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기습신지를 지배하는 자 (2)
억겁(億劫)의 세월을 살아온 무황백호는 고강한 무위를 갈고 닦은 뒤, 남아도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여러 부가 활동을 해오고 있었다.
동혈 벽에 문양을 파는 일은 그의 취미생활 중 하나일 뿐 전심을 쏟는 분야는 따로 있었다.
- 터벅 터벅
야광석이 박힌 동혈 안으로 깊숙이 들어온 강대운은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휘황찬란한 광채에 넋을 잃고 말았다.
“아니, 이건 대체?”
“뭐에요?”
뒤따라오던 설주연은 그 심상치 않은 기운에 서둘러 다가왔다.
“아···.”
그녀의 입에서도 경악성이 튀어 나왔다.
인공적인 손길로 깎여 나간 동혈의 내부는 둘레가 십 장(十丈)정도였는데, 이 좁지 않은 공간에 진귀한 물건들이 정교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 진열되어있는 물건들은 결코 운무궤계나 괴습지에 얻을 수 있는 자연의 산물이 아니었다.
- 이이이이잉
신비한 기운을 품기는 병장기를 시작으로 화사한 빛깔의 금팔찌와 각종 귀금속등이 야광석의 빛을 받아 다채롭게 번쩍거렸다.
그 영묘한 빛의 무리 중에는 보는 이를 황홀지경에 빠트리는 신비스러운 색깔의 장식품도 존재했다.
“믿을 수가 없네요···.”
설주연은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으며 무황백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건 괴습지에서 죽은 무림인들의 병장기와 소지품인 건가요?”
{ 그렇다. 흙으로 돌아간 자들이 남긴 다양한 흔적들이지. }
무황백호의 진짜 취미는 이 같이 빛나는 물건을 모으는 일이었다.
그의 진열장에는 번쩍거리는 반지와 기괴하게 뒤틀린 병장기, 그리고 사소한 생활 집기까지 들어차 있어서 세상의 보물을 모두 모아놓은 것만 같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 같은 물건을 모아오셨군요···.”
눈대중으로 여러 진열장을 둘러본 강대운은 기가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신병이기로 불리는 옥룡비검(玉龍匕劍)과 그에 버금가는 보물들이 가득하군요. 옥룡비검만 해도 이십 년 전, 복호장(伏虎掌)의 달인 반야가 죽으면서 사라진 복호문의 가보인데···.”
다른 진열장을 둘러보던 설주연도 매혹적인 눈매를 연신 번뜩였다.
“여기에 대력합죽선(大力合竹扇)도 있어요. 이 부채의 가치는 황금 천 냥은 족히 나갈 텐데···.”
무황백호는 처음으로 데려온 인간들이 연신 혀를 내두르며 경악성을 내지르자,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으며 자신의 앞발을 핥았다.
- 쓰윽 쓰윽
‘흐흐, 항상 혼자서 애장품을 감상해 왔는데··· 이렇게 난리 치는 인간들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지는군.’
백호가 모은 애장품은 실로 방대한 규모여서 강대운과 설주연이 그 내부를 둘러보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런데 진열된 장식품을 정신없이 구경하던 설주연의 눈이 갑자기 놀란 토끼처럼 되었다.
“아···.”
오랜만에 터져 나온 그녀의 침음성에 강대운이 관심을 보이며 다가섰다.
“이번엔 뭘 발견한 겁니까?”
“······.”
강대운 시야에 잡힌 물건은 그저 거무칙칙한 흑색의 나무 패였는데, 이 패에서는 기분 나쁜 기운마저 풍겨져 나왔다.
“흐음···.”
그런데 이 패는 주변에 진열된 다른 보물들에 비하면 정말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물건이었다.
“이게 뭡니까?”
설주연은 떨리는 심정을 겨우 안정시키며 몸을 돌려 세웠다.
“이 물건은 천마신보령이라 불립니다. 마도를 하나로 통합했던 천마님이 손수 제작한 천마신교의 신물이지요.”
“······!”
중원 무림의 역사를 대부분 꿰고 있는 강대운은 천마령이란 말에 절로 몸이 떨려왔다.
천마령은 모든 마도인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 권위의 신물인 것이다.
만약 마도인 중에서 이 천마령의 명령을 거부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모든 마도인들의 척살을 받아야 할 정도로 그 권위가 절대적이었다.
사실 오래전부터 천마신교가 다른 마도인들의 하늘로 추앙받았던 이유는 천마가 만든 패가 언제나 그곳에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 꿀꺽
강대운은 마른 침을 삼키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 패는 혈마대제가 괴습지에서 서거하며 사라진 것이지요?”
“맞아요. 그리고 그분은··· 무황백호에게 찢겨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죠.”
심상치 않은 대화 소리에 묵묵히 앉아있던 무황백호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 반짝이지도 않는 쓸데없는 물건을 보고 있군. }
설주연은 무황백호를 응시하다가 작은 음성을 발했다.
“이 패는 어떻게 얻으신 거죠?”
