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같지 않은 세상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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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하늘에 뜬 청아한 별자리를 바라보는 강대운의 시선은 매우 착잡했다.
“······.”
이제 내일이면 능운령에 도착 것이고, 본래 괴석사지에서 얻고자한 소기의 목적도 달성하였건만 그의 마음은 싱숭생숭하기 그지없었다.
‘내게 어떤 비밀이 있다는 건 알겠는데··· 대체 그게 무엇일까?’
- 쓰윽
강대운은 품속에 넣어둔 유선형의 단도를 꺼내서 그 안에 적힌 글귀를 손으로 매만졌다.
‘대체 누가 현철로 도금된 도신에 이런 글귀를 적을 수 있단 말인가? 현철은 제련 자체도 무척 어려워서 형체를 다듬는 것이 고작일 텐데···.’
강호 무림에 통용되는 금속 중에서 가장 강한 강도를 지닌 것이 현철이었다.
이는 숙달된 철방의 장인조차 쉽게 다를 수 없는 물건으로 이 표면에 글씨를 새기는 일은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자만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었다.
“도신에 적힌 글귀가 무척 자연스러운 걸로 봐서는 이를 적은 사람이 그리 힘을 들이지 않았다는 뜻인데···.”
열두 살 때부터 빈민촌 고아로 자란 강대운은 자신의 출생과 부모님에 대한 의문을 품었지만 이를 추적해 나갈 만한 단서가 없었다.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상실증에 걸렸기 때문이었는데, 단도에 적힌 글귀로 이름과 나이, 그리고 고아라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 전부였다.
“흐음, 이제 비밀을 밝힐 곳은 그곳뿐인가?”
강대운은 일전에 비연천림에서 겪은 하나의 사건으로 자신의 과거를 추적할 만한 단서를 얻게 되었다.
‘괴기습신지의 가장 중심에 자리한 괴설봉에 올라가면 모든 의문이 풀리겠지.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이 온전초가 필요하다.’
가슴자락에 넣어둔 온전초를 확인하는 강대운 곁으로 붉은 얼굴의 소계성이 조심히 다가왔다.
“강 서생, 아직 잠들지 않았군?”
“생각이 많아서 그런지, 잠이 오질 않는군요.”
“······.”
소계성은 굳은 표정으로 품고 있던 의문을 내뱉었다.
“반년 전 그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내게 정녕 말해주지 않을 생각인가?”
- 쓰윽
소계성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한 강대운은 착잡한 음색으로 대답했다.
“소 노사님께 비밀을 만들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단지··· 저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생각을 모두 정리했기에 다시 괴습지로 온 것이 아닌가? 내게 자세한 설명을 들려주게.”
강대운은 깊은 한숨을 내쉰 뒤, 어렵게 입을 벌렸다.
“똑똑히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비연천림에서 혈광아귀와(血光餓鬼蛙)에게 둘러싸였을 날···.”
“물론, 기억하네.”
“전 그 미친 개구리들을 피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도망쳤습니다. 그러다보니, 금방 힘에 부치더군요. 점차 다리에 힘이 빠져 나갔고, 결국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살아날 방도는 전혀 없었고 죽음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
그날의 참혹했던 기억이 떠오른 소계성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느라, 운학서생의 안위를 전혀 보살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강대운은 착잡히 시선을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그때 뭐가 나타난 줄 아십니까?”
“나야, 모르지···.”
강대운은 그윽한 눈길로 입을 벌렸다.
“무황백호.”
“······!”
소계성은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턱이 빠질 뻔했다.
무황백호(霧皇白虎)는 괴습지에 사는 것으로 알려진 영물인데, 그 존재가 지상 최강의 생명체로 평가받고 있었다.
백여 년 전, 천마신교의 혈마대제 마환이 괴습지 정벌에 나섰을 때 겨우 살아 돌아온 마교인이 남긴 기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 우리는 괴습지 금수들을 도륙하며 계속해서 전진해나갔다.
며칠쯤 가다 보니, 짙은 운무(雲霧)가 우리의 전신을 덮어왔다.
그런데 갑자기 그 운무 속에서 한 쌍의 현광이 터져 나왔다.
처음에는 그 생명체가 어떤 존재인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허나 바로 사방에서 마교 고수들의 귀곡성(鬼哭聲)이 들끓어 올랐다.
그것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현장! 참혹한 도살장의 모습 그 자체였다.
새로 나타난 미상의 생명체는 다름 아닌 삼 장 크기의 백호였다.
이 백호는 수천에 이르는 마교인들을 찢어발기고 앞으로 나선 교주님의 파천수라장마저 격퇴시켰다.
