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제일검 (3)
오랜 여정 끝에 청해성 서쪽에 위치한 합택산(合澤山) 자락에 도착한 강대운은 서운한 마음을 뒤로하고 오두취에게 작별을 고했다.
“형님, 여기서부터는 저 혼자 가겠습니다.”
“······.”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한 오두취는 그럴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우··· 여기까지 힘들게 함께 왔는데, 어찌 혼자 가려는 게야?”
“으음···.”
강대운은 잠시 망설이다가 단호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이제부터는 함께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형님도 본인 삶으로 돌아가셔서 새로운 출발을 하십시오.”
“아니, 나는 안 가겠다니까?”
고집 부리는 오두취를 가만히 지켜보던 강대운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중원 무림의 공적인 문현과 연관될 수 있는 일에 형님을 끌어들일 순 없지.’
마음을 정리한 강대운은 냉랭한 눈빛을 머금었다.
“제 간절한 부탁이니, 더는 다른 말 마십시오.”
“허허.”
“그리고 방방이도 돌봐주십시오.”
“방방이까지?”
강대운은 쥐고 있던 대완구 고삐를 오두취에게 넘겨주었다.
“성격이 많이 온순해졌다고 방심하진 마십시오. 이는 나중에 형님을 다시 만나게 될 때, 돌려받겠습니다.”
“알았다. 방방이는 걱정 마.”
그리고 침울한 표정이 된 오두취는 간절한 음성으로 물었다.
“아우··· 그러면 우린 언제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야? 이대로 헤어져버리면 다시는 못 볼 수도 있잖아?”
그를 마주한 강대운은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일전에 낙양에서 여장남자 대회가 있다는 말··· 형님도 들으셨지요? 별일 없다면 그때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런 황당한 대회가 있긴 했지.”
다시 만날 장소와 시기가 정해지자, 오두취는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수가 없었다.
“그러면 난 이만 고향으로 돌아가 봐야겠어. 전에 급하게 떠나와서 처리할 일이 많거든.”
“그동안 함께할 수 있어서 즐겁고 감사했습니다.”
“나야 말로.”
뇌전검 오두취와의 여정을 마무리한 강대운은 멀리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에 한참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제 다시 혼자인가?”
- 쓰윽
몸을 돌려 세운 그는 눈앞에 자리한 거대한 산맥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정말 문현이 있는 걸까?’
- 터벅 터벅
해답을 얻기 위해 산을 오르기 시작한 강대운은 곧 이 곳이 결코 만만한 야산이 아님을 깨달았다.
“헉, 헉··· 뭐가 이리 험해?”
하늘 높이 자란 고목과 우거진 수풀들은 그가 가는 길을 일일이 방해하고 있었다.
“변변찮은 산길 하나 없군. 에휴··· 정상까지 오르는데, 꽤 오래 걸리겠어.”
- 터벅 터벅
산을 많이 타본 강대운이 합택산 정상 언저리에 도착하는 데는 실제로 삼일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와아! 벌써 삼일이나 올랐는데, 정상은 아직 먼 거야?”
그는 탁월한 방향감각을 가져서 길을 헤매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합택산 정상은 멀기만 했다.
“이, 이러다 내가 쓰러지겠다.”
무리한 일정으로 산을 오른 강대운은 진이 빠지는 느낌을 받고 걸음을 멈춰 세웠다.
‘오늘은 건량으론 안 되겠어. 잠시 쉬면서 신선한 먹거리를 찾아보자.’
그는 보양식을 찾기 위해 들고 온 봇짐을 옆 나뭇가지에 걸어두었다.
‘산토끼나 꿩을 잡으면 딱 좋을 것 같다. 먹기 좋게 바짝 구워 먹어야지. 흐흐, 벌써부터 군침이 도네.’
일급령 안내인 출신인 강대운은 일각 만에 토끼가 지나간 흔적을 발견했다.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어. 서둘러 따라가면 잡을 수 있을 거야. 그런데··· 내가 잘 잡을 수 있으려나?’
사실 그는 직접 사냥을 해본 경험이 없었다.
자신이 목표를 발견하면 몸을 움직이는 일은 소계성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 스스슥 스스슥
허리까지 자란 갈대숲에 도착한 강대운은 희미한 토끼 발자국을 쫒다가 돌연 이질적인 풍경을 발견했다.
“으응?”
눈앞에 낡고 허름한 모옥(茅屋)이 나타났는데, 사람이 떠난 지는 매우 오래된 것 같았다.
‘이런 깊은 산중에 사람이 살았구나. 그렇다면 분명 깊은 사연이 있었을 거야.’
뒤쫓던 토끼에게 미련이 사라진 강대운은 쓰러질 듯 위태한 모옥으로 조심히 다가갔다.
“보기 안쓰러울 정도네.”
강대운은 폐가와 다름없는 모옥 주변에서 형태를 잃어버린 항아리와 작은 텃밭을 찾아냈다.