그것을 본 무황백호는 잠시 과거를 회상하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 전에 수많은 인간들이 떼를 지어 이곳에 침입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많은 금수들과 영물들이 죽임을 당했지. 그래서 나는 각 지역의 대표를 선정해 연합을 만들고 이를 이용하여 그들의 습격을 막아냈다. 그 나무 쪼가리는 당시 침입자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가지고 있던 물건이다. }
설주연은 그때의 침입자가 자기 소속 문인들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
무황백호의 말대로 마교는 단지 그들의 삶의 터전을 습격한 침략자일 뿐인 것이다.
“그 우두머리를 죽인 분은 누구시죠?”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강대운은 이 대목에서 큰 관심을 보였다.
무황백호의 존재조차 최근에 확인된 것이어서 그 개체수와 같은 다른 백호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 ······. }
질문을 받은 백호는 돌연 앞발로 자신의 옆구리와 목에 그어진 흉터자국을 보여주었다.
{ 처음으로 날 상처 입힌 인간이었다. 인간이 그토록 강해질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지. 하지만 날 상처 입힌 대가로··· 그는 한줌의 핏덩이로 승화되었다. }
설주연에게는 정말 놀라운 사실이었다.
천마신교 역사상 두 번째로 강했던 혈마대제를 죽인 무황백호가 바로 눈앞에 서 있는 것이다.
“아···.”
그녀는 감성에 젖은 촉촉한 눈빛으로 조심히 입술을 벌렸다.
“절 여기에 머물게 해주신 건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감히··· 부탁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무황백호는 크게 경계심을 보이며 머리를 내저었다.
{ 인간의 부탁을 들어줘야 할 이유는 없다. }
다급해진 설주연은 입술을 깨물며 간절한 음성을 토해냈다.
“제게 이 패를 주시면 안 되나요? 대신 그보다 더 반짝이는 물건들을 선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무황백호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 ······. }
그러자 오히려 강대운이 야단을 떨었다.
“주연 소저에게는 이 패가 중요합니까, 아니면 능사구미호가 중요합니까?”
“당연히 천마령이죠. 이를 얻는 일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대 사안이에요.”
무황백호는 애지중지 모아왔던 물건을 누군가에게 건넨다는 것 영 꺼림칙했다.
{ 인간에게 선물을 받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니 네 부탁을 들어줘야할 이유도 없지. }
설주연은 절색의 미모를 뽐내며 치렁거리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천하에 명망 높은 백호님? 제게 한번만 아량을 베풀어주시지 않으시겠어요?”
{ ··· 그런 아부에 넘어가지 않는다. }
강대운은 천마신보령을 보며 혼자 상념에 빠졌다.
‘마교의 힘이 약해진 이후로··· 혈봉궁과 같은 막무가내 사파조직이 여기저기서 난리를 치고 있어. 그런데 이 패가 다시 마교로 돌아간다면 그들이 능운령을 휘젓는 혈봉궁을 막아내지 않을까?’
혈봉궁의 횡포로 최근 능운령이 매우 혼란스러운 위기 상황을 맞은 상태였다.
이곳의 체제는 그의 밥줄과 매우 연관이 깊기 때문에 강대운은 이 사건을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었다.
거기다 이 기회를 이용하면 능사구미호를 포획해야하는 난감한 과제도 떨쳐버릴 수 있었다.
“흐음, 저희는 백호님 거처에 초대된 최초의 인간이지요? 이를 기념해서 선물을 하나 주시다면 정말 매우 황송할 것 같군요···.”
{ ······. }
무황백호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심에 들어갔다.
‘이 소년은 주인님을 살린 은인이니··· 그 정도 부탁은 들어줘도 되지 않을까?’
잠시 뒤, 백호는 초조한 발걸음으로 다채로운 빛을 내는 진열장 하나를 막아섰다.
{ 이쪽 물건은 내가 제일 아끼는 것들이라 절대로 내줄 수가 없다. 그러니 다른 곳에서 각자 마음에 드는 물건을 하나씩 고르도록 해라. }
강대운은 놀란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정말 저희에게 선물을 주시는 겁니까?”
{ 생각 바뀌기 전에 어서 골라라···. }
이미 가져갈 물건을 정한 설주연은 화사한 미소로 강대운을 바라보았다.
“전 천마령으로 정했어요. 이제 오라버니것만 찾으면 되겠네요?”
강대운은 진열된 물건들을 일일이 살펴보며 그 내력을 가늠해 보았다.
‘진정 이 진열품 중 어느 한 가지만 가져가도 천하의 무림인들이 달려들 만한 보물이다.’
수많은 진열품을 둘러보던 강대운은 백호를 향해 의문을 표시했다.
“설마 이 많은 물건을 혼자 모으신 건 아니시죠?”
{ ······. }
무황백호가 이에 답하지 않자, 강대운은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건 중요한게 아니죠.”
그런데 무황백호 거처에 진열된 이 애장품들은 사실 그가 일일이 모은 것이 아니었다.
일 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백호의 생일을 기념하여 괴습지 금수들이 저마다 번쩍이는 선물을 바친 것이다.
