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화점 주인이 되다
쿠르르르릉
'빌어먹을'
단우의 주위엔 이미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
그의 앞에 서있는 푸른 옷의 작은 아이가 가볍게 손짓 할때마다 율도국의 병사들은 낙엽처럼 스러져 갔다.
'거구귀가 왜 여기에...'
"신숙주를 모시고 있다고 들었네만...."
일찍이 과거를 치르러 가던 신숙주를 만난 거구귀가 그의 인물됨에 반해 그를 지키며 살아온 것은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의 삶은 얼마 남지 않았다]
일순 그의 눈가에 쓸쓸함이 맴돌았다.
"자신이 떠난다고 악귀로 돌변하는 것이 그가 바라는 것은 아닐텐데.."
[숙주는 율도가 장차 조선에 큰 위협이 될거라 믿고있지]
흠칫
거구귀가 그저 악귀로 변해 사람을 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율도에 명백한 적의를 가지고 찾아왔다는 점에 단우는 당황했다.
"율도는 작은 나라일세. 그저 조선에서 힘 없고 차별받던 사람들이 모여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갈 뿐인 욕심없는 나라지"
[차별없는 세상에 백성들이 모인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자네는 알지 못한다. 애초에 이해시킬 생각은 없었다.]
아이가 더이상 대화를 나눌 가치가 없다는 듯 말을 마치며 단우를 노려보자 그가 서있던 땅이 날카롭게 솟아 오르며 그를 덮쳤다.
구구구궁
휘릭
몸을 날려 겨우 일격을 피해 보았지만 그를 향해 솟아오르는 바닥은 한곳이 아니었다
구구구구궁
"제길"
쉬이이익 콰과과강
단우가 더 이상 솟아오르는 기둥들을 완전히 피할수 없어 한쪽 어깨정도는 내주겠다는 생각으로 몸을 앞으로 던졌을 때 뒤쪽에서 커다란 도끼가 날아와 단우의 어꺠를 찌르려던 기둥을 베어냈다.
"성님!"
"형님!"
"도철! 현제!"
"꼬라지가 그게 뭐시당가요. 데굴데굴 잘도 굴러댕기는것이 굼벵이가 성님하겄소"
덥수룩한 수염이 얼굴을 뒤덮은 기골장대한 사내가 어울리지 않게 촐싹대며 단우의 곁으로 다가왔다. 어릴적부터 단우를 가장 많이 따르던 의제 도철이었다.
"장난칠 시간이 없다. 너희는 이길로 빠져나가 길동형님을 지켜라."
"누가 누구를 지킨단 말입니까. 전하께서 누구에게 보호받을 분은 아니시지요."
가끔은 누가 형인지 모를 정도로 의젓한 모습으로 그를 도와주던 둘째 현제도 함께였다. 남들이 아는 것과는 다르게 도라이 기질이 다분하긴 했지만 그건 단우와 도철에게만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말좀 들어라 이것들아. 여기 있어봐야 다같이 개죽음을 당할 뿐이야."
"그렇게 전하가 걱정되불믄 성님이 가서 좀 챙기쇼. 나는 여서 둘째성님이랑 이 작것하고 한바탕 놀고 있을라요."
되지도 않을 말로 동생들을 타일러 이곳에서 내보내고 싶었지만 애당초 들어먹을 놈들은 아니었다.
"후우........ 미련한 놈들 같으니"
화륵
"그래 그렇게도 죽고 싶으면 어디 한번 해보자. 거구귀를 봉인하겠다. 시간을 벌어라. 우리는 오늘 여기서 죽는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듯한 단우의 손끝에 작을 불꽃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허허허허허 이제야 좀 성님 답소. 으랏차. 어이 거기!"
이제서야 함께할 결심을 내린 단우가 마음에 들었는지 도철은 크게 웃으며 거구귀를 도발하며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내 율도삼호걸 중 막내 차촌의 도철이요. 듣던 것보다 아가리가 작아보이는디 내가 도끼로 이름에 걸맞게 찢어 줄라니까 너무 고마워하덜 맙소."
"으랏차차차차"
거구귀가 날아오는 도철을 향해 손짓하자 동굴 벽들이 도철을 향해 날아들었지만 도철은 개의치 않고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콰광
도철의 도끼가 굉음을 내며 거구귀를 덮쳤을 때 단우의 옆을 지키던 현제도 행동을 시작했다.
"그저 형님을 따라다녔을 뿐인데 팔자에도 없는 대사마 자리까지 지내봤습니다. 어디서 실족이나 하여 아무도 모르게 쓸쓸히 죽는다 해도 원망할 것 없는 인생이었는데 형님 곁에서 율도를 지키다 죽을 기회까지 얻었으니 이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있겠습니까. 그동안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쉬이이익 콰과광
율도국 최고의 검사답게 빠르게 도약한 현제가 잘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거구귀를 향해 서슬퍼런 검기을 날렸지만 거구귀는 한손으로 도철의 도끼를 가볍게 처내면서도 현제의 검을 어렵지 않게 막아냈다.
