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키는 자, 빼앗는 자 (3)
“하하···.”
혼자서 운치 있는 시간을 보내려한 강대운은 이 예기치 못한 상황에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호탕한 여자로구나. 흠··· 그나저나 소 노사님에게 저런 여식이 있었다니, 정말 놀라운데?’
분명 남연지의 이런 반응은 강대운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지만 적어도 운학서생이란 신분은 숨길 수 있어서 그것에 만족할 수 있었다.
- 따닥 따닥
제법 몸집이 큰 모닥불 근처에서 허기를 달래던 태수는 뒤늦게 나타난 강대운을 발견하곤 얼른 몸을 일으켰다.
“형아, 오늘 저녁이 아주 끝내줘!”
- 탁탁탁탁
강대운에게 급히 달려온 태수는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크게 미소 지었다.
“내가 장담하는데, 최근 들어 먹은 음식 중에 제일 맛있어.”
“그래? 근데 네가 최근에 제대로 먹은 음식이 없잖아? 기껏해야 건량이나 과로단 정도만 먹었으니.”
기나긴 산행에서 매 식사 때마다 산해진미를 바라는 것은 매우 사치였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행인들은 간단한 조리과정을 거치는 청탕면이나 건량, 그리고 계란을 조린 과로단등으로 끼니를 때어왔다.
- 쓰으윽
그때 멀리 허리춤에 한쪽 손을 올린 남연지가 강대운을 향해 연신 손을 흔들었다.
“뜸들이지 말고, 어서 와!”
“예?”
“네 자리 만들어놨다고!”
“네··· 갑니다. 가요.”
고개를 푹숙이고 작게 대답한 강대운은 태수의 머리를 한번 헝클어트린 뒤, 무거운 걸음으로 남연지에게 다가갔다.
“흐음···.”
남연지가 머무는 모닥불 주변으로 십여 명의 표사들이 자리했는데, 기도부터가 남달라보였다.
“남 표두님이 이리 신경 써서 챙기는 사람은 정녕 처음 보는군.”
“그러게.”
“저 청년은 보통 신분이 아닌 것 같아. 내가 계속 말해왔지?”
“네가 언제?”
표사들은 서로 격식 없이 지내는 사이였지만 그래도 엄연히 표두와 그들 사이에는 신분격차가 존재했다.
“표두님, 이 청년을 저희에게 정식으로 소개 시켜 주시는 겁니까?”
“예쁜 아낙네가 아니라, 아쉽긴 하네요.”
한 표사의 농에 인상을 쓰고 앉아있던 주도방이 엄한 소리를 발해왔다.
“어헛, 표두님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군.”
“죄, 죄송합니다.”
“······.”
혼자 지내는데 익숙한 강대운은 이 불편한 자리를 얼른 피하고 싶었으나 남연지의 고집이 이를 허락지 않았다.
“이 청년은 나와 조금 특별한 관계에 있다. 그러니 이번 여정 동안 그의 신변보호에 최선을 다하도록.”
“예!”
“그리하겠습니다!”
남연지의 이 언행 때문에 사방에 널브러져있던 표사들의 지대한 관심이 강대운에게로 몰려들었다.
“자넨 아무 걱정 말게. 내 기필코 자네에게는 다람쥐 한 마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할 테니.”
“하하, 다람쥐가 다 뭔가? 난 메뚜기 한 마리도 접근시키지 않겠네.”
“이 사람이 또 지키지도 못할 헛소리를···.”
표두가 작성하는 표사인성 평가 때문인지, 대부분의 표사들은 강대운에게 다가가 거북스런 예를 들어냈다.
“앞으로 잘 부탁하네.”
“자네 용모가 매우 뛰어나구만?”
“흠흠, 어려운 일 있으면 내게 말하게.”
수많은 표사들과 한참동안 인사를 나눈 강대운은 슬쩍 남연지에게 다가가 자신의 속내를 밝혔다.