그 잔혹한 발톱에 교주님의 옥체가 산산이 잘려 나가자, 우리는 그곳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
대체 어떤 영물이 탈마(脫魔)에 오른 절세 고수를 그토록 참혹하게 처단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이때부터 그 백호를 무황백호라 부르며 괴기습신지를 두려워했다.
헌데 그 전설의 영물이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강대운 앞에 나타났다고 하자, 소계성은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백호는 백여 년 전에 존재했던 영물이 아닌가? 게다가 운무궤계에 사는 것으로 전해져 내려오는데, 어째서···.”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무황백호가 실존한다는 것에 크게 놀랐지요.”
“그래,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나?”
강대운은 조심히 내리깔았던 눈을 들어 소계성을 바라보았다.
“무황백호는 혈광아귀와를 안광만으로 제압하더군요. 그러고는 바로 떠나려 했습니다.”
“떠나려 했다는 것은 떠나지 못했다는 말이로군?”
소계성의 날카로운 물음에 강대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붙잡았습니다. 왜 절 살려주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거든요. 그 연유를 물었더니, 무심한 눈빛만을 보내오더군요.”
듣고 있어도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허허···.”
소계성은 탄성을 내지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는 계속 괴성을 내질렀습니다. 어째서 날 살려준 건지 이야기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자결을 해 버릴 거라고 소리쳤죠.”
강대운은 이 부분에서 슬쩍 소계성의 눈치를 살폈다.
“물론, 진짜 자결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혹, 안 알려준다면 바로 자리를 뜰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군.”
“그런데 무황백호의 다음 반응이 무척 충격적이었습니다.”
과거를 회상한 강대운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제 머릿속에서 음성이 울렸습니다. 무림인의 전음술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가 무어라 하던가?”
“백호가 말하길···.”
강대운은 진중히 백호의 음성을 흉내 냈다.
“소년이여, 너는 이곳에서는 죽을 수 없다.”
총명하다고 자부하는 강대운조차 이런 무황백호의 언행은 도저히 이해가 불가했다.
첫째로 자신은 소년이 아닌 어엿한 청년이었으며, 둘째로 자신이 괴습지에서 죽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소계성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급히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어찌됐는가?”
“물론, 제가 그곳에서 죽을 수 없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알려주지 않는다면 진짜 자결할 거라고 다시 협박했죠. 그랬더니 더 이상은 말해 줄 수 없다고 하더군요. 굳이 알고 싶다면 비밀을 간직한 곳에 데려가 줄 수는 있다고 했습니다.”
“어디를 데려간단 말인가?”
강대운은 심각한 음색으로 말을 받았다.
“괴설봉입니다.”
“······!”
괴설봉(怪雪峰)은 역사상 인간이 올라간 적이 없는 괴기습신지의 유일한 산봉우리였다.
날씨가 좋을 때에는 능운령에서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산이지만 여태껏 사람의 등반을 허용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더 정확히 보자면 등반은커녕 근처에 발을 들인 사람조차 없을 정도였다.
백여 년 전, 혈마대제 마환도 운무궤계의 중간까지만 가보았을 뿐 괴설봉의 산자락에는 접근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저는 이게 웬 떡인가 싶어서 그곳에 데려가 달라고 했죠. 그랬더니, 무황백호는 절 등에 태워 주더군요. 이후 섬광처럼 내달렸습니다. 찰나의 순간에 만괴사침을 지나 운무궤계에 들어갔죠. 주변 경관을 볼 여력이 없어 눈으로 확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느낄 순 있었습니다.”
소계성은 긴장한 듯 침을 삼키며 더욱 청각을 곤두세웠다.
“아무튼 운무가 걷어지며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천자만홍(千紫萬紅)의 꽃밭이 피어난 지역이었는데··· 그 뒤로는 정신을 잃었습니다. 깨어나 보니, 일행이 있던 곳으로 되돌아와 있더군요.”
이야기를 경청하던 소계성은 안타까운 마음에 머리를 갸웃거렸다.
“아니, 어째서 정신을 잃은 겐가?”
“아마도 그 다채로운 꽃들이 내뿜는 향내에 사람의 의식을 잠들게 하는 성분이 포함된 것 같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소계성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래서 자네가 온전초를 구한 것이로군? 그곳을 맨 정신으로 지나가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다음 여정에 운무궤계를 다시 들어갈 것인데, 그때 무황백호를 따라 괴설봉에 가보려고 합니다.”
“허허···.”
충격적인 고백에 놀란 소계성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조심스레 입을 벌렸다.
