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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님의 서재입니다.

폐하를 베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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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우
작품등록일 :
2021.02.14 17:49
최근연재일 :
2021.08.3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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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1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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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출항 (1)

DUMMY

헬무트는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페이에게 얻어맞은 부위가 욱신거렸다. 신물이 올라오려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자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헬무트는 고통도 잊고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눈앞은 전장이었다. 그러나 비명을 지른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다. 두 발이 허공에 매달렸다. 시야가 높다. 몸부림치며 주변을 둘러보자, 밧줄로 어딘가에 묶여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헬무트의 곁에는 함께 납치됐던 호위병이 정신을 잃은 채 묶여있었다. 그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안도했지만, 안도해도 될 만한 상황인지조차 판단하기 힘들었다.


“일어났는가, 집정관.”


뒤에서 페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헬무트는 뒤를 돌아보려고 노력하면서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무, 무슨 짓이오, 페이긴. 여기가 어디요?”

“넓게는 전장일세, 좁게는 배, 더 좁게는 뱃머리지. 그대는 우리의 선수상으로 임명되었다네.”

“그게 무슨 소리요, 선수상이라니?”

“모르는가? 배라면 모름지기 앞머리에 장식물이 있어야 하는 법이라네. 선원들에게는 용기를, 적에게는 위용을 주는 영웅적인 상징물이지. 그대가 영웅이라면 기꺼이 되어주지 않겠나.”


페이는 작게 키득거렸다. 명백하게 조롱하는 꼴이었다. 헬무트는 공중에 떠 있는 아득한 느낌에 발버둥 치지도 못했다.


“이, 이런 짓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이러는 게요, 페이긴 경!”

“집정관은 그리 생각할지 몰라도, 나에게는 충분한 의미가 있으니 잠자코 있으시게.”


페이의 출현에 전장은 진정했다. 처음에는 기사라는 존재에 두려움을 품었기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집정관이 배 끄트머리에 매달려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적의 손에 집정관의 목숨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 섣불리 나서는 자는 없었다.


“시암! 준비하게!”


망치를 단단히 쥐고 언제라도 뛰쳐나갈 준비를 하던 시암은 페이의 말에 황급히 배에 올랐다. 전장에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잠시 넋을 놓고 있었지만 페이의 간결한 말이 일깨웠다. 페이는 분명히 출항할 시간이라 말했고, 그렇다면 드디어 배를 움직일 때였다.


“세하라! 동지들을 배에 태우게!”


세하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간부들을 독촉했다. 물러나는 제국군에게 위협적으로 쏘던 반란군이 진형을 허물고 배에 오르기 시작했다.


전장이 해체되는 그 시점에 알베릭이 지상에 내려앉았다. 그는 분노로 이성을 잃기 직전이었다. 텅 빈 철혈을 경계하느라 페이에게 우회기동을 허용하게 했고, 손을 놓은 동안 숱한 병사들을 죽게 했다. 적이 설정한 전략목표를 헤아리지도 못하고 희생만 급증하는 최악의 선택을 거듭했다.


오직 어리석은 자신이었기에 지금 같은 상황이 되었다. 알베릭은 다른 기사였으면 이런 멍청한 짓거리는 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 구역에 있는 유일한 황제의 기사다. 언제까지고 기사단의 막내라는 것으로 변명 삼을 수는 없었다.


착지와 동시에 전개된 움직이는 대장간이 페이를 조준했다. 그러나 집정관의 바로 곁에서 세하라를 비롯한 숲지기들이 집정관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들이 방아쇠를 당기거나 활시위를 놓는 것보다 더 빨리 이 거리에서 그들 모두를 쓰러트릴 수는 없었다.


뱃머리로 강철의 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페이의 작은 몸이 그 안에 들어있다고 믿기 힘들 정도였다. 전성기의 페이를 기준으로 제작되었을 갑옷이므로 몸에 맞지 않아야 정상이었다. 그렇다면 페이는 철혈의 내부를 직접 개조했을 것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알베릭은 페이가 얼마나 긴 세월에 걸쳐 이 일을 계획했는지 가늠했다. 황제의 지식을 훔칠 수 있을 만큼의 자리로 올라가지 않는 한, 철혈을 개조하거나 고대의 구조물을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대의 순진함을 자책하지 마시게, 알베릭.”