“여기서 농사까지 지었던 건가?”
그는 곧 모옥으로 들어가 낡고 헤진 창호지 문을 바라보았다.
‘참 이상하다. 분명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폐가의 모습인데··· 왜 마음 한편이 아련해 지는 거지?’
강대운은 집안 구석구석을 살폈는데, 볼수록 이 폐가가 낯설지가 않았다.
- 스슥 스슥
그는 조심스런 걸음으로 거미와 잡초가 점령해버린 방들을 살펴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딱히 떠오르는 건 없다. 단지 여기 있으면 뭔가 아련한 기분이 들어.’
모옥은 매우 작아서 전체를 둘러보는 데 시간이 별로 소요되지 않았다.
“······.”
결국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은 강대운은 멍하니 툇마루에 주저앉았다.
“에휴··· 이러다가 정말 아무 해답도 못 찾는 거 아니야?”
그는 곧 몸을 뒤로 누이며 여러 상념에 빠져들었다.
‘문현은 사람들에게 철저히 배신당하고 또 배척당했다. 만약 그가 살아있다면··· 정말 세력을 키워 모두에게 복수하려 할 수도 있어.’
- 스르륵
툇마루에 누워 두 눈을 감은 강대운은 일전에 청성파 장문인이 했던 부탁을 떠올렸다.
[정황상 강 서생은 문현의 손자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네. 그러니 지금부터 하는 내 말 잘 듣게. 과거 문현은 단신의 힘으로 정사연합 척살대를 크게 도륙했네. 그런데 만약 그가 복수를 꿈꾸며 세력을 키웠다면··· 중원 무림은 전부 피로 물들겠지. 강 서생··· 혹 그 산에서 문현을 만나게 되면 우리를 대신해 용서를 구해줄 수 있나?]
그의 부탁을 떠올린 강대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기들이 잘못 해놓고, 왜 나보고 용서를 구해 달라는 거야?’
- 꼬르르르륵
“다시 배가 고프네···.”
맥이 빠진 강대운은 뒤늦게 허기를 느끼고 봇짐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아참, 봇짐을 두고 왔구나. 에휴··· 다 귀찮다. 내일 찾으러 가야지.’
다시 툇마루에 누운 강대운은 힘 빠지는 현실을 마주했다.
‘기연을 바라는 많은 무림인들이 이 고명한 산을 그냥 내버려 두었을 리 없다. 그러니 혹 산의 정상에 도착하더라도 문현을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어···.’
실제로 합택산은 지형이 험하고, 산의 기운이 예사롭지 않아서 도를 닦는 사람과 기연을 얻으려는 무림인들이 자주 찾는 장소였다.
게다가 최근에는 손익겸의 사인을 알아내기 위해 청성파에서 산매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 작업까지 벌였었다.
“하아아암.”
커다란 하품을 내뿜은 강대운은 머리 아픈 상념을 떨치기 위해 잠을 청했다.
“음냐···.”
***
- 퀘액 퀘액
- 끼이이 끼이이
- 뻐꾸루 뻐꾸루
수천마리의 전서구가 오가는 조관흥령부는 오늘도 변함없이 서신 분류작업에 한참이었다.
“거기, 좀 더 빨리 움직이지 못해?”
“예!”
“매듭도 잘 확인해. 틀릴 때마다 녹봉을 깎을 테니.”
“잘 확인하겠습니다!”
충혈된 안광으로 갖가지 지시를 내리는 백태조에게 한 인부가 다가왔다.
“백 부장님, 전에 언급하셨던 서신이 도착한 것 같습니다.”
“뭐?”
인부에게 서신을 받아든 백태조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청해성 지부장 낙중일이 보낸 서신이군. 그래, 알았다. 자리로 돌아가도록.”
“예!”
상대가 떠나가자, 백태조는 서신을 펴서 그 안에 적힌 내용을 살펴보았다.
‘흐음··· 강 공자를 데려오는 일에 실패했군. 그런데 이 일에 마교 교주가 개입 되어있다니?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조관흥령부를 관장하는 백태조는 일급기밀을 포함한 모든 서신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서신에 적힌 사안의 정도에 따라 그가 직접 천령부를 찾아 가기도 했다.
- 터벅 터벅
진의문의 거대한 장원 중앙에 자리한 천명부로 바삐 걸어간 백태조는 그곳을 지키고 선 수문위사에서 방문 목적을 알렸다.
“문주님을 뵈러 왔네.”
“조관흥령부의 백태조 부장님이시군요? 어떤 일로 문주님을 뵙길 청하시는 겁니까?”
백태조는 망설임 없이 한 인물을 언급했다.
“강 공자님 때문에 왔다고 전해드리게.”
“예, 알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허용된 백태조는 허옇게 물든 긴 머리를 치렁거리며 대청을 지나 수수한 내실로 들어갔다.
“문주님을 뵙습니다.”
“······.”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여인은 결국 청아한 음성을 발했다.