“저기··· 신경 써 주신 건 감사하지만 전 조용히 있는 걸 좋아합니다. 그러니 괜히 표사님들이 제게 관심을 보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 근데··· 나도 원래는 그냥 널 혼자 두려했는데, 아까 대화를 해보고 상황이 달라졌어.”
“네?”
강대운은 지척에 앉은 남연지의 눈방울 속에서 전에 없던 따스한 감정을 발견했다.
그런데 이것은 연인을 향한 애정 어린 시선도 전우를 향한 신뢰의 시선도 아니었다.
‘이거··· 진짜 날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건가?’
사실 그동안 남연지가 극심한 사치벽(奢侈癖)에 빠진 이유는 자신이 가진 집착의 욕구를 달리 표출시킬 대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인 그녀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상황에 까지 내몰리자, 매우 불안한 심리상태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오늘 생각지도 못한 남동생이 생기자, 그녀의 심장이 요동치며 커다란 격동이 일어나버렸다.
“자, 동생 이것 좀 먹어봐.”
“네? 아··· 제, 제가 먹을게요.”
불편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황송한 대접에 강대운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졌다.
그러자 반대편에 마주 앉은 주도방의 표정도 조금 어두워졌다.
“남 표두님이 동생이란 표현까지 사용하시다니, 참 신기하네요. 이보게, 자네는 대체 누군가?”
강대운은 손을 내저으며 정중히 대답했다.
“전 보잘 것 없는 일반인입니다. 이름은 강대운이라 하지요. 흠흠, 정말 표두님께서 인정이 많으시네요.”
상대청년을 한 번 매섭게 응시한 주도방은 은근히 속에서 화가 끓어올랐다.
‘일반인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로군. 흐음··· 대체 저 청년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표두님이 이토록 귀한 대접을 하는 걸까?’
- 쓰스슥 꿀꺽
주도방은 도수 낮은 죽엽청을 들이키며 시선을 돌렸는데, 남연지와 낯선 청년이 야릇한 시선을 주고받는 현장을 포착하고 말았다.
‘허허··· 설마 눈 높은 표두님이 저 어린 사내를 마음에 담으신 건가?’
오해의 불씨를 낳은 남연지의 눈빛은 계속해서 강대운의 몸 구석구석을 향해 뿌려졌다.
“······.”
이를 주의 깊게 지켜본 주도방은 정확히 일각 뒤, 엉뚱한 결론에 도달했다.
‘이제 보니, 표두님은 연하를 좋아하는 취향이셨군. 쳇, 내심 날 남자로 봐주길 바랐는데··· 저깟 녀석이 뭐가 좋다고.’
괜스레 주도방의 미움을 산 강대운은 평탄치 않을 자신의 고생길을 느낀 것처럼 볼 주위만을 열심히 긁어 되었다.
***
진의문에 소속된 정보원은 그 수를 다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심히 많았다.
개중에는 개방의 거지들보다 수가 많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실제로 그렇지는 않았다.
단지 진의문의 정보원들은 대부분이 고위 관직이나 중원각지의 필수불가결한 위치에 포진이 되어 있어서 입수하는 정보의 질이 개방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런 날이 오다니, 정말 꿈만 같아요.”
“문주님,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선관오위에 오른 강대운의 행적은 무림정사연맹 내에서도 매우 극비리에 다루는 사안이었다.
그 때문에 그곳의 최고위급 간부를 제외하고는 감히 접근할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그런 고급 정보를 이처럼 빠른 시일 내에 입수한다는 것은 정사연맹의 중요한 직책에 진의문 정보원이 나가 있다는 것을 뜻했다.
백태조는 붉은 안광을 내리깔며 다시 한 번 문주를 향해 깊게 머리를 조아렸다.
“각고의 노력을 들여 천리향을 일급령(一級令) 안내지기로 만든 것이 빛을 보는 것 같습니다.”
“맞아요. 그녀가 없었다면 이토록 빨리 오라버니 소식을 들을 순 없었을 거예요.”
