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비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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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는 눈물을 소매로 훑어낸 청년은 울먹거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전 감숙성의 합작(合作)에서 왔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에··· 저는 길거리에서 굶어 죽어가며 한 많은 인생을 마감하고 있었지요. 그때, 작은 객잔을 운영하던 은인의 규화동계가 아니었다면 저는 그날 죽고 말았을 겁니다. 그러니 어찌 그때의 맛을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왕보는 크게 놀라며 앞에 선 청년을 마주보았다.
“허허, 그렇다면 자네는 그때의 그···.”
“그렇습니다. 제가 바로 그 고아 소년입니다.”
한참 동안 두 사람은 지난 세월을 논(論)하며 가슴아픈 사연을 나누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왕보가 건넨 닭찜을 먹고 간신히 살아남은 강대운은 이후 많은 고초를 겪다가 우연한 기회에 진의문이라는 거대 문파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진의문에서 비록 비정규직으로 일했지만 꽤나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몸의 병을 고쳐야 해서 할 수없이 그곳을 떠나고 말았다.
여자와 어떠한 접촉도 할 수 없는 신체 질환을 고치기 위해 중원 곳곳을 떠돌아다닌 강대운은 결국 갖은 약초가 가득한 괴기습신지까지 오게 되었다.
“능운상가에서 우연히 주운 전단에, 은인의 이름과 규화동계 광고를 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놀란 표정의 왕보는 다부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이런 기이한 일이 있나? 손님도 오지 않는 이런 외진객잔에 인연의 끈이 닿았던 소년이 찾아오다니···.”
왕보는 현재 재정적으로 파산 직전까지 몰려있었지만 웃음을 잃지 않으며 청년을 환대했다.
“내 음식 값은 받지 않을 테니, 마음껏 먹게. 아차차!”
문득 그는 아직 상대 청년의 이름을 몰라서 머리를 긁적였다.
“내 정신이 없어서 자네 이름을 잊어버렸네. 그래, 이름이 어찌 되는가?”
“······.”
청년은 왕보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명확한 발음으로 대답했다.
“제 이름은 강대운입니다. 앞으로 천하를 떠들썩하게 만들 테니, 두고 보십시오.”
“으응?”
가진 것도 없어 보이는 청년이 이처럼 당당히 포부를 밝혀오자, 왕보는 내심 어이가 없었다.
“강대운이라··· 내 편하게 대운이라 부르겠네.”
“그렇게 하십시오.”
“그래, 방금 천하를 떠들썩하게 한다고 했는데··· 대체 무엇으로 이름을 날리려는 겐가?”
강대운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일단 이 객잔의 최고 점소이가 되겠습니다.”
“뭐? 여기서 일하겠다고? 흐음··· 근데 미안하지만 난 점소이를 구할 생각이 없어. 내 식비를 감당하기도 벅차거든.”
- 쓰윽
탁자에 내려놓았던 젓가락을 다시 집어든 강대운은 조금 남아있던 규화동계를 입에 가져갔다.
“흐흐, 봉급은 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전 이것으로도 충분하니까요. 절 살려주신 은인인데, 저도 당연히 보답을 해드려야지요? 그러니 앞으로 이 객잔을 능운령의 명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
넋을 빼는 왕보에게 강대운은 천연덕스런 미소를 선보였다.
“절대 제가 지금 마땅히 갈 곳이 없어서 이러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숙식정도는 제공해 주실 수 있죠?”
“숙식? 봉급 없이?”
“네.”
오랫동안 외진 변방에서 혼자 지내온 왕보는 은근슬쩍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래, 무상으로 일한다면야 나야 좋지. 숙식은 걱정 말게. 그보다 당장 일할 생각인가?”
“그럼요! 뭐부터 할까요?”
점소이가 된 강대운은 아침에 객잔을 청소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음식재료를 다듬는 일들을 처리하며 많은 열정을 쏟아냈다.
그런 그에게 매우 안타까운 점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손님을 응접할 기회가 없다는 것이었다.
“하아, 이거 정말로 손님이 오질 않네요. 전단을 아무리 뿌려도 여기까지 올 사람은 없나 봐요.”
지도를 보고도 찾아오기 어려운 선불객잔의 위치 때문에 실로 답이 없었다.
“대책을 세워야겠어요.”
강대운은 객잔 주인 왕보를 자리에 앉히고, 열변을 토해냈다.
“이런 변방의 객잔을 찾는 손님이라면 분명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싶지 않은 부류만 올 겁니다.”
