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부르는 죽음 (1)
약향(藥香)이 가득한 의방의 침상에는 사경을 헤매는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누워 있었다.
이 사내는 막강한 무공 수위를 갖춘 초일류 고수여서 그가 지금처럼 의원 신세를 지게 될 거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북성을 격동시킨 일대 고수의 입에서 또다시 괴로운 신음성이 새어나왔다.
“으으···.”
신음소리가 나올 때마다, 그를 둘러싼 일단의 무리가 미간을 찡그리며 같이 괴로워했다.
침상을 두른 사내들은 기세가 하나같이 헌앙(軒仰)하고 강인한 풍모를 갖추어서 명문 높은 문가의 사람임을 짐작케 했다.
“으···.”
이 사내들에게 둘러싸인 환자는 의식이 없는 와중에도 심한 고통을 느끼는지, 한시도 앓는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환자를 지켜보는 사람들 중에 순백(純白)의 머리를 한 성인군자다운 장부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인상에서부터 도도한 기상이 배어 나와 보는 이를 놀라게 할 정도였다.
“더 이상은 보고 있을 수가 없구나···.”
하북팽가의 가주 자전군자(自專君子) 팽백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벌써 며칠째 신음소리만 들어왔어.”
팽백리는 무학에 그다지 자질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도법도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천하에 다시없을 고명한 성품으로 많은 무림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이런 날이 올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자기 스스로 결정한 행동이 군자의 모습이라 불린다 하여 자전군자라 불리는 팽백리는 정말 안타깝게도 무학에 대한 자질이 너무나 없었다.
이에 하북팽가의 전 가주는 큰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도산검림(刀山劍林)의 강호에서는 강한 무위를 지니지 않으면 결코 강맹한 위세를 떨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무학에 재능이 없던 팽백리는 점차 자라면서 학문에 자질을 보였고, 또 고명한 성품으로 세인들의 신망(信望)을 한 몸에 받았다.
그리고 가주가 된 후, 자신이 이루지 못한 무학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후인들에게 온 정성을 쏟아부었다.
그 결과로 나온 초일류 고수가 바로 대풍패도 장묵이었다.
그렇게 하북팽가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장묵이 폐인이 되어 돌아와 버렸다.
“묵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이냐···.”
팽백리는 항상 평정심을 잃지 않고 의를 발하였는데, 지금의 사태는 너무나 큰 사건이어서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착잡한 안색으로 장묵의 심맥을 진맥하던 왜소한 체구의 노인은 작게 고개를 저으며 신형을 일으켜 세웠다.
“상세가 위중한대다 출혈이 많아서 어쩔 수가 없었네. 아마도 오늘 밤이 고비겠지.”
삼대명의(三代名醫)라 칭송받는 신통공의 도호가 이같이 확언하자, 모든 하북팽가의 문인들이 크게 안광을 번뜩였다.
“안됩니다!”
“제발 사형을 살려주십시오!”
“이대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이대로는 절대 안 됩니다!”
그중 가장 큰 노성을 발하며 앞으로 나선 이는 하북팽가에서 장묵 다음가는 고수로 인정받는 추뢰광도(椎雷光道) 마호진이었다.
그는 비록 장묵의 무공 수위에 밀려 만년 두 번째 기재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지만 조금도 불순한 마음을 품지 않았다.
하북팽가의 성세를 위해서는 장묵의 존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반드시 살아야만 합니다. 분명히 그럴 수 있습니다!”
마호진은 사내치고는 몸집이 왜소한 편이었다.
이제 막 삼십 대를 넘어선 그는 최근 들어 혁혁한 무공의 증진을 이뤄서 조만간 장묵과 비무를 겨뤄볼 참이었다.
헌데 모든 계획이 하루아침에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흠···.”
마호진보다도 자그마한 체형의 도호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착잡히 두 눈을 감았다.
“사람의 생과 사는 정해져 있네. 노부는 그저 미천한 의술로 그 경계에 있는 자를 데려오는 것이지. 허나··· 장묵은 이미 저승에 발을 담그고 있어. 이제는 대라신선이 오지 않는 이상 누구도 그를 살릴 수 없네.”
도호는 장강 출신의 고아였다.
혹독한 폭염과 전염병이 돌던 시기에 태어난 그는 많은 이들이 고통만 받다가 아무런 처방도 없이 생을 마감하는 것을 지켜보며 자랐다.
이후 성장하여 중원을 떠돌면서 독학으로 의술을 쌓은 도호는 당대 괴이한 의술로 악명이 자자했던 악의구생(惡意求生) 냉보유의 제자가 되었다.
당시 냉보유는 잔혹한 의술로 병자들을 필요 이상 괴롭혔지만 그들의 병세만은 완전히 치유시켰다.
도호가 사부로 받든 냉보유는 천수가 다해 죽었는데, 이후 다시 강호로 나온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의술을 창안하기 위하여 능운령에 터전을 잡게 됐다.
