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키는 자, 빼앗는 자 (5)
그들이 한 자리에서 머뭇거리는 동안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나온 여러 종의 독사들이 혀를 날름거리며 다가왔다.
- 쉬쉬식 쉬쉬식
주도방과 칠성팔령대가 자리한 길로 나온 독사는 고개를 쳐들었는데, 순신간의 대로를 모두 뒤덮을 만한 양의 뱀들이 기어 나와 서로 엉켜댔다.
칠성팔령대에서 검을 담당하는 검수(劍手) 원도한은 크게 놀라 입을 열었다.
“허허··· 설마 저걸 모두 죽여야 하는 건 아니겠죠?”
그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지, 강하게 도리질을 쳤다.
“부표두님도 잘 아시겠지만, 묵린사의 맹독은 황소도 쓰러트릴 정도로 강력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주의할 점은 그들 혈액에 닿기만 해도 중독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흐음···.”
표행 경험이 많은 주도방이 이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다.
“허나 오늘 내로 이 언덕을 넘지 못하면 기일에 맞춰 목적지에 당도할 수가 없다. 그러니··· 반드시 길을 확보해야 한다.”
“하지만···.”
- 쓰윽
강인한 팔뚝을 들어 상대의 입을 막은 주도방은 가늘게 뜬 눈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내가 걱정되는 건··· 지금 우리의 눈을 현혹하는 저 독사무리가 아니라, 멀리 앞서 걷는 무림인들이다.”
원도한은 바로 질문을 던졌다.
“그건 왜 그렇습니까?”
주도방과 칠성팔령대는 항시 여러 의견을 주고받아서 이 같은 대화가 매우 자연스러웠다.
“저 독사들의 움직임을 보면 시간차를 두고 대로로 모여들고 있다. 이를 잘 살펴보면, 저 행인들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모여드는 모양새란 걸 알 수 있지. 이것이 과연 우연일까? 아니면 필연일까?”
어느새 대로를 가득 채운 독린사들은 서로 뒤엉키며 주도방 일행에게로 밀려 들어왔다.
- 쉬시식 쉬시식
징그럽게 꿈틀대는 독사무리를 눈앞에서 목도한 말들은 조금씩 뒷걸음을 쳐댔다.
- 이이이잉 이이이잉
원도한은 다른 대원을 대신해 상관의 대답을 재촉했다.
“부표두님, 그럼 어찌하시겠습니까?”
단호한 표정의 주도방은 고삐를 꽉 움켜쥐었다.
“너는 본대로 돌아가 표두님께 이 상황을 모두 설명하고 속히 방어진을 갖추라고 전해 드려라.”
“예!”
명을 받은 원도한은 망설임 없이 말의 고삐를 돌려 달려나갔다.
- 따그닥 따그닥
“······.”
그가 멀리 떠나가자, 주도방은 세찬 호통과 함께 말의 안장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출! 모두 나를 따르라!”
- 팟 파파파파팟
폭죽 터지듯 안장을 박차고 날아오른 열네 명의 칠성팔령대는 쏜살같이 날아가는 주도방을 따라 어둡고 그늘진 숲속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 쉬시식 쉬시식
어두운 숲속에 들어온 주도방과 칠성팔령대는 바닥에 가득한 독사들을 피해 고목의 나뭇가지를 밟고 이동했다.
- 팟팟 팟팟 팟팟팟팟
그러나 고목의 나뭇가지에도 상당 숫자의 독사가 자리했다.
- 쓰르릉
주도방은 날카로운 검기로 독사들의 머리를 잘라 버렸다.
“모두 죽일 생각은 하지 말고, 진로를 가로막는 녀석만 벤다!”
“예!”
선두에 선 주도방은 다음으로 안착할 위치의 고목을 정하곤 서둘러 독사들을 정리했다.
- 차착 차차착
주도방을 따르는 칠성팔령대는 일렬로 진영을 이뤄 나아갔는데, 그 기세가 매우 빠르고 체계적이었다.
앞에서 묵묵히 신법을 펼치던 주도방은 자신의 계획을 모두에게 말했다.
“숲을 가로질러가 앞서 가던 행인의 길을 가로막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정체를 밝혀내야지.”
“예!”
주도방은 신원미상의 그들을 파악해지야만 이 사태를 해결할 것 같았다.
‘이제 다시 대로로 나가면 그들보다 조금 앞서 있겠지?’
- 파팟 척
“응?”
“믿을 수가 없군요···.”
“하···.”
“어찌?”
수림지대를 가로질러 대로로 다시 나온 주도방과 칠성팔령대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어안이 벙벙했다.
“저들이 어째서 아직도 저 멀리 떨어져 있는 거지?”
“이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저리 느리게 이동하는데···.”
주도방의 계산대로라면 분명 자신들은 저 수상한 행인들의 면전에 나타나야 했다.
혹 착오가 있었다 치더라도 이들과 어느 정도 가까워지긴 해야 하는데, 어찌 된 영문이지 그 거리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이건 설마?’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 주도방은 급히 사위를 둘러보며 출수식(出手式)을 준비했다.