철혈의 투구에서 기계음이 뒤섞인 페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알베릭은 주먹에 힘을 주며 뱃머리에 선 페이를 노려보았다.


“내려와라, 페이긴. 기사라면 단둘만의 결투에 답해라.”

“이제 경어도 쓰지 않을 셈인가? 그리고 이제 나는 기사가 아니라네. 관둔 지 오래라서 말일세.”

“페이긴!”


페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바닥에서 시암이 머리를 내민 채로 주먹을 들어 보였다. 출항 준비가 끝났다.


배에 늘어선 반란군은 저마다 난간에 서서 활이나 총기로 바깥을 겨누고 있었다. 이들이 탑승한 것만으로도 배는 요새가 되었다. 페이는 4구역의 제국군 모두가 달려들어도 함락되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페이는 완성된 배를 새삼스럽게 훑어보았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목재와 돛대, 수없이 시행착오를 거듭한 이음새. 반신반의하면서도 매진한 작품이 이곳에 있었다.


“이동 요새이자, 자유이며, 요람이자, 무덤.”


페이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갑옷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은 그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없었다.


“이곳이 우리의 이동 국가로다.”

“페이?”


세하라가 페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페이는 투구 너머로 무기질적인 시선을 보내며 짧게 명령을 내렸다.


“시동을 걸게, 시암.”

“예!”


시암이 다시 갑판 아래로 사라졌다. 페이는 세하라를 내려다보았다. 페이를 올려다보는 시선에는 일말의 불안감이 엿보였다. 페이는 그래서 철혈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표정도, 눈길도 겉으로 드러내지 못한다. 이 갑옷을 장착하고 있으면 외부에는 감정 없는 무기질로 보일 뿐이었다.


“걱정하지 말게. 세하라.”


배가 조용히 진동하기 시작했다. 느닷없는 진동에 깜짝 놀란 누군가가 방아쇠를 당겼다. 그를 나무라는 사람은 없었다. 배 위에 올라탄 누구나, 심지어 배의 가동방법을 알고 있는 시암마저도 이 진동에 놀라고 있었다.


“우리는 이 도시를 나갈 걸세.”


배가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맙소사······.]


나무 위에 숨어 언덕 위를 바라보던 헌진의 귓가에서 나리아가 경악했다. 헌진도 소리를 내지 않았을 뿐 전투상황에 버금가는 긴장감을 느꼈다. 땅이 울리는 원인이 눈앞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배가 움직였다. 나리아는 페이에게 배를 바다까지 옮길 수 없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어리석은 소리였다. 실제로 저 거대한 배가 움직이고 있으니 증명되었다. 말도 안 된다는 소리조차 나오지 못했다.


“나리아, 저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어, 모르겠어요. 수륙양용전함에 관한 자료를 본 적이 있긴 한데, 그걸 정말로 이곳에서 만들어냈다고요? 자원도, 기술도 없는 저들이?]

“페이의 목적이 처음부터 변함이 없었다면, 기사로서 지낸 긴 시간 동안 충분히 준비할 수 있었겠지.”


페이에게 시간이라면 썩어빠질 만큼 있었다. 현실을 부정하기에는 기사란 쉽사리 헤아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저게 제가 알고 있는 그런 종류의 전함이라면, 정말 바다까지 나갈 수 있을지도 몰라요. 동력원은 뭘까요? 전기나 기름은 아닐 테고, 기림 제국에서 그런 동력을 낼 만한 건······]

“철혈의 파워팩뿐이로군.”

[그렇겠네요. 그것도 상당한 숫자를, 훔쳐내거나, 기사를 암살하고 빼앗거나······.]


페이의 이동 요새는 점차 남쪽을 향해 나아갔다. 내리막길을 내려오기 시작하자 점차 속도가 붙었다. 감히 그것을 제지하려는 병사는 없었고, 집정관의 목숨이 위협받는 지금 쉽사리 나설 수도 없었다.


[왜 바로 북쪽이랑 서쪽에 있는 가까운 장벽으로 가는 게 아니고 남쪽으로 가는 거죠?]

