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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사랑사람의 서재

하늘을 등지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방구석4평
그림/삽화
lovendpeace
작품등록일 :
2019.12.26 00:03
최근연재일 :
2022.08.09 01:45
연재수 :
277 회
조회수 :
27,381
추천수 :
1,600
글자수 :
1,201,430

작성
21.03.12 20:30
조회
54
추천
2
글자
7쪽

Episode170_울이란 인간은 어떻게 살아왔는가(11)

DUMMY

“그대가 놀랄 필요는 하나도 없지. 난 이미 자네의 살 길을 한번 열어준 적이 있어. 자네 형님이란 자가 그대 집에서 칼부림 부릴때, 말을 타고 달려 세번째 길을 택하지 않았더라면 자네는 이미 뼛가루도 안남았을테니까. 그 날부터 이미 자네는 내게 삶을 빚졌어. 이제 갚아야 할 때야.


하지만 자애로운 내가 굳이 선택권을 주는 걸세. 이대로 계속 광인의 치하에서 그의 자객을 피해 벌벌 떨며 살텐가? 아니면···.


모래시계를 뒤집어 볼텐가? 자네는 나라님의 자격을 가진 그 때로 돌아가고, 메로스는 한낱 추한 반역자로 돌아간다. 위 아래를 뒤집어보는걸세.


그 때 자네가 얻을 것? 이 세상 무엇이든지! 권력, 복수, 힘, 안전, 또 뭘 원하나? 인망? 행복? 삶 그 자체? 후후, 일도 아니지. 그대가 내가 바라는 것을 이루게 해준다면, 자네가 상상하고 선망하는 것이 무엇이든 내가 그 배 이상을 가져다줄 수 있어!”


대신 그대가 잃을 것은 단 하나에 불과해. 나는 그것 하나를 가지는 것으로 족하네.”



울이 할 수 있는 대답은 당연히, 하나밖에 없었다.



***



울은 처음에 리체가 당연히 미친줄로만 알았다. 그게 아니라면 필시 울을 죽이려고 작정한 것이다.


이딴 편지를 보내라고 시키다니, 머리가 돌아도 단단히 돌아버린게 틀림없다.


리체가 천연덕스럽게 받아적으라며 줄줄 읊은 그 내용이란 그야말로 날 죽이시오 하고 목을 내미는듯한 글귀인데, 이것을 그의 형 메로스에게 전달하겠다니. 당연히 정신이 나갔다고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정작 이를 시키고있는 배후는 아주 자신만만하다. 무슨 함정을 파놨는지는 몰라도 정상인의 시각으로는 보나마나 실패할 것이 뻔한데 말이다.


와중에 행여나 의심하진 않을지, 이전의 글씨체와 동일한지, 문체와 어투가 적절한지를 느긋이 따지고 있는 리체의 모습을 보자면 울 본인도 돌아버릴 것 같다.


그렇게 완성된 편지는 아주 조심스레 다뤄졌다. 그 누구도 내용을 알 수 없도록 잘 봉해둔 뒤, 여기저기를 떠돌며 약 반 년간을 인간들의 파도에 흘려보냈다.


이 사람 저 사람, 많은 도착지와 출발지를 건너며 편지는 크게 돌아 어느새 황궁 앞까지 전해진다. 물론 그 모든 과정은 어느 한 사람의 체스판 위에서 미리 계획된 바이다.


마지막에는 미리 입을 맞춰둔 최고대신 주노가 직접 편지를 받아, 검문을 피하고 그 내용을 비밀리에 부친 채 메로스 개인에게 몰래 전달했다. 마치 선심을 쓰듯.


그렇게 거추장스럽고도 은밀히 전해진 편지의 내용이란 이러했다.



***



형님. 아직 제 얼굴을 기억하십니까. 제 글씨, 제 말투를 기억하십니까.


한때 형님의 밑에서 세상 흘러가는 것도 알지 못하고 놀기만 했던, 그렇게 갑작스런 피바람에 휩쓸려버렸던 울이 이제서 뻔뻔하게도 편지를 써올립니다.


때는 여기까지 이르러 벼랑 끝에 몰린 우리들이지만, 그럼에도 이 아우에게 조금의 정이라도 남아계시다면 부디 이 글을 눈에 담아주십시오.


그렇습니다. 무수한 칼 든 수색꾼을 이리저리 보내도 이제껏 저의 살조각 하나 찾을 수 없었던 것은 이 동생이 비천하게도 목숨을 부지한 탓입니다.


허나 어떻게든 다시금 살아보려 했어도, 저는 무엇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산 속에서 칡뿌리만 캐먹고 흙묻은 쓰레기를 주워먹으며 피를 토하고 모래를 씹으며 치욕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저는 이미 죽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라도 어떻게든 그 때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악착같이 목을 부지하던 제 앞에 인간을 사냥하는 자의 칼이 번쩍이고 지나가자, 저는 문득 영원히 이 지옥을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아 버렸습니다.