“모두 눈앞에 보이는 현상에 현혹되지 마라! 적은 가까이 있다.”
- 차차착
칠성팔령대는 주요 아홉 방위를 보호하는 형태로 방어진을 만들어 적의 급습에 대비했다.
“······.”
이 방어진은 하늘을 뒤덮는 화살의 맹공 속에서도 서로를 지킬 수 있게 고안된 진식이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주도방은 번개같이 눈알을 굴려 자신들을 함정에 빠뜨린 암습자를 찾으려했다.
‘분명 이 근처에 있을 텐데··· 언제 나올 속셈이지?’
그때 사위를 둘러보던 칠성팔령대원 하나가 질문을 건네 왔다.
“부표두님, 저희는 진법 안에 이미 갇힌 것입니까? 저 앞서 걷는 이가 헛것이라면 이미 저희 눈은 사술에 현혹된 것이니···.”
하지만 주도방은 담담히 고개를 내저었다.
“진법에 갇혔을 리가 없다. 여기까지 오면서 아무런 이상현상도 발견하지 못했으니.”
진법에 들어가면 일순간 공간 왜곡현상이 일어나는데, 주도방과 칠성팔령대는 이 현상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또 그들은 항상 자기가 맡은 형태의 자연 변화를 확인하며 이동하여서 웬만해서는 진법에 빠지지 않았다.
- 쓰윽
고개를 돌려 다시 대로를 주시한 주도방은 한적히 걸어가는 무림인들이 돌연 연기처럼 사라지자,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화(禍)가 많은 날인 것 같다.”
그의 낙담한 음성소리가 장내에 퍼지자마자, 바로 정체 모를 노인의 웃음소리가 지축을 흔들었다.
“크하하하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햇병아린 줄 알았더니, 그래도 사리판단은 할 줄 아는 구나?”
“으음?”
주도방은 음성 속에 깃든 낯선 노인의 가공스런 내공력에 검미를 찌푸렸다.
‘무서운 절정고수로군··· 대체 내공이 어느 정도이기에 땅까지 울리는 거지?’
긴장한 표정의 칠성팔령대원 역시 비슷한 두려움을 느끼며 검을 움켜쥐었다.
- 꾸욱
그런데 대원 중 하나가 정체모를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악에 받친 호통을 내질렀다.
“우린 옥광보상단에서 나왔다! 그러니 괜한 시비를 일으켰다간 뼈도 못 추릴 것이다!”
대원의 호통소리에 돌연 노파가 큰 웃음을 터트려왔다.
“호호호호호! 제 앞가림도 못 하는 녀석이 성깔은 제법이구나?”
귀청을 찢는 날카로운 웃음소리에 진을 구축한 칠성팔령대의 진세가 잠시 흐트러졌다.
“큭···.”
“지, 지독한 음파로군.”
“으음···.”
앞서 등장한 노인만 해도 감당키 힘든 수준으로 보이는데 뒤이어 다른 노파까지 나타나자, 주도방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설마 절정고수가 일행을 맺은 건가?’
주도방은 중원을 떠들썩하게 한 악인들의 신상을 대부분 꿰고 있었다.
‘강도짓을 일삼는 노인과 노파라면 설마···?’
그는 불현듯 무시무시한 마두의 별호가 떠올랐다.
“호, 혹시 대도쌍괴이십니까?”
“으응? 제법이구나, 목소리만 듣고 우릴 집어내다니.”
“우리가 유명하긴 하잖수.”
대도쌍괴(大盜雙怪)는 산동성(山東省) 일대를 휩쓸고 다닌 도적인데, 산동성에서는 이들에게 재물을 빼앗기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였다.
고명한 장법으로 이름난 복마장(伏魔場)에서 함께 자란 두 사람은 차차 연인사이로 발전해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렇게 신혼살림을 준비하던 두 사람은 금전에 관한 일로 다투다가 결국 이처럼 도적에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크크크, 우릴 알아봤으니··· 여기서 죽어줘야겠구나.”
“호호호, 지지리 운도 없지.”
“······.”
주도방은 암담한 상대를 마주하자, 어찌 상대해야 할지 방도를 찾지 못했다.
‘이 두 사람은 무림 공적에 올라 수많은 절정고수에게 쫒기고 있음에도 무공수위가 워낙 높아 아직까지 제압한 이가 없다. 게다가···.’
무림맹은 사년 전, 대도쌍괴를 잡기위해 자체 척살조직인 사살만성(射殺萬星)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작전에 투입된 이십 명의 초일류고수가 모두 불구자가 되어 돌아오고 말았다.
이후 대도쌍괴는 특급 위험인물로 지정되어 무림맹 척살백팔명단(刺殺百八名單)에 이름을 올리었다.
“······.”
그 때문에 주도방은 무력이 아닌 금전을 사용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어쩌면 아직 협상의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
한편 대로에 나타난 왜소한 체형의 두 노인을 발견한 칠성팔령대는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
“······.”
