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을 쫓는 나방의 비상 (4)
낙취의 말문을 막히게 한 강대운은 슬그머니 그의 일행들을 살펴보았다.
아직 정체를 알아내지 못한 의문의 고수를 보기 위함이었다.
‘단악이검은 이번 여정에서 큰 부상을 입었군. 표정을 보아하니, 다시는 괴습지에 들어오지 않겠어.’
호두심의 잘려나간 왼팔을 힐끔거린 강대운은 고개를 돌려 다른 이를 훑어보았다.
- 쓰윽
그러자 그의 시야에 유독 튀어나온 이마가 눈길을 사로잡는 무인이 들어왔다.
‘진권왕 도패··· 낙취님은 운무궤계에서 대체 무엇을 구하려 하신 걸까?’
강대운은 마지막으로 기이한 형상의 괴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는 자신을 향하는 의문어린 시선을 느끼고, 돌연 괴이한 미소를 머금었다.
“난 악사비라 한다. 강호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니,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봐도 소용없어.”
“아, 네···.”
적살은 정체를 숨기기 위해 역용술(易容術)을 펼친 상태였다.
그로인해 겉모습만으로는 절대 그를 추론해 낼 수 없었다.
‘분명 저 자가 천리향이 경고한 사람인데···.’
강대운은 상대가 매우 위험한 인물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추론에 들어갔다.
‘악사비라는 이름은 분명 가명일 테지. 흠, 당금 강호에서 무형신검 이서님을 위협할만한 고수가 몇이나 될까? 게다가 그가 악독한 마두가 아니라면 변용술과 가명까지 쓸 리는 없어···.’
촌음의 시간동안 악사비를 살펴본 강대운은 상대의 정체를 추적할 만한 작은 실마리를 발견했다.
그가 걸치고 있는 녹색 무복 소맷자락에서 어떤 흔적을 찾아낸 것이다.
‘저런 모양으로 소맷자락이 너덜거리려면 강력한 공력을 운용해야만 한다. 거기다 핏빛 색감으로 의복이 물들어 있다는 건, 그의 무공의 특색일 텐데··· 아! 설마, 이 사람은?’
마침내 상대의 정체를 알아낸 강대운은 놀란 내심을 숨기며 무심히 걸음을 옮겨나갔다.
‘틀림없다. 저 사내가 벽마괴살 적살이다···.’
일전에 그의 이름을 팔아 위기를 모면한적 있는 강대운은 괜스레 찔리는 마음으로 일행을 둘러보았다.
“자, 이제 성문에 근접했습니다. 모두 힘을 내십시오.”
그의 뒤에 선 이서는 손에 쥔 옥비녀만을 응시했다.
“······.”
평생의 한을 푼 그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머금어져있었다.
“흐음···.”
한편에 서있던 적살은 범상치 않은 기도의 이서를 발견하고 머리를 갸웃거렸다.
‘대단한 절정고수로군. 여기가 만약 능운령이 아니라면 자웅을 겨뤄봤을 텐데···.’
그는 쓸데없는 일에 끼어드는 성미는 아니지만, 강한 무인을 마주하면 손속을 겨뤄보는 습관이 있었다.
그리고 그 수많은 대결에서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승리를 거머쥐었다.
일대일 대결로 무적을 자랑하던 적살에게 처음으로 패배를 선사한 이는 바로 혈봉궁주 불사불귀(不死不歸) 구소기였다.
광동에 머물던 적살은 사대검강에 쫓겨 도망자 신세가 되긴 하였으나, 결코 패배의식을 느끼진 않았다.
하지만 손속을 겨뤄본 구소기의 무위는 정녕 차원이 달랐다.
‘흠, 내 살기가 느껴질 텐데··· 쳐다보지도 않는군.’
적살은 앞서 걷는 이서의 뒤통수로 무시무시한 살기를 쏘아 보냈다.
하지만 상대는 끝내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귀향문으로 발길을 옮겨갔다.
- 터벅 터벅
“응?”
- 우우웅 우우웅
씁쓸한 표정의 낙취는 자신의 가슴자락에 담긴 옥강신지가 반응을 보이자, 머리를 갸웃거렷다.
‘뭐지? 이 주변에 강력한 마기가?’
우연히 고개를 돌린 강대운은 그 기이한 울림소리를 듣고 눈을 부릅떴다.
‘이 울림소리는 대체 뭐지? 낙취님 가슴자락에 뭔가 신기한 물건이 있는 건가?’
이를 자세히 관찰해본 결과, 천마령을 품속에 지닌 설주연이 그의 곁에 다가갔을 때에만 이런 울림현상이 일어났다.
낙취는 방립을 쓴 상대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급히 입을 열었다.
“자네는 누군가?”
“······.”
설주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그녀 곁에선 무영이 입을 벌렸다.
“서로 참견하지 않는 게 좋을 성 싶군.”
“응?”
낙취는 그의 정체가 무영이라는 것과 마교인임을 알아차리고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상대가 마교인이라면 마기를 품은 물건을 지니는 경우가 허다할 것이라 여긴 것이다.
“······.”