“그럴까?”
“물론 여비가 부족한 행인들도 이곳을 찾을 순 있지만··· 능운령을 찾는 대부분의 무림인들은 돈이 많더군요.”
왕보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변론을 제시했다.
“그래도 이 객잔의 주변경관은 꽤 뛰어난 편이야.”
현실을 직시 하지 못하는 왕보에게 강대운은 단호한 의지를 내보였다.
“냉정하게 생각하세요. 사람들은 이곳에 객잔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수풀까지 헤쳐 가며 여길 찾아오겠어요?”
“그럼,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이미 난 모든 재산을 털어서 여기 객잔을 지었는데···.”
“······.”
잠시 고민하던 강대운은 손님 유치를 위한 새로운 접근 방법을 모색해냈다.
“아무래도 저희는 특별한 손님들을 공략해야 할 것 같아요.”
“특별한 손님?”
강대운은 음색을 가다듬고 설명을 이어갔다.
“두고 보세요. 선불객잔을 천하에 명망 높은 무림인들이 찾아오는 명소로 만들 테니까요.”
이때부터 강대운은 객잔을 살리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
‘우선 특별한 손님들을 끌어들일 만한 매력적인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
그는 이를 전혀 의외의 분야(分野)에서 찾아냈다.
“제가 괴습지의 유명 안내인이 되면 특별한 손님을 이곳으로 데려올 수 있을 거예요.”
열심히 학업에 몰두한 강대운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무림정사연맹의 칠급령(七級令) 안내인 시험에 응시해 바로 합격 통지를 받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와 일행을 맺은 한 무리의 무림인이 정말로 외진 선불객잔을 찾아왔다.
“며칠 쉬어 갈 테니, 잘 부탁 합니다.”
“그나저나 여기 규화동계가 그렇게 맛있다면서요?”
제대로된 손님을 맞이한 왕보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주방에서 다채로운 조리에 임하게 되었다.
‘그래, 바로 이거다. 대운이만 있으면··· 난 망하지 않고 여기서 계속 장사 할 수 있어!’
이후 괴습지를 돌아다니며 많은 경험을 쌓은 강대운은 고급 서적과 고서까지 연구하여 그 자격을 차츰 상승시켰다.
그리고 이에 따라 선불객잔을 찾는 무림인들의 신분도 높아져만 갔다.
처음에는 그저 싸구려 병장기를 소지한 낭인(浪人)들이 왔는데, 나중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유명 무림명숙들이 이곳을 찾은 것이다.
“하아, 참 힘든 나날들이었죠.”
애잔한 과거사를 중인들에게 들려준 강대운은 눈물을 닦아내는 시늉을 내보였다.
“그렇게 오 년이란 세월이 지났군요. 이제와 생각해보니, 선관오위가 되는 일보다 이 객잔을 살리는 일이 더 어려웠던 거 같습니다.”
“아···.”
“흠··· 그런 슬픈 사연이.”
“가슴 아파.”
길고 길었던 이야기가 막을 내리자, 중인들은 저마다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으음, 이 선불객잔은 참으로 대단하군. 선관오위를 배출하다니 말이야.”
“그러게 말이야. 고작 점소이 신분으로 그 높은 자리에 올라가다니··· 놀라워.”
“이따가 손이라도 한번 잡아봐야겠다.”
“······.”
한편 주방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왕보는 애지중지 아끼던 점소이가 정말 이곳을 떠나려 한다는 걸 알았다.
‘녀석··· 정말 떠나기로 마음먹었구나.”
운학서생의 탄생 비화까지 이리 선포된 이상, 선불객잔은 수많은 무림인들이 찾는 비사(祕事) 가득한 관광 명소가 될 것이 분명했다.
***
무림정사연맹에서 든든한 후원을 받는 태의원(殆醫院)은 현재 수많은 감찰대원들로 북적였다.
“아야야···.”
“살살 다뤄줘.”
“거, 거기도 너무 아픈데?”
정확히는 혈봉궁과의 결전에서 부상을 당한 무황조 고수들이 병실에 누워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사실 태의원은 여태껏 이런 대규모 혈전을 겪어본 적이 없어서 모든 병실이 실로 난리였다.
“······.”
씁쓸한 눈길로 수많은 환자를 훑어본 도호는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젠장 할 놈들··· 하나같이 심각한 부상을 입고 오면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
신통공의 도호는 임시 병상까지 만들어 그들을 자리에 눕히고, 침상 사이를 스치듯 돌며 극한의 시침술(施鍼術)을 펼쳐냈다.