수심이 가득합니다. 이전에 공원에서 했던 약속이 물거품이 되어버렸습니다.


더 이상 숨을 수 없음을 알며, 어쩔 수 없이 피붙이를 죽여야만 했던 형님의 아픔도 압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제 목숨을 내려놓고자 합니다. 이 지옥같은 땅 위를 벗어나 차라리 지하의 무간지옥에서 영원한 안식을 맞고자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바램이 있다면, 그저 마지막 남은 혈육인 형님과, 한번만 얼굴을 뵐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마음껏 원망하고 마음껏 슬퍼하고 마음껏 울고 싶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자리에서 죽어도 좋습니다. 그럴 수 없다면 자객만 보내 제 목만을 취하셔도 좋습니다. 그저 당신이 이 아우의 목숨을 앗아서, 오래 전 피바람의 끝을 깔끔히 낼 수만 있다면 족합니다.



왕궁으로부터 동쪽의 바털 구역 외길, 그곳의 풍차 아래서, 저는 그저 하염없이 기다리겠습니다.



***



놀랍게도 그는 정말 울을 만나러 직접 말을 몰고왔다. 심지어 부하를 데려갔다간 울에 대한 즉결처형을 피할 수 없다는 이유로, 최소한의 호위만을 데리고 무방비하게 성을 빠져나갔다.


그가 어째서 그런 미친 짓을 강행했는지 울은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날이 밝아온다. 메로스는 제 탓에 너무 오래토록 헤어졌던 동생과의 재회를 고대하며, 허겁지겁 들뜬 마음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신나게 말에 박차를 가하며 가는 길을 재촉했다.


드넓은 평야 위 외길. 울은 기다리고 있었다. 리체가 미리 준비해둔 이들과 함께. 그리고 약속장소인 풍차 앞에서, 두 형제는 드디어 얼굴을 맞댈 수 있었다.


그 날, 삼일천하 나라님이자 작은 형님이 자신에게 처음으로 지었던 표정을 울은 평생이 지나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질질 짜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며 다가오다가, 동생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또 흉하게 웃어대며 반겼다. 그리고 또 울었다. 저 혼자 아주 울고불고 난리를 떨어댔다.


정작 울고싶은건 울 본인이었는데 말이다.



곧 풍차 안에 숨어있던 리체의 부하들이 무수한 화살과 창 세례를 퍼부어댔고, 온 땅 위의 군주는 수백개의 구멍이 뚫려서 형체조차 알 수 없는 살조각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그 참혹한 시체 앞에는 그것을 내려다보는 울이 있었다. 문득 떠오르는 말이 있어, 무심코 입으로 읊어본다.


“명심해라. 반드시 살아남아라. 이건 우리 형제간의 맹세다···.”


...맹세 따위를 믿다니, 멍청한 인간.


작가의말

다음 화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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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 Episode187_잠시만 평화롭게(1) +2 21.05.25 47 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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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Episode185_비밀요원의 고요한 잠복(13) +2 21.05.19 47 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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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Episode182_비밀요원의 고요한 잠복(10) +4 21.05.05 44 3 8쪽
181 Episode181_비밀요원의 고요한 잠복(9) 21.05.03 36 4 12쪽
180 Episode180_비밀요원의 고요한 잠복(8) +2 21.04.30 59 4 9쪽
179 Episode179_비밀요원의 고요한 잠복(7) +2 21.04.26 60 4 7쪽
178 Episode178_비밀요원의 고요한 잠복(6) +4 21.04.21 48 4 8쪽
177 Episode177_비밀요원의 고요한 잠복(5) +2 21.04.18 45 4 10쪽
176 Episode176_비밀요원의 고요한 잠복(4) +2 21.04.12 57 2 10쪽
175 Episode175_비밀요원의 고요한 잠복(3) +2 21.04.07 59 3 8쪽
174 Episode174_비밀요원의 고요한 잠복(2) +4 21.04.04 49 4 8쪽
173 Episode173_비밀요원의 고요한 잠복(1) 21.03.31 50 4 8쪽
172 Episode172_짤막한 이야기 +4 21.03.29 58 4 10쪽
171 Episode171_울이란 인간은 어떻게 살아왔는가(12) +5 21.03.19 61 2 11쪽
» Episode170_울이란 인간은 어떻게 살아왔는가(11) +4 21.03.12 55 2 7쪽
169 Episode169_울이란 인간은 어떻게 살아왔는가(10) +2 21.03.08 38 3 8쪽
168 Episode168_울이란 인간은 어떻게 살아왔는가(9) +4 21.03.04 87 4 8쪽
167 Episode167_울이란 인간은 어떻게 살아왔는가(8) +2 21.03.01 62 5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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