천리향은 진의문의 비밀정보원인데 그녀의 주된 임무는 괴습지를 드나드는 무림인들의 신상과 그 목적을 비밀리에 본문으로 알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천리향에게 최우선 과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강대운의 행적에 관한 사항이었다.
강대운이 입수하는 괴습지 물품과 기물들은 워낙 많아 그것들을 일일이 보고할 필요는 없었고, 혹 그가 능운령을 떠나게 되거나 신변에 이상이 생길 때에만 이처럼 특별한 매듭을 메어 전서구를 날리기로 하였다.
“그럼 정사연맹에 투입된 천리향은 그만 복귀시킬까요? 오래전부터 능운령을 떠나고 싶다는 의견을 보내왔습니다.”
백태조의 물음에 홍설현은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일급령 안내인을 상대하는 직책은 결코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게다가 아직 그녀를 대신할만한 사람을 찾지 못했으니, 당분간은 그 자리를 지키라고 전해주세요.”
“예.”
다부진 문주의 지시에 백태조는 머리를 조아렸으나 속마음은 조금 달랐다.
‘아무래도 문주님은 강 공자님이 행여나 능운령에 다시 돌아갈까 봐 여지를 남겨두시는 같군.’
그가 무슨 생각을 하든 홍설현은 속에서 샘솟음 치는 흥분감을 감추지 못했다.
“혈봉궁의 암습을 받아··· 무척 걱정했는데, 혹시 그 일로 능운령을 떠나는 걸까요?”
질문을 받은 백태조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설마 지금 제 의견을 물어보신 것입니까?”
여러 정보를 종합해 완벽한 해답을 찾아내는 일은 천혼신녀 홍설현의 전매특허(專賣特許)였다.
그런 그녀가 한낱 전서구 관리지기인 백태조의 의견을 들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홍설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전 모든 사람의 의견을 소중히 여기니까요. 이런 대화는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꼭 필요한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흠···.”
잠시 고심하던 백태조는 슬며시 입을 열었다.
“귀수신과 감찰대의 충돌은 현재 무림인들 사이에서 입이 아플 정도로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그 화제의 중심에 공자님이 서셨으니··· 주목 받기 싫어하는 그분의 성품상 얼른 자리를 피하고 싶었겠지요.”
홍설현은 자그마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네요. 하지만 조금 돌려서 생각해보면 맞는 말도 아니지요. 사실 이번에 암습사건이 벌어지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오라버니의 신분이 들어난 것은 아니에요. 또 정체가 밝혀졌다 하더라도 능운령 내의 다른 지역으로 몸을 숨기면 해결될 문제이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 그게 무엇입니까···?”
의문을 표하는 백태조를 위해 홍설현은 친절한 답변을 내놓았다.
“오라버니가 능운령에 머문 이유는 아시다시피 앓고 있는 신체 질환을 고치기 위해서예요. 괴습지에서 나오는 각종 진귀한 약초를 직접 채취 하겠다고 떠나가셨죠. 그러니, 지금 능운령을 떠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지척에서 천혼신녀(天魂神女)의 고견을 들을 수 있는 기회는 결코 흔치 않았다.
그 때문에 충광마라 불리는 백태조의 눈방울에도 벅찬 감동이 밀려들어왔다.
“그게 무엇입니까?”
홍설현은 매력적인 눈매로 그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하나는 병을 고쳤다는 가정이에요. 최초 그곳에 찾아간 목적이 그것이니, 이를 해냈다면 더 이상 능운령에 머물 이유가 없죠.”
“······.”
백태조는 그녀의 말투에서 이 가정이 별로 가능성 없는 추론이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문주님은 두 번째 가정에 확신을 두고 계시는구나.’
상대에게 의중을 전달한 홍설현은 사랑스런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데 이 가정은 이해되지 않는 요소가 너무 많아요. 그냥 봐도 시기가 너무 절묘하다고 할까요? 또 태의원에 투입된 정보원에게서는 어떤 소식도 듣지 못했으니, 병을 고쳐서 능운령을 떠나는 건 아니라고 봐요.”
