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든빌 마을-9
퍽 퍽 퍽
“왜 빠져나가지 않았어요. 위험하게”
“단우 씨 피가...”
단우는 단검을 꺼내 벨라의 팔다리를 묶고 있는 밧줄을 잘라내었다. 오크들은 단우가 나타난 뒤로도 계속해서 돌을 던저 댔지만 단우는 벨라에게 날아오는 돌들을 피해내지 않았다.
줄어드는 생명력보다 조금씩 흐르기 시작한 피가 그를 더 귀찮게 했다.
“지금부터 잡화점 방향으로 빠져나갈 거에요. 계획대로라면 그쪽엔 오크들이 없을 테니 상황을 봐서 빠르게 마을을 빠져나가요. 일어날 수 있겠어요?”
끄덕
벨라는 단우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잡화점 방향에는 몇 명의 오크가 쓰러져 있었다. 아마 단우가 벨라를 향해 오면서 쓰러뜨려 놓은 것 같았다.
“제가 신호하면 잡화점 방향으로 달리는 거에요.”
단우는 벨라가 어느정도 정신을 차린 것을 확인하고는 지체하지 않고 수를 세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상황은 안 좋아 질 것이 뻔했다.
자신의 수많은 경험상 이럴 때 정확한 계획을 세우기 위해 시간을 끄는 것 보다는 일 초라도 빠르게 몸을 움직이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셋··· 둘··· 하나... 지금!”
벨라는 단우의 신호에 맞춰 그대로 잡화점 방향을 향해 달렸다. 혼란스럽고 무서웠지만 자신이 정신이라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괜히 단우에게 짐만 될 뿐이었다.
하지만 잡화점에 거의 도착할 때쯤 벨라는 이상함을 느꼈다. 아무리 뛰어봐도 단우가 따라오질 않았다. 그의 속도라면 그녀보다 앞서나가는 것이 당연했다.
챙 챙 챙
단우는 신호와 함께 벨라가 뛰어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글레이브를 꺼내들어 날아오는 돌을 처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큰 돌덩이가 날아오기도 했지만 이제 벨라가 맞을 위험이 없었기 때문에 가볍게 피해내면 그만이었다.
단우는 처음부터 벨라와 함께 달릴 생각이 없었다. 그는 벨라가 마을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오크들의 이목을 끌어야 했다.
“먼저 가고 있어요. 금방 따라갈게요”
“마녀가 도망친다. 마녀 잡아야 한다.”
오크들은 갑자기 나타난 단우가 벨라의 밧줄을 풀어주자 급하게 벨라를 쫓으려 했지만 단우는 오크들을 보낼 생각이 없었다.
“인간 비켜라. 왜 마녀를 돕는 거냐. 마녀 죽여야한다.”
“저 여자는 마녀가 아니야. 그냥 살고 싶어서 허세 한 번 부려본 것 뿐이지”
“믿을 수 없다. 마녀 확인해 봐야한다. 비키지 않겠다면 쓰러뜨리고 가는 수 밖에”
마지막 말을 끝으로 자신들의 무기를 주어들기 시작한 오크들을 상대하기 위해 단우는 조금씩 잡화점 방향으로 뒷걸음질 쳤다. 상대가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가진지는 알수 없지만 이런 넓은 공간에서 상대할 만한 수가 아니었다.
최소한 등 뒤 정도는 안전하게 확보 할 수 있어야 했다. 지금 단우가 등을 보일 수 있는 공간은 잡화점 방향 뿐이었다.
“단우 씨···”
벨라는 먼저 가라는 단우의 말을 곧바로 따랐다. 그녀는 도움이 되겠다며 단우를 따라 자리에 남을 정도로 생각없는 여자가 아니었다. 단우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건 어떻게든 자신이 오크들에게서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자신만 없다면 오히려 단우가 상황을 헤쳐나갈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그들의 계획은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틀어지기 시작했다.
“인간? 인간 찾았다. 칼리그가 인간 데려오라고 했다.”
갑작스레 벨라와 맞닥뜨린 것은 순찰 중인 오크들이었다. 벨라가 마을중앙에서 성으로 향하던 도중 이미 붙잡혀 끌려가고 있었지만 이 사실은 바로 마을 전체로 퍼지지는 못했다.