일행 숫자가 열을 넘을 때 공격해오는 극강의 맹수들은 사실 그들의 소지품에 관심이 많았다.
매년 돌아오는 무황백호의 생신날에 잘 보여 나야 그 해에 아무런 탈이 없기 때문이다.
‘어디보자··· 어떤 걸··· 응?’
수많은 보물 중 강대운의 시선을 사로잡은 물건은 단조로운 모양의 비녀였다.
이는 십 촌(十寸) 길이에 청명한 색채를 가졌는데, 보통 괴습지에 들어온 무림인들 중에는 이런 비녀를 지닌 사람이 많지 않았다.
‘혹시 이건··· 이서님이 찾으시던 그 옥비녀가 아닐까?’
뒤늦게 옥비녀를 발견한 설주연도 같은 놀라움을 표현했다.
“그건 옥비녀로군요? 설마···.”
강대운은 이에 대한 확답을 얻기 위해 백호에게 옥비녀를 내밀었다.
“이 물건은 어디서 얻으신 겁니까?”
무심한 안광으로 비녀를 바라본 무황백호는 담담한 음성을 발했다.
{ 그건 붉은 늑대들이 가지고 노는 것을 내가 빼앗아 온 것이다. }
그 설명에 강대운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늑대라면 오용 나무를 지키는 뇌전혈견을 의미하는 것이겠지··· 그럼, 이 옥비녀가 틀림없다!’
강대운은 수많은 보물을 제쳐두고 이 옥비녀를 집어 들었다.
“그럼, 저는 이걸로 하겠습니다.”
{ 마음대로 해라. }
- 쓰스슥
무황백호는 커다란 신형을 돌리며 눈꺼풀을 몇 번 껌벅였다.
‘이 인간들은 욕심이 없는 것인가? 딱 봐도 휘황찬란한 것이 이토록 가득한데··· 저런 보잘것없는 물건들만 챙기다니?’
누군가에겐 보잘것없는 물건이라도 다른 누군가에겐 가장 가치 있는 보물이라는 것을 무황백호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 쓱
생각을 정리한 무황백호가 안광 번뜩이자, 멀뚱히 서 있던 설주연이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 털썩
강대운은 바닥에 널브러진 그녀를 바라보았다.
“재워둘 생각이셨군요?”
{ 난 인간을 믿지 않는다. 내가 없는 동안 다른 물건에 손을 댈지도 모르니까. 다녀오면 다시 정신을 차릴 것이다. }
무황백호는 자세를 낮추며 등 뒤에 탈것을 지시했다.
“으쌰.”
백호 등 뒤에 올라탄 강대운은 가슴 속에 갈무리 된 온전초를 확인하고는 다시 한 번 의지를 다졌다.
“그런데, 괴설봉에는 누가 있는 겁니까?”
자리에서 일어선 무황백호는 진중한 음색으로 으르렁댔다.
{ 그곳엔··· 모든 영물과 금수를 지배하는 신수(神獸)께서 계신다. }
말을 마치고 동혈 밖으로 나온 무황백호는 기화이초(奇花異草)로 뒤덮인 초원의 중심까지 쏜살같이 내달렸다.
- 파팟
그 초원의 중심에 멈춰선 무황백호는 천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 여기까지는 전에도 왔었지? }
“예, 그랬지요.”
초원에 펼쳐진 다채로운 꽃들이 저마다 무리를 지어 하늘거리는 모습은 가히 세상에서 다시 보기 힘든 장관이었다.
거기다 이곳은 운무궤계에서도 한참을 벗어난 곳이어서 꽃으로 이루어진 언덕이 수평선 넘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저번엔 여기서 정신을 잃었었죠.”
강대운은 바닥에 가득한 무성한 화초의 향내를 맡으며 잠시 눈을 감았다.
‘이 기화이초 중에는 분명 학계(學界)에 보고되지 않은 미지의 영약과 약초들도 많을 테지··· 나중에 기회를 봐서 다시 와봐야겠다.’
- 터벅 터벅
무황백호는 새하얀 민들레를 사뿐히 지르밟으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 신수님을 뵐 때 꼭 지켜야 할 사항이 있다. }
“말씀하십시오. 경청하겠습니다.”
무황백호는 꽃밭을 천천히 걸으며 말을 이었다.
{ 그분께는 질문을 할 필요가 없다. }
물어봐야 할 질문이 산더미 같은 강대운은 입술을 잘근 씹었다.
“하지만···.”
{ 그분께서는 모든 걸 알고 계신다. 그러니 질문을 할 필요도 없지. }
“······.”
강대운은 눈썹을 움찔거렸다.
‘모든 영물을 지배하는 신수라 했으니, 상대의 생각까지 읽을 수 있을 지도?’
상념을 마친 강대운은 차분히 입을 벌렸다.
“흠흠, 또 유의해야할 것이 있습니까?”
무황백호는 침울한 표정으로 작게 으르렁되었다.
{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지. }
“말씀하십시오.”
{ 절대로, 절대로···. }
“네.”
{ 그분 앞에서 웃음기를 보여선 안 된다. }
“네? 그게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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