“그런데 말이야, 자네 말을 듣다 떠오른 것인데··· 전에 열두 살 이전의 기억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강대운은 착잡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바로 그겁니다. 그 백호는 마치 절 아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어쩌면 잃어버린 기억을 되돌릴 단서를 찾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소계성은 차분히 숨을 고르고 단호한 음성을 내뱉었다.
“고맙네. 어려운 이야기를 해주었군.”
혈육이 없는 강대운은 눈앞에 선 소계성을 단순히 호위무사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생사의 고비를 넘기며 정과 우애를 나눴기에 형제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두 사람은 앞으로 있을 계획을 세부적으로 논의하며 다시금 뜨끈한 의리를 나누었다.
***
능운령 중심에 자리 잡은 무림 정사연명에는 단 하나의 의원 시설만이 존재했다.
그곳은 태의원이라 불렸는데, 위태로운 환자만을 받는다는 철칙을 가지고 있었다.
태의원을 맡고 있는 이는 신통공의 도호인데 그는 괴팍한 성품이어서 한 번 진료를 맡은 사람은 기를 써서라도 살려냈으나 마음이 돌아선 자는 죽을 때까지 맥 한 번 잡아주지 않았다.
“······.”
조용한 병실 안에 자리한 도호는 침상에 누운 멸치 인상의 사내 등에 시침술을 시전하는 중이었다.
이 멸치 인상의 사내는 천금보 상단의 분타주 사마진으로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태의원에 많은 의료 시설을 장만해 준 후원자였다.
그는 또 값비싼 약재와 의료 서적을 가지고 태의원을 찾아왔기에 그 업적의 대가로 이처럼 도호에게 침을 맞는 영화(榮華)를 누리고 있었다.
- 벌 컥
그때 다급하게 병실 문이 열리며, 백신명의의 수장 천지웅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도··· 도호님, 사경을 헤매는 응급 환자가 발생했습니다!”
태의원을 찾는 긴박한 환자는 늘상 있어왔기에 도호의 표정은 매우 퉁명스러웠다.
“······?”
그의 눈에는 귀향문에서 응급 처치를 담당하는 천지웅이 오늘따라 유난을 떠는 것만 같았다.
도호는 가만히 눈살을 찌푸리며 담담하게 읊조렸다.
“사람의 생과 사는 하늘이 정해주는 것이거늘, 왜 이리 소란을 떠는 것이냐?”
천지웅은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왔는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를 재촉했다.
“어, 어서 가셔야 합니다!”
그의 재촉에 침상에 누워 침을 맞던 사마진이 기분이 상해서 입을 열었다.
“어허!”
엄연히 자신의 순번이 먼저인데 도호를 데려가려는 행위가 못마땅한 것이다.
도호는 사마진에게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는 입장이어서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노성을 터트렸다.
“이놈아, 여기 있는 환자는 사람이 아니고 개라도 된단 말이냐? 아직 진료가 끝나지 않았는데, 어딜 간단 말이냐!”
굳이 침상에 누운 사마진을 개와 비교하는 것은 그에 대한 도호의 심리적 마음 상태를 슬며시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도호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천지웅을 타일렀다.
“그들은 자기 생명을 걸고 괴습지에 들어간 자들이다. 만약 욕심을 부리지 않았으면 멀쩡할 테고, 탐욕을 부렸다면 크게 다쳤겠지. 그건 스스로를 탓해야 한다.”
“아··· 아닙니다. 이번 환자는 특별합니다.”
“뭬야?”
이렇게 크게 노성을 발했음에도 천지웅의 기가 죽지 않자, 도호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깨달았다.
만약 합당한 이유가 없다면 눈만 치켜떠도 오금을 저리는 천지웅이 이리 당당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 그가 실려 왔습니다.”
“그라고 하면 내가 어떻게 아냐?”
“서생··· 말입니다.”
“뭐어?”
도호의 안색이 전에 없이 퍼렇게 질리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백신명의를 응시했다.
자신이 노환(老患)이 들어 잘못들은 게 아니라면 분명 선관오위 운학서생을 들먹인 상황이었다.
“어서 앞장서거라.”
안색이 변한 도호는 앞뒤 사정 가리지 않고 급히 병실을 뛰쳐나갔다.
- 탁 탁 탁
조용한 병실 침상에 홀로 누운 사마진은 등에 꽂혀진 수백 개의 침 때문에 몸도 일으키지 못하고 그저 침묵을 지켰다.
“······.”
그러다가 한 가지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이거 설마··· 나를 개로 몰아가려고 서로 짜고 연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 작가의말
그저 성실히 연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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