워낙 중구난방으로 수색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오크들도 서로가 서로에게 제대로된 정보를 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아직 성 반대편을 수색중이던 오크들은 여전히 인간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물론 단우의 계획대로라면 벨라가 가는 방향은 크랄트에 의해 순찰조가 없는 곳이여야 했지만 이미 크랄트는 단우가 말해준 것과는 전혀 다른 둥근 굴뚝들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젠장···”
벨라는 급하게 활을 꺼내보려 했지만 등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당황한 까닭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녀의 활은 오크들에게 붙잡히는 순간 이미 빼앗겼었다.
벨라는 눈앞의 오크들이 단우쪽으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인간을 발견했다는 소리에 잡화점 방향을 수색중이던 오크들이 점점 늘어나는 바람에 다른 방향으로 도망칠 수도 없었다.
벨라는 다시 단우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오크들이 모이는 것을 막을 수 없다면 적어도 빨리 이 사실을 알려야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다시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벨라 씨! 왜 다시··· 크랄트 이 멍청한 오크가”
단우는 겨우 잡화점 방향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돌아온 벨라에 놀라 그녀에게 돌아온 이유를 물으려 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벨라가 나온 골목에서 오크들이 따라나왔기 때문이었다. 단우는 상황을 보지 못했지만 크랄트가 길을 잃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쪽엔 몇 명이나 되죠?”
“확인한건 8명이에요”
단우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이렇게 된 이상 아무런 피해없이 마을을 빠져나가는 것은 어려워졌다. 이제는 완전한 계획보다는 어느정도 도박을 하는 수 밖에 없었다.
오크들의 수가 많기는 했지만 그 한 명 한 명이 단우보다 강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오크들이 던진 수많은 돌멩이에 이미 살아남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
“무조건 도망가는게 최우선 목표라는 것만 기억해요”
단우는 대치중이던 오크들은 버려두고 벨라를 쫓아온 오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단우는 자신을 막아서는 오크를 단 번에 쓰러뜨릴 생각으로 글레이브를 휘둘렀다. 사실 지금까지 단우는 오크들을 죽이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린든빌에 온 목적이 칼리그와의 대화였기 때문이었다. 오크들을 죽여버리는 순간 칼리그와 정상적으로 대화가 될리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목적에 매달릴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살아서 마을을 빠져나가야 했다.
쾅
“으윽”
“막았어?”
단우는 글레이브가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충돌음과 함께 막혀버린 것에 적잖이 당황했다. 달려드는 힘 그대로 휘두른 글레이브였다.
지금까지 단우가 상대했던 일반적인 오크들이라면 한방에 죽지 않을지언정 그의 창을 막아내는 적은 없었다. 밤바그 조차도 레벨차이로 타격을 입지 않았을 뿐 단우의 창을 제대로 막지 못했다.
단우는 첫 일격부터 자신의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눈쌀을 찌푸리며 오크의 얼굴을 확인했다. 놀랍게도 자신의 공격을 막아낸 오크는 단우의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크윽··· 조심해라. 인간 굉장히 강하다.”
“브룰. 괜찮냐. 너 엄청 밀려났다 지금”
단우의 창을 막아낸 것은 성에서 단우의 은신술을 꽤 먼거리에서부터 알아차렸던 브룰이었다. 그도 단우의 창을 막아내는 것이 쉬운일은 아니었는지 단우의 힘에 밀려 꽤나 많이 뒷걸음질 쳤지만 그래도 별다른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뛰어요!”
단우는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다시 브룰에게 달려들었다. 브룰이 자신의 창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버티지 못하고 물러나는 바람에 그들이 막고있던 골목에 틈새가 생겼다. 단우는 그틈을 놓치지 않고 브룰을 다시 한 번 밀어붙였다.
마을 중심부의 훨씬 많은 오크들이 골목으로 들어오기 전에 벨라를 빠져나가게 해야했다. 오히려 벨라를 발견하고 주변의 오크들이 모여들었을 테니 이곳만 벗어나면 마을 바깥까지는 충분히 도망칠 수 있을것이다.
“멈추지 말고 계속 뛰어서 마을을 빠져나가요.”
