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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사랑사람의 서재

하늘을 등지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방구석4평
그림/삽화
lovendpeace
작품등록일 :
2019.12.26 00:03
최근연재일 :
2022.08.09 01:45
연재수 :
277 회
조회수 :
27,417
추천수 :
1,600
글자수 :
1,201,430

작성
21.03.19 20:25
조회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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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1쪽

Episode171_울이란 인간은 어떻게 살아왔는가(12)

DUMMY

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나서였다. 갑작스런 나라님의 부재에 황궁이 한창 혼란스럽던 사이, 그 성문 밖으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울과 리체였다.


급하게 분장한 게 전부인 이 수상하기 그지없는 이들. 보초병은 당연히 신분을 확인하려 했으나, 그의 충성심은 안타깝게도 최고대신 주노에 의해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았다.


어느새부턴가, 마치 그들이 나타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기다리고 있던 주노. 그가 신분을 보증하며 문을 열라고 하니 밑의 것들은 할 말이 없다. 이 세상 제일가는 권력자 중 하나가 그들에게 손을 내지르니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그렇게 아주 당당히 둘은 황궁 안에 발을 들였다. 나라를 통째로 뒤집어버릴 씨앗이 마침내 대지로 들어가 발아한 것이다.


곧이어 리체의 충성스런 수하들까지 그 뒤를 따랐으니 그렇게 주인없는 궁은 단 하루만에 외부인에게 장악당하고 말았다. 정확히는 돌아온 내부인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최고대신 주노는 그동안 숨겨두었던 선왕의 유서를 꺼내 펼친다. 그 필체와 문장 하며, 찍힌 도장에 견뎌온 세월까지 틀림없는 진품이다.


그와 동시에 살아남은 중요 대신들은 10년 전의 진실을 증언한다. 선왕이 진정으로 사랑한 아들, 그에게 선양한 왕위를 메로스는 억지로 찬탈했으며, 그날 불길의 진상. 억지 숙청과 살인멸구를 위한 편집증적인 추적까지.


끝내는 계속 메로스에게 시달려온 수색자의 대장마저 나라님의 부당한 명령을 증언하고야 만다. 그동안 존재해왔던 무수한 의혹들, 메로스가 진정한 반역자라는 소문이 사실로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이제 진정한 나라님의 적통임을 인정받은 울은 드디어 왕관을 제 손에 들었다. 그와 동시에 가장 먼저 한 일은 그것을 제 머리 위에 올려두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무릎을 꿇고 새로운 주인에게 하사하는 것이었다.


다름아닌 리채에게.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적임자이며 이 모든 일을 계획하고, 그들에게 무서운 권력과 자유를 선사한 반역자—이제는 혁명가라고 불러야 할—야말로 그 왕관의 주인이여야 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역시 한참 전부터 계획된 것. 리채가 울을 나락에서 끌어내고 질문을 던졌던 그 날부터, 운명은 지금 이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배후에서 주노는 미소지었다. 한때의 주군을 배반한 비열한 웃음인가, 아니면 드디어 진정한 군주를 모시게 된 데 대한 승리의 웃음인가. 그 미소가 무슨 의미를 담았을지 해석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그렇게 길고 길었던 과거사를 늘어놓고, 울의 회상은 드디어 마지막 전개에 이르렀다. 그 끝은 무척이나 당연한 동시에 끔찍하게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렇게 돌아온 나와 내 큰형님이 가장 먼저 해야했던 것은··· 내 작은 형님의 세력을 모조리 숙청하는 일이었다.”


그의 수족도, 충신도, 가족도 아이도··· 전부.


“...그렇게 나는 지금까지 살아남아왔다. 너희와 함께 궁전을 떠나기 전까지 말이다.”



***



“이후의 이야기는 역사책에도 쓰여있지. 새로운 나라님은 직접 군사를 통솔해, 질질 끌고있던 소수민족과의 전쟁을 이어받았다. 이미 떠난 군주를 떠받들던 소수 민족들은 점점 와해되어가던 차였으니 상대가 될리가 만무했다. 심지어 그들의 손에 쥐인 전략서는 다름아닌 리채 본인이 적어둔 것이니 황군의 손바닥 안이나 다름 없는 셈, 단 한순간에 그들은 모조리 쓸려나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게 메로스가 챙기려던 승리의 명예를 약탈함과 동시에, 혹여 모를 위험한 과거의 자취도 묻어버린 셈이다. 스러진 적들은 본인을 학살한 자가 그들의 주군이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을거다.”


