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평범한 일상 (1)
수고했다고 떠나는 사람들 사이 피폐한 몰골로 사이를 지나가는 남자를 눈으로 따라갔다.
인사를 하면서도 절대 말없이 고개만 꾸벅이며 떠난다.
그는 정말 조용히 사라졌다.
“뭘 그리 봐?”
메튜는 한동안 가만히 있던 정의 옆으로 걸어와 시선 끝을 바라본다.
뒤로 한 번도 돌아보지 않는 남자의 뒷모습만이 보일 뿐이었다.
“아, 저 사람 때문에? 저 사람 또 저렇게 가네.”
하지만 메튜는 뒷모습에도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봤다.
익숙하다는 듯이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저었다.
이쪽에서는 유명한 사람이라는 말에 정의는 표정을 찡그렸다.
“유명해요?”
“그래, 노숙자이면서 연기는 되게 잘하기로 유명하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걸?”
어째서 그가 노숙자가 되었는지 그런 눈을 갖고 살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를 보는 시선과 관심엔 의문밖에 없었다.
연기를 하면 몸을 사리지 않고 하면서 꾸미지도 않고 제대로 밥을 먹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잠을 제대로 자는 것도 아니었다.
“저 눈을 오래 보면 참 기분이 나쁘더라고.”
메튜는 정말 소름 끼친다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생각만 해도 싫었는지 표정이 더욱 구겨진다.
하지만 나는 저런 눈을 하고 있던 사람이 떠올라 입술을 깨문다.
“저게 어떻게 산 사람이야? 이미 죽은 시체지.”
메튜는 얼른 가자며 정의 어깨를 잡았다.
그의 힘에 끌려가면서도 다른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꺼져.”
죽은 눈으로 어두운 거실에서 초록색 병들이 굴러다니며 손에서 병을 놓지 못했다.
-“제발, 제발···! 날 좀, 놔두라고! 아아아악!”
미처 삼키지 못하고 저지당해 바닥에 가득 흩뿌려진 알약이 보인다.
그런 상황은 어떤 선택을 하고자 했는지 짐작하게 했다.
-“죽게 해달라고···.”
메튜의 말대로 그건 죽은 시체와 같은 눈이었다.
고개를 돌려 나는 메튜가 이끄는 앞을 바라본다.
자신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며 반짝이는 눈을 감추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 곳.
“정말 최고였어요. 완전 미카엘이었다니까요?”
“역시 나의 미카엘.”
칭찬과 함께 행복한 곳에 나는 웃었다.
저 멀리서 언제 왔는지 조용히 손을 흔들고 있던 아버지를 향해 활짝 웃는다.
“미카엘 다음 촬영일 언제인지 알죠?”
“네! 저 그 장면만 촬영하면 끝이잖아요.”
손을 흔들며 아버지의 손을 맞잡는다.
따뜻한 손이 오늘따라 더욱 몽글몽글한 기분이 들게 했다.
오늘은 정말 소득이 많았다.
배우로서 정말 많은 도움이 된 하루였다고 조잘조잘 떠드는데도 아버지는 그저 웃었다.
“진짜 대단한데? 이러다가 진짜 대배우가 되는 거 아냐?”
가끔 대단하다고 말해주는 것이 왜 그게 그렇게 재밌는지 모를 일이었다.
몸이 어려진 지도 벌써 꽤 시간이 많이 흘러서 진짜 어린아이가 된 걸지도 모르겠다.
*
여느 때와 같이 촬영을 이어가고 맨 마지막 촬영분만 남겨놓았다.
미카엘로서는 이젠 진짜 안녕을 고할 차례였다.
그동안 고생한 두피도 쉴 수 있는 걸 생각하면 좋은 것 같기도 했다.
“준비는 되셨으면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날 부르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팔을 잡는다.
순간 가려다 말고 팔을 잡은 메튜를 보자 진지한 얼굴로 내게 말한다.
“잘하고 와.”
“언제나 열심히 해야죠.”
그래야만 나아가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그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불만인 표정을 짓는 메튜였다.
“정, 난 사람이 좀 자만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메튜도 열심히 노력하잖아요.”
그 말에 더는 메튜도 말을 못했다.
그건 그렇다며 어깨를 으쓱이면서 표정이 풀렸다.
요즘 더 노력한다고 만족스러워하는 박정찬 감독의 말이 생각났다.