“그러면 공자님은 왜 그곳을 떠나신 겁니까?”
“그건 아마··· 자신의 신체 질환을 고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겼기 때문이겠죠.”
“······.”
그녀 앞에 부복한 백조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조심히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흐음··· 하지만 강 공자님은 자기 몸을 고치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다며 진의문에 정식으로 입문하라는 문주님의 청까지 거절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제와 더 중요한 일이 생겼다니···.”
홍설현은 한적한 걸음걸이로 내실을 둘러보다가 찬찬히 말을 받았다.
“아마 세월이 많이 지나서 저와 한 약조를 잊으셨나보죠. 그렇다면 저도 당사자 간에 합의한 내용을 무시하고 조금 거친 방법을 써야겠어요.”
그녀의 거침없는 확언에 백태조의 붉은 눈자위가 작게 떨려댔다.
“아니, 문주님··· 설마 납치라도 하시려는 겁니까?”
“글쎄요···.”
홍설현은 복잡 미묘한 시선으로 품속에 갈무리한 서신을 다시 바라보았다.
“저도 이제 기다리는데 지쳤습니다. 그러니··· 어디 한 번 손을 써 볼까요?”
“······.”
***
점소이 출신인 강대운에게 아침 햇살이란 음침한 객잔을 가장 먼저 찾는 친절한 손님이었다.
“하아아암!”
외진 객잔이 아닌, 수림 지대의 고목 위에서 기지개를 켠 강대운은 눈도 뜨지 않고 작게 웅얼거렸다.
“아침인가···.”
곧 울창한 수림 지대를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어른 주먹만한 산새들이 자신의 목청을 뽐내었다.
- 짹짹 짹짹 짹짹쨱
“하아아암, 그래··· 나도 해 뜬 거 알거든?”
마지못해 눈꺼풀을 들어 올린 강대운은 낯선 주변 경관에 어안이 벙벙했다.
“아, 자꾸 헷갈리네··· 여긴 괴습지도 능운령도 아니지? 흐음, 그건 그렇고 여긴 참 따사롭구나.”
정말 오랫동안 잊고 있던 편안하고 따스한 아침이었다.
선불객잔은 워낙 음침한 지역에 자리해서 햇볕도 그다지 들지 않고, 매번 드나들던 괴습지도 아늑함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 파다닥
그때 청명한 수풀 잎을 헤치며 한때의 새들이 어디론 가로 빠르게 날아갔다.
- 쓰슥 쓰슥
그리고 그 날갯짓에 떨어져 나간 여러 장의 나뭇잎들이 아직 상념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강대운의 볼기짝을 간질이며 지나갔다.
“평화롭군.”
강대운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가린 푸른 잎사귀의 장막을 바라보았다.
- 쓰윽
잎사귀 장막 틈새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은 강대운이 느끼기에 너무나 따스했다.
‘정말 오랜만에 맛보는 맑고 청량한 아침이다.’
그렇게 운치 있는 시간을 갖던 강대운에게 돌연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동생? 지금 한가롭게 늦잠 자는 거야? 어서 아침 먹어야지!”
높은 고목 위에서 밤을 보낸 강대운은 아래서 들려오는 여인의 잔소리에 바로 격하게 대응했다.
“안 오면 먹기 싫은 걸로 알 것이지··· 왜 이리 귀찮게 굴어요?”
“뭐? 너, 지금 누나한테 뭐라고 한 거야? 엉? 내 눈 똑바로 보고 다시 말해봐.”
“······.”
- 작가의말
조금 늦었지만 아무래도 후원해 주시는 분들께
감사인사를 들려야 할것 같아 인사를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작가님들이 많이 그러시더라고요.)
- hsw6466님, 독아혈랑님, 장어구이37님, 설영雪影님, 팔문원님~!
제게 힘을 보태주셔서 감사합니다. ㅠㅠ
그리고 부족한 글이지만 계속 읽어주시는 독자님분들께도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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