거구귀의 작은 손짓마다 현제와 도철의 몸에는 크고작은 상처들이 뒤덮여 이미 그들이 입고 있던 옷은 피로 물들어 본래의 색이 무엇이었는지 모를정도로 붉어졌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거구귀가 단우를 공격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계속해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우우우우우우웅
그러는 사이 단우의 손끝의 작은 불꽃을 향해 모여든 거대한 기운은 완전히 갈무리되어 끝내 주먹만한 금색 구슬의 형태를 이루었다.
"거구귀!!!!!!!"
단우의 손끝에 모인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거구귀가 그를 향해 몸을 날리려 했지만 도철이 다시금 도끼를 휘둘러 그를 밀쳐냈다.
'도철.....'
이제는 서있기도 힘들정도로 다리가 후들거리는 도철을 보며 분한 마음에 눈물이 차올랐지만 단우의 역할은 울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낙서류 후천팔괘 택수곤의 술'
"율도엔 한 발짝도 들이게 하지 않겠다."
"봉인!!!"
평소에도 요괴들을 퇴치할 때 자주 사용해오던 도술이었지만 이번엔 그 크기와 위력이 기존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단우에게 이 기술을 가르쳐준 길동도 이정도로 강력한 봉인술을 보인적은 없었다.
단우는 이 술법이 거구귀를 봉인 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본인과 동생들 또한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음을 알고 있었다.
"어디 같이 죽어보자 이 개자식아~~~"
단우의 손끝을 떠난 노란 구슬은 주변의 풀이며 돌, 형제들을 괴롭히던 바닥과 벽들까지 모든것들을 닥치는 대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
술법이 조금이라도 더 파괴력을 가질 수 있도록 버텨보려 했지만 이미 구슬의 마력은 인간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도철을 시작으로 현제, 단우와 더불어 거구귀까지 금색구슬에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쉬이이이익
툭.
주변의 모든것을 빨아들이고 나서야 구슬이 바닥에 떨어졌다. 세상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 처럼 고요했다.
지지지직
"으아아아아아악"
단우는 날아오는 전류를 맞으며 고통스럽게 잠에서 깨어났다.
"23번 교육생 집중하세요."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그래"
발끈해서는 말대꾸를 해봤지만 괜한 짓이었다.
"그럼 질문에 답해 보시죠. 일반 NPC와 파견 NPC의 차이는 어떤 것들이 있다고 했죠?"
"음...."
애초에 수업이라곤 귓등으로도 들은적이 없는 단우는 아무말이나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건.... 그러니까..... 일반적이냐... 일반적이지 않느냐의 차이지"
지지지직
"으아악 알았어 알았다고!!!"
"이번 교육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23번은 엔피시의 분류에 대해 정리해서 내일까지 제출하도록 하세요"
교육담당 교관 레나가 교실을 나가고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좀 차린 단우가 투덜대기 시작했다.
"도대체 내가 왜... 왜 저런 마귀같은 여자한테 얻어맞아야 하는거지?"
"형님 이제 그만 좀 하셔유. 일단은 저 마귀가 시키는데로 하자고요"
도철은 단우의 행동이 지겹다는 듯이 말했다.
"니들이 그러고도 활빈당이야? 길동형님이 아시면 너희들 볼기짝이 남아나질 않을거다."
"어쩌것슈 방법이 없는디. 형님 도술이라도 쪼까 되불문야 어찌 해볼랑가 몰라도 형님 지금 암것도 못하잖슈"
실제로 정신을 차리고 웬 이상한 건물에서 깨어났을 때 온갖 도술을 시도해 봤지만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철의 말을 인정하기에는 단우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못해? 내가 뭘 못해"
"귀엽구만이라 형님이 도술없이 나랑 한판 되것슈?"
"오 그래. 어디 한번 붙어보자. 내가 도술 없이도 네 놈 정도는 한손으로 상대 할 수 있어"
당장이라도 한판 붙어 보겠다는 듯이 촐싹거리는 도철의 등 뒤로 현제가 나타났다.
딱
"그만하거라 단우 형님이 오죽 답답하면 이러시겠느냐"
하지만 도철은 이대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그는 쥐어박힌 부위를 문지르면서도 하고싶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긍게퍼뜩 잡화점 일이라도 배워서 파견 나가자니께유"
"뭐? 내가 차촌에서 요괴 퇴치로는 따라올자가 없던 단우야. 천재도사란 수식어가 괜히 붙은줄 알아? 니들은 교관이랍시고 고상하게 제자나 가르치는데 나는 왜 잡화점 주인을 해야 돼. 나도 니들처럼 교관으로 갈거야. 아니면 안가"
"아니 성님이 도술을 못 부리는디 그럼 우짠다요. 근다고 형님이 활을 잘 쏠 줄 아요. 검술을 둘째형님보다 잘하기를 허요."
하나같이 맞는 말만 내뱉는 도철의 한마디 한마디가 단우의 자존심을 콕콕 찔러댔다.
"아니 저 자식이 진짜 뭘 잘못처먹엇나. 안해 안한다고~~~~~~"
생 떼를 부리는 단우였지만 현제는 단우를 다루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하는 수 없죠 그럼 뭐. 교관 자리 얻으실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근데 그거 아십니까? 내일부터는 레나가 직업교육도 참관한다더군요."
한달 뒤
끼이이이익 딸랑
"어서오십쇼. 포션이면 포션 양피지면 양피지 없는것이 없는 쿠란 마을 최고의 잡화점 단우상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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