강대운은 울림소리의 정체가 무엇일지 추론해 보았는데, 나오는 답이 단 하나였다.
‘소림사의 옥광신지는 마기에 반응하여 신비한 울림소리를 발한다고 들었다. 저것이 천마령에 반응한 옥광신지라하면 말이 되긴 하는데··· 왜 그 귀중한 소림의 보물이 낙취님 손에 있지?’
옥광신지는 소림사의 보물 제 12호여서 외부인에게 함부로 대여를 하는 물건이 아니었다.
‘뭐, 나랑 상관없는 일이니··· 신경 쓸 필요 없나?’
상념을 마친 강대운은 일행을 이끌고 성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자 주변에서 대기하던 수많은 상인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공자님, 뭐 좀 얻으셨습니까?”
“이리 와서 얘기 좀 해요!”
“무엇을 습득하셨든 저희가 큰돈을 지불하고 사겠습니다.”
벌떼처럼 몰려든 상인들은 눈앞에 청년이 운학서생이란 사실을 모르고 그저 일반 무림인을 상대하듯 형식적인 거래의사를 제의했다.
“다른데 가봐야 얼마 못 받아요.”
“현장에 나온 우리한테 파는 게 가장 이득이라니까?”
그런데 귀향문을 들락거리는 사람의 수가 하루에도 수백명에 달해서 그들의 관심어린 시선은 금세 다른 일행들에게로 돌아갔다.
“아니, 저 사람은 도패가 아닌가?”
“진권왕 도패?”
“맞는 거 같은데? 이야··· 뭘 구해왔는지, 어서 가보자고!”
“이봐! 내가 먼저 봤어!”
심상치 않아 보이는 낙취 일행에게 상인들이 떼를 지어 몰려가 버렸다.
“우린 편해졌네요.”
한산해진 주변을 잠시 둘러본 강대운은 일행을 이끌고 성문 주변을 벗어났다.
“······.”
성문 근처 객잔에 앉아 이를 지켜보던 한 사내는 급히 신형을 일으켜 아래로 내려왔다.
-쓰윽
이 사내는 천금보상단의 분타주 사마진이었는데, 그 표정이 무척이나 초조해 보였다.
‘마교의 소교주와 우리 일행이 같이 돌아왔구나···.’
사마진은 멀어져가는 설주연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낙취가 천마령을 얻지 못했다면··· 그녀를 암습해야만 하는데, 어찌 되었을까?’
궁금증이 극에 달한 사마진은 서둘러 낙취 일행에게로 걸음을 옮겨갔다.
“시간은 정확히 맞추셨군요.”
여정을 떠나기 전, 낙취는 돌아올 기일에 대해 미리 언질을 주었는데 그 일정에 정확히 맞춰 돌아온 상태였다.
사마진은 형식적인 대화로 시간을 끌 생각이 없었다.
“그래, 일은 잘 되신 겁니까?”
현재 능운령의 정세가 심상치 않아 어서 일을 마무리 하고 싶은 것이다.
“흐음···.”
그를 마주한 낙취는 음침한 헛기침을 발했다.
“흠흠, 쉽게 끝날 일이 아니라고 미리 얘기 했지?”
상대의 반응을 보고 임무 실패를 확신한 사마진은 씁쓸히 입맛을 다셨다.
“알고 있습니다··· 일단 저희 천금보로 가서 행장을 푸시지요.”
“그러지.”
사마진은 거만한 표정의 낙취를 보낸 뒤, 자기 곁을 스치는 적살에게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그는 비록 혈봉궁에 소속된 궁인은 아니지만 혈봉궁주가 인정한 사람이어서 그만한 대우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부상자가 많군요?”
“운이 좋지 않았어.”
“안타깝군요.”
“······.”
수많은 인파속에서 낙취와 대화를 이어나가던 사마진은 돌연 앞을 막아선 안대를 찬 노인 때문에 걸음을 멈춰야 했다.
“여긴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마중을 나왔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으니···.”
“······.”
왼쪽 눈에 안대를 찬 살신전의 진오현은 괴이한 미소와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정확한 날짜에 돌아왔군. 그래, 그 물건은 어찌 되었습니까?”
“······.”
계속 똑같은 질문을 받게 된 낙취는 속에서부터 분기가 끓어올랐다.
“지겹게도 물어보는군. 더는 대답하고 싶지도 않다···.”
“알만 하군.”
능글맞은 미소의 진오현은 잠시 벽마괴살 적살에게 시선을 던지다가 바로 신형을 돌려버렸다.
“시간을 끌 필요도 없겠군. 오늘 일을 내일로 미뤄선 안 되니까.”
이는 진혈미책 방회보고 들으라고 한 말이었는데, 괜스레 낙취가 역정을 냈다.
“제기랄, 그게 어디 쉬운 일인지 아나? 그리 답답하면 지가 해보라지.”
“······.”
묵묵히 자리를 떠나려던 진오현은 섬뜩한 안광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당신이 아무리 선관오위라 해도··· 다시 한 번 그따위로 입을 놀렸다간 목을 비틀어 버리겠다.”
낙취는 상대의 강맹한 살기에 모른 척 고개를 돌려버렸다.