이렇게 인정받는 배우도 노력하는데, 자신은 얼마나 더 노력해야 할까.
“전 정말 열심히 해야겠네요···.”
“···기만자.”
“네? 뭐라고 하셨어요?”
“아냐, 지금 너 부른다고. 얼른 가서 연기 잘하고 와.”
제대로 듣지 못한 정의를 보낸 뒤, 메튜는 고개를 저었다.
이젠 어린아이한테 말싸움마저도 지니 어디 가서 고개도 못 들겠다고.
“그나저나 더럽게 잘하네···.”
정말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서 첫 NG 거하게 낸 뒤론 한 번을 NG를 내지 않았다.
감독의 얼굴은 꽃이 폈고 온정의는 점점 나아가는데, 메튜 본인 얼굴만 흙빛이었다.
“나 주인공인데, 이러다가 주인공 뺏기는 거 아냐?”
“그러니까 팩 좀 하셨어야죠.”
“인정하면 어떡해. 뭐야, 내가 진짜 지금 못 봐줄 정도야? 오마이갓, 나 얼굴 빼면 시체인데!”
거울을 어디선가 가져와서 얼굴을 보는 메튜를 보며 매니저는 혀를 찬다.
얼굴로 먹고사는 배우라고는 하지만, 너무 호들갑이 심했다.
이 와중에도 자기 연기 체크한다고 모니터링하더니 고개를 갸웃대며 대화를 이어간다.
어린아이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고개를 돌리니 미스트를 뿌려대는 메튜가 보인다.
“···누가 배우인지.”
하찮은 자기 배우 메튜와 프로다운 아이가 비교되는 순간이었다.
*
마지막 촬영이 끝나고 일정이 없는 정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평범한 12살의 어린아이처럼 다시 까맣게 머리를 물들이고 밥도 먹고 공부한다.
학교를 한동안 바빠서 제대로 가지 못했지만, 곧 새 학기가 시작되니 설레기도 했다.
“다녀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보여야 할 부모님 대신에 익숙한 덩치와 길쭉한 기럭지가 보인다.
잘못 본 건가 싶어서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똑같았다.
“아더, 딜런···?”
“오랜만이다, 꼬마야.”
“안녕하세요, 정. 오랜만에 보네요.”
자신만만한 표정의 PD 아더와 여전히 곱슬머리에 충혈된 눈의 조연출자 딜런이었다.
반가움도 잠시 어떻게 집에 오게 됐는지 몰랐을 때, 그들의 뒤로 아버지가 걸어온다.
“다녀왔어?”
“네, 아빠. 근데 왜 아더랑 딜런 씨가 있어요?”
“자세하겐 못 들었지만, 좋은 소식 들었다고 축하해주러 왔다던데?”
“소식이요?”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서서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자 부자간의 인사가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아더는 딜런의 어깨를 팔로 친다.
“···제가 일찍 요절하면 감독님이 절 끌고 다녀서라는 걸 잊지 마세요.”
“이런 건 원래 조연출자가 딱 나서서 하는 거야. 그때도 내가 캐스팅한 거 못 봤나?”
물론 그 과정엔 제멋대로 뛰어가서 캐스팅한 아더의 뒷정리를 해준 건 딜런이었다.
그건 그거고 결국 캐스팅한 것은 아더, 본인이니 당당했다.
오히려 손쉽게 해결했다고 으스대던 아더를 보며 남몰래 주먹을 말아쥔다.
“다른 건 아니고 저희가 이번에 드라마 찍으려는데, 주인공이 좀 어려서요.”
잠도 못자고 어둠 속에 있다가 끌려 나온 탓에 눈이 붉어진 딜런은 사무적인 웃음을 짓는다. 여전한 일 지옥에 빠져있는 딜런이 반가웠다.
“거기다가 또 이번 영화가 상영도 전에 감독님이 극찬했다고···.”
소문이 너무 자자해서요.
말을 하면서도 딜런은 자기 옆에 있는 아더를 향해 눈치를 봤다.
“지금 최고의 배우가 되기 전에 빨리 계약하고 우리도 대박 좀 치자는 말이 나왔고.”
“그래서 내가 꼭 꼬마 너여야만 한다고 그렇게 말했지.”
마지막 마무리만을 기다린 것처럼 참지 못하고 말을 꺼낸 아더는 입술이 씰룩였다.