대도쌍괴는 표사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악당의 최고봉이기 때문이다.
“자, 잠시··· 저와 대화를 나눠 주시겠습니까?”
주도방은 움켜쥔 검을 슬쩍 내리깔며 말을 이어나갔다.
“두 선배님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습니다. 흠흠, 그런데 혹시 저흴 노리고 여기에 매복하고 계셨던 겁니까?”
얼굴에 검버섯이 핀 노인은 크게 콧방귀를 껴댔다.
“흥! 애송이들을 상대로 내가 매복까지 할 성 싶으냐? 그냥 기다리고 있던 거다.”
노인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머리를 풀어헤친 노파가 같은 편에게 역정을 냈다.
“아니, 이럴 땐 왜 이리 답변을 잘해? 집에서 내가 뭣 좀 물어보면 입도 안 벌리는 사람이?”
“이 사람이··· 내가 일할 때는 나서지 말랬지?”
“내가 나서든 말든, 그건 내 마음이야.”
“이게 또, 또···.”
“왜 또 치려고? 그래, 자신 있으면 쳐봐! 한번 해보자고!”
난데없이 부부싸움을 시작한 대도쌍괴는 자신들을 향하는 열다섯 쌍의 의문어린 눈초리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만하자, 정말! 지겹다, 지겨워.”
“흥! 할 말 없어지면 꼭 그러더라?”
“시끄럽고, 아무튼 집에 가서 다시 얘기하자고.”
“알았어.”
살림살이를 위해 도적 일을 시작한 대도쌍괴는 나이가 들자, 그저 정으로 살아가는 부부사이가 되어버렸다.
“흠흠···.”
잠시 본연의 목적을 망각했던 노인은 뒤늦게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애송이들아! 그래, 결혼은 언제 할 생각··· 아니지. 흠흠, 어디 보자··· 내가 어디까지 말했더라?”
노인의 당혹스런 행동에 곁에 선 노파가 옳다구나 다시 말꼬리를 붙잡았다.
“아니, 벌써 치매가 왔수? 그런 머리로 백결자염신공(百結紫焰神功) 구결은 어떻게 다 외웠나 몰라.”
“이 사람이 진짜···.”
또다시 부부 싸움이 시작되려하자, 주도방은 머리를 조아리며 그들을 말렸다.
“선배님, 저희는 상단을 지키는 표사입니다. 저희에게 어떤 볼일이 있으신지, 말씀해주시면 참작하여 성의를 보이겠습니다.”
“······?”
“······?”
보통 이름난 도적과 조우하면 표사는 성의를 보임으로써 생명과 표물을 지키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성의 표시는 물론이고 오늘 두 분 선배님을 뵌 일도 절대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대로 중앙으로 나와 자세를 잡은 두 노인은 상대의 정중한 태도가 무척 마음에 들었으나 오늘은 그걸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네 마음은 알겠다만 이번엔 그럴 수가 없다.”
“꼭 강공을 취하셔야겠습니까?”
처음과 달리 살벌하게 되묻는 주도방 질문에 노인과 노파는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우리 두 사람은 아주 작정을 하고 왔어, 그러니 무슨 소릴 해도 소용이 없을 거다.”
“호호호호, 불쌍한 것들···.”
주도방은 상대를 몰아붙이기 위해 목소리에 더욱 힘을 주었다.
“저희 표행의 표사는 백 명이 넘습니다. 아무리 두 분이 절정고수 할지라도 그들 모두를 제압할 수는···.”
그러자 검버섯이 핀 노인이 여유롭게 손을 흔들어댔다.
“그 놈들 잡으려고 이 주변에 약을 뿌려놨어. 뱀들 몰려든 거 봤지?”
“독사들이 몰려든 이유가 그것 때문이군요? 하지만 그 독사들로도 옥광보상단의 표사 전부를 상대할 순 없을 겁니다.”
주도방의 반론에 노파가 비웃음을 흘리며 앞으로 나섰다.
“흐흐흐,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니다만 독사들만 준비되어 있는 게 아니다. 아무튼 너희는 이곳에서 절대 살아나갈 수 없으니, 미리 유언이나 준비해 두거라.”
주도방은 무의식중에 작은 신음성을 발했다.
“하··· 그런···.”
정황상 대도쌍괴는 우발적으로 이 암습을 준비한 게 아니었다.
‘큰일이다. 본진도 위험해!’
범상치 않은 기도의 노인은 노곤해진 관절을 이리저리 풀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살고 싶겠지. 너희도 살아 숨 쉬는 생명체니까.”
하지만 노인 얼굴에 깃든 미소는 상냥함과 거리가 멀었다.
“흐흐, 안타깝지만··· 다음 생을 기약하도록.”
- 작가의말
벌써 100화군요. ㅎㅎ
항상 같이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음, 약한 주인공 보시느라 좀 힘드시죠?
하지만 그런 맛(?)이 있을 거라 믿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 강해집니다!! ㅠ_ㅠ
앞으로도 열심히 달려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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