울은 그렇게 이야기를 마쳤다. 한동안 이어지던 목소리가 꺼지자 모닥불 타닥이는 소리만 밤공기를 채운다. 사라는 이야기가 더 이어지길 기다렸지만, 계속 침묵을 지키는 울을 보고 그제서야 할 말이 끝났다는걸 알았다.


실로 장대한 이야기였지만 뭔가가 찜찜했다. 어느 순간부터 핀트가 엇나간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상하다. 진짜 듣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사라가 더 의문을 품기 전에 울은 옷을 툭툭 털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다급하다 싶을 정도로 빠르게 자리를 피하려는 그 모습에 그녀는 순간 놀랐다. 이대로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대화를 이어가야 했다.


“저, 저는요···!”


그렇게 물꼬를 틀자 울은 움찔 하여 가려던 채비를 멈추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사라는 무언가 할 말을 찾아 애써 머리를 굴려본다. 그리고 과거의 이야기가 아른거리는 지금에 와서, 생각나는 주제는 하나 뿐이었다.


“전··· 말했듯이, 부모가 없습니다. 아빠는 존재는 했는지도 의문이고, 엄마는 제가 기억해주기도 전에 벌써 돌아가셨어요. 같은 마을 사람들이 산골짜기에 버려진 절 꺼내와 기른게 지금의 저거든요.”



그렇게 난데없이 자신의 과거사를 풀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사라 본인도 이제껏 가슴아픈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이제와 말해보니 속이 시원할 정도로 술술 말해진다. 하기야 아기 때의 일을 그리 깊이 새기는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그게 부모건 말건.


“...어느날 숲에 들어가니, 고목 아래에 다 헤진 족보 하나랑 어린애가 함께 널브러져 있더랍니다. 본디 죽을 게 뻔했는데, 원체 체질이 강골이었으니까요. 절 발견했을 땐 온 사방이 피투성이에, 저랑 늑대가 같이 쓰러져있었답니다. 흥, 그 자그맣던 것이 늑대를 때려잡았다니, 내 이야기지만 내가 더 놀랐다니까요.”


사라는 자기가 들은대로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말했다. 제 친부모가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아저씨를 졸라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녀는 그리 큰 충격을 받지 않았다. 내 친아버지가 어떻게 되었건 지금의 사라에겐 상관 없는 일 아닌가.


“제 어머니도 근처에서 발견되었지만···. 이미 늑대에게 물려버려서 얼마 못가 그대로 명을 달리 하셨대요. 대체 그 때 뭘 하셨길래 어린애 하나를 들고 위험한 산골짜기까지 들어가신건지, 도무지 모를 일이죠 뭐.”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무슨 사연이 있건, 제길, 무슨 상관이야. 결국 내 옆을 지킨 사람이 쥐뿔도 없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데.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기분이 풀리긴 커녕 답답해진다.


그렇지만 사라는 알고있을까. 어머니가 지어줬다는 그녀의 이름도 바로 그 순간에 지어졌음을.


배가 뜯겨 창자가 쏟아지는 고통에도, 점차 눈이 감겨가며 커져오는 죽음의 공포에서, 의식을 잃어가며 마지막으로 내뱉었던 어미로써의 한마디. ‘살아라’.


어머니가 지어주었다는 ‘사라’라는 이름은, 사실 그녀의 옆집 아저씨가 어머니의 유언을 따서 대신 지어줬던 이름이라는 사실을, 사라는 내심 눈치채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


그런데 이런 무거운 분위기에서, 울은 갑자기 의문이 들어 사라에게 물었다. 분명 이전에 제 뿌리를 안다는 듯이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건 대체 무슨 뜻이지?


“그렇다면, 가문 대대로 빨간 머리가 장사라는 말은···”


아하, 그것. 사라는 제 스스로 설명했던 힘의 근원을 떠올렸다. 그런 말도 했었구나. 하지만 그 사실을 안 것도 별다른 건 아닌지라,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제 지식의 출처를 울에게도 일렀다.


“내 근본이 하도 궁금해서, 산골까지 찾아온 책장수한테 물었더니 알려줬습니다. 족보에 쓰인 이름중에 빨간 머리로 알려진 장수가 몇 있다고요.”


그러자 울의 머릿속에 퍼뜩 떠오르는 자 하나가 있었다. 워낙 옛날의 일이라 기억에서도 지워진 것이었다. 그런데 그 말에 이토록 선명히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다니.


“그 이름 중에 혹시...”