“흥···.”
진오현은 이를 부득부득 갈다가, 방회를 향해 싸늘한 미소를 내보였다.
“이제 일의 지휘권은 확실히 내 손으로 넘어왔다.”
방회는 착잡한 음색으로 수긍의 뜻을 비쳤다.
“신중하게 처리하십시오.”
천마신교 소교주를 암살하는 계획은 혈봉궁의 존망을 좌우하는 중대 사안이었다.
‘과연 일이 우리 생각처럼 진행될까?’
방회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그녀가 마도 제일의 지략가로 불린다는 점이었다.
어떤 이들은 혈봉궁의 사대책사 모두가 모여야 그녀의 지략에 견줄 수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지금껏 천마옥녀의 행적은 전혀 드러나질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우연찮게도 모든 행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어. 우리가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지만··· 한편으론 계속 불안한 마음이 드는구나.’
만약 암습을 맡은 진오현이 작은 실수라도 한다면 뒷일은 정녕 감당키 어려울 것이다.
‘그 불똥은 나한테까지 오겠지.’
진혈미책 방회는 천금보에 오랜 공을 들여 능운령의 실세를 잡게 되었는데, 진오현이 일을 그르치면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게 될지도 몰랐다.
‘내가 너무 불안해하는 걸까?’
방회는 근심을 떨쳐버리기 위해 귀수신과 그들의 대장 종율을 떠올렸다.
‘그래, 진 호법은 믿음이 가지 않지만 그들이라면 절대 실수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종율은 일처리가 확실한 사람이니···.’
- 꿀꺽
천금보로 낙취 일행을 이끌던 방회는 바로 오늘 밤, 중원 무림을 뒤흔들 중대 사건이 일어날 것임을 알고 연신 마른침을 삼켜댔다.
***
병색이 짙은 사내는 고개를 조아리며 착잡한 음성을 발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
만사웅왕에게 치명상을 입은 일 호의 부상은 끝내 완치되지 못하고 환부가 점차 문드러져갔다.
결국 일 호는 설주연의 지시에 따라 이 호와 함께 태의원으로 떠나게 되었다.
마룡보의 의술로는 그의 상처를 완전히 치료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능운령에 도착한 직후 이서 또한 의동생인 서량을 본다고 떠나버려서 설주연 곁에는 강대운과 소계성 그리고 무영만이 남게 되었다.
“······.”
무심한 안광의 무영은 주변의 위풍당당한 고루거각(高樓巨閣)을 올려다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쓰윽
그리고는 설주연에게 은밀한 전음을 넣었다.
/ 수라대원들이 모두 자리를 잡았습니다. /
일 호와 이 호를 제외한 열여덟 명의 수라대원들이 은형술로 설주연의 사위를 빠짐없이 감쌌다.
그들의 생명은 오직 소교주의 안위만을 위해 존재해서 그녀가 돌아오는 날을 기다리며 귀향문을 지키고 서 있었다.
“그보다···.”
그런데 정작 설주연의 관심사는 그것이 아니었다.
“주변에 수상한 움직임은 없나요?”
“흠···.”
다시금 주변을 훑어본 무영은 담담히 고개를 내저었다.
“별다른 낌새는 없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에요.”
“예···.”
- 터벅 터벅
다시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한 설주연은 귓전을 파고드는 낯선 음성에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 쓰윽
그녀가 고개를 돌려보자, 낯익은 노인이 손을 흔들어 되고 있었다.
“진오현 호법님?”
“하하, 절 잊지 않으셨군요.”
“······.”
인파를 뚫고 나타난 진오현은 넉살 좋은 웃음을 흘리며 그들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능운상가를 구경하러 가는 길에 이리 귀한 분을 뵙게 될 줄은 정녕 몰랐습니다. 흐흐, 방립을 쓰고서도 이런 자태를 보이실 분은 소교주님밖에 없지요.”
그를 마주한 설주연은 의문어린 음색을 발했다.
“진 호법님은 유람을 즐기지 않으시는 걸로 아는데, 능운령에는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진오현은 순전히 그녀를 암습하기 위해 온 것이었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사위를 두리번거렸다.
“저도 은근히 유람을 좋아합니다. 그보다··· 행색을 보아하니, 괴습지에서 막 돌아오셨군요?”
설주연은 망가진 방립을 고쳐 쓰며 대답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으레 괴습지를 탐험해 봐야지요.”
“하하, 그렇군요. 그러면 여기 계신 두 분은 괴습지 안내인과 그의 호위무사겠군요?”
멀뚱한 눈매의 강대운과 소계성은 뒤늦게 포권을 취했다.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 두 사람은 예의 있게 인사를 건넸지만 정작 자신의 직분과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낯선 불청객과 괜히 엮이고 싶지 않다는 의사표현이었다.
“흠흠.”
진오현 역시 이들의 내력이 그다지 궁금하지 않아서 급히 고개를 돌려 설주연을 바라봤다.
“사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천마신교의 교세에도 큰 영향이 갈 만한 중대 사안이지요.”
- 작가의말
시간이 참 빠르네요.
Comment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