“이번에도 서신을 직접 들고 오셨군요.”
작은 구슬로 장식된 교의에 앉은 어여쁜 여인은 작게 손을 내저었다.
“매번 이리 직접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도 바쁘실 텐데···.”
“아, 아닙니다. 이를 핑계로 문주님을 뵈러오는 것이 제 삶의 낙입니다.”
천혼신녀 홍설현은 그를 마주보다가 사랑스런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고맙네요. 그보다··· 서신의 내용은 어떻습니까?”
백태조는 서둘러 서신을 펴고 그 내용을 다시 확인했다.
“낙중일 지부장이 보낸 서신에는 강 공자님을 모셔오는 도중 방해자가 나타났다고 적혀있습니다. 그런데 그 방해자가 다름 아닌···.”
그가 방해자의 정체를 말하려는 찰나 홍설현이 먼저 말을 받았다.
“혹시 마교가?”
“그, 그렇습니다. 문주님··· 이걸 어찌 아셨습니까?”
“······.”
홍설현은 달갑지 않은 듯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설마 했는데, 역시 나쁜 일은 벌어지고 마는군요.”
그녀 앞에 부복한 백태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어찌 마교의 교주가 이 일에 개입된 걸까요?”
이지적인 미모의 홍설현은 차분한 어조로 그 해답을 알려주었다.
“오라버니 곁에 마교 소교주가 붙었을 때부터 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무척 불안했어요.”
“네? 하지만 귀수신의 암습 사건과 이 일은··· 전혀 연관이 없지 않습니까?”
다른 상념에 빠져있던 홍설현은 재빨리 현실로 돌아왔다.
“연관을 찾으려면 그날의 암습사건이 아니라, 옥광보 상단을 공격한 대도쌍괴의 행적을 보아야 해요.”
“대도쌍괴를요?”
당시 표행을 이끈 표두 남연지는 대도쌍괴의 암습을 총단에 보고하였는데, 옥광보상단은 진의문에 이 일의 수사를 맡기었다.
그리고 진의문은 고가의 가치를 지닌 고혹향의 입수 경위를 조사하여 그들 배후에 혈봉궁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설마 했는데···.”
홍설현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옥광보에는 알리지 않는데, 사실 혈봉궁은 대도쌍괴 뿐 아니라 다른 혈봉궁인까지 동원하여 오라버니를 죽이려했습니다.”
“그, 그렇습니까?”
“예, 그런데··· 돌연 다른 계획은 취소되었죠.”
“······.”
백태조는 차분한 태도로 홍설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암습은 대도쌍괴와 막대한 자금을 들이고 또 혈봉궁인 백여 명을 투입했는데, 갑자기 취소가 됐어요. 그렇다면··· 이는 누군가가 혈봉궁에 압력을 넣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지요.”
“압력이라니요? 누가 혈봉궁에 그런··· 아! 서, 설마 마교의 교주가?”
뒤늦게 정황을 유추해낸 백태조를 한번 쳐다본 홍설현은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중원 무림에서 불사불귀를 압박할 사람은 그 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설량이 어찌하여 강 공자를?”
“그건··· 천마옥녀 설주연 때문 일겁니다.”
강호상에 단 서른 명만이 들어갈 수 있는 흑색기피명부(黑色忌避名簿)에 이름을 올린 여인이 언급되자, 백태조의 표정이 굳어졌다.
“허허, 그 악녀가 공자님에게 관심이 내보이는 건가요?”
“······.”
홍설현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아요. 휴우··· 전부터 오라버니 주변에는 여자가 끊이질 않았죠. 지금까지는 제가 잘 처리했는데, 이제부터가 문제네요.”
“······?”
홍설현은 담담한 음성으로 현 상황을 정리했다.
“아무튼 오라버니는 당분간 그냥 내버려둬야겠네요. 자칫 소중한 사람을 잃을 수도 있으니···.”
힘든 결정을 내린 홍설현은 교의에서 몸을 일으켰다.
- 스르륵
“오늘은 그만 쉬어야겠어요. 오라버니를 볼 줄 알았는데, 너무 아쉽네요.”
“실망 마십시오. 다음에는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그래요.”
일을 마치고 천명부를 빠져나온 백태조는 내심 어이가 없었다.
‘강대운··· 그 녀석은 눙운령에 들어가 일급령 안내인이 되어 날 놀래키더니, 이제는 천마옥녀의 관심까지 산건가?’
백태조는 전에 강대운을 서신 분류 인부로 잠시 부린 적이 있었다.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농땡이 칠 궁리만 하던 녀석인데, 대체 어떻게 문주님과 마교 소교주 마음을 사로잡은 거지? 무슨 마공이라도 익힌 건가?’
평생 독신으로 살아온 백태조는 괜히 미운마음이 들어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에잇, 빌어먹을 녀석! 욕심도 참 많다!”
그는 불편한 걸음걸이로 자신의 평생 근무처인 조관흥령부를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 작가의말
마공아닌데?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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