感樓)는 술에 취해 정감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로 매일 성시를 이루는 주루였다.
내부는 특색에 맞춘 장식과 함께 세 분류로 구별되는데, 일 층은 주머니가 얇은 서민을 위한 구조로 별다른 장식 없는 탁 트인 공간이었다.
그리고 층계를 통해 이 층으로 올라가면 중산층이나 일반적인 무림인들을 위한 내실이 자리해 있다.
마지막 삼 층은 무림의 명망 높은 사람들만이 입장이 가능한데 그 안에 어떤 장식과 기물이 자리하고 있는지는 아는 자가 매우 드물었다.
“오늘은 얼마나 기다려야 하려나···.”
강대운은 적적할 때만 이 주루를 찾는 편이어서 정감루의 단골손님이란 직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 비싼 돈을 지불하고 술 마시기 싫어해서 일반 서민들이 들어가는 일층을 주로 이용했다.
그는 이 자리를 얻기 위해 기다란 대기열 뒤에 서서 천천히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음냐, 음냐···.”
사실 그가 선관오위라는 신분을 이용하면 언제든 황송한 대접과 무상의 고급 술을 제공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강대운은 그런 격한 대접보다 조용히 사색에 빠져서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구경하길 좋아했다.
“오늘은 줄이 유독 더 기네···.”
그가 지루한 대기 행렬에 서 있는 동안 몇 차례 고급 유삼을 차려입은 무림인들이 대기 줄을 무시하며 주루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지체 높은 신분과 거대한 자금력을 가진 상위계층이어서 대기자들은 서로 작게 웅얼거렸다.
“젠장할 놈들··· 지들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라고 만날 먼저 들어가 버리는 거야?”
“그러게 말이야. 저런 놈들만 없어도 우리 차례가 훨씬 빨리 돌아올 텐데···.”
고된 노동 후의 피곤이 느껴지는 두 중년사내는 서로를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이봐, 그건 아니지··· 저들은 이 층이나 삼 층으로 올라갈 테니, 우리 대기시간이 길어진 거와는 별개네.”
“이 사람이? 말이 그렇다는 거지··· 자네는 내 말에 꼭 그리 토를 달아야겠나?”
다른 대기자들과는 달리 강대운은 이 상황을 즐기며 지나쳐 가는 무림인들과 그 뒤를 따르는 행인들을 자세히 관찰했다.
그들 얼굴의 특징과 작은 행동거지를 통해 내력을 추적하는 놀이를 하는 것이다.
‘호오, 방금 들어간 자는 진권왕(鎭拳王) 도패인 것 같은데··· 무슨 연유로 저리 바삐 가는 걸까?’
정감루에서 강대운이 선호하는 자리는 언제나 이 층으로 이어지는 층계 앞이었다.
그가 이 자리를 탐내는 이유는 위로 올라가는 다양한 무림인들의 내력을 유추해보고 다음 상황을 예측해보기 위해서였다.
‘도패 정도의 인물이라면 어딜 가도 극진한 대접을 받을 것인데··· 그가 은연중에 신법까지 발휘하며 들어간 것을 보니, 위층에 신분이 더 고귀한 사람이 와 있다는 건가?’
- 작가의말
주인공 강대운은 호구가 아니지만 제대로 알려드리질 않았으니, 책임은 제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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