능운령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신비한 영약과 약초가 쏟아져 들어오는데다가 괴습지에서 부상당한 중증 환자들도 들끓기 때문이었다.
도호는 자신의 의술을 발전시키고 다양한 약재를 연구하기 위해서 남은 여생을 이곳에서 보내고 있는 상태였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충혈된 안광의 마호진은 분노에 사로잡혀 이를 악물었다.
“그를 공격한 흉수라도 꼭 알아내야만 합니다.”
침상에 누운 장묵의 몸에는 뇌전혈견에 의한 상흔 말고도 세 가지 병기에 의한 상흔이 남아 있었다.
마호진은 그에게 살수를 펼친 악적을 반드시 붙잡아야만 했다.
“장묵이 뇌전혈견의 공세를 피해 몸을 사리고 있을 때, 누군가 암습을 감행한 것이 분명합니다. 전··· 그 흉수를 반드시 알아야겠습니다.”
“······.”
도호는 다시금 그의 환부를 들춰 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흉수는 세 명이며 각각 검(劍)과 권(拳)과 륜(輪)을 사용한다는 것이네.”
“그건 이미 아는 사안입니다.”
마호진이 재차 다른 문제를 언급하려 하자, 말없이 눈물을 삼키던 팽백리가 침통한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회광반조가 일어나도록 시술해 주십시오.”
“······?”
팽백리의 단호한 눈을 마주한 도호는 크게 머뭇거렸다.
회광반조(廻光反照)란 사람이 죽기 직전에 이르렀을 때, 잠시 동안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것을 뜻했다.
그런데 이것을 강제로 시술하게 되면 의식 불명인 환자는 잠시 깨어나기는 하겠지만 바로 혈맥이 망가져서 일각도 버티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기면 장묵은 폐인이 돼서라도 살아날 가망이 있기 때문에 도호는 씁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팽 가주? 너무 감정적으로 결정을···.”
그러자 다시 팽백리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회광반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랜 고심 끝에 말씀드린 것입니다.”
“······.”
의원의 본분은 환자를 살려내는 것이었다.
혹시나 하는 염원으로 오늘 밤을 지새우려던 도호는 자기 손으로 죽음의 처방을 내려야하는 상황에 내몰리자, 안색이 굳어졌다.
“허허, 이거 참···.”
하지만 장묵은 하북팽가에 소속된 사람이어서, 그의 생사를 결정하는 일는 도호가 할 일이 아니었다.
“일각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만 정신을 차릴 수 있네···.”
“알겠습니다.”
팽백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동의를 표했다.
더 이상의 기다림은 장묵에게 고통만을 지속시킬 뿐이라 판단한 것이다.
생명을 귀히 여기는 그가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장묵이 오늘밤을 넘길 가능성이 희박하고, 또 행여나 살아난다 해도 정신이 온전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장묵은 의지가 굳건하고 강인한 자네. 그렇지 않았다면 절대 지금까지 버티지 못했을 거야.”
“······.”
하북팽가의 고수들은 숨을 죽이며 신통공의 도호의 자침술(刺鍼術)이 장묵에 몸에 시전대는 것을 지켜보았다.
도호의 자침술은 이제껏 수많은 환자들을 살려냈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소중한 이의 생명을 앗아가는 착잡한 시술이었다.
“흐음···.”
도호의 이마에서 송골송골 땀이 맺혀 나왔다.
이제 마지막으로 장묵의 이마 혈 자리에 침을 꽂으면 모두 끝이었다.
이 침술 한 번에 장묵은 깨어날 것이고, 또 죽을 것이다.
“······.”
정막이 감도는 내실 안에서 팽백리의 단호한 시선을 마주한 도호는 마침내 마지막 침을 꽂아 넣었다.
- 핏
“으···윽, 응? 여··· 여긴···?”
드디어 기나긴 고통의 장막을 걷어내고 장묵이 의식을 되찾았다.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넋을 빼던 장묵은 이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 스윽
침상을 에워싼 하북팽가의 문인들은 평상시와 다름없는 그의 모습을 보고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사형!!”
“괜찮으신 겁니까···?”
“저희를 알아보시겠어요?”
“물론이지. 내가 바보인줄 아냐?”
“······.”
가주 팽백리는 격동하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잠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일으킨 회광반조의 지속 시간이 무척 짧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눈을 떴다.
- 쓰윽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호탕하게 미소 짓던 장묵은 곁에 선 팽백리를 뒤늦게 발견하고는 침울한 눈빛을 내보였다.
“제가 심려를 끼쳐드렸나 보군요.”
팽백리는 하북팽가의 제자들을 뒤로 물러나게 하고는 조심히 그에게 다가섰다.
“내공력을 증진시켜주는 영약을 구하겠다며 자신 있게 나가더니, 침상에 누워 있구나.”
“죄송합니다···.”