단우는 자신의 말을 듣고 브룰이 밀려난 곳을 통해 빠져나가고 있는 벨라에게 다시 한 번 마을을 빠져나갈 것을 당부하고는 브룰에게 쉴 틈을 주지않고 글레이브를 휘둘렀다.
브룰의 뒤에 있던 오크들이 그를 돕기 위해 자신을 공격해대는 탓에 크고작은 상처들이 생기고 있었지만 이미 단우는 아무런 탈 없이 상황을 벗어나는 건 포기한 상태였다.
벨라가 조금만 더 멀리 간 뒤에는 자신도 오크들에게 몇번 베이는 것 정도는 감안하고 등을 돌려 마을을 벗어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단우가 정신없이 브룰을 몰아치고 있는 사이 린든빌에는 또다른 존재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아우우우울~!”
“미쳐버리겠네 정말”
단우는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식은 땀이 흘렀다. 이미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상황은 이보다 더 깊은 바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단우는 이 소리를 알고 있었다. 늑대의 울음소리였다.
“아우우우울~”
단우가 소리를 들려오는 방향을 쫓아 고개를 돌려봤지만 소리는 한군데서만 들려오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단우를 중심으로 주변 지붕들에 늑대들이 나타나 있었다. 단우는 아카데미에서 오크들의 상위급 전사에 속하는 오크라이더들이 늑대들을 부린다는 것을 떠올렸다.
단우는 린든빌에 와서 처음으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오크들이라면 몰라도 늑대들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단우는 늑대의 소리를 듣자마자 결정을 해야했다. 원래 생각대로 마을을 빠져나가는 데 집중할 것인지 어떻게든 자리를 옮겨가며 오크들을 상대할 것인지.
둘 중 어느쪽이던 말도 안되는 난이도의 일이었지만 그 어려운 걸 해내는 것 밖에 살아날 방법이 없었다.
“휴우··· 하는 수 없나. 끝까지 가보자고. 내가 사실 천재라고 불리던 사람이거든”
단우는 브룰을 향해 몰아치던 공격을 멈추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이러나 저러나 힘든 일이라면 자신이 오크들을 전부 상대하는 쪽이 벨라가 살아나갈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그러려면 자신의 위치를 옮겨야 했다.
브룰을 상대하는 사이 이미 뒤의 오크들이 골목으로 쫓아오고 있었다. 이정도의 숫자를 상대하려면 최대한 자리를 바꿔가며 버텨야 했다. 단우는 더 늦기 전에 지붕으로 올라가고 싶었다.
시간이 있다면 브룰을 제압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그렇다면 지붕에 올라가 자신을 따라오는 오크들을 상대하는 것이 가장 수월한 방법이었다.
단우는 지붕을 오를 때를 정하기 위해 오크들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단우는 그제서야 오크들의 반응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우우우우울~”
“느··· 늑대소리다. 갑자기 웬 늑대들이냐”
“모르겠다. 이 근방에 늑대가 살았었나?”
“인간이 끌고 온 것 아니냐?”
“근데 왜 이렇게 무섭냐. 늑대들 원래 오크 안 싫어하는데 지금은 좀 싫어하는 것 같다.”
단우의 생각과도 달리 늑대는 오크가 불러들인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단우는 오크들이 단체로 혼란에 빠진 상황을 놓치지 않았다.
탓 탓 휘릭
단우는 순식간에 벽을 딛고 몸을 날려 바로옆의 건물 지붕에 매달렸다. 오크들이 갑작스런 단우의 움직임에 놀라 단우에게 각자의 무기를 휘둘렀지만 이미 단우는 몸의 반동을 이용해 지붕을 올라간 뒤였다.
“아우우우우울”
단우는 자신이 지붕에 오르자마자 또다시 울부짖는 늑대를 발견했다. 홀로 울부짖고 있는 늑대는 주변의 다른 늑대들이 회색의 털을 가진 것 과는 달리 새하얀 털을 가지고 있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흰 늑대의 자태는 그것이 달빛 때문인지 스스로 빛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흰 늑대의 울음소리에 이번에는 다른 늑대들이 따라 짖지 않고 흰 늑대를 향해 모여들었다.
자신을 향해 모여든 늑대들 사이에서 울음을 멈추고 자신을 바라보는 흰 늑대의 눈빛을 보고 단우는 알 수 있었다. 늑대들은 자신에게 적대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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