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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사랑사람의 서재

하늘을 등지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방구석4평
그림/삽화
lovendpeace
작품등록일 :
2019.12.26 00:03
최근연재일 :
2022.08.09 01:45
연재수 :
277 회
조회수 :
27,358
추천수 :
1,600
글자수 :
1,201,430

작성
21.05.08 00:01
조회
54
추천
4
글자
8쪽

Episode183_비밀요원의 고요한 잠복(11)

DUMMY

타나의 비명이 울려퍼졌던 그 날의 진상은, 결론만 말하자면 애쉬가 상상하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그녀를 놔주고 뒤늦게 들려온 폭발음은 암살단이 소녀를 처치했기에 생긴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소녀가 저항하던 순간, 그녀 자신도 몰랐던 어마어마한 기적의 재능이 암살단의 흑광석과 반응해 역으로 공격을 튕겨내버린 것이다.


암만 꼬마라고 방심했다 한들, 기적이라곤 들어보지도 못한 한 어린 소녀가 암살단이라는 정예병의 기적을 이겨내고 도리어 역공까지 가했다니. 이는 결코 예삿일이 아니었다.


이를 본 암살단 대장은 직접 타나를 제압한 뒤, 싹수가 있다고 판단해 몰래 생포해서 감옥으로 데려갔다. 굉장한 잠재력을 가진 반역자의 딸에 대한 이야기는 곧바로 상부에 보고되었고, 그 날부터 타나의 이름은 네아가 되었다.


반역자의 발칙한 딸년을 굳이 살려둔 것이 싹수가 있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라니, 혈통 자체가 불순하단 소린 그야말로 개소리였다는 뜻이다.


그와 관련된 모든 과거를 술술 불어준 동료는 마치 그것이 재밌는 농담인양 실실 웃어제꼈고, 애쉬는 본인이 그에게 술을 처먹여 언질을 받아낸 장본인임에도 동료의 머리를 세게 후려치고싶은 충동을 참아내느라 갖은 애를 써야만 했다.


애쉬가 알고싶었던 것은 그 뒤 네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였다. 그리고 한 참혹한 실패담이 네아를 이용해 이루어졌음을 듣고 난 뒤, 애쉬는 끝내 참아내지 못하고 동료의 얼굴을 힘껏 때려눕힌 채 술집을 떠났다.


더 나은, 더 강한 암살단을 만들어내고자 시행되었던 특수한 실험이 하나 있었다. 이전의 삶과 기억을 모조리 지우고 애국심이라는 이름의 암시로 정신을 정리정돈함으로써, 충성심도 기적을 일으키는 힘도 획기적으로 증대시키겠다는 프로젝트.


집도 가족도 사라지고, 차피 죽을 운명에 누구보다도 굉장한 재능을 지닌 네아는 그 계획에 그야말로 꼭 들어맞는 실험체였던 셈이다.


개조가 진전될수록 그녀는 과거의 평범하고 겁 많은 아이로부터 점점 변질되어갔다. 기억, 생각, 신념, 인간성을 구성하는 무수한 성분들이 깊게 파내어져 텅 비어버렸고, 그 가운데에는 수정같은 순수성만을 한가득 채워넣었다. 그 모든 것이 더 강한 힘과 기적을 위한 필수조건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까지 추진한 프로젝트는 별다른 성과조차 이뤄내지 못했다. 진전 없이 몇년을 질질 끌어댄 실험은 결국 실패 판정을 받아 중단된것이 한 달 전. 남은 것은 실컷 탕진해 바닥을 드러낸 국고와, 과거도 미래도 잃고 국가에 미쳐버린 광신도 소녀 뿐. 그 재능을 마치 떨이 처리하듯이 네아는 암살단의 견습이 되버린 것이다.


영광따윈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추한 인사행정이다. 이따위 직책을 영광이랍시고 덥석 받아들은 스스로가 우스워서, 평소의 애쉬였다면 분명 미친척 크게 웃어제꼈을 것이다.


하지만 애쉬는 웃지 않았다. 그 뿐이 아니라 지금껏 계속 해오던 미친 짓도 모조리 관두고, 그날 이후 한번도 보인 적이 없었던 진중한 얼굴을 한 채 모두의 앞에 나섰다.


그리고 신병의 견습기간을 맡을 선임을 정할 때, 가장 의외의 인물로서 손을 들었다.


“...제가 신입을 맡겠습니다.”


항상 태업은 예사에 삶의 끝만을 학수고대하던 그 정신나간 애쉬가, 지금 실로 오랜만에 진지하게 직무에 임하기 시작한 것이다.


애쉬의 삶을 정반대로 뒤집고, 또 그것에 변화를 준 것도 모두 그녀와의 만남으로 인한 것이었다.


녹슨 천재는 마음을 바꿨다. 그는 국가지사를 바꿀 힘이 없다. 애쉬따위 하나 없어도 어차피 암살단은 계속 존재할 것이고, 일처리도 아무 문제 없이 이뤄질 것이다.


허나 그는 이미 발을 담근 사람이다. 결국 누군가는 죽이고 죽여야 한다면 총대는 자신이 맨다.