그를 마주한 팽백리의 입술은 극심한 슬픔에 가느다란 경련을 일으켰다.
“아니다, 다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기쁘다. 그것이면 됐다.”
장묵은 의식이 있어도 몸 상태는 송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상체조차 일으키지 못하고 고개만을 조아렸다.
“돌아가면 어떤 질책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아니다, 내가 어찌 네게 질책을 내리겠느냐?”
침착함을 잃지 않고 대화하던 팽백리는 마주하는 장묵의 안광에 벌써 생기가 사라졌다는 것을 감지했다.
더는 한가로운 소리를 나눌 시간이 없는 것이다.
“너를 공격한 이가 누구냐?”
장묵은 다그치듯 물어오는 팽백리의 음색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아는 팽백리는 언제나 차분한 음색을 잃지 않는 가주였기에 의아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핏빛의 늑대였습니다. 아마도 뇌전혈견인 듯합니다.”
팽백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것 말고 네게 암습을 가한 이가 누구냔 말이다.”
상태가 온전치 못한 장묵은 갑자기 머리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두통에 오만상을 찌푸렸다.
“으··· 누군가가 암습을···.”
“그가 누구냐? 어서, 어서 내게 알려다오.”
이를 지켜보던 도호는 생명 줄이 급속도로 타들어가는 장묵의 상태를 깨닫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 쓰으윽
이제 흉수가 밝혀지게 되면 보복의 꼬리가 이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사람을 살릴 생각을 해야지··· 헛된 원한의 실타레만 만들어지는구나.’
“커컥···.”
장묵이 진득한 피사발을 토해내자, 하북팽가의 문인들이 침상으로 바짝 모여들었다.
“사형? 사형 이겨내셔야 합니다!”
“힘을 내십시오!”
하지만 그들이 목도한 장묵의 상태는 정녕 심상치가 않았다.
눈과 귀, 코와 입을 분간하지 않고 시뻘건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것이다.
“······?”
자신의 몸 상태를 직감한 장묵은 이제는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팽백리를 향해 힘겹게 입을 떼었다.
“살괴···삼···마···.”
사력을 다해 흉수를 밝힌 장묵은 영문도 모른 채 숨이 끊어져 버렸다.
축 늘어져 버린 장묵의 시체를 마주한 하북팽가 고수들은 괴성으로 크게 울부짖었다.
“안 돼!!”
“사형······.”
“으아아아!”
그런데 크게 격분한 하북팽가의 문인들과 달리 팽백리는 조금도 슬퍼하지 않고 신형을 돌려 병실 밖으로 나왔다.
- 터벅 터벅
이제 흉수를 알아냈으니 여기서 울고만 있을 순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적어도 장묵의 영정에 흉수의 목을 가져가기 전까지는 눈물을 흘리는 시간마저도 사치같았다.
“묵아, 네 죽음을 헛되이 만들지 않으마.”
어진 성품으로 세인들의 존경을 받아온 자전군자 팽백리의 눈에서 핏발 선 살광(殺光)이 이글거렸다.
“살괴삼마··· 네 놈들의 사지를 모조리 찢어주마.”
***
- 콰과과광!
먹구름이 드리워진 하늘에서 무지막지한 뇌성이 터져 나오자, 능운령 전체가 그 위용에 사로잡히는 듯 했다.
눈을 멀게 하는 백광(白光)이 또다시 번뜩이자, 이번에도 어김없이 굉음이 뒤따라 나왔다.
- 콰과광광광!
집무실에서 사무를 처리하던 총관 서량은 계속되는 천둥소리에 불안감이 치솟아 올랐다.
‘불길하구나. 갑자기 날씨가 급변하더니, 이리 비바람이 몰아치다니···.’
- 번쩍
먹구름을 비집고 나온 섬광이 또다시 그의 눈자위를 뒤덮었다.
그리고 그때, 굳게 닫혀 있던 집무실 문이 열리며 기괴한 음영(陰影)이 다급히 모습을 드러냈다.
- 콰과과과쾅
“아··· 아··· 그······.”
그 섬뜩한 모습에 살짝 놀란 서량은 난데없이 쳐들어온 직속 수하 남하건을 향해 노성을 내질렀다.
“무슨 일로 이리 야단을 떠는 게냐!”
매사에 냉철하게 계획을 세우는 서량과 달리 남하건은 작은 일에도 야단을 떨 때가 잦았다.
그런데 막상 남하건의 보고를 들어보니, 충분히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총관님, 그가··· 아니, 그녀가··· 도착했다는 급보(急報)입니다.”
“허허···.”
보고를 받은 서량은 좌불안석(坐不安席)이란 말을 온몸으로 보여주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 안을 서성거렸다.
“흠··· 천마신교의 소교주가 결국은 왔구나. 시기도 좋지 않을 땐데 말이야.”
- 작가의말
점점 더 흥미진진해 질겁니다~!!
Comment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