설마, 하는 마음에 울은 입을 열었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그녀는 혹시...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곧 다시 입을 닫았다. 말해봤자 소용 없는 짓이다. 설마 그게 사실일리도 없고, 만에 하나 진실이라 한들 그런 우연따위 이제와선 아무 의미도 없다.


사라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잠깐 울을 응시하더니 도로 부지깽이를 들어 불 속을 헤집는다. 그녀도 생각한 것이다. 아무 의미 없는 말이겠거니, 하고.


다시 침묵이 흐른다. 기껏 이어졌던 대화는 그대로 다시 끊겼다. 이상한 일이다. 아까는 그렇게 다급하게 울을 불러세울 정도였는데, 정작 자신의 과거를 다 까고 나니까 다른 사람의 과거는 그리 궁금하지 않다. 그제서야 사라는 아까 느낀 이야기의 빈 구멍이 무엇인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고보니, 정작 중요한 하온의 유년시절은 전혀 듣지 못했다. 산골짜기 오두막에 남겨두었다면서, 어떻게 지금은 다시 되돌아와 아들로써 지낼 수 있지···?


사람을 대하는 하온의 비정상적인 태도도, 두 부자지간의 가까운듯 먼듯 기묘한 거리감도 전혀 설명되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뭔가를 되물어보기엔 이미 듣고 내뱉은 이야기만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아서, 사라는 이만 포기하고 구태여 옛이야기를 들추지 않기로 했다.


울도 옛이야기는 들추지 않기로 한다. 다만 옷을 털고 이번에야말로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갑자기 머리에 박혀 도무지 떠나지 않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울이 리체와 왕궁에 돌아간 날, 그들은 제 형제 메로스와 그를 따르던 자들을 숙청했다.


그 때 마지막까지 주인을 위해 항전하던 무시무시한 장사 한 명이 있었다. 도무지 사람같지 않은 괴력을 지닌 장수. 그 충성심과 귀기는 아직까지도 그의 뇌리에 깊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장사는 제 충성의 댓가를 뼈아프게 치뤄야만 했다.


‘왕위가 바뀔때 일어나는 숙청은 결코 단 하나의 목숨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피의 뿌리까지 찾아내어 모조리 목을 뽑아내야 한다. 숙청 대상이라면 그의 아비건, 아내건, 아이건, 예외없이 삼 대를 지워내야만 후환이 없으니.


그래서 그 장수의 가족도 쫓았지만, 아내와 딸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어···’


다시 생각해보니, 그 자는 빨간 머리.


사라가 말한 그 집안 내력을 다시금 떠올려본다.


‘가문에 붉은 머리를 타고난 자는 모두 괴력을 지니고 태어난다라···’


역시··· 알릴 이유는 없는 것이다.


작가의말

울의 과거편이 드디어 다 풀렸습니다. 이렇게 길어질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다음 화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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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5

  • 작성자
    Lv.46 sj란
    작성일
    21.03.20 13:21
    No. 1

    앗... 사라.... 이게 이렇게 엮이네! 잘 보고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방구석4평
    작성일
    21.03.21 19:49
    No. 2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오늘도 복선 몇개를 회수하고 갑니다. 줍줍.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4 Jy2315
    작성일
    21.03.22 20:40
    No. 3

    잘보고가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방구석4평
    작성일
    21.03.28 04:54
    No. 4

    죄송합니다. 최근 일주일간 휴가였던 탓에 업로드를 못했습니다. 전 거리두기로 밖에도 못나가니 글 좀 써야지 싶어 공지도 올리지 않았었는데, 사람 마음이 참으로 간사해서 막상 나와보니 진탕 빈둥대다가 결국 조금도 업로드를 못했습니다 ㅠㅠㅠ 정말 사과밖에는 드릴 말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4 Jy2315
    작성일
    21.03.28 12:08
    No. 5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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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Episode178_비밀요원의 고요한 잠복(6) +4 21.04.21 49 4 8쪽
177 Episode177_비밀요원의 고요한 잠복(5) +2 21.04.18 45 4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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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Episode174_비밀요원의 고요한 잠복(2) +4 21.04.04 50 4 8쪽
173 Episode173_비밀요원의 고요한 잠복(1) 21.03.31 50 4 8쪽
172 Episode172_짤막한 이야기 +4 21.03.29 58 4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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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Episode168_울이란 인간은 어떻게 살아왔는가(9) +4 21.03.04 87 4 8쪽
167 Episode167_울이란 인간은 어떻게 살아왔는가(8) +2 21.03.01 63 5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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