이제부턴 내가 하겠다, 목을 베고 뼈를 부러트리는 것도. 집을 부수고 문서를 불태우는 것도. 과거를 지우고 역사에 덧칠하는 것에 내 손을 더럽히겠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죄인을 만들어내지 않는 것 하나만으로 난 족하다.


그저 단 하나. 단 한 사람 만이라도 지켜낼 수 있다면. 공적을 반으로 나누든 오명을 쓰든 나에게는 아무 상관 없다.


그게 바로 너다. 내 손으로 가족을 죽여 고립시킨, 내가 속죄해야만 하는 대상이면서, 또한 일생에 단 한번의 선택의 여지조차 없이 암살단으로 끌려온 그 여자.


나는 내 의지로 이 지옥에 발을 들였다. 하지만 너마저 이곳에 물들어버린다면, 그건··· 그건 너무 불공평하다.


네아. 너 하나만큼은 반드시.


그의 정신이, 힘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



보였다. 눈 앞은 깜깜했지만 감각으로 느낄 수는 있었다. 어떤 상황인지,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가슴 절절히 슬퍼하고 있는지도.


네아, 네가 거기에 있구나.


그녀가 굳게 닫았던 마음의 문이 지금 살짝 열렸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까진 알 수 없었지만, 그 조금의 틈 만으로도 흑광석으로 서로 이어진 마음이 애쉬로 하여금 그녀의 신호를 읽을 수 있게 해주었다.


<오지 마요.>


사라의 목소리가 마음 속에서 울려퍼진다. 그녀의 목소리는 슬퍼하고 있었다. 억울하고 분해서 끝이 떨려오고 있었다.


<오지 마, 당신 말은 이제 더 안들을거예요.>


눈 앞을 더듬으며 억지로 걸음을 옮기는 애쉬를 뜯어 말리고 있었다. 마치 사춘기 아이의 투정처럼 거세고 막무가내로 반발하는 네아의 목소리는 마음으로 전해지기에 더더욱 솔직한 본심일 수밖에 없었고, 그렇기에 애쉬는 의문을 품을 수 있었다.



“왜...”


네아를 위해 싸우지 말라고 했다. 그녀를 위해 내가 피투성이가 되는 한이 있어도 앞으로 나섰고, 지키고 싶어서 이제껏 도망치라며 죽도록 만류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반발하고 있다. 네아가 마음으로 전하는 이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나 슬프고 괴로워서, 눈물이 날 정도로. 난 이 아이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뭘 어떻게 하는게 좋았던걸까. 진짜 네아를 위한 것··· 네가 진짜 바라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래서 이번에는 여지껏 있어서 처음으로, 그녀에게 질문해보기로 했다.


“왜 오지 말았으면 하는지, 가르쳐줄 수 있겠니?”


<내가 싸울거예요! 싸워서 이기고, 국가에 헌신할 능력이 있음을 입증하고 싶단말예요!>


대답하는 네아의 목소리는 사납고 당돌하다. 일체의 이의조차 허용하지 않으려는 다급함이 느껴진다.


왜 그렇게까지? 애쉬는 한번 더 물었다.


“그럼 너는 싸우고 싶은거니? 그렇게 아프고 위험해도···?”


<당연하죠! 왜냐하면...!>


그 순간, 잦아드는 네아의 목소리. 곧 뒤를 잇는 것은 그녀의 작고 고요한 마음이었다.


<항상 싸우는건 아저씨 뿐이었잖아요. 이렇게··· 아프고 위험해도.>


네아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침묵을 지켰다. 애쉬는 이제 자신이 답할 차례임을 눈치챘다.


“그럼··· 내가 가야겠구나.”


그건 말하자면, 네아에게 있어서 처음으로 떨어진 전투 허가였다. 그녀 자신도 놀라서 동요하는 낌새가 여기까지 전해져왔지만, 애쉬는 개의치 않고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그래, 난 네 스승이니까. 꼭 가지 않으면 안되지.”


<......>


“풋내기 견습이 처음으로 힘껏 싸우고 있는데, 선임으로써 함께해야지. 안 그러니?”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몸, 어느 방향으로 가야하는지도 알 수 없고, 다만 그녀에게 한발짝 더 다가가기 위해서.


“어디로 가야할지, 알려다오.”


작가의말

수정같은 순수성은 비트겐슈타인의 주옥같은 글에서 따온 개념입니다. 이 글을 빌어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날 가져요 논리왕님 흑흑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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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54 Jy2315
    작성일
    21.05.11 23:24
    No. 1

    이름 나오는 암살단은 배드엔딩을 마주할거 같은데 ㄷㄷ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방구석4평
    작성일
    21.05.14 20:51
    No. 2

    업뎃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흐흑 ㅠㅠ
    자꾸 군대 탓 하기 싫지만 최근 유달리 근무나 일이 많아져서 시간 내기가 촉박했습니다
    대신 다음 화는 좀 더 알차게 분량을 담아봤으니 조금이라도 만족이 되셨기를...ㅠㅠㅠ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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