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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사랑사람의 서재

하늘을 등지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방구석4평
그림/삽화
lovendpeace
작품등록일 :
2019.12.26 00:03
최근연재일 :
2022.08.09 01:45
연재수 :
277 회
조회수 :
27,384
추천수 :
1,600
글자수 :
1,201,430

작성
21.03.01 20:28
조회
62
추천
5
글자
9쪽

Episode167_울이란 인간은 어떻게 살아왔는가(8)

DUMMY

그건 정말 운명적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다. 물론 인간지사가 모두 실로 얽히고 얽힌 필연들 뿐이라지만, 그 날의 만남이란. 그 사람과의 만남이란.


어떻게 흘러흘러 들어간걸까? 외진 시골마을에 도달한 울은 그 날도 거지꼴로 도로를 거닐며 먹을 것을 훔쳤다. 물론 여전히 완벽치는 못한 솜씨였으나, 이전에는 어린 아이를 보여주며 사정사정을 하면 약간의 매타작 정도로 죗값을 치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필 어지간히 성질이 더러운 이를 건드렸던 탓에 이번에는 정말 죽을 노릇이다. 가뜩이나 최근들어 더욱 쇠약해진 몸인데 이토록 세게 걷어차이고 얻어맞으면, 이번엔 정말 목숨이 위험했다. 아니, 분명 죽어버릴 것이다.


그럼에도 눈 하나 깜짝 안하는 이 비정한 인간. 아무리 죄를 지었다지만 그것이 죽어도 된다는 뜻은 아닐진데. 울은 눈물조차 다 말라서 어지러운 뇌로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매타작이 멈추었다. 그리고 주위가 고요해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움직이지도 않는 목덜미를 간신히 꺾어 앞을 보았다.


앞에서 몽둥이를 가로막아준 사람이 하나 있었다. 수염 성성하고 주름이 깊은 노인이다. 언뜻 가냘퍼보여도 무언가 가득 차있어서 쓰러질것 같지는 않은 신비한 인상을 지닌 자다.


놀랍게도 그의 제지 하나에 이 성질 더러운 자는 도둑에 대한 자신의 화를 거둬주었고, 노인은 쓰러진 가여운 절도범을 부축해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그를 본 이들은 모두 발을 옮겨 길을 열어주었다. 이 노인은 마을 안에서 꽤나 유명인사였던 것이다. 울이 그 독특한 명성과 별명을 안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곧 울이 노인의 오두막에서 깨어났을 때, 그의 옆에는 각종 과일과 채소를 넣은 수프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정신없이 이것을 먹던 도중 정신이 번쩍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은 숲 안이었다.


노인이 사는 곳은 마을 뒷산 깊숙히에 외로이 있는 오두막이다. 그는 은둔자였던 것이다.


마저 허겁지겁 접시를 비우고 나자 그제서야 또 떠오르는 게 있었다. 하온의 존재였다. 자신의 골칫덩이 아들을 찾기 위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제길, 온통 맞은 탓에 천근만근이다.


하온은 아주 가까이에서 다른 노인의 품 속에 있었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할머니에게 꼬옥 안긴 채 하온은 세상 모른채 곤히 자고있다.


“당신의 아들인가요? 아이가 참 귀여워요.”


침대에 앉은 채 이 노부인은 아주 인자한 말투로 말을 건넨다. 울은 불신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보면서도 스리슬쩍 고개를 끄덕인다.


곧 오두막에 아까의 그 노인이 다시 도착했다. 노인 역시 선량한 눈빛으로 울을 진정시키더니 제 집처럼 편히 있으라는 말과 함께 그의 거주를 허락해주었다.


이 수상쩍은 청년에게 무엇도 따지지 않고, 무엇도 묻지 않았다. 울은 그곳에서 아주 짧은 기간을 머무르게 된다.


지켜본 노인의 삶은 괴이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늘 풀과 벌레가 없는 곳만을 용케 골라 밟고다녔고, 뭘 먹고는 사는건지도 확실치 않았다. 울에게 가져다주는 음식들도 죄다 이미 떨어진 과일이나 늙어 죽은 동물들 뿐. 무슨 도를 닦는 사람도 아니고 말이다.


함께하는 노부인도 마찬가지였다. 병이 있는지는 몰라도 침대 위나 소파에서 나오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범상찮은 존재감을 내비쳤으며 오두막의 분위기를 밝게 띄워주는 자애가 있었다.


그들은 항상 인자한 미소로 울을 대했다. 더 의심하는 본인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울은 그들은 믿을 수 있을 것이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이곳에 머물러도 되는게 아닐까.


하지만 밤이 되면 찾아오는 두려운 망상. 그리고 악몽. 울은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누군가 저 허름한 문을 걷어차고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잠을 설쳤다.


그렇게 혼탁한 머리를 감싸쥐고 있는동안, 하온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품 속에서 기뻐하며 매일을 보냈다.


결국 행복해하는 것은 하온 뿐이었다. 반쯤 정신이 나가고 나니, 이제 울은 하온이 미웠다. 가증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무엇도 모르고 혼자서 실실 웃고있다. 자신은 그를 위해 오만 고생을 다했는데 이제 배가 부르니 나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아이는 정말··· 행복해보인다. 그래, 자신이 억지로 아이를 이끌때보다 더 기뻐보인다···.