“5구역으로 갈 생각일 거다.”

[굳이 5구역으로······아.]


나리아는 5구역과 6구역 사이에 흐르는 검은 강을 떠올렸다. 강은 바다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고립되었는데, 강물을 가둔 장벽을 뚫으면 바로 바다로 이어졌다. 도시 바깥으로 가는 길로 따지면 멀리 돌아가는 것이지만, 바다로 나아가려 한다면 가장 효율적인 길이다.


[가까이서 보고 싶어요.]

“안 된다.”


당연하지만 단호한 말에 나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안 그래도 상의 없이 페이를 만났다는 사실에 헌진은 여관에서 대기하도록 반쯤 강제하듯 설득했다. 화를 내는 헌진을 본 적이 없었지만 그것이 헌진 나름대로 화를 낸 것일지도 모른다.


[제가 헌진한테 말하지도 않고 페이를 만났다고 화난 건 아니죠?]

“그게 아니다. 넌 내 부하가 아니야. 너에게는 독립된 행동권이 있다. 네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내가 나무랄 수는 없지. 그래서 너에게 위험한 일이 닥친다면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왜 그래요? 갑자기 그런 감동적인 얘기를 다 하고.]


괜스레 머쓱해진 나리아의 말에 헌진은 단단히 당부했다.


“기사가 셋이나 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지. 그리고 내가 하려는 일을, 네가 바로 곁에서 보게 하고 싶지 않다.”

[네? 뭘 하려는 거죠?]


헌진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나리아는 여관에 있을 것이고,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제구군도 이동할 테니 그것조차 뚫고 기사의 싸움판에 끼어들 수는 없다. 게다가 방금 자기 입으로 동등하다는 말을 꺼냈으므로 이제 와서 숨길 수 없었다.


“내 목표는 페이긴과 알베릭, 둘이다.”

[네? 알베릭을 도와서 페이긴을 제압하겠다는 작전은요?]

“어차피 페이가 살아남으면 장벽을 파괴할 테고, 알베릭이 살아남으면 내가 윗구역으로 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테지. 그러므로.”


헌진은 짧게 말을 골랐다.


“두 기사를 공멸시킨다.”

[서로 죽이게 하겠다고요?]

“그렇다.”

[······제압하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무르히처럼요. 그에 아니라 죽인다는 뜻이었나요?]


나리아의 말이 살짝 떨렸다. 헌진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리아는 직접 마주한 사람에게 집착했다. 마린에게 그랬고 루미스에게 그랬다. 나리아는 페이와 지나치게 교감했다.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기사가 둘이다. 상황이 그렇게 좋게 흘러갈 리 없다.”

[어, 음······.]


나리아가 무언가를 고민하는 동안에도 배는 느리지만 착실하게 전진했다. 제국군이 개미떼처럼 좌우로 흩어졌다. 나무를 무너뜨리고 땅을 가르며 나아가는 전함에게는 거칠 것이 없다. 알베릭이 발악하듯 그것을 막아내려 했지만, 그때마다 페이가 뛰쳐나가 짧은 교전을 치르거나 집정관을 위협했다.


“알베릭! 우리는 그저 도시 밖으로 나갈 따름일세. 방해하지 말게나!”


페이가 철혈 너머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헌진은 최대한 기척을 숨겼다. 아직은 아니었다. 알베릭과 페이가 서로 전력을 다해 맞부딪칠 수 있는 상황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알았어요. 제가 뭐라고 할 수는 없겠죠. 전투작전은 헌진에게 달려있으니까요. 저는 루미스에게 연락할게요. 만약을 대비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생각보다 나리아는 침착했다. 헌진은 나리아의 냉정함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알았다.”


헌진은 통신을 마치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어쩌면 기사를 둘이나 상대해야 할 수도 있다. 게다가 알베릭은 움직이는 대장간을 지녔고 페이는 철혈을 입었다. 녹슨 몸으로 과연 두 기사를 상대로 한 순간이라도 버틸 수 있을지 보장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기에, 두 기사는 반드시 공멸해야 한다. 헌진은 가볍게 뛰어올라 숲을 따라 전함을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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