- 팟 팟팟팟
그는 거침없이 양손을 뻗어 누워있는 환자 몸에 수백 개의 침을 꽂아 넣었다.
“내상을 입은 녀석들은 이걸로 되겠지만··· 외상이 심한 놈들이 문제로군.”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동안 괴습지에서 나온 다양한 약초를 연구한 끝에 지혈 효과가 탁월한 몇몇 약재를 발견했다는 점이었다.
며칠 동안 위급한 환자를 돌본 도호는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화원이 마련된 마당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아이구, 삭신이야··· 저놈들 살리다가 내가 피로로 먼저 가겠네.”
도호가 앓는 소리를 늘어놓자, 어느새 그의 곁으로 다가온 인자한 표정의 노인이 말을 받았다.
“며칠 동안 쉬지도 않고 일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흠···.”
도호는 다가온 노인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자세를 바로 잡았다.
나이로 따지자면 도호가 더 연장자지만 상대는 중원무림에서 매우 존망 받는 무림명숙(武林名宿)인 것이다.
“이 정도 가지고 뭘··· 전에 전염병 도는 마을에서 사람들을 돌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꼬박 반년을 미친 듯이 일만 했지. 어릴 적에 돌림병으로 고생한 기억이 있어서 악으로 버텼어···.”
“그렇습니까?”
여유로운 태도의 노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적에 아픔을 겪으셨군요. 저도 그런 기억이 있지요.”
“흐음, 그보다 몸은 다 나은 건가?”
작은 나비가 날아드는 화원에서 도호를 마주한 사람은 다름 아닌 무형신검 이서였다.
그는 괴습지에서 돌아온 날, 총관 서량을 만나 회포를 풀고 치료를 위해 태의원에 계속 머무는 중이었다.
“아주 건강해졌습니다. 무리하게 내공을 운영하여 단전에 손상을 입긴 했으나··· 이건 시간을 두고 차차 회복해 나가면 됩니다.”
이서는 주화입마 상태까지 갔던 전력이 있어서 쉽게 회복할 수 없는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만들어주신 약의 효과가 매우 뛰어나더군요.”
그는 아직까지도 날뛰는 기혈을 완전히 잠재우지 못해서 도호가 만들어준 약에 의존하고 있었다.
“약 기운으로 버티는 사람치고는 표정이 매우 좋군.”
“마음의 짐을 덜고 나니, 표정이 자연히 밝아지더군요. 정말 강 서생이 아니었다면 분명 이 자리에 서 있지도 못했을 겁니다.”
이서는 태의원에 며칠 머물면서 그동안의 정황을 돌아보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분명 난 만괴사침에서 운학서생과 헤어졌다. 그러다 뇌전혈견을 보고 정신을 잃었는데, 다시 정신을 차리니··· 그가 내 앞에 나타나 있었어.’
- 쓰윽
이서는 한시도 손에서 떼놓지 않는 옥비녀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내 손 위에는 소소의 옥비녀가 놓여있었다. 내가 정신을 잃은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당시 이서는 사고력이 온전치 못한 탓에 그저 옥비녀가 하늘에서 떨어진 줄 알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럴 가능성은 너무나 희박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지. 아마 옥비녀를 찾은 강 서생이 내 손에 그것을 쥐어주고 하늘이 날 도운 거라 말했을 것이다··· 허허, 상심에 빠진 날 위해 그런 행동을 하다니? 진정 목숨으로도 갚을 수 없는 은인 중에 은인이다.’
강대운에게 여러 가지로 신세를 지게 된 이서는 어떡해서든 그 사례를 베풀고 싶었다.
그런데 현재의 그는 금전적인 여력조차 마땅치 않아서 다른 방안을 모색 중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내 모든 내공과 무학의 깨달음을 그에게 주고 싶구나.’
휴식을 취하러 나온 도호는 상대 입에서 강대운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연신 머리를 긁적였다.
“하아··· 그 녀석 생각을 하니, 차분해지던 머리가 또 지끈거리는군.”
이서는 신통명의 도호의 실력을 요 며칠 눈으로 직접 목격해 와서 그를 매우 신뢰하게 되었다.
“그의 질환을 고칠 방도가 정녕 없는 것입니까?”
“흐음···.”
도호는 침음성을 흘리다가 복잡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아직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사실 그놈 병을 고칠 방법 하나를 찾아놓았지.”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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