언제든 승낙만 해주면 당장이라도 뛰어나갈 기세로 눈을 부릅뜨고 보고 있었다.
“꽤 재밌는 거야. 아마 이때까지 해본 적이 없는 장르일 거고 우리도 도전이거든.”
대본을 들이밀었고 얼떨결에 품에 들어온 시놉을 본다.
빳빳한 시놉은 누가 봐도 내게 처음 온 것 같았고 기분 좋은 잉크 냄새가 났다.
“하지만 아직 XIS가 끝나려면 좀 멀었잖아요?”
기분 좋은 향기에 순간 망각하고 시놉을 만지고 있었을 때였다.
문득, 이들이 아직 드라마가 안 끝났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까 아직 시리즈로 좀 많이 남았을 텐데, 드라마를 맡는다는 게 이상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온 거지. 좀 더 있다간 예약하게 생겼으니까.”
자랑스럽게 고개를 빳빳하게 세운 아더를 향해 눈을 가늘게 뜨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까 지금 누가 예약을 한다는 건지 이해를 못한 정의였다.
그러자 고개를 저으며 아직 모른다며 하소연을 딜런에게서 한다.
“저저, 봐봐. 아직 자기가 천재인지도 모른다니까. 내가 저런 천재를 키워냈다고! 딜런!”
“···PD님 떨어지시죠.”
“아하, 냄새가 많이 났나? 역시 고기를 먹은 냄새는 어딜 가지 않는다니까.”
“밤을 새우고 온 저도 옷은 갈아입습니다.”
깔끔쟁이라며 캭캭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손길도 슬쩍 피해내는 딜런은 지친 표정으로 정의를 본다.
“지금 엄청 유명하셔서요. 섭외가 오기 전에 섭외해야 할 것 같았거든요. 저희도 급해서.”
“제가요?”
“네, 벌써 이렇게 소문날 줄은 몰랐지만 좋은 게 좋은 거죠.”
원래 이 바닥에선 실력이 좋으면 다라고 하지만, 온정의는 정말 빨리 뜬 편이었다.
어린 배우 중에서 뜨는 경우가 있기야 하지만, 이렇게까지 뜨기 쉽지 않다.
그걸 미리 알고 아더는 새 작품 이야기에 빠르게 온정의를 찾아온 거였다.
자칫하다간 뜨면 아예 촬영도 같이 못 할까 봐.
“PD님이 생각보다 괜찮은 작품을 물어왔거든요. 작가가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아···.”
“그러니 저희가 인연이 있다는 것만 알아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배우는 작품을 보고 고르는 거라며 손을 휘젓는 딜런이었다.
그 말이 맞기도 한데, 어째선지 그가 하는 말이 아직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시놉 하나는 정말 자신 있거든요.”
자신감 넘치는 딜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자신은 모자란데, 현재 피부로 닿지 않는 인기는 알 수가 없다.
제대로 학교에 가지도 않았으니까 모르는 건 당연한 거였다.
“딜런, 자신감 넘치는 게 점점 날 닮아가는 것 같은데?”
“아뇨, 착각입니다.”
딜런은 완전히 정색하고서 안 그래도 환한 빛에 붉어진 눈이 더 붉게 달아올랐다.
“확실해, 역시 파트너는 닮아간다고 그러더니 사실이였구만!”
“절대···, 아닙니다.”
“딜런, 너의 키가 멈춘 것 같더니 그 이유가 있었어!”
캭캭거리며 웃는 아더와 몸을 부르르 떠는 딜런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아버지는 걸어와 눌러썼던 모자를 벗긴다.
잠깐 도서관에 다녀온 탓에 머리는 눌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근데 작품 이야기 때문에 오신 거라면 시놉만 보내면 되는 거 아니에요?”
“아, 겸사겸사 온 겁니다. XIS에서 첫 데뷔를 했으니까 연락이 많이 오더라고요.”
“섭외요?”
그러자 딜런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정말 여러 곳에서 배우 온정의 소속사가 되고 싶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이래 봬도 자기도 이 바닥에서 들은 것이 많다고 웃는 딜런의 얼굴이 보인다.
“배우가 좋은 작품을 고르려면 연락이 잘 돼야 하니까요.”
딜런의 기대와 다르게 나는 소속사라는 말에 눈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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