일주일이 더 지났다. 울은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설령 이곳이 그가 머무를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해도, 계속 한 공간에서 정체되어있는 것 자체가 그를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무언가가 뒤쫓아올게 틀림없어. 그럼 쉴새없이 움직이지 않으면 안된다. 울은 다급히 짐을 쌌다. 노부부가 자신을 위해 저장해둔 음식들을 억지로 주머니에 쑤셔넣은 뒤, 깜깜한 밤을 틈타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끼긱대는 장판을 밟고 지나다 문득 하온의 얼굴을 보았다. 노부부 사이에 곤히 잠든 하온은 평온해보인다.


그래서 울은 그를 그냥 내버려두었다.


버리고 떠났다.


밤은 깊었고, 해가 뜨기 전에 울은 오두막으로부터 멀리 떠나 몸을 감추었다.



***



몇시간이 지났을까. 울은 한순간도 발을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이 어둠을 헤치는 것이 좋았다. 무엇도 보이지 않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공포도 휩쓸려가는 것 같다.


아아, 하지만 저기 저편을 보라. 점차 밝아오는, 푸르게 누르게 물들어가는 하늘. 해가 뜨려고 한다.


빛이 세상을 덮는다. 시야가 다시 돌아오며 그의 정신을 되돌려놓는다. 망각되었던 심장박동도 다시 느껴지며 울의 다리에 힘이 풀린다.


힘이 풀린 그곳은 자그마한 연못가. 엎드린 채 가쁜 숨을 헥헥 몰아쉬던 울은, 눈 앞의 물을 보자마자 갈증이 느껴져 다급히 그리로 기어갔다.


손으로 물을 뜨며 마치 개처럼 할짝, 벌컥대던 울. 그런데 아침놀의 빛이 다다르자 문득 시야에 들어오는 게 있어, 울은 퍼뜩 행동을 멈추고 시선을 그 앞에 고정한다.


수면을 들여다보자, 마구 일렁이던 상이 점차 잔잔해지며 일그러진 그림자를 하나 반사했다. 하지만 수면의 떨림이 멈춘 후에도 그 그림자는 여전히 일그러져있다.


사람의 얼굴이다. 아주 추하고 괴이한. 아주 늙고 추레한 얼굴. 정확히는 아마,


그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아니, 이것이 나의 얼굴인가?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나 자신도 알아볼 수가 없다. 이것이 나인가?...


주머니 안에 조심스레 쑤셔넣은 종이 한장을 꺼낸다. 다름아닌 본인의 초상이 그려진 수배서이지만, 오늘따라 낮설어보이는 그것. 울은 그려진 초상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다시 수면을 쳐다본다. 그리고 곧 헛웃음이 난다. 실소를 터트리고 황망하게 눈 앞을 떠도는 먼지를 바라본다.


내가 정말 울이 맞는가? 황실 아래 곱고 흰 비단옷을 입고, 사랑하던 이와 손을 맞잡던 그 울이 맞나? 행복하게 웃던 그 남자가 맞는가?


이제껏 그 누구도 울을 잡아가지 않았다. 누구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이런 추하고 쪼그라든 면상은 전혀 울처럼 보이지 않는다. 천대받다 못해 무시당하는, 그런 끔찍한 얼굴이 수면에 일렁이며 비치고 있었다.


그래, 내가 아니다. 여기 비치는 이 얼굴, 나는 이제 더이상 울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가 없다. 나는 내가 아니다. 백번을 다시봐도 이것이 나라고 긍정할 수가 없다.


그것은 바로 이 수배서···! 이것에 그려진 그 얼굴, 매끈하고 깔끔한 저 허여멀건한 그림쪼가리가 이제 자신보다도 더욱 자신다웠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리며 꺽꺽댄 채, 울은 제 얼굴을 감싸쥐었다. 깊게 패인 주름과 흠집이 손바닥에 쓸린다.


무엇이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무엇때문에 자신이 이런 꼴이 되어, 죽기만도 못한 비참한 삶을 꾸역꾸역 연명하고 있는가? 울은 드디어 느끼고야 말았다.


이제 수배서에 그려진 자신의 태평한 얼굴이 너무나 밉다. 그는 이제 모든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무엇이 나를 추락시켰는지. 그 이전에 무엇이 나를 하늘 위에 올려놓은 채, 구름으로 발밑을 가려 안심토록 했는지.


그랬다. 울은 이제 자신이 그토록 비웃고 부정했던 권력이란 것에 깊디깊은 선망을 품게 된 것이다.


너무나 뒤늦게··· 너무나 서럽게···.


울은 그렇게 물가에 엎어져, 강물보다 더 세찬 눈물로 자신의 얼굴을 적셨다.


작가의말

다음 화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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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Episode169_울이란 인간은 어떻게 살아왔는가(10) +2 21.03.08 38 3 8쪽
168 Episode168_울이란 인간은 어떻게 살아왔는가(9) +4 21.03.04 87 4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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